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언젠간 우리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우리는 미국이다”

‘워싱턴포스트’ 보브 우드워드 기자가 쓴 화제의 신간 ‘Bush at War’ 발췌

  • 번역·정리: 이흥환·미 KISON 연구원 hhlee0317@yahoo.co.kr

    입력2002-12-31 15: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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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냉장고’ 속에 들어간 콜린 파월
    • 부시가 고집한 ‘부시 독트린’
    • 이견 대립으로 엉망진창된 국가안보회의
    • 부시 사로잡은 콘돌리자 라이스의 ‘힘’
    • CIA, 7000만달러로 아프간전쟁 종료
    “언젠간 우리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우리는 미국이다”
    ‘워싱턴포스트’ 편집부국장 보브 우드워드(Bob Woodward)가 쓴 ‘전시 대통령 부시(Bush at War)’의 일부 내용이 3회 특집으로 기획되어 ‘워싱턴포스트’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2002년 11월17일) 워싱턴은 두 번 놀랐다.

    9·11사태 이후 부시 행정부가 꾸려나가고 있는 전시 내각의 갈등과 분열상, 현금 7000만달러가 지출된 무장 CIA 공작 요원들의 아프가니스탄 비밀작전 등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던 이면사에 대한 충격이 그 처음이고, 둘째는 보브 우드워드의 취재력과 전시 내각의 숨은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이끌어나간 필력이 그것이다.

    이 글의 주제는 9·11사태에 대처해 나간 부시 행정부 전시 내각이 겪은 최초 100일의 기록이다. ‘뉴욕타임스’의 평론가 미치코 카쿠타니는 11월20일자에 기고한 ‘부시 전쟁지휘실의 내면(Inside Bush’s War Room)’이라는 제목의 서평에서 이 책을 세 갈래로 평했다. 테러라는 도전에 직면한 젊은 신임 대통령의 모습을 그린 교양소설이자 오사마 빈 라덴의 목을 가져오기 위해 현금 가방을 운반하는 CIA의 비밀 공작을 그린 스파이 스릴러이며, 대통령을 움직이기 위해 정책을 놓고 대결하는 전시 내각 각료들의 정치 드라마라는 것이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언젠간 우리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우리는 미국이다”

    보브 우드워드(Bob Woodward)(왼쪽) ‘전시 대통령 부시(Bush at War)

    50회 넘게 열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기록이 이 책의 뼈대이다. 취재원들이 이렇게 속속들이 기자에게 털어놓고, 기자는 이렇게 적나라하게 내용을 공개해도 아무 탈이 없을까 싶을 만큼 세밀하다. 저자는 대통령은 물론 각 부 장관, CIA 국장 등 인터뷰한 인물만도 100명이 넘는다고 책에서 밝히고 있다. 또 대부분의 인터뷰는 배경 설명을 한다는 조건아래 진행됐다고 했다. 즉, 취재원이 정보는 주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조건인 셈이다. 실명이 빠졌다고 해서 맥빠지고 김빠지는 대목은 거의 없다. 실명으로 거명된 이들의 생생한 대화만 보아도 진력나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이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콘돌리자 라이스라는 인물의 역할은 무엇인지, 국방부의 럼스펠드 장관과 폴 월포위츠 부장관이 왜 워싱턴의 보수 매파로 분류되는지 등 저자는 독자들의 궁금증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외딴 섬에서 정치적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서는 ‘워싱턴 게임’의 한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 외교정책의 정당성이나 옳고 그름 같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 군사 행동의 의미나 향후 영향 따위의 깊이 있는 분석도 피해갔다. 일부러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직 미국의 테러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깊이가 없다는 혹평도 있다. 정색을 하고 심각하게 다뤘어야 할 주제들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저자가 너무 많은 것을 욕심냈다면 이 책의 재미는 덜했을 게 뻔하다. 미국인이 보고 미국인이 썼으니 ‘전시 대통령 부시’이다. 외국인이 본 대로라면 이 책의 제목은 ‘전쟁과 정치-워싱턴 게임’이었을 것이다.

