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 이후 주한미군은 지속적으로 병력을 감축해왔다. 미국은 마지막 주한미군인 2사단의 철수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 미국의 大戰略 속에서 한국의 국가전략을 원활히 운용하려면, 한국은 모든 작전부대를 한미연합사에 배속시키지 말아야 한다. 한국군은 합참이 전·평시 작전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부대를 갖고 있어야 한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수복한 후 한미 양국군 병사가 악수하고 있다. 6·25전쟁을 계기로 한미 양국은 견고한 군사동맹 관계에 돌입했다.
반미주의는 친미주의만큼이나 감정에 기인하는 측면이 많다. 반미주의를 외치는 사람 중 상당수는 여중생 압사사건과 관련, ‘사고 직후 미 2사단장이 사과하고 2사단에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를 세웠고, 피해자 가족에 대해 보상을 약속했으며, 군사작전과 훈련 중에는 사고가 일어나도 작전과 훈련을 중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에게 주한미군은 무엇인가. 한국과 미군은 어떻게 만났고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가. 반미주의 파고로 인해 새삼 관심이 높아진 주한미군의 모든 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서울에 주둔한 미군을 미8군이라고 한다. 왜 8군인가? 한국 육군에 1군·2군·3군이 있으니, 미국 육군에도 1군에서 8군까지 있는 것인가.
오래 전부터 외신은 미국 육군은 사단을 12개에서 10개로 줄였다고 보도해왔다. 49개 사단을 가진 한국에 3개 군이 있는데, 10개 사단밖에 없는 미국에 어떻게 8개 군 이상이 있겠는가. 이러한 의문을 풀려면 미 8군이 서울에 자리잡게 된 과정을 통시적으로 추적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왜 미8군이 서울에 주둔하는가
미8군은 2차대전 말기인 1944년 6월10일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창설되었다. 미8군이 한국과 간접적으로나마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일본이 항복한 1945년이었다. 미8군이 창설되기 직전인 1944년 6월6일 유럽전선의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독일군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잡았다.
이 상륙작전을 위해 연합군은 미 육군 1군·영국 육군 2군·캐나다 육군 1군 등 3개 야전군 60만명을 투입해 독일 침공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상륙작전 과정에서만 8975명의 사망자와 5만179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로부터 10개월 후인 1945년 4월, 태평양의 연합군은 오키나와를 점령한 후 노르망디의 상륙작전과 비슷한 일본본토 상륙작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참고삼아 대략 60만 병력을 동원해야 성공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를 위해 미 육군의 6군과 8군 그리고 24군단 등 태평양 전선에서 싸워온 전 육군을 동원키로 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은 50세 이하 남성은 모두 출정하는 ‘국민 총동원령’을 내려 700만 대군으로 결사 항전한다고 선언했다. 상륙작전에 성공하더라도 이들을 굴복시켜 항복을 받아내려면 연합군에서도 상당한 희생자가 발생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예상보다 빨랐던 일본의 항복
‘희생자가 너무 많을 것’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미국은 두 가지 방안을 선택했다. 연합국의 일원이면서도 중립조약을 맺어 일본과 싸우지 않고 있던 소련을 설득해, 남(미국)과 북(소련)에서 동시에 공격해 들어가자는 것이 첫째 방안이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에 성공해 북상할 때 북쪽의 소련군도 독일군을 궤멸시키며 남진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독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둘째는 ‘공포의 무기’인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의 항복을 유도한다는 것. 원자폭탄을 맞고 일본이 바로 항복한다면 미군은 수만명의 젊은 목숨을 아낄 수 있다. 미국은 일본의 조기 항복을 끌어내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일본은 (원폭 투하) 9일 만에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군이 유황도나 사이판, 오키나와에서처럼 결사적으로 저항하리라고 예상했던 미국은 너무 빠른 일본의 항복에 오히려 당혹스러울 지경이 되었다.
