2000년 11월호

“대전역 플랫폼의 가락국수 맛을 아십니까?”

  • 입력2006-08-02 1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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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기기관을 돌리는 화부 노릇을 하는 기관조사로 출발한 신범철씨는 142만km 무사고 기록을 세웠다. 기록 갱신을 앞둔 지난 9월 새마을호를 몰던 그는 순간적인 직감으로 위험을 알고 대형 참사를 피해 갔는데...경의선이 다시 뚫리는 날 그는 신의주까지 무사고 열차를 몰 수 있을 것인가?
    대 전에서 0시50분에 떠나는 목포행 완행열차가 실제로 있었을까? 사실이든 아니든 유행가요 ‘대전 블루스’는 중년층의 애창곡이다.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이 노래는 변변한 이별의 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열차에 몸을 싣는 애절한 마음을 가슴저리게 뿜어 올리고 있다.

    40대가 넘은 지방 출신 사람들에게 ‘완행열차’와 ‘대전’은 남다른 존재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만나고 갈리는 곳이 대전이다. 공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농촌 젊은이들은 물동이와 호밋자루, 지게와 쟁기를 내던지고 너도나도 서울로 향했다. 그들의 정처(定處)는 그냥 ‘서울’이었다. 서울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봐야 할지에서는 달리 대책이 없었다.

    한국 최고의 무사고 기관사

    상행선 열차가 대전쯤에 이르면 고향역에서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의 두려움과 설렘도 눅눅해져 버린다. 완행열차 객실에서 대여섯 시간이나 부대꼈으니 몸도 지칠 대로 지쳤다. 이럴 때 ‘이곳 대전역에서 20분간 정차하겠습니다’라는 차내방송은 상경길에 녹초가 된 몸을 추스리라는 시그널이다. 언 손을 ‘후후’ 불어가며 가락국수 한 그릇으로 원기를 되찾고 고단한 서울길에 다시 나섰던 것이다.

    기차를 처음 탔을 때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기차도 자동차나 선박처럼 운전사가 핸들을 돌려서 방향을 바꿀 것인가? 아니면 열차 바퀴와 레일이 맞물리기 때문에 레일이 휘어진 대로 알아서 방향을 틀어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레일이 휘어진 대로 방향을 트는 것이 기차라면 기관차 운전사(기관사)는 뭣하는 사람일까?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아직도 이 의문에 대해 명쾌히 답변할 수가 없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도 이륙 전에 자동항법장치에 코스를 입력해 놓으면, 이륙 후에는 조종사의 조작 없이도 비행이 가능한 세상이다. 그러니 기관사가 원시적으로 핸들을 조작하지 않아도 기차 방향이 바뀔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대전으로 간다. 대전역 부근에 기관차 승무사무소가 있고, 그곳에는 우리나라 최장의 무사고 기록을 보유한 기관사 신범철씨(53)가 있다.

    그는 지금 대전-부산 간을 운행하는 경부선 열차의 기관사로 있다. 새벽에 부산을 출발하여 이제 막 대전에서 후임자와 교대하고 나왔다는 신씨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평소에 벼르고 있던 궁금증부터 털어놓았다.

    ―기찻길의 레일이 굽어진 곳에서, 기관사는 자동차 운전하듯이 방향을 돌립니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은 넓기 때문에 자동차는 상황에 따라 진행 방향을 이리저리 바꿔야 하지만, 기관차는 레일 위를 달리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기관차 바퀴 방향을 바꾸면 탈선하게 돼 오히려 큰 사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관사가 이리저리 핸들을 조작해서 방향을 바꾼다면 큰일입니다.”

    신씨가 씽긋 웃고 나서 차륜이 어떤 원리로 레일을 이탈하지 않고 맞물려 진행하는지에 대해 한참 설명했다.

    ―그렇다면 간간이 일어나는 탈선사고의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요. 기관차나 객차에 어떤 결함이 있다든지, 아니면 선로가 놓인 지반에 문제가 있는 경우 탈선할 수도 있지만, 그런 사고는 지극히 드물어요.”

