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호

원수도 친구로 만드는 골프의 마력

  • 최희암 동국대 농구팀 감독

    입력2005-08-29 13: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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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수도 친구로 만드는 골프의 마력
    내가 아는 골프는 그저 돈 많은 사람들이나 즐기는 스포츠였다. 나 같은 월급쟁이 체육인과 인연이 있을 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골프 입문도 당연히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듯 남의 일 같던 골프와 첫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무식’했다.

    연세대 감독 시절의 일이다. 해마다 가을 정기 연고전이 끝나면 1년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며 학교 체육부장이 각부 감독들을 데리고 지방으로 1박2일 연수를 갔다. 연수의 내용은 부장의 취향에 따라 매년 달라진다. 출발부터 술판을 벌이는 해가 있는가 하면, 고스톱으로 시작해서 고스톱으로 끝나는 때도 있고, 기간 내내 골프만 치는 일도 있다.

    1996년 혹은 1997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해 연수 종목은 골프로 정하고 연세대 응원단 출신의 선배가 운영하는 경산CC로 장소를 잡았다. 야구의 김충남 감독과 필자는 골프를 전혀 못했지만 대세다 보니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10월 초의 가을날 아침 일찍 출발한 일행은 오전 8시 무렵 골프장에 도착했다. 클럽하우스에 모여 앉아 모닝커피를 한 잔씩 마실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모두들 필드로 나서길래 골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김 감독과 필자는 잘 다녀오시라고 손까지 흔들었다. 라운드가 진행되는 동안 클럽하우스에서 기다릴 심산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한 10시쯤 되니 이게 장난이 아니었다. TV 아침방송 프로그램도 끝났지, 김 감독과의 대화 밑천도 다 떨어졌지, 하릴없이 죽치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는 종업원들의 시선도 심상치 않지, 이건 뭐 고문이 따로 없었다. 더구나 점심 무렵이 되자 그나마 말동무를 해주던 김 감독마저 대구에 있는 후배 감독들이 찾아왔다면서 자리를 뜨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나보고는 “저녁에 다시 일행과 합류하려면 최 감독이 연락을 좀 해줘야겠다”며 꼼짝말고 자리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때야 휴대전화가 넘쳐나는 시대도 아니었으니 일행의 골프가 일찍 끝나면 길이 엇갈릴까 걱정되기도 했다. 혼자 클럽하우스에 남아 보초를 서다 보니 스스로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괜히 따라왔나 하고 투덜거려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렇게 무려 6시간 넘게 혼자 있다 보니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골프가 그리 오래 걸린다는 것을 알았다는 게 수확이라면 수확일까.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클럽하우스에서 시간을 죽인 사람이라는 타이틀은 붙여줄 수 있겠다.

    결국 다음날에는 혼자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무섭고 지겨워서 별수없이 라운드에 따라나섰다. 전혀 뜻하지 않은 골프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렇듯 억지춘향으로 끌려나간 필드이니 제대로 될 턱이 있나. 이후에도 가끔씩 라운드에 어물쩍 따라나가곤 했지만 연습은 언감생심, 빨리 끝나기만 바라는 식으로 어영부영 ‘개기기’를 무려 7~8년쯤 한 모양이다.

    돈 앞에는 장사 없다고, 그렇게 데면데면하던 골프를 제대로 쳐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역시 내기 때문이었다. 2003년 프로팀 감독직에서 물러나 한가해졌을 무렵, 친구들이 불러 라운드에 나간 자리였다. 편한 사람들인 만큼 생전 처음으로 점당 2000원짜리 골프에 도전했다. “공부에도 핸디를 주느냐”며 안 된다는 친구들을 억지로 졸라 핸디를 3개씩 받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하늘로 훨훨 날아가버린 4만2000원. 공부만 하던 친구들에게 운동선수 출신인 내가 운동에서 참패를 당하니 창피하고 열이 받아 더욱더 헤맨 탓이었다.

    동네 골프연습장에 등록한 것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한번 시작하면 또 끝을 보는 것이 스포츠맨의 자세 아니겠는가. 본격적으로 배움의 길에 들어서 곧 100고지를 돌파하고 90대 초반까지 내려갔다. 내심 80대를 욕심 내려는 찰라 그만 올해 동국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됐다. 연습을 안 하니 스코어는 순식간에 퇴보 또 퇴보. 어느새 100대로 올라간 스코어를 보면 80대는 영원히 물건너간 게 아닌가 싶다.

    이렇듯 마음대로 되지 않아 애간장을 녹이는 것이 골프이건만, 그래도 누가 청하면 라운드를 뿌리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을 사귀고 관계를 맺는 데 골프가 얼마나 큰 구실을 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를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신동파 선배와 관련된 에피소드에서였다.

    1991~92년 시즌 당시 3학년이던 오성식 선수의 실업팀 진로문제가 크게 불거져 SBS 농구팀 창단 감독이던 신동파 선배와 필자는 거의 원수지간이나 다름없는 사이가 됐다. 이후 공·사석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지만 당시 맺힌 감정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더욱이 신동파 선배는 필자의 고등학교(휘문고)와 대학교(연세대) 선배이기도 했다.

    세월이 꽤 많이 흘러 지난해에야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신임 휘농회(휘문고등학교 농구후원회) 윤기동 회장이 전임회장이던 조병학 선배, 신동파 선배를 모시는 자리에 필자를 함께 초청해 라운드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이날 우리는 지난날의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신 선배는 만날 때마다 백수이던 나의 거취를 걱정하면서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을 만큼 가까워졌다.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주는 골프의 마력 덕분이다.

    그래서 골프를 왜 치느냐고 누가 물으면 내 대답은 한결같다. 적을 아군으로 만드는 매력 있는 스포츠니까. 다른 이유도 많지만, 내기에서 돈 따는 재미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물론 내기에서 이기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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