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사생활의 발견’에서 ‘생활의 정치학’으로

문학, 세계의 반영

  • 글: 이광호 서울예대 교수·문예창작 / 문학평론가 over82@lycos.co.kr

    입력2003-01-22 13: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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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발견한 것은 공적 담론의 억압 아래 오래 침묵하던 사사로운 인간의 언어다. 국가와 가족이란 제도의 경계를 넘어선 사적 욕망의 움직임. 이제 한국문학은 집단의 언어가 보여주지 못한 미학적 반란과 새로운 욕망의 전선을 모색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내용을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작품들의 다양한 양상 때문만이 아니라, 90년대 문학의 ‘현재성’ 때문이다. 90년대적인 문학 작업은 완료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90년대는 완결된 문학사적 시간대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의미형성의 공간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다만, 그 현재적인 공간에서 움직이는 몇 가지 문학적 맥락을 점검해보는 일만이 가능하다.

    90년대 이후의 문학은 80년대 이전의 문학과 무엇이 다른가? 이 질문에는 80년대와 90년대를 대비시키는 논리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은 90년대 문학을 설명하는 낯익은 방식의 하나다. 이 논리 안에는 80년대와 90년대에 관한, ‘집단·개인, 거대담론·미시담론, 정치적인 삶·문화적인 삶, 역사·일상’ 등의 세부적인 대립 명제들이 포함된다. 이 이분법은 단순성의 문제를 노출하고 있지만, 먼저 사회적 상황과 관련해 설명할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전세계적 지배가 공고화되는 90년대는 한국정치의 민주화 과정과 겹쳐 있고, 이것은 문학을 사회변혁의 중요한 실천방식으로 생각하는 문학이념에 타격을 가했다. 90년대 이후 ‘문민정부’에 이은 ‘국민의 정부’ 출현은 적어도 제도적 층위에서는 정치적 폭압의 시대가 사라졌음을 보여주었고, ‘적’에 대한 폭로와 분노를 쏟아내던 문학은 그 ‘표적’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자본주의가 문화 혹은 정보상품 개발을 통해 시장개념을 확장하면서 노동형태와 생활양식이 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문화산업은 정치권력의 하부구조라는 상태를 벗어나, 자본의 논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스스로 시장을 확대해나가는 자율적인 생산기구로 자리잡게 되었다. 문화산업의 성장은 영상, 음반 혹은 디지털 매체 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지만, 여성 독자를 중심으로 한 문학 소비자군 형성이 90년대 문학시장을 확대했다. 출판시장의 구조는 이른바 ‘본격 문학’ 대신 장편소설과 아마추어리즘을 노출하는 시집 중심으로 변화했다. 이런 과정에서 문학은 피할 수 없이 문화산업의 구조 안에 편입되어 갔다.

    문학은 숨 거두지 않았다



    문화산업의 팽창과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으로 인한 문학의 주변화,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문학의 죽음’이라는 풍문은 90년대 내내 문학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자극했다. 하지만 문학은 아직 숨을 거두지 않았다. 단지 다른 방식으로 숨쉬고 있을 뿐이다. 특히 상업주의 문제를 둘러싼 갖가지 추문들은 90년대 문학공간을 진창으로 만들기에 충분했으며, 시장의 논리가 확장되면서 상품경쟁력의 척도로 문학의 크기가 평가되는 상황이 빚어졌다. 여기에서 상품미학의 척도와 대결하는 진지한 문학적 실천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고립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시대를 주도했던 정치적 상상력의 문학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한국현대문학의 주류적 특성인 문학에 대한 정치적 소명과 계몽담론의 요구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문학의 추진력이던 정치적 전위와 미학적 전위는 위축되었다. 특히 정치적 전위를 표방한 문학운동은 그 정점에서 불과 몇 년을 견디지 못했다. 더는 폭로할 것도 분노할 것도 없는 세계, 낯선 정보사회적 환경과 자본주의적 일상성의 비속함 가운데서, 문학은 스스로 존재 위치를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서 90년대 문학의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 낯선 문화적 상황에서 문학은 자신의 미학적 자율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집단의 이념에 가려져 있던 개인적 삶의 영역이 새롭게 부각되었다. 공적인 명분을 내세우는 대신, 문학은 개인의 실존적·문화적 경험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이 다원화한 사회에서 개인의 사적 영역에 관한 관심이 새로운 문학적 탐구의 영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90년대 문학공간에는 사적인 생활세계와 문화적 삶의 문제와 관련된 새로운 주제들이 떠올랐다. 내면성의 재인식, 여성주의와 섹슈얼리티, 도시적 일상성의 탐구, 대중문화와의 접속, 디지털 환경과 사이버 세계, 몸의 시학, 생태학적 상상력 같은 다채로운 테마들은 이전 시대에 볼 수 없었던 세계 인식의 다원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주제와 소재의 다양성이라는 차원을 넘어 문학적 인식 대상과 관계의 다원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내면’과 ‘일상’ ‘영상문화의 매혹’ ‘여성성’ 등이 90년대 문학의 중심부에서 키워드로 작동한다.