    ―현업 기관사 중에 최장 무사고 기록을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 기관사의 무사고 기록은 어떻게 관리되는 것입니까?

    “기관사 잘못으로 일어난 사고는 기관사 책임으로 돌아갑니다. 속도 조절을 잘못 해서 과속을 했다거나, 기관차나 객차의 결함 여부를 사전에 발견하지 못했다거나, 또한 역 구내에서 기관차의 선로를 바꿀 때 잘못하면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크든 작든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것이 기관사의 잘못이라는 게 판명되면 그 동안 쌓아온 무사고 기록은 없어지고 제로 상태에서 다시 출발하게 됩니다.”

    현재 신씨의 무사고 기록은 142만㎞다. 기관사가 된 이래 이 기록이 한번도 제로로 환원된 적이 없다고 한다. 기관사가 된 이래, 적어도 자신의 잘못으로 사고를 일으킨 적이 한번도 없다는 얘기다. 우리 나라에 철도가 생긴 이래 최장 무사고 기록은 142만 3200㎞로, 97년도에 정년퇴직한 장병권씨가 갖고 있다. 신씨의 현재 기록과는 3200㎞ 차이가 난다. 신씨는 취재차 만났던 9월 말에 “앞으로 15일만 사고를 내지 않으면 한국 최고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고 했다. 이 기사가 나갈 무렵이면 그는 이미 연일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한 무사고 기록

    그렇다면 기관사가 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우선 발차 역에서 시동을 걸어서 열차를 움직이게 하고, 목적지에 다다르면 멈추게 하는 일이지요. 열차 운행 전에 열차의 이상 유무를 검사하는 일도 기관사의 의무 중 하나입니다. 물론 정비 담당자들이 따로 있지만 그걸 믿고 탔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은 기관사에게 돌아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기관사는 운행할 동력차를 인수받아 검수(檢受) 당담자에게서 기관차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듣는다. 이어 동력차의 성능과 정비 상태를 점검한 뒤에 열차 운행에 들어간다. 운행중에는 역장 및 차장과 긴밀히 연락하고, 각종 신호기·표지·운행시간·운전조건의 변화에 따라 속도를 조절하는 등 제반 조처를 취한다. 종착역에 도착하면 다시 열차를 점검하고, 동력차와 화차 및 객차를 분리한 뒤 동력차를 기관차 사무소에 인계한다.

    ―사람들에게 기차 소리를 흉내내 보라고 하면 ‘칙칙폭폭’이라고 합니다. 이 ‘칙칙폭폭’은 유치원 시절 우리말 의성어 공부의 대표적인 사례로 통하는데, 사실 그건 증기기관차 시절의 소리 아닙니까?

    “그렇지요. 안 맞는 거지요.”

    ―그렇다면 증기기관차 시절부터 기관사로 일해온 사람으로서, 요즘의 디젤기관차 소리를 흉내낸다면 뭐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까?

    “글쎄요, ‘빠앙’하는 건 기적 소리고… ‘덜크덩 덜크덩’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 소리도 사실은 기차에서 나는 소리라기보다는 선로의 이음매 때문에 나는 소리거든요. 기관차의 기관이 돌아갈 때에는 ‘우우웅’ 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데….”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에는 ‘칙칙폭폭’만큼 정취가 있는 것은 없네요. 칙칙폭폭의 정취를 살리기 위해서 그런 소리를 내는 장치를 별도로 만들어 달고 다니면 안 되겠습니까. 나이든 사람들의 향수도 자극하고, 아이들 국어 교육의 일관성도 지켜나갈 겸해서….