    ‘전시 대통령 부시’의 주요 내용을 발췌해 소개한다.

    2001년 9월11일 화요일. 조지 테닛 CIA 국장은 매일 아침 8시 부시 대통령을 만나 보고하는 일일 정보 브리핑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부시 대통령이 플로리다 출장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이민자의 아들로 올해 48세인 육중한 체구의 테닛 국장은 이날 아침 정보 브리핑 대신 백악관 북쪽으로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세인트 리지스 호텔에서 오클라호마 출신인 민주당 전 상원의원 데이비드 보렌과 아침을 먹고 있었다.

    보렌은 테닛 국장이 미 정보계의 거두로 자리잡기까지 그를 이끌어준 사람이다. 13년 전 보렌이 상원 정보위원회 위원장이었을 때 테닛 국장은 그 위원회의 중간급 참모였다.

    보렌 전 의원은 테닛의 성실성과 타고난 브리핑 실력을 높이 샀다. 1992년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정권 인수팀의 정보파트 책임자로 테닛을 추천한 사람도 보렌이다.

    테닛은 신경질적이고 성미가 급하며 일에 미친 사람이다. 클린턴 2기 행정부 때인 어느 해 연말에는 CIA 국장 자격으로 참석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를 발칵 뒤집어놓은 적도 있다.

    아들의 학교 크리스마스 연극행사에 참석하기로 약속했던 그날, 안보회의는 대통령이 불참하는 대신 국무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이 참석했으나 쓸데없는 공론으로 시간이 지연되었다. 그러자 테닛은 벌떡 일어나 상소리를 던지고 회의장을 나와버렸다.

    “××, 난 가겠습니다.”

    이 사건 이후 테닛은 성질 죽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2001년 초, 보렌 의원은 대통령에 당선된 부시 공화당 후보에게 테닛을 CIA 국장에 추천하면서 “테닛이 어떤 인물인지는 아버지(부시 전 대통령)께 여쭤보라”고 했다. 부시 전 대통령이 신임 대통령인 아들에게 준 대답은 “내가 듣기로는 좋은 친구”라는 것이었다. 부시 집안에서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최고의 찬사였다.

    빈 라덴 찾아 헤맨 CIA

    9월11일 아침 식사 자리에서 보렌 전 의원은 테닛에게 “요즘은 뭐가 가장 큰 걱정거리냐”고 물었다. 테닛의 대답은 짧았다. “오사마 빈 라덴입니다.” 그러자 보렌은 또 빈 라덴 타령이냐며 싱거운 소리 그만두라고 타박을 했다. 보렌은 지난 2년 동안 테닛에게서 빈 라덴 이야기를 지겹게 들어왔던 터였다.

    “아니, 어떤 나라의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니고 개인일 뿐인데 무슨 위협이 된다고 자꾸 빈 라덴 이야기만 하는 건가?”

    테닛은 맞받아쳤다.

    “그를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보렌이 보기에 테닛이 빈 라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테닛은 이미 1999년 12월 보렌에게 새천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지도 말고 여행도 삼가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그때 갑자기 테닛의 경호원들이 테이블로 달려들었다.

    “국장님, 심각한 문제가 터졌습니다.”

    “뭔가?”

    “세계무역센터(WTC)가 공격을 받았습니다.”

    경호원 한 명이 그에게 휴대전화를 넘겨주었다. CIA 본부에 연결이 되었다. 테닛은 본부의 보고를 듣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그들이 비행기로 빌딩을 들이받았다는 말인가?”

    그는 핵심 요원들에게 15분 후 CIA 본부 회의실에 모이라고 전화로 지시한 후 서둘러 자리를 뜨면서 보렌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빈 라덴입니다.”

    “언젠간 우리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우리는 미국이다”

    조지 테닛 CIA 국장(왼쪽사진), 미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브리핑중인 테닛 국장(맨 오른쪽)

    CIA는 이미 5년째 빈 라덴을 쫓고 있었다.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 대사관 폭파 사건 이후에는 추격의 고삐를 바짝 죄었다. 1999년에는 직접 빈 라덴을 체포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할, 파키스탄 정보기관원으로 구성된 특공대를 조직했으나 파키스탄에 군사 쿠데타가 발생해 무산되고 말았다.