이 시기 미군은 오키나와에 머물며 원폭을 맞은 일본이 어쩌는가 지켜보고 있었는데, 원폭이 없는 소련군은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만주에 병력을 투입했다. 그 결과 일본이 항복하는 순간 미군보다 훨씬 더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따라서 소련군이 먼저 일본을 점령한다면 1941년부터 일본과 싸워 온 미국은 ‘닭 쫓던 개’가 된다. 당황한 미국은 ‘소련군은 혼슈(本州)는 물론이고 홋카이도(北海道)로도 상륙하지 말라. 한반도에서는 38선 이남으로 내려오지 말라’고 요구했다. 미국이 개발한 원폭의 힘을 의식한 소련은 이에 순응했다.
엄포가 먹힌 덕분에 미군은 일본과 38선 이남의 한반도에 진주할 수 있었다. 미군은 6군과 8군을 일본에 상륙시키고, 하지 중장이 이끄는 24군단은 한반도에 상륙시켰다.
그 직후 미군은 한 가지 미묘한 문제에 봉착했다. 미군은 두 개의 통합군사령부로 태평양전쟁을 치렀는데, 맥아더 원수가 지휘한 남서태평양군사령부와 니미츠 원수가 통솔한 태평양군사령부가 그것이었다. 이 두 사령부 중 어느 쪽이 일본을 점령해 군정(軍政)을 펼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친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부를 선택했다.
이로써 호주에 본부를 두고 있던 남서태평양군사령부가 도쿄(東京) 부근의 자마(座間)로 옮겨오며, 이름을 극동군사령부로 바꾸었다. 니미츠의 태평양군사령부는 원래 본부가 있던 하와이로 물러나게 되었다. 남한에 상륙한 24군단은 극동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1948년 미군과 소련군은 남북한에 각각 친미·친소 정부를 세우고 철수했다. 이 시기 미군은 2차대전 기간 동안 어머어마하게 커진 군대를 축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남한에서 철수한 24군단과 일본에서 빠져나온 6군은 곧바로 해체되고 일본에 남은 8군도 4개 사단 체제로 대폭 축소되었다.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없었다면 8군은 한국으로 올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예상치 못한 북한군의 공격은 한반도를 극동군 관할 구역으로 여겼던 철저한 ‘반공주의자’ 맥아더를 흥분시켰다. 당시 극동군은 육해공군 세력으로 8군·7함대·5공군을 갖고 있었는데, 맥아더는 기동성이 좋은 7함대와 5공군에 대해 6월26일 북한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한국전 상황을 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수원을 방문하고 돌아온 6월29일 미 합참에게 지상군 참전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음날 미 합참이 이를 승인하자 그는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24사단의 한 개 대대를 차출해 항공편으로 한국전장에 투입했다. 스미스 특수임무대로 불린 이 부대는 오산 전투에서 인민군 4사단에게 참패했다. 이어 24사단을 한국에 보냈는데, 24사단도 7월21일 대전 전투에서 참패하고 얼마 후 사단장인 딘 소장이 인민군에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이렇게 미군이 연패하자 맥아더는 8군사령관인 월턴 워커 중장을 주한미군사령관에 임명하고 7사단을 제외한 모든 지상군 부대에게 한국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7월7일 미국의 영향권에 있던 UN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유엔군 설치를 의결하며 그 임무를 미국 합참에 위임했다. 미 합참은 이를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에게 다시 위임함으로써, 맥아더는 미국 극동군사령관과 유엔군사령관을 겸하게 되었다. 유엔군 설치를 의결한 7월7일 주한미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대구에 8군 임시본부를 만들어 추가로 한국에 올 미 지상군 부대를 총괄 지휘하게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한국 육군은 8개 사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개전 3일 만에 3개 사단이 형체도 없이 무너졌다. 한국군의 지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인민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안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8군사령부가 대구로 옮겨온 다음날인 7월14일 맥아더에게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UN군에게 이양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로써 맥아더는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차후에 유엔군이란 이름으로 한국에 온 15개국(미군 제외) 군대를 통합 지휘하게 되었다.
7월14일 이대통령이 맥아더에게 보낸 편지는, 1978년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창설될 때까지 효력을 발휘해, 한국의 육해공군은 미 8군의 작전통제를 받게 되었다.
