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수재와 반골의 동거’ 원희룡 의원

탄로난 ‘지능적 좌파’? ‘한나라病’ 뜯어고칠 보수혁명가?

  • 이동훈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dhl3457@naver.com

    입력2006-03-27 13: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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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희룡(元喜龍). 올해 42세의 한나라당 재선 의원. 연배와 경력은 아직 일천하지만, 그의 대중적 인지도와 정치적 무게감은 상당하다. 공식적으로 당 서열 3위의 최고위원. 여론조사에선 차세대 정치지도자 1위에 랭크된다. 그런데 가끔 초선 의원에게 면박을 당하고 출당 압박도 받는다. 한나라당 도처에 그의 안티(Anti) 세력이 득실거린다.
    ‘수재와 반골의 동거’ 원희룡 의원
    그가 살아온 이력은 극과 극을 달린다. 그를 상징하는 두 단어는 ‘수석(首席)’과 ‘반골(反骨)’이다. 그는 대입학력고사 전국 수석, 사법고시 전체 수석으로 이어진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수석 인생’을 살았다. 용모도 반듯하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반골을 자임했다. 그는 거칠다. 끊임 없는 ‘개김’은 원희룡 이력의 또 다른 면이다.

    역설적으로, 그에게 제기되어온 의혹들을 통해 원희룡 의원의 내면을 들여다봤다. ‘반전을 즐기는’ 정치인에게 어울리는 접근법인 것 같다.

    1. 배신을 밥먹듯 한다?

    2004년 2월8일 원희룡 의원은 서울 여의도의 한 호텔에 있었다. 한나라당 수도권 초·재선 의원 20여 명이 점심을 겸해 2시간째 마라톤 회의를 벌이고 있었다. 이윽고 원 의원이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 앞에 섰다.

    “최병렬 대표의 퇴진을 공식 요구키로 했습니다.”



    기자들이 되물었다.

    “퇴진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는 한치의 머뭇거림이 없었다.

    “타협은 없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한국 정당사(政黨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2004년 한나라당 소장파 쿠데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반란군의 한가운데에 원희룡 의원이 있었다.

    불과 수개월 전 그는 최병렬 대표 체제를 떠받치는 한 축이었다. 당 기획위원장으로서 그는 최 대표의 개혁성을 보완했다. 그는 최 대표 체제를 옹립한 ‘공신’이기도 했다.

    이회창, 최병렬, 박근혜와의 불화

    “최 대표는 정통 보수지만 다원성을 존중하고 있고 합리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원 의원은 이렇게 최 대표를 치켜세웠다. 그런 그가 얼마 안 가 반최(反崔)의 선봉에 섬으로써 자신의 선택을 되물린다.

    그로부터 5개월 뒤인 2004년 7월19일, 원 의원은 서울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대의원들의 환호 속에서 박근혜 대표와 손을 잡고 있었다. 그를 비롯한 소장파 의원들은 최병렬을 내쫓은 뒤 박근혜 의원을 한나라당의 임시 대표로 추대했다. 그해 4월 한나라당은 박 대표 체제로 총선을 치렀다.

    이어 7월에 열린 정기 전당대회 대표 경선에서 박 대표와 원 의원은 나란히 1, 2위를 차지하면서 대표최고위원과 2등 최고위원직을 맡는다. 원 의원은 당시만 하더라도 박 대표 체제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는 환호하는 군중 앞에서 “박 대표를 잘 보좌해 대권(大權) 재창출의 기반을 다지겠다”는 인사말도 했다.

    하지만 그해 겨울을 지내고 맞은 2005년 봄, 원 의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박 대표에게 등을 돌렸다. 국가보안법 개폐논쟁, 4대 입법 국면, 7월 조기전당대회 논란 등을 거치며 둘은 갈라섰다.

    남을 비판하는 데 신중한 박 대표지만 원 의원에게만은 예외였다. 지난해 4·30 재보선에서 완승을 거둔 직후 박 대표는 한 일간지와 인터뷰하면서 “당원들은 발이 부르트도록 뛰는데 인터넷 게임이나 하고 당에 악영향 끼칠 인터뷰를 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있다”며 원 의원을 정면으로 겨냥해 공격했다.

