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로호 발사 성공 2주일 뒤인 2월 12일, 서울에서 다시 만난 조광래 항공우주연구원(이하 항우연) 나로호발사추진단장은 여전히 ‘나로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0년 넘게 나로호 발사의 총책임을 맡았던 조 단장은 한결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지만 마음고생은 쉽게 사라질 문제가 아니었다.
2010년 2차 발사가 실패로 돌아간 뒤 조 단장은 갑자기 심장이 거칠게 뛰거나 숨이 가빠지는 일이 잦았다. 신경정신과에서 공황장애 진단을 받아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과거 국내 주요 위성의 제작 책임자들도 비슷한 증상을 보인 적이 있다고 한다.
“발사하던 날은 바빠서 잊어버렸지만 발사 성공한 뒤로는 꾸준히 약을 먹고 있어요. 의사가 약에 중독될 염려는 없다고 하는데….”
사람 좋은 웃음 뒤로 54세 ‘한창 나이’가 무색하도록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가 눈에 띈다. 로켓 연구에 몸 바친 25년을 빛내주는 훈장처럼 보였다.
훈장으로 남은 흰머리

조광래 나로호발사추진단장.
새로운 변화를 기다리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한국과 러시아 연구진, 취재진, 수많은 관람객으로 북적거리던 나로우주센터는 원래의 어촌 마을로 되돌아간 듯 고요하다. 또 한 번의 비상을 위해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로우주센터는 전남 고흥군 봉래면 예내리 외나로도에 있다. ‘나로’라는 이름도 마을 명칭에서 비롯한 것이다. 외나로도는 우주센터 최종 후보지로 발표될 당시 52가구 73명이 사는 자그마한 어촌 마을이었다.
김민현 항우연 시설운영팀장은 조용한 섬 외나로도에 처음 내려온 2003년을 기억한다. 우주센터 건설기술그룹장이던 그는 직원 10명과 외나로도에 가설 사무소를 짓고 터를 닦기 시작했다. 산을 밀고 길을 낸 토목공사, 시설공사, 발사통제동·종합조립동 건설 등 지금의 나로우주센터를 완성하기까지 어느 것 하나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야말로 나로우주센터의 산 증인인 셈이다.
“당시 늦둥이 아들의 유치원 재롱잔치를 못 가서 핀잔을 많이 들었어요. 이제 봄이 되면 그 녀석이 고등학교에 들어간다고 하니 시간이 참 많이 흘렀지요.”
강산이 바뀔 만한 시간이 지난 후 외나로도는 한국 우주개발의 전진 기지로 거듭났다. 항우연은 센터 방문객이 올해 안에 1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내다봤다.
앞으로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날 곳은 로켓을 쏘아 올리는 발사대 시스템이다. 해발 390m인 마치산의 허리를 잘라 평지로 만든 뒤 그 아래에 지하 3층 규모의 발사대 설비를 채우고 그 위에 발사대를 세웠다. 한국형 발사체를 쏘아 올리려면 또 한 번의 큰 변화가 필요하다. 발사대를 새로 설계해야 한다. 한국형 발사체는 1.5t짜리 위성을 쏘기 위한 것으로 높이가 47.5m에 달한다. 100kg짜리 위성을 쏘아 올린 나로호가 33.5m인 것과 비교하면 14m나 더 높다. 아직 발사대 업그레이드 방안을 확정하진 않았지만, 나로호 발사대 옆에 더 큰 규모의 발사대를 세울 것으로 보인다.
나로우주센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숨은 포인트가 하나 있다. 해안선을 따라 발사대로 가는 길 오른편에는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망향비(望鄕碑)다.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지내던 주민을 이주시키면서 그들의 애환을 달래고자 세운 것이다. 언젠가 이곳을 박차고 먼 우주로 날아갈 발사체와 위성에도 이 망향비의 의미는 새롭다. 10년 넘게 드나들며 제2의 고향이 돼버린 연구원에게도 망향비는 향수의 표지로 기억될 것이다.
역사는 미래를 보는 창이라고 했던가. 10여 년에 걸친 나로호 개발 사업은 한국 우주개발 계획에 다양한 시사점을 제공했다. 가장 절절하게 깨달은 사실은 기술 선진국의 텃세와 견제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조광래 단장은 2004년 12월 러시아 측의 은밀한 제안을 생생히 기억한다. 항우연이 러시아 우주기업 흐루니체프와 1단 로켓과 발사대 시스템 등의 기술협력 계약을 체결한 직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