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호

평생 격려 아끼지 않은 영원한 ‘첫 독자’

“자네 때문에 한국 詩의 지형이 바뀔 걸세”

  • 신경림 시인·동국대 석좌교수 skyungrim@paran.com

    입력2006-03-29 10: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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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학교 때 영어를, 고등학교 때 독일어를 지도하신 정춘용 선생은 내게 문학과 철학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50년이 지난 지금도 독서지도를 해주고 문학의 길을 걷는 데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영원한 스승이시다.
    평생 격려 아끼지 않은 영원한 ‘첫 독자’

    유종호 교수(왼쪽)와 신경림 시인(오른쪽)은 학창시절 정춘용 선생(가운데)에게 문학을 배웠다.

    6·25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전쟁 직후 휴교에 들어간 학교는 다음해 늦은 봄이 되어서야 겨우 개교를 했는데, 피란이다,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다 해서 떠돌아다니던 나는 두 달도 더 지나서야 복학했다. 교사(校舍)는 미군부대에 내어주고 시내 한복판의 허름한 창고 비슷한 건물을 빌려 수업을 하고 있었다.

    내가 크게 실망한 것은 전쟁 전에 계시던 선생님들 태반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특히 내가 좋아하던 영어, 수학, 국어 선생이 몽탕 바뀌어 있었다. 나는 다니는 둥 마는 둥 교과서도 없이 공책 한 권만 꽁무니에 꽂고 책상도 걸상도 정해진 자리도 없는 교실을 들락거렸다.

    한 달도 못되어서였을 것이다. 모내기철 집일을 도우라는 가정실습기간이 되었다. 관례대로 숙제가 주어졌는데, 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별로 한 일이 없는지라 그동안 읽은 소설 독후감을 써 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과 ‘전원교향악’이었다.

    그 얼마 뒤였다. 영어 시간에 선생님이 맨 뒷자리에 숨어 앉아 있는 내 이름을 불렀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어선 내게 그는 대뜸 “실제로 그 책들을 읽었는가” “그 감상문을 직접 썼는가” 하고 물었다. 내가 우물쭈물하니까 그는 그날 배울 교과서 한 대목을 읽게 했다. 더는 아무 말씀이 없었지만 그 뒤로 시간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 한 대목씩 읽게 한 것을 보면 그 감상문을 실제로 내가 썼다는 것을 인정했던 것 같다.

    영어교사·문학교사·철학교사



    이렇게 정춘용(鄭春溶) 선생님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는데, 그는 그때 서울대 독문과 학생으로서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그가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던 것은 젊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교과서의 구문을 설명하면서 많은 예문을 인용했는데, 늘 명작 속에서 가져와, 가령 톨스토이, 헤밍웨이,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의 문학의 편린들을 우리는 그를 통해서 접할 수 있었다. 또 데카르트와 니체를 좋아한 듯, 그들이 한 말이 영문법 설명에 이용되었다. 그는 영어교사이면서 문학교사요 철학교사인 셈이었다.

    선생님과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한 사건이 있고서였다. 나는 이전까지는 수학시간을 대단히 좋아했는데, 수학 자체가 좋아서라기보다 담당 선생님이 좋아서였던 것 같다. 내 하숙집 근처의 수학 선생님 댁에는 큰 살구나무가 있어, 선생님 댁에서 하숙하던 동급생한테 놀러가면 사모님이 잘 익은 살구를 한 소쿠리씩 내놓고는 했다. 전쟁 소식을 듣던 날도 그 친구와 마루에서 사모님이 따다준 살구를 먹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6·25를 살구와 함께 떠올린다.

    한데 그 선생님은 6·25 뒤로는 학교에서 볼 수 없었다. 부역을 해서 감옥에 갔다는 둥 분명치 않은 소문이 떠도는 그를 대신해서 수학을 가르친 선생님은 전에 농업과 생물을 담당했던 분으로, 발음도 불분명하고 설명도 엉망이었다. 게다가 나는 두어 달이나 진도가 뒤처져 있었으므로, 당연히 수학시간이 지겨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학시간이면 소설 따위를 감추어들고 읽곤 했는데, 그날따라 들키고 말았다. 나는 교무실로 불려갔고, 선생님은 분기탱천해서 내가 읽던 책을 땅바닥에 내팽개치면서 나를 때리고 차고 했다. 마침 옆에 계시던 정춘용 선생이 그 책을 집어들면서 말렸다. ‘수업시간에 다른 책을 본 것은 잘못이지만, 이런 책을 읽는다면 상당한 수준이니까 봐줘야 할 것 아니냐’는 뜻의 말도 했던 것 같다.