    신씨는 “그거 참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치면서 한바탕 사람 좋은 웃음을 웃었다. 그가 웃는 모습은 열 량이 넘는 객차를 씩씩하게 끌고 철로를 질주하는 기관사라기보다(물론 기관사가 객차나 화차를 완력으로 끄는 것은 아니다), 시골 초등학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다칠세라 교정의 유리조각을 줍는 교감 선생 쪽이 더 어울릴 것 같은 표정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어릴 적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선생님을 꿈꾼 소년

    1947년 논산시 연산면 덕암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고향에서 중학을 졸업하고 교사를 양성하는 대전병설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도전했다가 낙방했다. 다음해에 다시 도전하려고 재수를 했는데, 말이 재수지 농사일 하느라 변변히 책 한번 들여다볼 짬이 없었다. 그는 그 무렵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스스로 “신앙적 체험을 많이 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지금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기관실에 올라가 열차를 운행하기 전에 그는 승객의 안전을 기원하는 기도를 해야 비로소 마음이 평안해진다고 한다. 크리스천이 아닌 독자일지라도 그가 세운 142만㎞ 무사고 기록은, 그와 ‘그의 하나님’이 함께 이룩한 결과라고 평가해주는 데 인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의 기독교 입문 시절은 축복스런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학교도 떨어지고 앞길이 막막해서 새로 맛들이기 시작한 신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침 저녁 가릴 것 없이 매일 교회에 나갔지요. 좀 우스운 얘긴데, 당시만 해도 저는 교회를 주일(일요일)에만 나가도 되는 곳인 줄 몰랐어요.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직장이나 학교에 가는 일을 함께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시골 교회여서 그랬는지 ‘고등학교 다니면서도 교회에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니까요.”

    이 순진한 ‘어린 양’은 교회에 계속 나가기 위해서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써놓고도 응시를 포기했다. 그래서 충남 연산중학교 졸업이 그의 최종 학력이다.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교회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요즘도 누군가 출신 학교 얘기를 꺼내면 주눅이 든다”고 고백한다.

    대전에 계룡공고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 철도운전과가 있었다. 그곳에서 1년간 교습 과정을 거쳐 철도청 기관조사(현 직급으로는 부기관사) 공채에 응시해 합격했다. 1966년, 그의 나이 열아홉 시절의 일이다. 이전에는 별다른 채용 절차 없이 철도 공무원의 소개로 아무나 들어가 대충 일했는데, 1965년부터 공채제도가 시행됐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기관조사 공채 2기인 셈이다.

    처음 배치된 곳이 전라북도 익산이었다. 기관사나 기관조사의 직장은 ‘열차’다. 열차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혹은 서울에서 목포까지 달리는 것인데, 어디에 근무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있을까? 익산에서 근무하게 됐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가령 서울에서 목포까지 가는 열차가 있다고 합시다. 서울 승무원이 대전까지 기차를 끌고 오면, 이어 대전에 근무하는 승무원들이 열차를 인계받아서 목포까지 가는 것입니다. 대전에 온 서울 승무원은 목포나 부산에서 올라오는 열차를 인계받아 다시 서울로 돌아갑니다.”

    火夫 노릇의 기관조사와 通票

    신범철씨가 처음 기관조사로 몸담았던 기차가 바로 ‘칙칙폭폭’의 원조인 증기 기관차였다. 조개탄(석탄)을 때서 물을 끓이고 거기서 발생하는 수증기가 피스톤을 밀어서 동력을 만들었다. 이 동력으로 바퀴가 회전하면 거대한 견인력이 생겨, 객차나 화차를 끌게 되는 것이다.

    이때 피스톤을 밀쳐준 과열 증기는 과열관 주위를 지나면서 포화증기로 바뀌어 굴뚝으로 나가는데, 이때 나는 소리가 ‘칙칙’이다. 반면 보일러 안의 연료(조개탄)이 타면서 생긴 가스가 굴뚝으로 빠져나갈 때 나는 소리는 ‘폭폭’이다.

    기관조사란 직함은 그럴듯하지만 당시 그의 주임무는 보일러에 조개탄을 넣어 불을 때는 화부(火夫) 노릇이었다. 주요 역에는 연료를 만들어 공급하는 곳이 있었다. 주요 역 선로에는 석탄연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크레인을 이용해 이 연료를 기관차에 싣는다. 기관차에는 탄수차(炭水車)가 연결돼 있어 연료와 물을 공급받는다.

    기관조사의 주 임무는 탄수차의 연료를 삽으로 퍼서 불을 때는 것이었다. 연료를 퍼넣는 작업은 발차 역에서부터 종착 역까지 쉼없이 계속된다.

