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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철녀들 ⑧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의 독보적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

싸워야 할 적은 남자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

  •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의 독보적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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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의 독보적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

강렬한 꽃그림으로 주목받은 조지아 오키프.

오키프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스티글리츠라는 남자다. 보통 예술가들의 삶에는 동성이든 이성이든 예술적 재능을 교환하고 긴밀한 영적 소통을 하는 동반자가 있게 마련이다.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예술분야에도 성공한 여자보다는 성공한 남자가 많다. 따라서 대가(大家) 남성에 여성 제자가 흔하다. 그 과정에서 여자는 남자의 성취에 육체적 감정적 정서적 보조자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설사 재능이 남자보다 뛰어나다 하더라도 세상의 평가는 여자의 성취에는 박하게 마련이다. 오키프와 스티글리츠의 경우도 처음엔 비슷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당시 오키프는 갓 도시로 나온 시골뜨기 교사에 불과했지만 스티글리츠는 당대 유명 인사였다.

애송이 화가와 유명 예술인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은 뉴욕에서 가장 유명했던 ‘291화랑’이었고, 스티글리츠가 바로 주인이었다. 291화랑은 마티스 몬드리안 브라크 피카소와 같은 유럽 화가들의 작품전을 미국에서 처음 연 곳으로 현대미술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미국 내 첫 화랑이었다. 지금이야 현대미술의 주 무대가 뉴욕이지만 당시만 해도 중심지는 파리였고 유럽이었다. 스티글리츠는 정력적인 활동으로 뉴욕을 현대미술의 메카로 일군 개척자나 다름없다. 미국 현대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다뤄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매체는 사진이었다. 당시 사진은 본격적인 미술장르가 아닌 그야말로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 장르였다. 그런 매체를 도구 삼아 스티글리츠는 카메라 렌즈를 빛에 3,4분씩 길게 노출시키는 자신만의 촬영기법으로 뉴욕 시의 파괴되거나 건설 중인 건물들을 밤이나 가을비를 배경으로 찍었다. 이렇게 나온 사진은 마치 ‘그림’처럼 보여 스티글리츠는 ‘사진기를 든 화가’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또 그림을 사고파는 화상(畵商)이기도 했으며 명석한 통찰력과 허를 찌르는 비평에, 가난한 예술인들을 열렬히 지원한, 한마디로 뉴욕 예술가들의 영웅이었다.

오키프는 뉴욕 생활을 하면서 그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1908년 로댕전을 보기 위해 291화랑에 처음 갔을 때 관람객들에게 깊이 있으면서도 쉬운 언어로 작품 설명을 해주던 그를 먼발치에서 인상 깊게 보기도 했다. 이후에는 가벼운 눈인사를 하는 사이가 됐다. 하지만 당시 스티글리츠는 불행한 결혼생활로 고통 받는 한편 매력적인 부호 여성과 불륜 행각을 즐기고 있었으니 시골뜨기 오키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의 독보적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

‘분홍색 위에 두 송이의 카라’1928년작.

더욱이 오키프는 임시 교사를 하기 위해 사우스캐롤라이나 시골로 이사를 가 잠시 뉴욕을 떠난다. 그녀는 이곳 자연 속에 묻혀 평생 트레이드마크가 된 꽃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오키프는 어느 날 친구 폴리처에게 주홍색 코스모스와 자주색 피튜니아 꽃그림을 그린 파스텔화와 소묘를 보내주는데, 이게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폴리처는 어느 날 오키프의 작품을 들고 291화랑을 찾는다. 쉰두 살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현대예술의 거장은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고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진짜 여성 화가가 나타났군요.”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이 그림을 그린 여자는)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사물을 보는 통이 크면서도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입니다. 이 그림들은 제가 그동안 봐온 것들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작품들입니다. 언젠가 꼭 전시회를 열고 싶군요.”

전시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애송이 화가의 그림 몇 장만 보고 전시회를 열겠다고 한 스티글리츠야말로 예술가를 보는 뛰어난 안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혼잣말처럼 내뱉은 탄성이 미국 현대미술사에 길이 남을 여류화가를 발굴한 것이었음을 그 자신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소식을 전해 들은 오키프는 뛸 듯이 기뻤다. 자기 작품이 유명 화랑에 전시된다는 소식도 기뻤지만 천하의 스티글리츠가 자신을 인정해준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직접 편지를 쓴다. ‘제 그림을 보신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그림이 왜 좋은지 기억하신다면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그림으로 말하려고 했던 것을 이해하신 것 같아서요.’

스티글리츠는 제법 유혹적인 어투로 답장을 쓴다. ‘작품에서 느꼈던 것을 말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직접 만나 인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전할 수도 있겠지요. …(당신의) 작품이 제게 큰 기쁨을 주었다고 말하고 싶군요. 정말로 놀라웠소. 자신의 내면을 진정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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