    그 무렵 그는 우리반 담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각별히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참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위기에서 나를 구해준 선생님이 여간 고맙지 않았고, 나는 선생님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사범 병설 중학교로, 졸업 후 거의 사범학교로 진학하게 되어 있어 졸업을 앞두고도 진로 상담 같은 것이 없었다. 한데 담임인 정 선생님이 진로 상담을 하겠다며 나를 교무실로 불러서는, 대뜸 고등학교로 옮기라고 했다. 첫째, 풍금을 못하니 소학교 교사를 할 자격이 없고 둘째, 대학으로 진학해서 더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소학교 교사가 되어 어느 강가의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감상적인 꿈에 젖어 있던 나는 당연히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풍금은 이제부터 배우면 되고 대학엔 가고 싶지 않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그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여러 번 나를 불러 설득하다가 안 되니까 내 아버지까지 동원했다. 결국 나는 소학교 교사가 되는 꿈을 접고 학년이 바뀌자 고등학교로 옮겨갔다.

    “속임수는 통하지 않아!”

    그러나 그와의 인연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학년으로 진급하기 전에 그가 고등학교로 옮겨온 것이다. 이번에는 독일어와 서양사 담당으로였다. 선생님도 친구도 다 낯설어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나는 엄청난 후원자라도 얻은 것처럼 갑자기 우쭐해졌다. 나는 선생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는 점을 친구들 앞에서 늘 과시했고, 어떠한 경우에도 그가 내 편이 되어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학교에서는 해마다 늦은 봄 행사를 하나 열었다. 시내를 벗어나면 바로 나오는 호수를 지나 강을 따라 달려갔다가 8km 되는 지점에서 팔뚝에 도장을 받고 되돌아오는 전교생 달리기였다.

    호수까지 달려 나간 우리는 잔꾀를 내었다. 힘들게 끝까지 달릴 게 아니라 여기서 놀면서 기다렸다가 먼저 달려 들어오는 동급생이 있으면 팔뚝에서 도장자국을 옮겨 받아 학교로 되돌아간다는 꾀였다.

    과연 일찍 달려 들어오는 동급생이 있어 쉽게 도장 자국을 옮겨 받았고, 그들을 뒤따라 학교로 달려 들어갔다. 교문에 서 있는 감독관이 정 선생님임을 알고서 안심한 것은 까다로운 선생님에게라면 발각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불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선생님은 우리를 그냥 통과시키지 않고, 일단 옆에 서 있게 했다. 운동과는 담을 쌓은 우리들이 선수급 학생들과 거의 나란히 들어온 점이 의심을 샀던 모양이다.

    “선생님, 좀 봐주십시오.”

    나는 이렇게 농조로 사정했다. 우리 일행이 대체로 모범생인데다 상대가 나를 인정하는 정 선생님이었으므로 무난히 통과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가타부타 말이 없이 뙤약볕 아래 한참을 세워두었다가 달리기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우리를 교무실로 끌고 갔다.

    “쪼그만 것들이 벌써 속이는 법부터 배우고!”

    우리는 팬티 바람으로 교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시는 속임수를 쓰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썼다. 그리고 다음날 출석하자마자 다시 교무실로 끌려갔고, 속임수를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번 더 한 뒤에 운동장을 50바퀴 도는 벌을 받았다. 이 세상에서 속임수는 결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 하면 안 된다고, 징계가 끝난 뒤에 선생님은 강조했다.

    “쟤 버릇은 정 선생이 다 버려놨어”

    선생님과 더 가까워질 일은 생기지 않았다. 나는 그가 담당한 독어에는 영 흥미가 없었고, 그가 담당한 다른 과목인 서양사는 이미 우리는 배우고 있지 않을 때였기 때문이다. 그때 학교에서 교지(校誌)를 창간하게 되었는데, 내가 편집 실무자로 참여했다. 지도교사가 “정 선생님이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잘 쓰니 원고를 하나 청탁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해서 그 청탁을 내가 맡은 것이 그때 나와 선생님 사이의 유일한 개인적 접촉이었을 것이다. 그는 시를 한 편 썼는데 아주 관념적인 시였다.