    석탄을 불구덩이에 퍼넣는 작업이라고 해서 쉽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경사진 길을 올라갈 때에는 증기의 힘이 세야 하는데, 막상 오르막길을 만나 연료를 많이 퍼넣으면 안 된다. 기관차가 힘을 내려면 퍼넣은 연료가 제대로 타야 힘을 내는데, 오르막길을 만났다고 그제서야 연료를 많이 넣으면 미처 연료가 타지 못해 힘을 내지 못한다. 따라서 기관조사는 평탄한 길에서 부지런히 연료를 퍼넣었다가 오르막길에서 기관차가 힘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오르막길이 긴 곳에서 연료를 적절히 공급하지 못하면 중간에 열차가 멈춰서고 만다. 오르막 선로를 오르다가 아예 멈춘 열차를 다시 가동하여 움직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긴급히 지원을 요청하여 다른 기관차가 와서 밀어주거나, 아래쪽 평탄한 선로까지 후진해야 다시 가동할 수가 있다. 당시 이런 일은 심심찮게 발생하였다.

    ―앞에 가던 열차의 엔진이 꺼져서 미끄러져 후진하는 경우, 뒤에서 따라오는 열차와 추돌할 위험은 없었습니까? 요즘이야 무선전화기 등 통신체계가 발달했다지만, 그때는….

    “무전기마저 없던 그 시절이 안전에 있어서는 오히려 완벽했다고 볼 수 있지요.”

    무슨 얘길까?

    눈썰미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올 때 작은 훌라후프처럼 생긴 링을 걸어주고, 출발할 때비슷한 것을 다시 받아들고 가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링은 열차 기관사가 이전 역에서 받았던 ‘통표(通票)’다. 통표는 그저 주고받는 상징이 아니다. 한 열차가 A역에서 B역으로 출발했을 경우, A역을 출발한 열차의 기관사가 통표를 B역에 갖다주기 전까지는, A역에서는 그 어떤 열차도 B역을 향해 출발시키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A역과 B역 사이에는 단 한 개의 열차만 존재하게 된다.

    통표 내부에는 원형이나 사각형·삼각형·마름모 등 각기 다른 모양의 쇠붙이가 내장되어 있다. A역과 B역 사이의 통표가 원형이라면, B역과 C역 사이의 통표는 삼각형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전 역에서 사용한 통표를 다음역 통과용으로는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제 모양의 통표가 들어가야 역 사이의 전화가 통화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열차가 A역과 B역 사이에서 기관 고장으로 멈춰섰다고 하자. 이 열차는 B역에 통표를 전달하지 못했으므로 후속 열차는 A역을 출발하지 못한다. 고장난 열차가 기관을 수리한 후 B역에 도착해 통표를 제출해야, B역에서 A역으로 전화가 통화되고 A역에서는 후속 열차를 출발시키게 되는 것이다. 아주 원시적인 체제처럼 보이지만, 이 통표야말로 열차 추돌을 막는 최고의 안전 시스템이었다.

    대전발 0시50분은 군용열차

    그런데 요즘은 통표 대신 무선 전화를 사용하기 때문에, 효율 면에서는 앞설지 모르나 안전성에서는 옛 통표 활용 시절보다 못 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무선 전화기도 있고 무전기도 있으니까 금방 연락이 되지만 예전에는 그런 통신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운행 도중에 고장나면, 출발했던 역까지 후진을 합니다. 후진하더라도 통표 제도 때문에 뒤따라오는 열차가 없어,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당시 기관조사의 월급은 얼마나 됐습니까?

    “5000원이었어요. 쌀 네 가마 반을 살 수 있는 돈이었으니까, 다른 업종에 비해서 많은 편이었지요.”

    ―기관사와 기관조사의 업무는 어떻게 분장돼 있었습니까?

    “한마디로 열차 운전은 기관사가 하고, 기관조사는 불을 때는 일이 주업무였어요. 초기에는 기관조사가 두 명이었습니다. 신입 기관조사를 ‘보조’라 하고, 고참 기관조사를 ‘본무’라고 했는데, 본무는 경사진 오르막 선로 같은 어려운 구간에서만 불때는 일을 했어요. 그런 구간에서는 노련하게 연료를 넣어야 기관차가 지속적으로 힘을 낼 수 있거든요.”

