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은 고등학교를 두 번 떨어졌다. 서울사대부속고등학교, 대광고등학교. 삽다리에서는 ‘최고 실력자’였지만 서울에선 통하지 않았던 것. 할 수 없이 무시험 입학이 가능한 동대문 근처 강문고등학교(지금의 용문고)에 들어갔다.
그의 고교 시절은 지지리 가난했던 것만 빼면 화려 그 자체였다. 밴드부 멤버, 교지 창간 멤버, 미술반 반장, 동신교회 성가대 반장. 두 살 아래인 장래의 인기가수 이장희, 윤형주와 친분을 튼 것도 이때였다.
1962년, 한양대 주최 ‘전국고등학교 음악 콩쿠르’에서 일등을 해 한양대 음대 특차 입학생이 됐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고, 곧바로 서울대 성악과에 도전해 합격했다.
그 후의 삶은 알려진 그대로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 명동 ‘쎄씨봉’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 곳에서 평생 친구이자 ‘통기타문화’의 대표주자인 송창식, 김세환, 김민기, 양희은, 조동진, 서유석, 김도향, 이상벽을 만났다. 첫 결혼 상대가 된 연기자 윤여정도 ‘쎄씨봉’ 멤버였다. 모두 명문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를 다녔거나 다니던 ‘당대의 엘리트’. 또한 술과 노래만 있으면 아쉬울 것 없는 못 말리는 청춘이었다.
조영남은 그들과 어울리는 틈틈이 미8군 무대에 서 돈을 벌었고, 어찌어찌해 팝송 번안곡 ‘딜라일라’ 하나로 ‘완전히 떠버렸다’. 학교는 장식으로만 다니다 언제 그만뒀는지도 모르게 흐지부지 됐다. 외제 차에 운전사까지 두고 한참 잘 나가던 어느 날, 그는 거짓말처럼 범죄자 신세가 됐다. 그놈의 ‘신고산타령’ 때문이었다.
광화문 시민회관에서 열린 ‘김시스터즈’ 귀국 공연. 게스트로 출연한 조영남은 공연 전날 있었던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이 떠올라 노래 가사를 이렇게 바꿔 불렀다. “신고산이 와르르르 와우아파트 무너지느은 소오리에에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으을 치이누나아아….”
그저 멋지게 불러 박수 한번 받아보자고 한 노래였다. 어쨌거나 다음날 새벽 네시, 그는 엉뚱하게도 병역기피죄로 체포돼 본적지인 예산 삽교 부근 홍성재판소로 압송됐다. 이 때 조영남을 구하겠다고 홍성까지 달려 내려온 두 사람이 있었으니, 당시 이화여대 법정대학장이던 이태영 박사와 그 아들 정대철이었다. 조영남은 이박사의 ‘로비’에 힘입어 겨우 철창행을 면했다. 이박사 보호하에 한 달을 보낸 뒤 자원 입대한다는 조건이었다.
육군에 입대해서도 용산 본부에 근무하며 군 행사 단골 가수로 성가를 올렸다. 시도 때도 없이 높은 분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기 때문에 상관이나 고참들도 그를 어쩌지 못했다. 어느날 육군본부 참모장이 그를 불렀다. 무슨 행사인지 모르겠으나 유난히 심혈을 기울여 선곡을 하고 시나리오를 짰다. 부를 노래로는 ‘보리밭’ ‘황성옛터’ ‘딜라일라’가 정해졌다.
그러나 행사 당일 날 그는 와우아파트 건을 능가하는 사고를 치고 만다. 파티에 나가 보니 이게 웬일인가, ‘별’ 수십 명과 더불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무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당황한 조영남은 재빨리 머리를 돌렸다. ‘이 황공무지한 영광에 어찌 보답할까. 최고의 노래라면 역시 민족의 역사와 애환이 담겨 있는 각설이 타령이다.’ 그리고는 ‘보리밭’을 포기하고 냅다 각설이 타령을 부르기 시작했다.
“어화 이 놈이 이래봬도 정승 판서 자제로서 ‘와우아파트 타령’ 한번 잘못 불러서 여기 군대까지 끌려왔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갈수록 점입가경이자 육본 참모장이 무대로 올라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만두고 빨리 박대통령의 애창곡인 ‘황성옛터’를 부르라는 것이었다.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조일병, ‘각설이타령’을 뚝 그치고 ‘황성옛터’를 시작하는데, 아, 하필이면 왜 이 때 가사가 생각나지 않냐 이 말이다. 결국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만 세 번 거푸 부르다 퇴장 당하고 말았다. 눈앞이 캄캄해질 일이었다.
다음날 육본 법무감실로 이송된 조일병은 세 가지 ‘혐의점’에 대한 심문을 받았다. 첫째, 왜 대통령 애창곡인 ‘황성옛터’ 부르기를 세 번이나 거부했나, 둘째, 시키지도 않은 각설이 타령은 왜 불렀나, 셋째, ‘작년에 왔던 각설이’는 누구를 말하는가.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하는 조일병 대신 법무관실에 근무하던 서울대 동문들이 백방으로 힘을 썼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저 친구는 정치색이 없다, 그저 똥, 된장도 못 가리는 한심한 성격일 뿐”이란 말로 그를 적극 변호(?)했다. 덕분에 겨우 풀려났지만 이후 조영남은 ‘제법 생각 있는 가수’라는 일반의 오해(!)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까지가 조영남 인생의 ‘첫째 날’, 파란만장했던 어린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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