    내가 쓴 시 한 편과 에세이 한 편이 실렸는데 책이 나오자 정 선생님이 독어시간에 여러 학생 앞에서 내 시와 에세이를 극찬했다. 이만하면 기성 시단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바람에 나는 우쭐했다. 그리고 그 칭찬을 학과에 등한해도 좋은 특권을 허용한 것쯤으로 해석하면서 싫은 과목 시간에는 드러내놓고 시집이며 소설책을 읽어 선생님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쟤 버릇은 정 선생하고 유 선생이 다 버려놨어.”

    평생 격려 아끼지 않은 영원한 ‘첫 독자’

    신경림 시인의 모교인 충주고등학교. 충주고 시절의 신경림 시인과 정춘용 선생.

    이런 말을 담임이 하는 것을 들으니 그는 다른 자리에서도 내 칭찬을 했던 모양이다. ‘유 선생’이란 나의 또 한 분의 은사이신 유촌 선생님(유종호 연세대 석좌교수의 선친)을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편식으로 문학 공부를 하는 내가 걱정되었던지, “진짜 제대로 된 문학자가 되려면 기초가 단단해야 한다”면서 영어 수학 등 다른 공부에도 등한하지 말 것을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귓등으로 들어 넘겼다.

    내가 대학으로 진학한 얼마 뒤에 그는 다른 중학교로 옮겨갔다. 이렇게 자주 학교를 옮겨 다니는 것은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였다는 사실은 후에 들었다.

    그뒤에도 한두 번 찾아뵈었던 것 같다. 다방으로 데리고 가서 차를 사며 토마스 만 얘기를 많이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아직도 글을 쓰시느냐는 질문에는 손을 내저으며 “글은 너희들이 잘 쓰니까 나는 이제 고시나 볼까” 하셨다. 유종호는 평론으로, 나는 시로 문단에 데뷔한 뒤였다. 과연 얼마 뒤 그 학교도 그만두셨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이어 고등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번 우연히 거리에서 만났더니 광주지법 판사로 계신다고 했다. 밥을 사시면서 문학을 계속하지 못한 것, 학교를 떠난 것 그리고 법관이 된 것을 다 후회한다고 하셨는데 나는 공연한 수사(修辭)라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 문학을 주도하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며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얘기를 하시는 것을 듣고 당장 나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을 구해 읽었다.

    시집 ‘농무’ 첫 구매자

    선생님과의 만남은 한동안 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실의에 빠져 10년 가까운 세월을 시골을 떠돌았기 때문이다. 다시 상경해서 내가 나가게 된 일터가 바로 선생님의 변호사 사무실 길 건너편에 있었다. 이미 판사직을 떠나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계셨던 것이다. 내가 막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였다. 내 시가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면 선생님은 반드시 전화를 주셨다.

    “오늘 어때? 바쁘지 않으면 술이나 한 잔 하지.”

    물론 나는 사양할 까닭이 없었다. 그는 매번 내 시를 극찬했고 나는 그것이 과찬인 줄 알면서도 싫지 않았다. 내 시가 처음 ‘창비’에 실렸을 때도 먼저 전화를 주셔서 나를 찾았다. 그는 ‘창비’를 아예 여러 권 사다가 직원들에게 나누어주셨다면서 당장 전화로 ‘창비’ 정기구독을 신청했다.

    첫 시집 ‘농무’를 들고 내가 제일 먼저 찾아간 분도 선생님이었다. 또 선생님은 ‘농무’ 10부를 현찰로 사준 첫 구매자이기도 하다. ‘농무’ 출간을 축하하는 술자리를 먼저 열어주신 분도 선생님이다. 둘만의 술자리였지만 선생님은 내 시를 극찬하면서 이제 한국 시의 지형이 바뀔 것이라고 과히 듣기 싫지 않은 장담을 하셨다.

    ‘농무’ 때뿐 아니라 책을 낼 적마다 선생님은 첫 독자가 되어주셨다. 책을 내놓고 찾아뵈려고 전화를 드리면 그는 번번이 말했다.

    “나 벌써 사왔어. 지금 읽으려는 참이야.”

    찾아가 뵈면 과연 그의 책상 위에는 방금 나온 내 책이 놓여 있었다.