    기관사나 기관조사의 급여가 타 직종에 비해 높았던 것은 이유가 있다. 작업환경이 지극히 열악했기 때문이다. 석탄이라는 연료로 물을 끓이고 끓는 물에서 나온 증기의 힘으로 열차를 움직이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한 작업환경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여름철 같은 경우 그냥 들어갔다간 온몸을 다 데요. 수건을 물에 흠뻑 적셔서 얼굴을 감싸고 들어가지 않으면 화상을 입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옆에 가만히 있으면 숨이 막힙니다. 따라서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되도록 자세를 낮춰서 일을 해야 합니다. 탄수차와 기관 사이가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 그 사이를 철판으로 이어놨거든요. 그런데 열차가 심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고 철판을 왕래하는 것은 참 어려웠습니다. 그 시절의 기관조사들, 고생이 참 많았지요.”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관조사로 채용된 사람들 중 도중에 포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요즘 젊은이들 같았으면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신씨가 일했던 열차는 익산-전주, 익산-군산, 혹은 익산-연무 구간을 운행하는 지선(支線)이었다. 승객들은 대개 열무나 고추, 콩 등속을 보따리에 바리바리 싸서 팔러가는 보따리장수들이었다.

    지금은 열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의 모양새도 다르고 기관사나 부기관사의 근무여건도 크게 달라졌다. 하지만 신범철 기관사는 그래도 ‘칙칙폭폭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굉장히 좋아졌지요. 60년대만 해도 사람들이 열차 지붕 위에도 매달려 가고, 원래는 들어올 수 없게 돼 있는 기관실에까지 꽉 찼거든요. 그때에는 모두 가난했지만 사람 사는 맛이 났어요. 그런데 선로를 대대적으로 직선으로 만들면서부터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열차가 동네 어귀나 산모퉁이를 칙칙폭폭하며 비잉 돌아나오는 그런 정취 있는 모습은 구경할 수가 없게 됐지요.”

    그뿐일까? 추석이나 설 명절 때면 선물 꾸러미를 양손에 나눠 들고(가족에게 줄 옷가지라면 내용물을 꺼내 가방에 챙겨 담았으면 더 간편했을 텐데, 당시엔 왜 모두 와이셔츠를 악착같이 종이상자에 넣은 채로 들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완행열차의 유리창으로 기어드는 모습은 이제 ‘그 때 그 시절’ 얘기가 되어버렸다. 신씨는 그런 낭만과 운치가 사라져버려 못내 서운하다고 했다. ‘빠르고 안전하고 쾌적한 철도여행’을 지향하는 철도청장이 들으면 영 섭섭해 할 소리다.

    ―유행가 ‘대전 블루스’에 나오는 대전발 0시50분발 열차가 실제로 있었습니까?

    “0시50분에 대전을 출발하는 열차가 있었습니다. 예전 그 열차는 군용열차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없어졌지요.”

    ―옛 완행열차 시절에 기차를 타보면 대전역에서 유독 정차 시간이 길던데, 경부선과 호남선이 갈라지는 곳이어서 그랬습니까? 아니면 역 구내의 가락국수 장수들하고 철도청이 ‘작당’을 하고….

    “완행열차가 워낙 속도가 느리지 않습니까? 대전에는 몇 시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는데, 늦게 도착해서 차질을 빚는 것보다, 차라리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 서둘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전역에서는 20분이나 30분씩 정차하게 되었지요. 지금은 기껏해야 2분 정도밖에 쉬지 않습니다.”