    ‘사생활의 발견’에서 ‘생활의 정치학’으로

    왼쪽부터 소설가 신경숙, 윤대녕, 성석제

    ‘내면’ 혹은 ‘일상’에 대한 탐구는 근본적으로 새로울 것도 없는 테마다. 근대문학이 기본적으로 ‘내면적 인간의 형식’이라고 한다면, 90년대에 와서 왜 갑자기 내면성의 미학이 부각된 것일까? 80년대 이전 한국문학에서 계몽에 대한 요청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내면성의 문학’이 주류로 부각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연장선에서 ‘역사’와 ‘집단적 이념’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일상’을 탐구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개인의 일상세계에 대한 미시적 접근이라는 주제 역시 그러하다.

    이런 상황에서 90년대 문학은 전통적인 리얼리즘 미학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다. 문학이 객관적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반영론’의 가치에 대해 야유하기 시작했고, 리얼리즘의 규범에 대한 반란이 새로운 문학적 모토가 되기도 했다. ‘실재/반영’의 도식을 해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논리와 맞물리면서 리얼리즘이 아니라 ‘낯선 리얼리티’가 새로운 문학적 관심사가 되었다. 미학 이데올로기와 문학운동 형태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생활세계의 내부에 대한 현실적인 시선에 의해 포착되는 리얼리티의 문제가 현안이 된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서사성의 약화도 지적 대상이다. 소설에서 서사적 구조의 해체와 더불어 이미지와 기호의 유희가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90년대 소비생활의 심미화와 디지털 세계의 확대, 그 안에서 미디어가 생산하는 무한복제의 이미지들은 재현의 코드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이 이미지의 제국 안에서 소설은 이미지의 매혹을 위해 기꺼이 서사적 인과성의 원리를 희생시키기도 했다.

    90년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여성성’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시기다. 여기에는 몇 가지 문화적 조건이 관여한다. 기존의 변혁이념이 다원화되는 자리에서 여성주의와 성 정치학 이론이 진보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진보와 보수의 전선은 단지 ‘좌우’의 문제가 아닌 문화적 지형 속에 형성되었고, 페미니즘은 기존의 전선을 해체하는 새로운 급진성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또 다른 측면에서 문학제도권과 독서시장에서 여성작가와 여성독자층이 두터워졌다. 물론 이것은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변화에 맞물린 여성의 사회적 문화적 성장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한번도 ‘주류’가 된 적이 없는 여성적인 주제와 여성적 시선, 혹은 여성적 미학이 문학사의 전면에 부각된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여성문학이 리얼리즘의 후퇴를 가져왔다는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여성독자들의 기호에 영합하는 사소설적 경향이 지배적인 상업성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여성작가들의 소설이 평면적인 여성성의 미학을 반복하고 불륜 소설의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문제의식의 날카로움을 보여주지 못한 측면도 있다. 또한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여성문학가 내부에서 상호 이견과 비판도 표출되었다. 문제는 여성성이라는 개념이 단일한 미학적 전술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서 출발한다. 90년대를 통해, ‘언어미학으로서의 여성성’과 ‘정치의식으로서의 여성주의’는 하나의 작품에서 행복하게 만난 적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90년대 새로운 여성문학의 탐색은 ‘성숙한 남성의 형식’으로서의 주류 서사문학을 낯설게 만들었으며, 일상세계의 정치학에 대한 새로운 문학적 탐구의 차원을 열어놓고 있다.