7사단을 제외한 모든 지상군 부대를 한국으로 이동시킨 맥아더는 소련군의 일본 침략을 염려했다. 그런데 7사단마저도 9월15일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한국으로 이동시킬 수밖에 없게 되자, 맥아더는 구 일본군 세력으로 하여금 자위대를 만들어 일본 방어를 담당케 했다. 평화헌법에 따라 군대 보유를 금지 당한 일본은 갑자기 터진 한국전쟁 덕분에 재무장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참담한 패주로 발목 잡힌 미군
이승만 대통령의 작전권 이양에 대해서는 ‘자주권을 포기한 작태’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세계사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나라가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강국에 작전권을 넘겨 대신 싸우게 한 경우가 많다.
1999년 유고가 알바니아계인 코소보에 대해 공격을 강화하자, 위기감을 느낀 알바니아는 NATO에 작전권을 넘기는 방법으로 생존을 모색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공격을 막아낼 방법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던 영국은, 1941년 8월14일 대서양에 있던 영국 구축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함에서 미-영 정상회담을 갖고, 미군이 연합군 최고사령관을 맡는 조건으로 미군 참전을 끌어낸 바 있다.
1950년 12월 압록-두만강까지 진격한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일패도지(一敗塗地)해 평양-서울을 내주고 한 순간에 안성-장호원 전선까지 후퇴했다(1·4후퇴). 두만강 부근부터 따진다면 직선 거리로 1000여㎞를 패주한 셈이다. 신생 한국군에게는 이러한 패배가 별것 아닐 수 있어도, 세계 최강을 자부해 온 미군에게는 엄청난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미 육군은 17세기에는 인디언과의 전쟁을 통해, 18세기에는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통해, 19세기에는 남북전쟁을 통해 발전해 왔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모두 이긴 기록을 갖고 있다. 미 육군 역사상 1000여㎞를 패주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6·25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은 3만6914명인데, 이중 상당수가 1·4후퇴 때 발생했다. 1·4후퇴로 인해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은 것은 워커 8군사령관과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이었다. 패주 와중인 1950년 12월28일, 워커 8군사령관은 의정부에서 지프 전복사고로 사망했다. 중공군의 참전에 흥분해 만주 핵폭격을 주장하던 맥아더 원수는 1951년 4월11일 극동군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맥아더는 미국 의회가 종신(終身)토록 원수 계급장을 달 수 있도록 승인한 장성인데 목이 날아간 것이다.
이 패주로 인해 미국은 ‘명분론’과 ‘모성론’이 정면으로 대립하는 위기를 맞았다. 명분론자들은 “미군은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군대니 이길 때까지 한반도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미국은 전쟁 불똥이 일본으로 튀는 것을 막기 위해 ‘예방적 차원’에서 가볍게 6·25전쟁에 개입했다. 그런데 1·4후퇴로 세계 최강의 체면을 구기게 됐으니 끝까지 싸우자는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명분론이 득세하면 일본을 지키기 위한 방패 정도로 인식됐던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는 크게 올라간다.
러시아는 현재 러시아연방에서 독립하려는 체첸의 의지를 꺾기 위해 체첸에 대규모 부대를 보내 놓고 있다. 그런데 체첸 전선에서 희생되는 젊은이가 늘어나자, 체첸 전선에 아들을 보낸 러시아의 어머니들이 ‘반전 데모’를 벌이고 있다. 자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 벌이는 전쟁인데도, 한쪽에서는 인간애에 근거해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1951년 1·4후퇴 이후의 미국에서도 “전쟁을 끝내라”는 모성론이 점점 커졌다.
아들을 희생하더라도 체면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론’과 체면은 포기해도 아들은 포기할 수 없다는 ‘모성론’의 대립으로 미국은 시끄러워졌다.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1952년 치러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는 ‘한국전 종식’을 공약으로 내세운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 외견상으로는 모성론이 승리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내치(內治)에는 등신이고 외치에는 귀신’이라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국제정세를 보는 데는 그만큼 뛰어난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전쟁 종식이 공식화되자 ‘외치의 귀신’은 기막힌 벼랑끝 전술을 들고 나왔다. “한국군 20개 사단을 현대화해주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야만 전쟁을 끝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유엔군에게 넘겨준 한국군 작전권을 환수해 한국군 단독으로 북진함으로써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정전회담을 무력화하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동두천에 있는 미 2사단을 방문해 미군장병으로부터 환영을 받는 부시 대통령 부부
이 조약 4조에는 ‘한국은 미국이 한국 영토와 그 주변에 미군을 배치하는 것을 허락하고, 미국은 이를 수락한다’는 문구가 있다(문구가 너무 복잡해 의역했다). 이로써 미국은 법적인 근거를 갖고 한국에 미군을 주둔시킬 수 있게 되었다.