    68년도에 군에 입대하여 3년간 복무를 마치고 71년에 대전역으로 복직해보니 사정이 달라져 있었다. 연료가 석탄에서 벙커C유로 바뀐 것이다. 석탄을 퍼넣는 중노동에 시달렸던 때와는 달리 밸브를 조정하여 연료를 공급하게 됐으니, 근무 환경이 ‘혁명적으로’ 변한 것이다. 물론 그가 예전에 근무하던 익산 등의 지선에는 아직도 석탄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신씨가 기관조사에서 ‘조(助)’를 떼고 정식 기관사가 된 때가 74년 7월17일이다. 66년도에 기관조사로 들어갔다가(군복무 기간 3년을 포함하여) 8년 만에 기관사 공채에 합격한 것이다. 그러니까 신씨의 무사고기록은 그가 기관사로 일하게 된 74년을 기점으로 26년 동안 쌓아온 것이다.

    ―기관사라면 누구나 무사고인 채로 정년퇴임을 하고 싶어할 텐데, 26년이란 긴 시간 동안 무사고 행진을 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세요?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말고 또 있겠습니까? 아, 있습니다. 가정이 평안해야 합니다. 집안에 걱정거리가 있으면 사고 나기 쉽습니다. 기관사는 운행중에 잠시도 딴생각을 하거나 한눈을 팔지 않아야 합니다. 집안 문제로 잠시라도 정신이 멍해지면 전진 방향에 뭐가 나타나도 몰라요. 그래서 기관사의 부인들은 걱정거리가 될 만한 가정사는 남편에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가장 발생빈도가 높은 사고는 무엇이지요?

    “건널목 사고지요.”

    ―건널목에 사람이나 자동차가 있을 경우, 일찍 발견하면 급제동을 해서 사고를 피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이나 자동차가 비키기 전에는 사고를 피할 수 없습니다. 기관사의 눈에 보였다 하면 이미 늦은 겁니다. 건널목 700m 전방에서 기적을 울리도록 돼 있는데 그때 건널목에는 사람이든 자동차든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급제동을 하더라도 제동거리가 600m나 되기 때문에 당사자가 피하지 않는 한 불상사가 일어나게 돼 있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 차량통행이 100대 이상인 곳은 1종 혹은 2종 건널목으로 분류해서 차단기를 설치했다. 그러나 사람과 차량 통행이 적은 곳은 통제 없이 알아서 건너가게 했다. 그러다 지금은 모든 건널목에 차단기를 설치해서 통제하고 있다.

    차단기가 내려오기 시작하면 일단 정지해야 한다. 그런데 급한 사람들은 재빨리 건너갈 욕심에 차단기가 내려오는 와중에 자동차를 몰아 통과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짓이야말로 자살 행위나 다를 바 없다. 이 편의 차단기는 통과해도 건너편 차단기가 이미 내려와 꼼짝 못하고 갇히기 때문이다. 건널목 차단기는 사람이 들어올리면 올라가게 돼 있다. 따라서 자동차 조수석에 탄 사람이 재빨리 내려서 차단기를 들어올리고 차를 통과시키면 된다는 것이 신씨가 일러준 응급처치 요령이다.

    그러나 눈 쌓인 겨울철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눈이 쌓여 있으면 차단기를 들어 올리고 출발하려고 해도 철길 위에 놓인 자동차 바퀴가 눈에 미끄러져 헛돌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차가 온다는 신호가 떨어지면 일단 멈추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경험으로 피한 참사

    신씨는 지난 9월에 건널목 사고를 미연에 방지한 것을 평가받아 철도청장 표창을 받았다. 신씨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고 말한다.

    “맞은편에서 오던 기차가 건널목에 있던 자동차를 친 사고가 발생했어요. 저는 경부선 하행선으로 내려가고 그 열차는 상행선으로 올라오던 중이었거든요. 부산 물금역 인근의 건널목이었는데, 하필 그곳은 커브길이어서 사고가 난 건널목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속 140㎞의 새마을호를 몰고 커브길을 막 돌아서는데 맞은편에서 오던 상행선 열차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뜻 그 열차의 기관차 앞부분을 살펴보니 부숴진 흔적이 있었다. 신씨는 순식간에 판단을 내렸다. ‘속도로 봐서 저 열차는 건널목에서 사고를 내고 지금 멈춰서기 위해서 제동중일 것이다. 만일 자동차를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면 그 자동차나 사람이 하행선 선로 쪽으로 튕겨나와 있을 것이다.’