    영예이자 부담인 신세대 문학

    ‘세대론’은 10년 단위의 시대구분론과 함께 한국문학사의 맥락을 설명하는 익숙한 설명 방식이다. ‘신세대 문학론’은 문학사의 전환기에 출몰하는 일종의 유령일지도 모른다. 그 유령을 보는 시선은 다분히 이중적이다. 문화적인 층위에서 본다면 이 용어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거부감과 우려를 담고 있는 동시에, 새로운 문화생산자·문화소비자이며, 그 자체로 문화상품인 집단에 대한 매혹을 담고 있다. 거부감에는 다소 윤리적인 면이, 매혹에는 저널리즘과 문화산업의 논리가 스며 있다. 한쪽에서는 그들의 ‘가벼움’을 문제로 제기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 새로움과 전환의 논리를 긍정적으로 내세운다. ‘신세대 문학’이라는 명명은 그래서 부담스러운 영예인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는 오명이다.

    90년대 초반에 등장한 ‘신세대 문학론’ 역시 뚜렷한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일군의 젊은 작가들이 80년대에는 나타나지 않은 성향의 문학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저널리즘에 의해 ‘신세대 작가’로 명명된 일군의 작가들 작품에서 집단적 문학적 동일성을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개념이 출현한 것은 그들이 80년대 문학과는 다른 어떤 문학을 ‘따로 또 같이’ 보여준 것처럼 인식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정치과잉의 시대였던 ‘80년대’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적 요청과 마주하던 세대다. 이들 중 80년대 후반부터 활동한 세대들은 여전히 ‘80년대의 기억’을 중요한 문학적 관심으로 삼아 이른바 ‘운동권 후일담’ 문학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세대적 새로움을 보여준 것은 영상대중매체에 밀착되어 성장한 경험을 갖고 있는, 90년대 이후에 등장한 작가들이다. 초기 신세대 문학론은 박상우, 구효서, 이순원, 공지영, 김소진, 김인숙, 이인화 등이 대상이지만, 실제 90년대 중반 이후 문학적 평가를 받은 것은 신경숙과 윤대녕, 성석제이며, 더 선명한 세대적 차별성을 선보인 것은 백민석과 배수아 그리고 김영하, 박성원, 김연수 등이다.

    ‘사생활의 발견’에서 ‘생활의 정치학’으로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소설가 김영하, 백민석, 은희경, 배수아

    가령,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1993)와 윤대녕의 ‘은어낚시 통신’(1995)이 억압되었던 한국문학의 내향적 미학을 현실화했고, 그 연장 위에서 또 하나의 가능성은 배수아의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1995), 백민석의 ‘헤이, 우리 소풍간다’(1995)로 그 징후를 드러냈으며, 성석제의 ‘새가 되었네’(1996) 김영하의 ‘호출’(1997)에 와서 선명한 미학적 차별성의 공간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가설을 세워보자.

    이 가설은 주관적인 것이며, 편향된 것이기도 하다.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90년대 문학의 동력 중 하나는, 이미 알려진 것처럼 개인성 혹은 개인적 삶의 공간에 대한 문학적 탐구와 관련된다.

    문제는 90년대 문학이 모두 개인성의 실재를 주창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90년대 문학은 개인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그것을 해체했다. 개인적 공간에 대한 발견은 동시에 그 공간의 부재에 대한 회의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신경숙과 윤대녕이 보여준 자기 기원에 대한 탐사는 90년대 문학에 하나의 단초를 마련했다고 알려져 있다. 서간체와 자기 반영적 글쓰기 등의 형식으로 표출되는 신경숙의 일인칭 고백체가 가지는 문학사적 의미 역시 실존적 기원을 찾아가는 내면성의 지향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돼왔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내면성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기보다는, 그 언어화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문학이며, 개인의 실존적 윤리학을 탐구하는 문학이다.