1954년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한국과 미국간의 합의의사록’에 따라 군사원조를 실시하였다. 한국은 올림픽이 열린 1988년까지 미국의 군원계획(MAP: Military Assistant Program)에 따라 54억7000만달러를 무상원조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 정말로 한국은 돈이 없었다. 모든 것이 부숴졌으니 세금이 걷히지 않아, 전후 복구는 차치하고 공무원에게 월급을 주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 시기 미국이 MAP에 따라 무상으로 지원해준 돈은 한국 정부를 가동하는 국가예산으로도 활용되었다.
20개 사단 현대화도 실현되었다. 상비사단 20개 체제는 지금도 이어지는데 이를 병력으로 바꾸면 대략 60만명이 된다. ‘한국군=60만 대군’이라는 체제는 미국이 60만 한국군이 사용할 장비와 피복 등을 제공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인데, 지원이 끊긴 지금도 한국군은 대략 60만명 선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 시기 한국은 미국 돈으로 4년제 사관학교를 지었고, 장교들의 군사훈련도 미국 돈으로 치렀다. 모든 것을 미국에 의존했던 시기라 이때는 반미(反美)의 ‘반’자도 나오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한국은 20∼30년간 열심히 ‘미국화’를 시도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나라가 되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나라 중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미군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6·25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한국으로 이동해 있던 8군이 1955년 7월26일 서울 용산에 자리잡음으로써, ‘일본 자마’ 시대를 종식하고 ‘서울 용산’시대를 열었다.
1957년 7월1일 미군은 극동군사령부를 없애고, 일본을 태평양군사령부 관할지역으로 편입시켰다. 이에 따라 극동군 소속의 7함대와 5공군이 태평양군사령부 소속으로 옮아갔다. 그러나 한국으로 이동한 8군에는 극동군사령부가 하던 일(유엔군사령부 역할)을 맡겨 태평양군사령부 소속이 아닌 미 합참 직속의 독립사령부로 남겨놓았다.
극동군 폐지
미국은 왜 극동군을 없앴는가. 이는 미국 군사(軍史)를 살펴보면 쉽게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 미국은 태평양에 태평양군사령부 하나만 두고 있었다. 이때 미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필리핀이 미국의 자원을 받아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다.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퇴역한 맥아더는 신생 필리핀에 머물며 필리핀군 양성을 돕고 있었다.
그런데 1941년 12월7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같은 시각 친미정권이 들어서 있던 필리핀도 공격하였다. 이로써 맥아더는 현역 육군 대장으로 복귀해 미군-필리핀 연합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바탄 이라는 작은 섬으로 쫓겨가 결사항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맥아더를 아주 좋아했다. 바탄 섬에서 맥아더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직접 “호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의 직접 명령 때문에 맥아더는 호주로 후퇴했다.
이러한 맥아더를 예우하기 위해 미국은 니미츠가 이끄는 태평양군사령부 외에 맥아더가 지휘봉을 잡은 남서태평양군사령부를 만들었다. 남서태평양군사령부와 그 후신인 극동군사령부는 맥아더라는 거인을 위해 위인설관(爲人設官)된 조직이었으니, 맥아더가 물러난 다음에는 그 존재가치가 희석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냉전 체제이긴 하지만 한국전이 끝나 세계가 다시 평화무드로 접어들자 극동군사령부를 폐지한 것이다.
이후 미 합참 직속의 8군은 유엔군사령부와 주한미군사령부를 겸하면서 유사시 북한군을 상대로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작전계획(Operation Plan)을 만들게 되었다.