    두 사람의 감정대립은 지난 연말∼연초로 이어진 사학법 장외투쟁 국면에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박 대표가 눈물로 사학법 장외투쟁을 호소하자 원 의원은 “우리가 봐야 될 눈물은 박 대표의 것이 아니라 민생이 어렵고 정치가 잘못됐기 때문에 고통받는 국민의 피눈물”이라며 국회 등원을 주장했다.

    원 의원은 한 주간지와 한 인터뷰에서 “박 대표의 이념적 편견은 병”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후 당 회의석상에서 두 사람은 얼굴을 붉혔다. 박 대표의 원 의원 비판은 그 누구보다 수위가 높았다. “원 최고위원은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열린우리당의 생각을 대변해왔다”고도 했다.

    원 의원의 그리 길지 않은 정치이력은 이회창, 최병렬, 박근혜로 이어지는 선택의 역사였으며 그들과의 ‘불화의 역사’였다. 그러다 보니 그에겐 “배신을 밥 먹듯 했다” “제2의 박찬종이다”라는 유쾌하지 못한 손가락질이 따라다닌다. 한 당 관계자의 원 의원에 대한 논평은 신랄하다.

    “대선에서 패배한 후에 당을 개혁해야 한다고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인 원 의원이 대안으로 내세운 인물이 5공(共) 세력 최병렬이었다. 말이 안 된다. 개혁을 잣대로 선택했다기보다 자신들의 지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속 보이는 후보 선택이었다. 박 대표 역시 마찬가지 선택이라고 본다. 결국 박 대표가 자신의 지분을 인정해주지 않자 박차고 나간 것이다.”

    이번엔 원 의원을 위한 변명도 들어보자. 한 재선 소장파 의원의 말이다.

    “선택의 과정이 철저하지 못했고 용의주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왕적 총재인 이회창 총재 앞에서도 그는 목소리를 냈다. 공천을 앞둔 상황에서도 그는 최 대표를 몰아내기 위한 봉기에 나섰다. 지금은 유력 차기 대권 주자인 박 대표에게 대든다. 그런 원 의원을 기회주의자, 배신자로 규정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최 대표나 박 대표 모두 약속한 방향과 거꾸로 갔기 때문에 지지를 철회했을 뿐이다.”

    몇 번의 선택과 되물림 과정은 그에 대한 신뢰, 나아가 소장파 전체에 대한 신뢰를 허물어뜨렸다는 지적도 있다. 동료 의원들은 물론이고 당의 밑바닥을 움직이는 대의원과 당원들의 신뢰 상실은 현재 위험 수준이다.

    “원 의원, 왜 거꾸로만 해요?”

    결국 한나라당 내 소장파의 둥지인 수요모임도 친박(親朴)과 반박(反朴)으로 양분됐다. 올해 초 당 청년위원장, 여성위원장선거에서 수요모임이 내놓은 후보들이 당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고배를 마신 것도 이런 분위기 탓이다. 모든 지탄이 한나라당 소장파의 대표 격인 원희룡 의원을 향하고 있다. 원 의원으로선 당내 신뢰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는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2. 정치적 입지 확대를 위해 돌출발언만 한다?

    지난해 11월7일 한나라당 최고회의체이던 상임운영위원회 때의 일이다. 회의 도중 원희룡 의원이 열린우리당 김한길 의원 주도로 여야 의원 185명이 공동 발의한 공직자 윤리법 개정안 문제를 꺼냈다.

    “장관급 이상 고위공직자의 재산형성 과정을 반드시 기록하도록 하는 개정안에 한나라당 의원은 22명만이 참여했다. 한나라당의 차기 대선후보를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 때문에 지도부가 경계령을 내렸다는 보도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라고 믿는다.”

    박근혜 대표를 비롯한 참석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또 저러냐’는 표정들이었다. 원 의원의 발언이 이어졌다.

    “지난 16대 대선 과정에서 후보의 재산과 신상문제를 둘러싸고 흑색선전을 당한 뼈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 제출된 법안에 대해 당이 적극 토론해서 권고적 당론으로 만들었으면 한다.”

    원 의원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김영선 최고위원, 전여옥 대변인, 김무성 사무총장으로 이어지는 반박이 곧장 튀어나왔다.