    그 고백적 인간이 보편적인 가족주의를 수락함으로써, 신경숙 소설은 정신적 성숙을 보여주는 동시에 근대적 의미의 인간 윤리학으로 귀환한다. 이를테면 고백적 자아와 낭만적 자아로 요약될 수 있는, 신경숙과 윤대녕 소설 속의 인간형들은, 집단적 주체를 대변하고자 하던 80년대 소설의 지배적 경향과 차별되는 지점에서 ‘안으로의 시선’을 드러낸다. 물론 이와 같은 경향이 90년대 여성소설의 주류로 부각되면서, 그 이후 다른 여성작가들에게도 인물의 스테레오 타입과 화법의 단성적·독백적 경향을 낳았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등단하여 세대론에 편입되지 못한 은희경은 90년대적인 여성소설의 주제를 자신의 개성 안에서 확대시켜 나가면서 많은 독자들을 확보했다. 은희경은 내면성의 지향과는 반대편에서, 사랑과 로맨스를 탈낭만화하여 연애와 결혼과 가족, 그리고 성장을 둘러싼 생의 비루함을 거침없고 날카로운 입담으로 풀어냈다.

    조금 다른 자리에서, 백민석과 배수아는 자기성찰적 태도를 과감하게 던져버림으로써 새로운 세대의 미성년적이고 반사회적인 자아의 존재론을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제도적 훈육을 거부하고 생에 관한 스타일의 반란을 도모하는 불온한 아이들의 육성이 등장한다. 이들의 과격한 허무주의는 새로운 세대의 가망 없는 나르시시즘과 문화적 저항의 표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두 작가의 급진성은 그것이 체험적 혹은 생래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작가는 문학제도 안의 규범적인 미학으로부터 탈주하면서, 그로테스크한 악몽의 미학과 잡종적인 차원의 새로운 여성적 언술로 자기 문학을 확대해나가면서, 그 전위의 문법을 지켜나간다.

    성석제와 김영하는 고백하는 존재로서의 작가 개념을 넘어서 직업적인 이야기꾼의 면모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이들의 소설에서 작가와 등장인물 그리고 서술자 사이의 연계성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두 작가에게서 우리는 ‘극화(劇化)된 화자’와 혹은 숨은 ‘구연가’로서의 서술자라는 면모를 여실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계몽과 고백의 문법 틈새에서 새로운 화법을 실험했다는 맥락에서 의미 있다.

    성석제는 한국문학에서 잊혀진 구연적 전통을 되살려 비루한 남성 영웅의 서사를 풍성한 유머와 위트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생의 아이러니를 포착하는 페이소스를 선사한다. 그는 여성적 화법이 지배적인 90년대 한국문학에서 가장 선명한 개성 하나를 보여주었다. 김영하는 새로운 문화적 상황과 코드를 소설화했는데, 이것은 하위적이고 주변적인 장르들과의 접속을 통해 소설 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소설 언술 자체의 새로움을 지향하는 문학적 움직임은 박성원, 김연수 등 젊은 세대의 문화적 감각과 결합하면서 소설과 현실과 텍스트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질문으로 확대되었다.

    ‘사생활의 발견’에서 ‘생활의 정치학’으로

    왼쪽부터 시인 장정일, 유하, 장석남

    90년대를 풍미했던 ‘문학의 죽음’이라는 풍문은 ‘시의 죽음’이라는 풍문을 거느렸다. 문학시장이 문화산업의 구조 안에 들어가면서, 이른바 ‘본격 문학’의 공간에서 소통되는 시들은 시장과 저널리즘의 관심으로부터 주변으로 밀려나게 됐다. 그런데 시는 오히려 이런 자기부정의 상황을 통해 장르에 대한 자의식을 심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이 문화적 주변성의 자리에서 시는 ‘시란 무엇인가’를 다시 근원적으로 질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90년대 시의 공간에는 죽음과 소멸의 미학, 도시적 일상성의 탐구, 대중문화와의 접속, 디지털 환경과 사이버 세계, 몸의 시학, 여성주의와 섹슈얼리티, 생태학적 상상력, 정신주의의 세계 등 다채로운 테마들이 등장하여 시적 인식의 다원화를 가져왔다.

    이 다원화한 공간에서 새로운 세대의 시인들이 등장했다. 우선 두드러진 것은 도시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세대의 시다. 대중문화를 자양분으로 성장한 이들은 사회이념적 관심을 축소하고 자본주의적 일상의 이미지들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소비사회의 갖가지 문화적 영역들이 시의 소재로 등장했다. 이들은 대중문화적 매혹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 주체의 정체성 혼란과 소외를 표현한다. 장정일, 유하, 함성호, 장경린, 함민복 같은 시인들은 현란한 자본주의적 스펙터클 뒤의 무의미와 공허와 혼돈을 노래했다. 이들에게 대중소비사회는 비판과 반성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실존의 자리이자, 강력한 매혹의 대상이다. 이들의 시적 문법은 서정시가 지닌 전통적인 절제의 미학을 파기하고 자본주의적 욕망의 과잉과 분출을 표현하는 산문적 진술과 요설의 어법을 선택한다.