이 계획에 필요한 부대가 창설되었다. 물자 보급을 담당한 제7군수사령부를 창설하고 1959년에는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로 무장한 제4미사일사령부를 창설했다. 이어 적 전투기를 공격하기 위해 나이키와 호크 미사일을 갖춘 제38방공여단을 창설했다. 한국 육군은 이러한 미 8군을 어깨너머로 건너다보며 배웠다. 이 시기 한국은 가장 우수한 가정교사를 맞은 군대였다고 할 수 있다.
6·25전쟁이 끝난 후 한국에 왔던 미 육군 전투부대는, 1군단과 2사단·7사단을 남기고 모두 철수했다. 한국 육군은 1953년 12월15일 제1군을, 1954년 10월31일에는 제2군을 창설했다. 이후 미 8군은 1군단으로 하여금 2사단과 7사단, 한국 육군의 1군단과 5군단·6군단을 작전 통제하며 서울을 방어하는 서부전선을 지키게 했다.
반면 동부전선에서는 한국 육군 1군이 순수 한국군 군단·사단을 이끌고 방어하도록 했다. 한국군 2군은 후방 지역 통제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휘체계는 1970년대 들어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1961년부터 공산화를 막는다는 이유로 베트남에 개입한 미국은 1964년 미 구축함에 대한 북베트남 어뢰정 공격으로 촉발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한국전보다 훨씬 큰 규모(54만명)의 병력을 투입해 북베트남과 싸우게 되었다. 북베트남과의 전쟁이 장기화하자 미국과 남베트남은 한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1965~66년 한국은 청룡·맹호·백마 등 전투부대를 파병해 북베트남의 조종을 받은 베트콩과 싸웠다. 한국군 파월(派越)에 대해 반미주의자들은 ‘미국의 용병으로 간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의 해석은 전혀 다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2조와 3조는 ‘어느 한 나라가 무력위협을 받으면 다른 한 나라는 헌법상의 절차에 따라 무력위협을 받은 나라와 같이 행동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의역). 한국은 이 조항을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군의 참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만 해석해 왔다. 그러나 조항대로 해석하면 ‘미국이 공격받았을 때는 한국은 미국을 위해 참전한다’는 역(逆)도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군 파월을 ‘한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성실히 수행한 것’ ‘한국이 6·25전쟁 때 미국에 진 신세를 어느 정도는 갚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용병’이란 해석에는 한국군이 미군에 종속돼 있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으나, ‘의무를 다했다’ ‘빚을 갚았다’는 해석에는 대등하다는 개념이 들어 있다.
베트남전은 주한미군의 위상을 크게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한국전에 이어 베트남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한국전 때는 아이젠하워가 미군 철수를 마무리지었다면, 베트남전 때는 아이젠하워가 아꼈던 닉슨이 대통령이 돼 같은 일을 했다. 1970년 2월 닉슨은 미 의회에 보낸 교서에서 ‘동맹국은 1차적으로 스스로가 자국을 방어해야 한다. 미국은 핵우산만 제공해주겠다’는 내용을 집어 넣음으로써, 베트남에 나가 있는 미군 철수를 공식화했다(닉슨 독트린).
미국은 왜 베트남전 철수를 결심하게 됐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이 시기 미국대통령 안보보좌관으로 활약한 키신저가 작성한 정교한 미국의 세계 전략을 살펴보아야 한다.
미국 정보기관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기 1년 전쯤인 1969년 3월2일, 일단의 중국군 병사들이 우수리강(江) 전바오 섬(珍寶島·소련 이름은 다만스키 섬)에 있는 러시아군 막사를 공격해 러시아 병사 31명을 살해하고, 얼마 후에는 소련이 대대적으로 병력을 일으켜 중국군을 보복 공격한 사실을 포착했다(진보도 사건). 그때까지 세계는 공산국가끼리는 싸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진보도 사건이 일어났으니 키신저는 공산국가들도 영토 문제가 걸리면 자기네끼리 전쟁을 한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었다. 이념(공산주의)보다는 민족주의가 우선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키신저의 대전략
키신저는 중-소간의 민족 갈등을 확대시키고 중국을 미국 쪽으로 끌어당긴다면, 소련을 고립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이제 미-소 양국이 세계를 이끌던 시대는 끝났다. 앞으로는 유럽과 일본·중국이 강대국으로 발전해, 다섯 개 나라가 세계를 이끄는 ‘5극시대’가 올 것이다. 5극시대(일명 다극시대)에는 동서 냉전이 끝나고 긴장완화(detente)가 일어날 것이다”며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탕트 외교에 나섰다. 키신저는 자신의 주장이 빈말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중국의 코앞인 베트남 주둔 미군을 철수시키는 안을 만들었다.