    신씨는 순식간에 비상제동 조치를 취했다. 커브길이어서 그의 열차는 시속 100㎞로 달리고 있었는데, 그 속도에서 수치상의 제동거리는 500m다. 열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속도를 줄였고, 완전히 멈춘 후 앞을 보니 상행선 열차가 들이받은 자동차가 신씨가 진행하려던 하행선 선로 한가운데에 걸쳐 있었다.

    만일 비상제동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대로 전진하여 선로 위의 자동차를 들이받았다면(다행히 사람은 이미 피했고 빈 자동차였지만) 그의 열차는 탈선했을 수도 있다. 탈선했다면 수많은 승객들의 안전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마주 오는 열차와 스쳐 지나가는 건 순식간이다. 그 순간에 ‘반대편 열차의 속도가 느리다, 앞부분에 파손된 흔적이 있다, 사고를 내고 제동중이다, 그렇다면 내 선로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비상제동을 해야겠다’는 판단을 재빨리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경험에서 비롯된 연륜 때문일 것이다.

    열차 승무원은 근무지 전출이 없는 게 원칙이다. 사고를 낸 경우 문책삼아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관내 지역에서 계속 근속하도록 한다. 같은 구간에서 계속 운전하는 것이 안전 운행 차원에서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관사를 오래 하다 보면 구간의 선로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다.

    같은 구간에서만 계속 근무하다 보면 안이하게 생각해서 태만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기관사 노릇을 하는 것 자체가 안일이나 태만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펄쩍 뛴다.

    ―철든 이래 거의 평생을 열차 기관실에 근무해온 사람으로서, 요즘 충원되는 젊은 기관사나 부기관사(옛 기관조사)들을 어떻게 보십니까?젊은 사람들이 근무에 임하는 자세는 예전과 많이 다를 텐데요?

    “많이 다르지요. 제가 처음 기관조사로 들어왔을 때 기관사의 말 한마디는 하느님 말씀이나 한가지였어요. 게다가 기관사는 연배가 훌쩍 높은 어른이었기 때문에 시키는 일에 뭐라고 말대꾸를 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안 그래요. 맘에 안 들면 금세 항변이 건너오고 따지기도 하고….”

    ―무조건 복종하는 경직된 관계보다는 문제가 있으면 당당히 의견을 말하기도 하는 게 안전운행을 위해서 오히려 합리적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측면도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열차의 기관사는 승객 전체의 안전운행을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기 때문에 기관사 수칙에 기관조사는 기관사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돼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규정이 통했지만 요즘 사람들하고는 잘 안 맞는 모양입니다. 물론 저는 젊은이들의 그런 정서를 알기 때문에 비위를 맞춰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긴 합니다만….”

    ―근무시간이 주기적으로 바뀌기 때문에 취침시간도 왔다갔다 할 것 아닙니까. 애로가 많겠습니다.

    “대전에서 부산까지 3시간 반이 걸리는데, 부산역에 가면 승무원이 취침할 수 있는 휴게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등만 대면 금방 코골고 자는데 저는 낮에 자는 습관과는 친해두지 못해서 어려움이 많습니다.”

    ―휴일을 어떻게 보냅니까?

    “가족이랑 어디 놀러가는 것은 엄두도 못 냅니다. 집에 들어갔다 하면 무조건 잡니다. 나처럼 나이든 사람들이야 문제가 안 되지만 젊은 사람들은 부부생활에 문제가 있어서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정 모르고 결혼한 신혼 부인들은 ‘뭐 이런 직장이 다 있느냐’고 따지기도 하고….”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열차 승무원으로 살아왔으니 결혼도 승무원 시절에 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부인도 철도 여행과 관련해서 극적으로 만났다든지 하는, 근사한 로맨스가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 점잖은 예비 장로님 기관사에게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었다.