    CIA는 3년째 30명으로 구성된 빈 라덴 추적 팀을 가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원 아프가니스탄인으로 CIA로부터 한 달에 1만 달러를 받았다. 이들은 ‘고참’이라는 작전 코드명 아래 아프가니스탄 전지역을 대상으로 팀 전체가 같이 움직이거나 때로는 5명이 1조가 되어 빈 라덴의 뒤를 밟았다.

    CIA는 빈 라덴을 죽일 수 없었다. 암살을 금지한 미 헌법 때문이다. 체포해 사법기관에 넘기는 것만이 허락되었을 뿐이다. 법적으로는 이른바 ‘양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테닛은 빈 라덴이 생포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빈 라덴에 대한 CIA의 비밀 공작이 성공한다는 것은 결국 빈 라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날 (9월11일) 아침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새 대통령 알레한드로 톨리도와 아침을 먹고 있던 콜린 파월 국무장관(64)도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1시간만에 워싱턴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오랜 친구이자 국무부 부장관인 리처드 아미티지와 계속 통화를 했으나 비밀스러운 대화는 나눌 수 없었다.

    파월은 페루에서 워싱턴으로 돌아오기까지 7시간을 비행기 안에 고립되어 있었다. 역대 정권에서 비상시 백악관 상황실 회의에 참석해 본 적이 있는, 전 합참의장 출신인 파월에게 그 7시간은 영원이나 다름없는 긴 시간이었다.

    ‘땀 빼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

    전역 2년 뒤인 1995년 파월은 대통령 출마를 고려했었다. 그러나 아미티지가 극구 말렸다. “당신은 대통령선거전에 뛰어들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이 아미티지의 논리였다. 대통령선거의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파월이 증오하는 것뿐이고, 파월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험악한 일을 선거에서 겪을 텐데, 잘 짜인 계획에 맞춰 예측 가능한 일을 질서정연하게만 해왔던 그는 미 정치판의 대통령선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대법원이 부시의 당선을 선언했을 때 파월의 참모들은 자기들의 보스인 파월이 부시 승리의 견인차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유권자들은 부시-체니 팀만이 아니라 부시-파월 팀도 염두에 두고 선택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파월은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줄곧 뒷전으로 밀려났다. 백악관 내부 정치는 그에게 고삐를 매었고 그는 각광받는 위치에서 밀려났다.

    텔레비전의 주요 토크쇼에 누가 출연할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부시의 선임 자문역인 칼 로우브와 고문인 카렌 휴스이다. 언론은 파월의 출연을 교섭했지만 이 두 사람은 파월에게 출연해도 좋다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파월은 규칙을 아는 사람이다. 토크쇼의 출연 섭외를 받을 때마다 파월은 나갈 수 없다고 대답했다.

    파월과 아미티지는 파월이 ‘냉장고’ 속에 들어가 있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필요할 때만 꺼내 쓰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9·11사태가 터지기 1주일 전 ‘타임’은 파월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파월, 어디에 간거요?(Where have you gone, Colin Powell?)’라는 제목을 달았다. 정책에서 뚜렷한 족적이 없고, 행정부 내의 강경파에게 밀리는 파월을 주제로 삼은 것이었다.

    이 기사는 백악관이 만들어낸 히트작이었다. 백악관의 일부 관리들이 이 기사 작성에 물심양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파월이 새 행정부 내에서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지 그 진면목을 일일이 귀띔해 주었던 것이다.

    물론 파월과 측근들도 그 기사를 쓴 기자들을 상대로 힘을 쏟았으나 역부족이었다. 파월과 아미티지는 워싱턴 권력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생생한 기사들이 전혀 사실이 아닌 경우에도 진실처럼 비쳐진다는 것이었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기사 내용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즉, 기사에 나타난 대로 파월은 외교정책을 짜는 사람이 아니라, 임무가 떨어지면 사건별로 작은 위기들에 대처해 나가는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언젠가 사석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꼭대기에서 살아남는 것이 실용주의이다.”