    “토론하기 전에 결론을 내서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김영선)

    “평소 당내 상황에 대해 잘 파악하지 못해 오해하는 것이다.”(전여옥)

    김무성 총장은 격하게 반응했다.

    ‘수재와 반골의 동거’ 원희룡 의원
    “(원 의원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악의적 보도를 인용하면서 또 새로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발언을 했다. 나는 그 법안을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서명할 수 없었다…이 자리가 당 지도부가 다 모인 자리인데 사인하지 말라고 한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라.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회의가 비공개로 들어가자 원 의원을 향한 참석자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공개 회의 시간에는 정부를 비판하고, 비공개 회의 때 집안 얘기를 하는 법인데 왜 거꾸로만 해요?”라는 말도 나왔다.

    “비공개 회의선 입 다문다”

    원 의원이 참여하면서부터 한나라당 회의 때면 이 같은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원 의원에 대해 “당의 방침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진다”는 비판이 있다. “튀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만 개혁적인 발언을 하고 비공개 회의에선 입을 다문다”는 비아냥도 있다.

    전자의 비판은 비교적 사실에 근거한다. 그간 원 의원은 여야가 대치하는 주요 현안에서 당론과 다른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혀왔다. 최근의 것만 정리해보자.

    ‘학교가 전교조의 이념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며 사학법 무효화를 위한 장외투쟁을 끝까지 벌이겠다는 박 대표의 논리에 대해 그는 “편협하고 경직되고 시대에 맞지 않는 논리”라며 반대했다. 8조9000억원 감세(減稅) 당론에 대해선 “감세가 투자 활성화로 이어질지 의문”이라고 찬물을 끼얹었다. 도청 ‘X파일’ 처리 문제에서도 당론과는 정반대로 “파일 내용을 전면 공개해야 한다”고 했다. “공개를 막으려는 것은 과거 권력의 배후를 비호하려는 음험한 작태”라며 열린우리당보다 더 목소리를 높였다.

    “‘보수혁명’이 언행의 기준”

    과연 그는 자신을 개혁적으로 보이기 위해 당론에 대해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는 것인가. 이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선 먼저 그가 일정한 이념적 준거틀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최근 원 의원과 인터뷰를 했다.

    먼저 “당신의 이념 성향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합리적 개혁을 추구하는 중도우파”라고 말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우파의 가치는 뚜렷이 지지하지만, 자유시장 경제만으로는 현대사회가 운영되지 않는 만큼 시장 실패와 민주의 과잉을 보완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개략적인 이념틀이다. 그는 “학생운동을 정리하면서 그 번지수로 찾아들어 갔다”고 했다.

    여기서 그의 이런 이념적 틀이 만들어진 학생운동 시절로 돌아가보자. 그는 의원이 되기 전에 쓴 자서전 ‘우리들의 세기’에서 학창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의 학창 시절은 성난 파도와 격랑의 바다 속에 있었다. 나는 우아한 정원사가 되는 대신 거친 바다를 헤쳐 나가야 하는 항해사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1982년 서울대 법대 수석 신입생 원희룡. 그의 첫 학기 성적은 4.3점 만점에 4.13점이었다. 그에겐 여전히 공부가 몸에 배어 있었다. 그는 새벽부터 도서관 문을 닫을 때까지 공부했다. 그러나 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를 감돌던 최루탄 냄새와 광주의 소문은 조금씩 그를 도서관 밖으로 불러냈다.

    1983년 5월. 그는 유인물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경찰에 끌려갔다. 훈방으로 풀려났지만 학교측 징계는 가혹했다. 유기정학이었다. 1983년 두 학기 동안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됐다. 그는 구로공단에 뛰어들어 야학을 조직한다. 1985년 1월엔 인천의 한 금속공장에 위장취업했다. 일당 2900원짜리 노동자가 되어 프레스, 롤러, 압연 등 단순노동을 배웠다. 기계에 몸이 끼어 죽을 뻔한 고비도 넘겼고 건강이 나빠져 쓰러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수당 인상 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는 노동자 편을 들다가 법대생 티를 내는 바람에 회사측의 의심을 샀다. 결국 6개월 만에 공장 노동자 생활을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학교로 돌아왔지만 방황은 계속된다.