    소비사회적 현실과 관련된 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시의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시인은 장정일이다. 그는 소비사회의 제도적 지배와 사물화를 문제삼고 있으며, 거기에서 가짜 낙원의 매혹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의 상상력은 80년대의 전위적인 시인들보다 경쾌한 것인데, 이는 소비사회를 사는 삶의 생태와 리듬이 그의 시 속에 육화되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세대의 도시적 감각을 대중문화적 상상력으로 확대한 시인은 유하다. 첫 시집 ‘무림일기’에서 그는 무협지라는 하위문화적인 장르를 패러디하여 정치현실을 풍자한다. 두번째 시집인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압구정동’이라는 공간은 자본주의적 스펙터클이 전시되는 장소다. 시인은 여기서 세속 도시의 욕망이 자아내는 풍경을 반성적으로 인식한다. 그는 거리의 풍경 안에 들어 있는 욕망의 만화경을 이미지의 연상을 통해 펼쳐 보인다. 이어지는 시집들을 통해 그는 ‘세운상가’와 ‘경마장’이라는 또 다른 도시적 공간을 탐사한다. 유하의 시적 자아는 소비사회의 매혹과 환멸을 ‘훔쳐보는’ ‘반성적인 산책자’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서정시의 전통을 도시의 공간에서 현대화하는 작업도 이어갔다. 장석남은 전통 서정시의 새로운 해석에서 섬세한 감각을 보여준 시인이다.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은 새로운 세대에 의해 심화된 서정적 언어를 보여준다. 그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정서를 더욱 감각적인 언어로 다듬어, 원초적인 자리로 귀환하려는 마음의 움직임을 섬세한 언어적 화음으로 빚어낸다. 이윤학의 시들은 폐허의 이미지로 뒤덮인 버려진 변두리의 공간에서 삶의 쓸쓸함과 비애를 직관하는 시적 묘사를 보여준다. 그의 시에서 생은 폐허 그 자체이거나 폐허를 건너가는 시간일 뿐이다. 이윤학의 소멸과 폐허의 풍경들은 생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응시의 공간이 된다.

    이런 서정시의 현대적 변용과는 조금 다른 층위에서, 시적 자아를 탈인간화 혹은 탈주체화하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작업을 만나게 된다. 꿈의 자리에 현실을 채워 넣으며, 그 안에서 몸의 포복을 통해 독특한 몸의 시학을 그려낸 채호기, 죽음의 상상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서 세계에 대한 묵시록적 상상력을 건조한 시 언어로 드러낸 남진우, 시적 언술의 현실적·의미론적 연관을 파괴함으로써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을 선보인 박상순의 시들은, 자기 문법의 탐색이라는 측면에서 선명한 문학적 개성을 성취하고 있다.

    ‘사생활의 발견’에서 ‘생활의 정치학’으로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시인 김혜순, 최정례, 나희덕, 허수경

    여성시인들의 문학적 성장은 90년대 시 공간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여성적 존재의 감각을 세밀하게 드러내주는 여성 시인들의 활동은 90년대 시를 풍요롭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새로운 여성적 시학은 서정시의 전통을 여성적 서정성을 통해 풍부하게 하거나 전복적인 여성적 상상력과 탈중심화된 언술 방식을 드러내주었다. 김혜순은 여성적 상상의 공간을 주술적인 어법과 여성적인 시선을 통해 드러내줌으로써 90년대 들어와서 더욱 괄목할만한 시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남성적 시선이 아닌, 여성적 존재의 관점에서 세계와 사물을 인식하는 여성 시인들의 작업은, 문화적인 층위에서의 전위적인 의미를 함유하는 것이다.

    최정례의 시는 허위와 허무를 감추고 있는 일상의 시간들을 냉정하게 들여다본다. 그의 시에서 지리멸렬한 일상은 그 안에 날카로운 아픔과 생의 모순을 숨기고 있다. 시인은 절제되고 투명한 언어를 통해 일상의 조각들을 재구성함으로써 틈새의 또 다른 삶의 진실을 암시한다. 그래서 기억의 흔적과 일상적 시간은 낯설고 불길한 것으로 묘사된다.