    또 합참의장으로 펜타곤에서 근무할 때는 책상 유리판 밑에 경구를 적은 쪽지를 밀어 넣어놓곤 했다. ‘땀빼는 모습을 그들에게 보이지 말라’는 것도 그런 쪽지 가운데 하나였다.

    “언젠간 우리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우리는 미국이다”

    젊은 시절 공화당의 JFK로 불렸던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 그는 1960∼70년대 공화당 내에서 가장 명석한 스타였다. 공화당의 케네디(JFK)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인물 좋고, 지적이고, 선이 굵은 데다가 살짝 미소지으며 던지곤 하는 위트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한마디로 자타가 공인하는 대통령감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대중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탓에 전국적인 정치인이 되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사람을 퉁명스럽게 대하고 늘 자기 밑에 두려하는 것이 문제였다. 무엇보다도 공화당의 떠오르는 스타 가운데 한 사람인 부시 전 대통령을 적으로 만든 것이 정치인 럼스펠드에게는 결정적인 치명타였다.

    하원의원 시절 럼스펠드는 같은 하원의원이었던 부시(전 대통령)를 우정이나 논하고 홍보와 여론조사 결과에만 흥미를 갖는 경량급으로 판단했다. 그의 눈에 부시는 늘 논란거리를 피하고 체육관 밖에서는 땀 흘리기를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누구 밑에서 일만 할 줄 알았지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 못한 인물로 치부했던 것이다. 럼스펠드의 세계에서 웅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거의 범죄나 다름없었다.

    공중 납치당한 여객기가 펜타곤을 쳤을 때, 럼스펠드는 사무실에서 일일 정보 보고를 받고 있었다. 건물이 연기로 메워졌으나 그는 펜타곤을 떠나지 않았다. 마이어 장군이 대피할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장관이 건물에 남아 있을 경우 다른 사람들도 대피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나가셔야 합니다.”

    “알았네.”

    그러나 그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빈 라덴의 목만으론 부족”

    9월11일 오후 6시30분, 다른 지역에 머물러 있던 부시 대통령이 공군 1호기를 타고 마침내 백악관으로 돌아왔다. 백악관 1층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에서 선임 연설문 작성자 마이클 거슨이 써놓은 대국민 담화문 초안을 읽어본 부시는 ‘미국은 이번 행위를 계획한 자와 이를 묵인하거나 테러리스트를 고무한 자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대목 가운데 ‘테러를 묵인하거나 고무한 자’라는 표현이 너무 두리뭉실하다면서 ‘숨겨준(harbor) 자’로 고쳤다. 보복 공격 목표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 테러리스트를 지원하거나 보호한 자들도 모두 포함시킨 광범위한 수정안이었다. 이 수정안은 나중에 이른바 부시 독트린으로 불리게 되었다. 체니 부통령이나 파월 장관, 럼스펠드 장관과도 상의를 거치지 않은 것이었다.

    국가안보 보좌관 라이스는 목표를 광범위하게 확대시킨 부시의 연설문이 과연 국민을 위로하는 데 적합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 언급하셔도 좋겠지만 나중에 말씀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밀어붙이지 않는 한 자신이 먼저 나서지 않는 라이스의 스타일대로 조언한 것이다. 그러나 라이스는 대통령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최초의 언급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백악관 서편 사무실인 웨스트 윙의 참모들은 부시의 연설문이 전쟁 선언이나 다름없다면서 우려를 나타냈다. 참모들의 의견을 전달하러 온 연락 참모 댄 바트릿에게 부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미 말했소. 고치지는 않을 거요.”

    부시는 국가안보 팀 참모들과 마찬가지로 빈 라덴과 국제 테러에 대한 클린턴 행정부의 대응이 너무 약해 결국 미국이 다시 당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나중 인터뷰에서 “크루즈 미사일로 텐트나 공격하고 만다는 방부제적인 발상은 정말 웃기는 소리다. 무기력한 미국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부시는 이렇게 덧붙였다.

