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발로 뛰며 가슴으로 쓴 ‘위장취업자’ 기사

  • 유시춘 (작가·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입력2005-03-21 16: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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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5년 전 서울의 봄을 짓밟고 권력을 강탈한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과 반민주성을 향한 젊은 양심들의 저항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해 5월, 서울의 미국문화원을 기습 점거한 삼민투 대학생들은 군부정권이 저지른 동족학살을 세계를 향해 알렸으며, 유령처럼 떠돌던 ‘광주사태’는 ‘유비통신’의 울밖을 넘어 공공연히 국민에게 회자됐다.

    대학가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시위로 몸살을 앓았고, 학생들은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감옥으로 행진해 갔다. 감옥은 이들 양심범으로 넘쳐났고 정부는 문교부를 앞세워 학원안정이라는 구실로 ‘학원안정법’을 제정, 눈엣가시와 같은 저항분자들을 격리 수용하려는 의도를 노골화했다.

    저항세력들은 결사항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그해 여름을 온통 ‘재야의 메카’로 불리던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농성과 집회로 보냈다. 학원안정법제정반대 공동대책위 등 몇몇 ‘공대위’의 성명서 발표와 각 단체간의 연대활동으로 소란한 와중에도 밤이면 사무실 귀퉁이에 뒹구는 시사잡지에 눈을 돌리곤 했는데, 그때 읽은 신동아 기사를 잊을 수 없다.

    당시 신문지상에 출몰하던 생소한 단어가 있었으니 ‘위장취업’이 바로 그것이다.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대기업의 노동자들에게도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은 그림에 떡이나 다름없었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내 사전에 노조란 없다”고 공언하는 ‘회장님’들의 노사관도 그러려니와, 5공치하 우리 언론의 현주소는 또 어떠했던가.



    부도덕한 정권과 야합해 사세를 확장하고 이윤을 챙기기에 급급했던 그들은 사회적 공기로서의 ‘언론’이 아니라 ‘십전짜리 한 닢을 보고 한양에서 개성까지 달리기를 마다 않는’ 장사꾼에 불과했다. 그들은 ‘진통하는 대학가’, ‘대학가의 음영’ 등등의 기획시리즈를 통해 학생운동에 붉은 페인트를 칠했으며, 노·학 연대를 공산주의의 마각으로 매도했다.

    그런 즈음에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사분규가 합법적으로 타결되는 현장은 여러 가지 면에서 충격적이었다. 한국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재벌총수와 마주앉아 협상하는 노조대표는 대학생 신분으로 노동현장에 취업한 20대 청년이었던 것이다.

    ‘위장취업자’. 관제언론은 그들을 이렇게 불렀다. 정권타도를 목적으로 순진한 ‘근로자’에게 좌경의식을 불어넣어 노조결성을 통해 사회불안을 야기하고자 한다는 군사정권의 매도를 앵무새처럼 되뇌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한 선배는 대학신문의 지면에다 이렇게 일갈할 지경이었다.

    “관제언론이여, 그대 이름 창녀이니 가랑이를 벌리는 만큼 얻으리라.”

    이런 때에 신동아의 젊은 기자가 당시 언론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이들 위장취업자의 삶과 진실을 따라가며 발로 쓴 기사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지식인 노동운동의 현장’ ‘노동현장에 뛰어든 여대생’ 등의 기사는 꼼꼼히 읽어보면 발로 쓴 기사를 넘어 기자가 가슴으로 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권인숙, 조영래, 박종철…

    필자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그 기사를 읽고서 큰 감동을 받았다. 일당 2000원 안팎의 저임금에 100원짜리 마른 빵으로 밤참을 때우는 여성 봉제공 노동자의 현실에 적응해 가는 ‘위장취업’ 여성의 헌신은 무난히 대학을 졸업하고 따순 방에서 기름진 밥을 먹으며 ‘글 씁네’하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새벽별을 쳐다보며 살을 에는 칼바람을 마시면서 공장으로 출근하는 한 여자 대학생의 독백은 그대로 내 가슴에 화살되어 박혔다.

    “산다는 것은 엄혹하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운동이다. 이를 전제로 하지 않은 삶은 무의미하다.”

    이들 위장취업자가 우리 사회 중심부를 뒤흔든 사건이 곧이어 일어났다. 1986년 여름에 일어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그것이다.

    지방 소도시의 꿈나무였던 서울대생 권인숙은 영세한 노동현장에 취업해 있다가 적발당해 구속된다. 그녀는 깊은 번민끝에 군사정권의 하수인인 더러운 고문자와 함께 한 ‘짐승의 시간’을 증언한다. 당대의 빛나는 인권변호사 군단으로 구성된 변호인단을 대표해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얼굴없는 권양을 위한 변론’은 시대의 명문으로 남았다.

    이를 계기로 저항세력은 그동안의 여러 작은 차이를 극복하고 대동단결해 군사독재와 대치하는 단일대오를 형성했다.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박종철군 고문살해사건이 일어나고 주지하다시피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불길이 타오른다.

    소시민인 나를 그토록 부끄럽게 했던 그 ‘위장취업자’들은 이제 없다. 노동자들은 그 이후의 열린 공간에서 ‘학출’의 도움없이도 스스로 노조를 결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민주노총이라는 최대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권인숙을 변론했던 조영래 변호사는 요절하고 없지만 그가 쓴 ‘전태일 평전’은 이제 저자를 밝혀 출간되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순결한 피땀과 영혼의 자갈길을 구르면서 더디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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