    1989년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는 충격과 허탈감을 안겨줬다. 그는 “무작정 무전여행을 떠나 50여 일간 방황했다”고 말했다. 여행을 다녀온 그는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1992년, 대학에 입학한 지 10년 만에 그는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한다.

    그는 말했다.

    “당에 대한 비판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면서 내가 성장하려 한다면 나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당론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이 고민 없이 단지 튀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면 나는 당연히 도태될 것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해왔던 나름의 고민, 그리고 소명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이념적 방황을 통해 끊임없이 해답을 추구했고 그 작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보인다. 지금 그가 분명히 말하는 것은 ‘좌파 노선은 실패했다’이다. 아울러 그가 주창하는 것은 ‘보수혁명’이다. 그 말 속에는 기존 보수세력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개혁을 하는 데 있어 우파적 방법론을 사용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의사 부인, “남편은 외향적 사고형”

    그는 “기존 보수세력과 한나라당의 부정적 요소를 털어내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나라당의 영남당, 부자당, 반공당, 노인당 이미지를 변모시키는 역할을 자임한다. 그것이 ‘독불장군’이라는 욕을 먹으면서도 끊임없이 당론에 어깃장을 놓을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진정성을 믿어달라고 했다.

    “나도 이런저런 욕 얻어먹을 때면 하루에도 몇 번씩 심해(深海) 속으로 추락하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가야 할 길이라면 왕따가 되더라도 갈 수밖에….”

    그러나 한나라당 관계자 A씨의 얘기도 귀담아두자.

    “원 의원이 그렇게 개혁적이라면 현재 한나라당 대권 후보군(群) 가운데서 손학규 경기지사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개혁이란 이름을 내걸지만 속내 계산은 따로 있다는 얘기다.”

    3. 그가 깃발을 들면 몇 명이나 따라갈까?

    그는 1982년 학력고사 전체수석을 차지하면서 ‘제주도의 전설’이 됐다. 학생운동을 정리한 뒤 1년반 만에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했다. 잘나간다는 한나라당 의원들 중에서도 그는 최상급에 속한다. 학력에선 누구보다 자존심 센 한나라당 의원들이 그의 앞에서는 기가 죽는다. “재수없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그는 현재 당 안팎으로 고립돼 있다. 그를 지지하는 의원은 소장파 내 몇 명 정도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퍼스낼리티’의 문제도 있다는 게 당 안팎의 지적이다. 그는 ‘외로운 수재’라는 말을 듣는다. TK 출신의 한 초선 의원은 말했다.

    “원 의원은 솔직히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상대다. 우연한 기회에 함께 여행을 가서 같이 지낸 적이 있다. 듣던 얘기와는 달랐다. 겸손하고 솔직했다.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부인 강윤형씨는 정신과 의사다. 동향인 제주 출신의 서울대 82학번 동기다. 강씨가 분석하는 원 의원의 정신의학적 유형은 ‘외향적 사고형’이라고 한다. 외향이라 하면 자기 내면에 침잠하기보다 사회현상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많다는 의미다. 사고형이란 논리적 사고에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뜻이다. 대신 직관과 감정은 약하다.

    그 또한 “다른 사람의 말을 항상 논리적으로만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인정했다. 눈치코치로 때려잡아야 하는 상황에도 그는 논리가 앞선다. 그의 발언 역시 논리의 사슬을 물고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웬만한 집중력을 갖지 않으면 그가 하는 말의 흐름을 놓칠 때가 많다.

    “아니, 혼자서라도 가능하다”

    그의 공부 비결은 ‘집중력’, 그리고 철두철미한 ‘시간계획’에 있었다. 그의 공부 방법론은 훌륭해 보였다. 그가 떨어져본 시험도 있다. 운전면허시험이다.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운전면허시험을 봤는데 정말 어려웠다. 자동차라는 기계가 참 낯설었다. 전날 벼락치기로 공부한 필기시험에서 80점을 받아 겨우 커트라인을 넘겼다. 세 번 만에 합격했다.”

    그런데 ‘정치’라는 시험 역시 그에게 이전의 공부 방법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다. 다음은 초선 의원 B씨가 원 의원을 향해 던지는 충고다.