    부인 서정순씨(50)와는 73년에 결혼했다. 고향 후배뻘인 서정순 처녀는 신씨가 병역을 마치고 다시 기관조사로 복귀했을 때, 신씨가 퇴근길에 내리곤 하던 연산역 부근에서 양장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장래를 약속한 뒤 이 처녀는 매일 저녁 연산역에 나와, 언제 근무를 마치고 돌아올지 모르는 서씨를 몇 시간씩이나 기다리곤 했다. 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밤에, 처녀는 씩씩하게 기관차를 몰고 나타날 애인을 기다리고, 그 애인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기적 소리를 평시보다 한 번쯤 더 울리면서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장로님에게는 그만 해도 근사한 그림이다.

    전동차보다는 기관차가

    ‘우리 철도 행정의 개선점이나 앞으로의 바람직한 발전방향에 대해 한 말씀 해달라’는 주문에 신씨는 “그런 거야 높은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요”라며 웃었다. 승무원은 본시 단순해서 오직 열차의 안전운행 외에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열차 운행 이외의 모든 생각은 ‘잡념’이라는 것이다. 기관사들은 남의 말도 고스란히 믿어버리기 때문에, 퇴직한 후 사업을 벌인 기관사 출신 중에 성공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한다.

    수도권 전철 1호선의 국철 구간은 철도청에서 관할한다. 따라서 열차 기관사들 중에는 전동차 기관사 쪽으로 자원해 가는 경우가 있다. 전철 운행은 지하 근무라 환경이 나쁘기는 하지만 서울에 거주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또 심야근무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점을 선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씨는 전동차로 옮겨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장거리 승객들을 싣고, 기적을 빠앙 울리면서 천리길을 질주하는…, 그래야 기관사 하는 맛이 나는 게 아닐까요?

    “그런 게 있긴 해요. 명절 같은 때 고향을 찾는 수많은 승객들을 안전하게 싣고 달려가서 종착역 플랫폼으로 들어갈 때 어깨가 으쓱해지는 자부심 같은 것 말입니다. 하지만 사정에 따라서 근무하는 곳이 다를 뿐이지, 전동차 기관사도 우리 못지않게 중요하지요.”

    ―기관사들도 혹 열차 승객들로부터 팬레터나 선물을 받기도 하나요? 기관실은 객차와는 격리돼 있어서 흔치 않는 일이겠지만….

    “허허허, 이런 일은 가끔 있어요. 브레이크를 쓸 때 차체가 앞뒤로 쿵쿵 흔들리는데, 이때 승객들이 민원엽서로 고발을 하거든요. 민원은 함부로 처리하면 안 되기 때문에 여러 절차를 거쳐서 조치 결과를 민원인에게 통보합니다. 물론 운전하는 기관사의 능력과 아주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브레이크를 사용하는 경우 차체가 유난히 흔들리는 그런 열차가 따로 있습니다. 기관차 두 대가 끄는 경우지요.”

    무슨 얘길까? 하나의 기관차로 운행할 때에는 별 문제 없으나, 객차를 11량이나 12량을 다는 경우 열차 맨앞에 두 대의 기관차를 연이어 연결시킨다. 따라서 역구내에서 출발하거나 멈춰설 때, 뒤쪽의 기관차가 진행하던 관성에 의해서 앞차 쪽으로 쏠리면서 덜컹거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의 두 눈에 피곤기가 어려 있고, 오래 붙잡아 두면 괜한 잡념만 보태는 턱이 될 것 같아 일어서기로 했다.

    “경의선을 달리고 싶다”

    수첩을 덮으면서, 최근에 남북관계가 호전되어 경의선 연결공사 기공식이 있었는데, 기관차를 몰고 신의주까지 달려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피곤해하던 그가 대번에 “첫 개통열차가 아니더라도 정년 퇴임까지 4년이 남았다. 그 사이 한 번이라도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며 반색을 한다. 글쎄, 중요한 노선이니만큼 무사고 기록을 보유한 그에게 첫 개통열차의 운행을 맡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철도청장이 알아서 할 일이고….

    무릇 기차여행에서, 특히 밤기차를 타고 있을 때, 우리는 상념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이때 절대로 상념에 빠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기관사다. 가끔씩 내 몸과 내 안전을 모두 맡기고 열차를 탈 때 맨앞 기관실에서 나를 끌고 가는 그 사람, 기관사의 존재를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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