키신저는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미묘한 민족갈등을 보았기 때문에 미군 철수를 거론한 것이다. 미군이 철수한 후 북베트남이 중국의 지원을 받아 베트남을 통일하더라도, 베트남과 중국은 민족갈등 때문에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미군이 철수한 후인 1973년 베트남은 공산통일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키신저가 예상한 대로 베트남과 중국은 점차 사이가 벌어져, 1979년에는 중국군이 베트남을 침공함으로써 한 차례 전쟁을 치렀다(중월전쟁).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90년, 4대 1로 고립되었던 소련이 거대한 파열음을 내고 무너져내렸다. 소련 붕괴 후 생겨난 러시아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함으로써 미국과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했다.
키신저의 플랜에 따라 데탕트 외교가 활성화되자 미국에서는 ‘해외에 나가 있는 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요원의 불꽃처럼 일어났다. 한번 방침을 정하면 사소한 사건으로는 이를 바꾸지 않는 것이 미국의 특징이다.
미군 철수 후 베트남에 이어 라오스·캄보디아가 공산화되었다. 당시 한국에는 한 개 군단(1군단)과 두 개의 사단(2사단과 7사단)이 주둔하며 서부전선을 지키고 있었는데, 인도차이나 공산화되기 전인 1971년 미국은 과감히 7사단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미 2사단을 전방에서 철수시켜 미 8군 예비 부대로 전환했다. 이어 1군단도 완전 철수시킬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미군을 붙잡아 둘 생각으로, 한국과 미국에서 절반씩 병력을 차출해 ‘한미 1군단(ROK-US I Corps)’을 만들 것을 제안해 이를 성사시켰다. 이로써 미국은 미 1군단 병력의 절반을 철수시키는 ‘실속’을 챙길 수 있었고, 한국은 미 1군단 철수를 막는 실속을 챙기게 되었다.
한미 1군단은 예하에 미군 부대 없이, 한국군 1군단·5군단·6군단을 작전통제하며 과거 미 1군단처럼 서부전선을 방어하게 되었다. 1973년 3월23일 베트남에 나가 있던 한국군이 모두 철수했다. 그해 7월1일 한국 육군은 3군사령부를 창설해, 미군이 서부전선 방어를 포기하는 경우에 대비했다.
이후 한국군 3군은 문산 지역을 방어하는 1군단을 작전통제하고, 한미 1군단은 한국군 5·6군단을 작전통제하는 쪽으로 업무 분담이 이루어졌다. 과거 미군은 다른 나라의 군대와 연합해 야전군이나 군단·사단을 편성한 예가 없다. 한미 1군단은 미 육군 역사에서 유일하게 다른 나라(한국) 장병과 부대를 형성한 경우인데, 한미 1군단 창설 아이디어가 훗날 한미연합군사령부를 만드는 단초가 되었다.
1977년 미국에서는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건 민주당의 카터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자 북한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자고 제의했다. 1978년에는 판문점에서 8·18도끼만행 사건을 일으켜 직접적으로 미군을 압박했다. 한편 유엔에서는 세계적으로 데탕트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는데 편승해, 냉전시대의 잔재인 유엔군사령부를 해체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런 가운데 카터 대통령이 공약을 실천한다는 명분으로 2사단 철수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2사단 예하의 3연대(지금은 3여단)가 철수해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로 이동했다(1978년).
그러자 한국방어를 책임진 8군의 참모장 싱글러브 소장이 전역서를 제출하며 카터의 조치에 강력히 항의했다. 카터의 조치를 성급하다고 생각하던 미국 공화당 의원들은 즉시 싱글러브 소장을 청문회로 불러내 무언의 지지를 보냈다. 베트남 공산화를 지켜본 미국 언론도 싱글러브를 지지하고 나서자, 카터 대통령이 곤란해졌다. 이러한 카터를 구해준 것이 CIA였다.
