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아들 광호(40) 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 유학을 떠나 캘리포니아대(UCLA)를 졸업한 후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박사 공부를 하려 했으나 김만철 씨가 사기를 당해 재산을 잃으면서 한국에 돌아왔다.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현재 학원 강사로 일한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청소년들에게 수학을 영어로 가르친다.
장남 광규(50) 씨는 서울 잠실에 살면서 LH공사에 다닌다. 차남 치일(43) 씨는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장녀 광옥(45) 씨는 경기 고양시 일산에 살면서 버스운전을 한다. 광옥 씨 남편은 트레일러 기사다. 광숙 씨 외할머니 허문화 씨는 2011년 1월 92세로 별세했다.
김만철 씨는 수차례 사기를 당해 정착금과 강연 등으로 번 10억 원가량의 재산을 날렸다. 경남 남해에 기도원을 세웠는데 목사가 기도원을 담보로 수억 원을 대출받고는 필리핀으로 도주했다. 지인 소개로 거액을 들여 구입한 땅이 알고 보니 가치가 형편없는 곳인 적도 있다. 그는 경기 광주시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다. 광숙 씨는 주말마다 부모 댁을 찾는다.
“목사도 사기 치고, 권사도 사기 치고, 여러 번 사기당했습니다. 그래서 장인어른이 아주 힘들게 사는 것으로 아는 분이 있던데, 그렇진 않아요. 농사지으면서 즐겁게 사십니다. 종교기관이 소유한 땅인데, 그쪽에서도 어차피 놀리는 땅이라 배려를 해줬습니다. 광주에 가면 닭도 잡아먹고, 삼도 캐 먹습니다. 산에 장뇌삼 씨앗을 뿌렸거든요. 자식들도 다 잘 컸고요
장인 차는 쏘나타, 장모님 차는 코란도 스포츠예요. 나이가 있어 운전하는 게 위험하니 그만두라 말씀드려도 안 들으십니다. 장인이 재미난 분인 게, 멜라민 우유 파동이 났을 때는 염소를 사서 직접 젖을 짜 드셨어요. 언젠가는 장인어른이 창고에 보트와 모터, 경유 4t, 벼 형태의 쌀 8t을 보관하고 있길래 ‘이건 뭡니까?’ 여쭤보니 ‘전쟁 나면 먹고 살아야지, 하다하다 안 되면 배 타고 도망가야지’라고 말씀해 웃은 기억도 납니다.”

1989년 1월 27일자 동아일보. ‘오는 2월 국민학교를 졸업하게 되는 김광숙양’이라는 사진 설명 아래 “역사 과목 달라 당황…탤런트나 의사 되고 싶어”라는 제목이 붙었다.
용수 씨는 1995년 북한군에 징집됐다가 휴전선을 넘어 귀순했다.
“강원도 창도군에서 근무했습니다. 양구, 화천 맞은편 1제대 보병으로요. GOP대대를 1제대라고 부릅니다. 국군 GP에 도착하는 데 3시간 걸렸어요. 산세가 험해 감시를 피하기 쉬웠습니다. GP에 도착해 문을 두들겼죠. 몇 년 전 ‘노크 귀순’이 문제가 됐는데 10년, 20년 전에도 다 노크 귀순이었어요. 그때만 호들갑을 떤 거예요. GP에 도착할 때까지 아군이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광숙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법무사 사무소에서 일하다 용수 씨를 만났다. 2000년 5월 한 이벤트 회사가 탈북인을 위해 연 미팅 행사 때다. 용수 씨가 2호선 방배역에서 역무원으로 일했고 광숙 씨 사무실은 서초동이었다. 용수 씨는 “말 통하는 이성을 만난 게 무엇보다 반가웠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두 사람은 운명의 짝을 만난 것처럼 연애를 시작했다. 그해 9월 데이트가 늦게 끝나 용수 씨가 김만철 씨 집으로 광숙 씨를 바래다줬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아내가 집에 들어와 커피 한잔 마시고 가라는 겁니다. 어른들은 주무시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몰래 들어갔는데, 장인이 떡하니 서 계신 겁니다. 둘이 서로 좋아하느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라고 했더니 ‘방 하나 비었으니 오늘부터 여기서 살아’라고 하셨어요. 장인과는 전부터 안면이 있었습니다. 얼떨결에 결혼한 셈이죠. 탈북자 부부는 우리가 처음이에요. 그때까지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끼리 결혼한 예가 없었어요.”
두 사람은 한 달 후(2000년 10월 28일) 서울 종로구 구기동 이북5도청에서 화촉을 밝혔다. 광숙 씨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 직장이 탄탄하잖아요. 빨리 붙잡아야죠, 하하. 일하는 곳이 가까워 자주 만나다보니…. 결혼 적령기였고요. 용수 씨가 혼자 한국에 온 터라 친척도 없고 외로운 처지였습니다. 저보다 더 외로워하는 것 같았어요. 남편이 저보다 두 살 아래인데, 연하인 것은 별로 생각을 안 했어요. 주위에서도 남편을 다 좋게 봐주셨거든요.”
광숙 씨는 연하 남편에게 존댓말, 용수 씨는 연상 아내에게 반말을 한다.
“아내가 부모님 사는 모습을 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북한이 더 가부장적이에요. 가끔 딸이 ‘아빠, 누나한테 그렇게 하면 안 돼’라고 놀리곤 하죠.”
광숙 씨는 “존댓말을 썼다, 안 썼다 한다”고 멋쩍어했다.
용수 씨 고향은 함북 연사군, 광숙 씨는 함북 청진시다. 어릴 적 같은 혁명유적지로 견학 간 기억, 즐겨 하던 놀이, 부르던 노래, 학교생활 등 공유하는 추억을 얘기하며 사랑을 나눴다. 광숙 씨는 이렇게 말했다.
“어릴 적 한국에 왔지만, 청진에서의 일이 지금도 다 기억나요. 동네 모습, 학교 다니면서 친구들과 있었던 일이 오롯이 떠오릅니다. 용수 씨와 함께 있으면 편했어요. 서로 비슷한 추억을 가진 게 참 좋았습니다.
둘 다 한국 생활을 오래해서 이제는 사투리를 안 씁니다. 사투리가 오히려 어색해요. 일부러 함경도 말로 대화하면서 서로를 웃길 때가 있습니다. 엉터리 사투리가 나와 배꼽을 잡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