    그 뒤 선생님과 나는 술친구가 돼버렸는데, 술값은 언제나 선생님 몫이었다. 가난한 시인이 무슨 돈이 있느냐면서 어쩌다 내가 술값을 내려 하면 질색을 했다. 또 그는 대단한 독서가여서 손에서 책을 놓는 때가 거의 없었다. 틈만 나면 서점 특히 외서서점을 순방했다.

    그는 읽고 나서 읽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책이 있으면 내게 양도하기도 했다. 그때 내가 선생님한테 얻은 하야시 겐타로의 ‘세계의 발전’, 야마베 겐타로의 ‘일한합병소사(日韓合倂小史)’, 안우식의 ‘김사량(金史良)’, I. F. 스톤의 ‘조선전쟁비사’ 등 이와나미신서(岩波新書) 여러 권이 아직도 내 서가에 꽂혀 있다. 졸업하고 훨씬 뒤까지 나는 그로부터 독서지도를 받은 셈이다.

    나는 선생님 댁에도 종종 들러 술을 얻어 마셨다. 우연히 소설가 이호철 형과 동아일보 주필이던 천관우 선생이 다 이웃해 살고 있어 더 자주 들르게 되었던 것 같다. 1970년대 중엽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이호철 형이 구속되자 내 부탁으로 선생님이 그 변론을 맡게 되었는데, 그것이 내가 더 자주 선생님 댁을 찾을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술에 취해 선생님 댁에 쓰러져 잔 일도 여러 번이다.

    술값은 언제나 선생님 몫

    문인간첩단 사건을 계기로 선생님은 시국사건의 변론도 여러 건 맡았다. 내가 알선한 경우가 많았는데, 대개가 운동권의 중심에 있는 떠들썩하고 화려한 사건이 아니라 주변부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어서, 명성에도 도움이 안 되고 돈벌이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들 보호자 중에는 수임료를 제대로 내기는커녕 차비나 밥값을 오히려 신세지는 가난한 시골 태생도 많았으며, 매스컴을 탈 만한 더 유명한 변호사에게 맡기지 못한 데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는 철딱서니 없는 학생도 있었다. 한 학생은 제 아버지가 점심까지 변호사한테 얻어먹고 뒤에 앉아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법정이 떠나가라 고성을 질러가면서 오만방자하게 변론을 거부했는데, 말하자면 변호사도 적으로 간주한다는 태도였다. 그는 잘도 참아냈고, 백배사죄하는 그 아버지에게 시골 내려갈 차비를 쥐어주기까지 했다. 선생님에게 시국사건을 여러 건 알선한 일을 나는 지금도 뉘우친다.

    선생님 사무실에는 나뿐 아니라 여러 제자가 드나들었다. 함께 어울려 저녁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일이 잦았지만, 이때 선생님은 좀처럼 제자들한테 돈을 치를 기회를 주시지 않았다. 모두들 이것을 당연하게 알았고, 나도 십수년간을 선생님한테 얻어먹기만 했다. 내가 밥값이라도 내기 시작한 지는 불과 몇 해가 되지 않는다.

    어느 해 봄날 교보문고 앞에서 마주친 선생님의 등이 갑자기 굽어 보였다. ‘아하, 선생님도 늙으셨구나!’ 그날 나는 처음으로 선생님께 저녁을 대접했고, 그로부터 한 해 한두 번 선생님께 식사 대접을 했다. 대개 유종호 교수와 함께였으며, 유 교수가 호스트가 되는 일이 더 많았다. 그 자리에서 그가 늘 하시는 말씀이 있다.

    평생 격려 아끼지 않은 영원한 ‘첫 독자’
    申庚林
    ●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 동국대 영문학과 졸업
    ● ‘문학예술’에 시(詩) ‘갈대’로 등단
    ●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 現 동국대 석좌교수, 만해마을 대표
    ● 저서 : 시집 ‘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산문집 ‘민요기행’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등


    “내 인생의 실패는 학교를 떠난 거야. 나한테 가장 잘 맞는 직업이 교사였는데 말야.”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는 학교를 떠났지만 교사를 그만둔 것은 아니다. 많은 제자의 가슴에 여전히 인생의 스승으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지난해는 선생님을 모시지 못한 채 한 해를 보내고 말았다. 올해는 꼭 한번 모시고 그동안 읽은 책 얘기라도 나누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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