카터와 싱글러브
카터 대통령 시절 북한군은 줄곧 100만명을 유지했다. 인민군과는 별도로 국가안전보위부에 소속된 20만명의 국경경비대와 해안경비대도 유지했다. 이 시기 CIA는 국경수비대와 해안경비대도 군사조직으로 봐야 한다는 판단 보고를 카터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에 따라 카터는 “북한군이 20만명을 증원했기 때문에 주한미군 철수를 1981년까지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카터 시절의 주한미군 철수와 유엔사 해체 논의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한국 방어를 위한 새로운 방안 모색에 나섰다. 1978년 그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 지금의 한미연합군사령부(ROK-US Combined Forces Command, 약칭 CFC 혹은 연합사)다.
한미연합군사령부는 2차대전 때 만들어진 연합군사령부(Allied Forces Command)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2차대전 때의 연합은 ‘Allied’라는 단어를 썼으나, 한미연합군사령부에서의 연합은 결합의 강도가 강한 ‘Combined’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양국군은 한미 1군단 운영을 통해 같은 나라 군대처럼 움직였기 때문에 Combined라는 단어가 들어간 한미연합군사령부를 창설한 것이다.
연합사는 유엔사 해체에 대비해서 만든 지휘부였다. 그러나 해체될 것 같던 유엔사는 해체되지 않고 현재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유엔사 사령관은 연합사 사령관이 겸하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이른바 ‘선군(先軍)정치’를 표방해 군대가 민간보다 우선한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는 ‘문민(文民) 우위’의 원칙에 따라, 민간인인 대통령과 국방장관으로 구성되는 국가통수 및 지휘기구(NCMA)가 군대를 통제한다. 유엔사는 미국 합참이 통제하고, 미 합참은 미국의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통제하므로, 유엔사는 미국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작전을 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합사는 한미 양국의 대통령과 국방장관으로 NCMA를 구성하고, 이 NCMA의 위임을 받아 한미 합참의장으로 편성한 한미군사위원회(MC)의 통제를 받으므로, 한국 정부는 영향력을 행사해 볼 여지를 갖게 된 것이다.
1991년 남북이 공동으로 유엔에 가입하기 전까지 한국은 유엔의 회원국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한국군은 유엔군의 작전통제를 받으니 이는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모순도 한미연합사 창설과 한국의 유엔 가입으로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1980년 3월14일 한국군과 미국군은 한미1군단을 한미연합야전군사령부(Combined Forces Army, 약칭 CFA 또는 한미야사)로 발전시켰다. 이후 한미야사(사령관 미 육군 중장)는 기동부대로 변모한 한국군 5군단과 6군단을 후방에서 작전통제하고, 한국군 3군은 한국군 ○개의 군단을 이끌고 최전선(철책선)을 방어하게 되었다.
카터가 잠정적으로 주한미군 철수 연기시한으로 정한 1981년이 오자, 그해 2월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국의 안보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핵심 요소이며 미국의 안보를 유지하는 핵심 요소”라고 재확인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공식 취소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91년 미국 의회는 ‘4만3000명인 주한미군을 3만6000명으로 줄인다’는 넌-워너 의원의 수정안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1992년 6월26일 한미야사가 해체돼 한미야사에 근무하던 미군이 철수하고 한국 5군단과 6군단은 한국 3군의 작전통제를 받게 되었다. 한국에는 8군 예비부대로 돌려진 2사단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넌-워너 수정안이 담고 있던 추가 철군 계획은 1992년 북핵 위기가 고조되면서 현재까지 중단된 상태다.
6·25전쟁중 미 육군은 1개군(8군)-3개 군단(1군단·9군단·10군단)-9개 사단(해병대 포함)에 32만명이 주둔했으나, 종전과 함께 빠르게 철수해 지금은 1개 군-1개 사단만 남았다.