    허수경은 토착적인 정서와 가락으로 세간의 고통을 감싸안은 감성을 보여준 시인이다. ‘혼자 가는 먼 집’에서의 그의 시는 숙성한 여성적 감수성의 경지를 드러낸다. 허수경 시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세속적 삶의 남루와 비애를 끌어안는 ‘통속적인’ 가락인데, 이것은 삶의 질곡과 타자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모성적 감수성으로 표현된다. 나희덕은 마음의 미묘한 색채와 사물의 빛깔들을 관찰하는 시인이다. 나희덕의 서정성은 주관적 감정으로 사물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사물에 관한 성찰적 시선과 자기발견의 시학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모성적인 감성을 바탕으로 한 연민이 정서적 주조를 이룬다. 시인은 삶의 본질적인 어둠을 응시하면서도 그 안에서 여러 겹의 마음을 읽어내고 삶의 깊은 의미들을 찾아낸다.

    젊은 시인 이원은 여성적인 상상력과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탈인간주의적 시선으로 사물과 공간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가시적으로 묘사한다. 그의 시에서 사물들은 인간 주체의 관점에서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물질적 공간에서 그 존재성을 드러냄으로써 주체가 된다. 여기서 우리 시대의 상황은 물질적인 상상력과 전자적인 이미지에 의해 묘사된다. 이 물질적 상상력은 디지털 공간과 전자사막에서의 유목민이라는 주제로 나아간다. 이것은 90년대 시가 새로운 문화적 상황과 만나는 징후라고 볼 수 있다.

    화법의 전복, 새 문학의 시작

    만약 ‘90년대 문학’이라는 개념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용인할 수밖에 없다면, ‘2000년대 문학’이라는 명명 역시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명명은 ‘80년대/ 90년대’의 단절론을 반복하면서 앞 세대를 캄캄한 과거 속으로 밀어넣는 세대론 전략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90년대와 선명하게 구별되는 연대로서의 2000년대는 아직 우리에게 그 문화적 표지를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90년대 문학의 작업을 섬세하게 읽어주는 독법, 그리고 그로부터 ‘시작’된 미학적 주제들을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하려는 시도가 중요하다. 그것은 90년대라는 ‘기억’을 현재화하는 일이며, 그 기억의 시간을 ‘새롭게 사는’ 일이다.

    나는 이 글에서 90년대 이후의 문학을 ‘사생활의 발견’이라는 개념으로 호명했다. 그런데 이 ‘발견’의 미학은 나름의 한계를 갖는 것이다. 가령, 90년대 문학이 과연 사생활을 일차원적으로 드러내는 차원을 넘어서, 사생활의 ‘정치학’을 적극적으로 탐구했다고 볼 수 있을까? 일상적 삶의 세부가 어떻게 사회적 힘들의 자장 속에 놓여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90년대 문학의 하나의 가능성이었다면, 90년대 문학은 그 가능성을 얼마만큼 적극적으로 실현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니까 사생활의 발견을 생활세계의 정치학으로 밀고 나가는 작업이 이제 겨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선은 새로운 문법과 언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미학적 징후들은 이미 실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령 젊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화법의 범주에서의 전복은 한국문학사의 그 어떤 내용주의적 전환보다 근원적인 전환에 가까운 것이다. 90년대 문학 이후 한국문학에 나타난 ‘개인의 목소리’는 타자를 배제한 독백이 아니라, ‘타자가 말하게 하는’ 공간을 구현함으로써 새로운 대화 관계를 구성한다. 우리가 이 낯선 문학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공적인 담론의 억압 아래 오래 침묵하던 사사로운 인간의 언어다. 그 언어는 공동체와 집단의 언어가 아니라 철저히 사적인 영역의 개인 언어다. 그것들은 국가와 가족이라는 제도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적인 욕망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런 개인화한 주체를 통해 한국문학은 집단의 언어가 보여주지 못한 미학적인 반란과 새로운 욕망의 전선을 모색하고 있다. 그곳에서 ‘사생활의 발견 이후’의 문학을 예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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