    “언뜻언뜻 묻어나는 오만함을 지워내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논리보다는 감성으로 접근할 필요도 있다.”

    ‘수재와 반골의 동거’ 원희룡 의원
    원 의원에게 “지금 깃발을 들면 몇 명이나 따라올 것 같은가”라고 물었다. 그의 답은 솔직했다. 하지만 오만하기도 했다.

    “몇 명 안 된다. 하지만 3명만 있으면 승산은 충분히 있다. 아니, 혼자서라도 가능하다.”

    4. 결국 한나라당을 탈당하지 않을까?

    “한나라당의 유시민이자 지능적 좌파, 해당(害黨)행위 중증 질환자인 원 의원은 대권 가도의 장애물에 불과하니 스스로 당을 떠나라.”

    “뼈를 묻겠다”

    원 의원을 향해 최근 한나라당 보수파 김용갑 의원이 낸 개인성명의 골자다. 그는 원 의원으로부터 ‘밥에 든 돌’로 비유된 적 있다. 한나라당 내 보수세력은 종종 원 의원을 향해 당을 떠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해왔다.

    원 의원의 ‘탈당설’은 16대 초선 의원 시절부터 나온 얘기다. 그는 당시 불법 대선자금 정국에서 최병렬 대표가 기용한 재선 3인방(이재오·김문수·홍준표 의원)과 사사건건 부딪쳤다. 공천을 앞둔 상황에서 “소장파도 물갈이의 예외가 아니다”는 경고가 그를 향해 날아들기도 했다. 탈당설은 그때쯤 돌았다. 앞서 당을 떠난 이부영·김부겸 의원 등 ‘독수리 5형제’의 뒤를 밟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

    “나는 탈당하지 않는다. 나는 보수다. 한나라당에 뼈를 묻겠다.”

    박근혜 대표 체제하에서 움츠러든 원 의원을 향해 또다시 탈당론이 불거진다. 이전보다 더욱 구체적이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결국 탈당하지 않겠나” “당내 기류가 그를 대안으로 보지 않는 상황에서 스스로 새로운 모색을 하지 않겠나”….

    원 의원은 이 같은 의견에 대해서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선진강국으로 지속성장하고 개인과 가정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한나라당에서 보수혁명을 하겠다.”

    원 의원은 한나라당을 변모시키겠다고 했다. 그는 이를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5·31 지방선거 이후인 오는 7월 전당대회에서 박근혜 대표가 물러나고 새로운 ‘관리형 대표’가 선출된다. 원 의원은 그 국면에서 또다시 움직일 것이다. 이 시기는 박근혜, 이명박, 손학규 등 한나라당 대권 빅3가 2007년 대선을 위해 본격적으로 세(勢) 규합에 나서야 하는 민감한 시점이기도 하다. 그는 차기 관리형 대표, 나아가 한나라당 대권 후보에 대한 선택의 이니셔티브를 쥐기 위해 모종의 역할에 나설 것이다. 아예 대권출마를 선언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초선 의원 C씨의 분석이다.

    “원 의원은 앞으로도 계속 한나라당 내의 개혁적 블록으로 자신을 인식시키려 할 것이다. 그것이 결국은 차기 대권에 대한 캐스팅보트를 쥐는 길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의 ‘서브 스리’를 꿈꾸며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쉽게만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재선 의원 D씨는 “원 의원은 지금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다. 그의 주위엔 사람이 많지 않다. 이번의 승부수가 성공하지 못할 경우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겠나.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원 의원의 탈당설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원 의원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빚쟁이들의 빚 독촉에 시달리는 부모를 두근대는 가슴으로 지켜보며 소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 사고로 오른발 발가락이 부러졌지만 가난 때문에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오른발은 기형이다.

    그는 그 발로 마라톤 풀코스를 7번 완주했다. 그리고 아마추어 마라토너의 희망이라는 ‘서브 스리(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 안에 완주하는 것)’를 꿈꾼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서브 스리는 지금 비록 얻기 힘들어 보이더라도 결국 언젠가 도달할 것이라는 희망이자 목표이다.”

    그는 지금 정치의 서브 스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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