평시작전통제권 환수
한국의 모든 전투부대를 통제하는 한미연합군사령부는 한국군 최고 사령부인 합참과 기능적인 면에서 충돌한다. 한국 전투부대 처지에서는 언제 한미연합사의 지휘를 받고 언제 한국 합참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은 1994년 12월1일 부로 한국군에 대한 평시작전통제권은 한국 합참이 행사하고, 데프콘2 이상의 전시작전통제권은 연합사가 행사하는 것으로 교통정리가 되면서 풀리게 되었다. 이로써 이승만 대통령이 작전권을 유엔군에 넘긴 1950년 7월14일 이후 처음으로 한국군은 작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평시작전통제권은 간첩 색출 작전이나, 1996년 9월의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2002년 6월의 서해교전 같은 국지적인 충돌시 작전을 지휘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작전으로는 한국군의 작전통제능력을 개선시킬 수 없다. 따라서 한국은 지금의 NATO 동맹국처럼 모든 작전부대를 연합사에 배속시키지 말고, 일부는 합참이 전·평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고, 유사시 한미연합사에 모든 작전부대를 배속시키는 체제를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들은 “지난 반세기의 한미동맹이 한국이 미국을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원 사이드 동맹이었다면, 다음 반세기의 동맹은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해 미국을 도왔던 것처럼 대등한 형태로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군 소식통에 따르면 미군은 마지막 전투부대인 2사단마저도 미국영토인 괌으로 철수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이유는 2사단의 효율적인 활용 때문이다. 소식통의 말이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거둔다는 경제 법칙은 미 육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국 눈으로 봤을 때 한반도는 지속적으로 안정적이다. 북핵 문제마저 풀린다면 미국이 굳이 2사단을 한국에 주둔시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미국이 생각하는 앞으로의 위협은 중국인데, 중국과 분쟁시 미국이 신속히 투입할 수 있는 부대는 오키나와에 있는 해병대 3사단뿐이다.
만약 미 육군이 2사단을 괌으로 철수하고, C-17 같은 대형수송기로 옮길 수 있는 경보병 사단으로 바꾼다면, 2사단은 중국과 한반도는 물론이고 아프간이 위치한 중앙아시아까지 커버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은 필요에 따라 다시 2사단 철수를 거론할 수 있다. 그때 ‘양키 고 홈’을 외쳐 온 한국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궁금하다.”
2사단이 철수하면 한국에는 오산에 있는 7공군만 남게 된다. 7공군은 극동군 소속의 5공군에 속해 있던 항공사단이 발전한 부대다. 따라서 5공군이 태평양군사령부로 전환될 때 함께 태평양군사령부로 배속되었다. 태평양군사령부 소속인 7공군은 태평양군사령부 소속인 7함대처럼 데프콘2 이상의 전시가 돼야만 한미연합군사령부로 전속된다.
베트남전쟁 때의 일이다. 미군 소대장 켈리 중위는 작전명령을 받고 출동했다가 ‘미라이’라는 마을에 들어가 주민 전부를 학살하고, 베트콩을 죽인 것으로 허위보고한 후 훈장을 받았다(미라이촌 학살사건). 그후 진상이 밝혀지자 미국에서는 작전중에 범한 범죄를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불붙었다.
결론은 작전 목적과 어긋난 범죄는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군 법정은 켈리 중위에게 종신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주의해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는 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 또 사고가 나더라도 작전을 계속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1993년 팀스피리트 훈련 때 미군 헬기가 추락해 수십명이 사망했으나 미군은 그대로 훈련을 감행했다. 훈련은 실전을 대비한 것인데, 실전에서 사고로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해서 작전을 멈출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논리는, 안보는 산소와 같아서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미군의 논리는 그러나 사망자가 한국 여중생으로 바뀌자 한국민과 강한 마찰을 빚고 있다. 이 문제는 냉철히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동티모르에서 PKO로 활동하는 한국군 차량이 작전 도중 사고를 일으켜 주민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여중생 사망과 미군 무죄 평결이 불씨가 된 반미시위가 이토록 커지도록 방치한 것엔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이 문제는 국민이 나서기 전에 정부가 정치력을 발휘해 풀었어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이회창-노무현 대통령후보는 유세장에서 오히려 이 문제를 확대시켰다.
반미 촛불시위가 벌어지는 와중에 제2차 북핵 위기의 파고도 높아졌다. 이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한미 양국은 군사동맹 50주년을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