    “외부 세계에 비쳐진 미국은 물질 만능적이고 쾌락적이며 가치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다. 공격을 당해도 보복하지 못하는 나라라는 것이다. 빈 라덴도 그렇게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9월12일 아침에 열린 국가안보회의에서 부시는 탈레반 리스트를 원했다. 그는 파월에게 “빈 라덴의 목만으로는 부족하다”면서 알 카에다 조직 전체를 잡아들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럼스펠드가 끼여들었다.

    “처음에 정확한 목표를 어떻게 세우느냐가 중요하다. 동맹국들이 서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빈 라덴과 알 카에다에만 초점을 맞출 것인지 아니면 좀더 광범위하게 가는지가 중요하다.”

    파월은 이에 대해 “목표는 광범위한 의미의 테러리즘”이라면서 “우선 이번 일을 저지른 조직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부시는 “빈 라덴부터 시작한다. 그게 미국인이 바라는 것이다. 성공한 후에는 더 큰 타격을 가하고 또 나아간다”라고 말했다. 부시는 테러 위협을 ‘암’이라고 표현하면서 특정 그룹만 우리의 적이 아니라, 적개심 자체가 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기독교를 증오한다. 유대교도 증오한다. 자기네 것이 아닌 것은 모두 증오한다.”

    오후 4시 국가안보회의가 다시 열렸을 때 럼스펠드가 이라크 문제를 제기했다. 왜 이라크는 공격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느냐는 것이 그의 질문의 핵심이었다. 럼스펠드가 질문을 제기할 때는 자신에게만 묻는 것이 아니었다. 폴 월포위츠 부장관은 대 테러 전쟁 1회전의 주요 목표는 이라크여야 한다는 정책을 고수했다.

    “언젠간 우리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우리는 미국이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가운데)과 그를 견제하는 앤드루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담당 보좌관‘(왼쪽사진),테러 지원국 종식’을 외치는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9·11이 터지기 전 펜타곤은 이미 수개월에 걸쳐 이라크에 대한 군사 공격안을 수립하고 있었다. 결국 전면적인 대 테러전은 이라크를 공격 목표로 삼아야 했다. 럼스펠드는 이 기회를 살려 즉각 사담 후세인에 대한 공격 개시 가능성을 제시했다.

    파월은 즉각적인 이라크 공격에 반대했다. 미 국민이 알 카에다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대 테러전도 그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9월13일의 펜타곤 뉴스 브리핑은 럼스펠드 대신 폴 월포위츠가 주재했다. 하루 전 부시 대통령이 참석했던 국가안보회의에서는 럼스펠드 장관이 이라크 문제를 제기했고, 이번에는 월포위츠가 뉴스 브리핑을 통해 이라크 문제를 공론화하려는 참이었다. 부시 대통령으로 하여금 테러전 1라운드의 목표를 이라크로 삼도록 하려는 또 하나의 노력인 셈이었다. 월포위츠는 주장했다.

    “이번 전쟁은 단순히 사람을 잡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테러의 성역을 제거하는 것이고 테러 지원 시스템을 없애는 것이다. 테러 지원국을 끝장내는 것이 이 전쟁의 목표이다. 이번 전쟁은 일회성 행동이 아니며 지속적인 캠페인이 될 것이다. 테러를 지원하는 자들을 테러가 멈출 때까지 끝까지 쫓을 것이다.”

    월포위츠의 말은 9월11일 밝힌 부시 독트린을 다시 한번 반복한 것이었지만, 그의 강경한 발언은 신문 머리 기사를 장식할 만한 것이었고, 또한 미국의 동맹국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테러 지원국 종식’, 즉 이라크의 정권 교체라는 카드는 부시 대통령도 그 뜻을 내비치기는 했지만 분명하게 못박지 않은 말이다.

    마이어 장군이 합참의장을 인계하기까지 2주 동안 합참의장을 맡고 있던 휴 셀턴 장군은 초기 단계에서의 대 이라크 군사 공격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다. 이라크가 9·11에 연계되어 있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이라크 공격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즉, 아프가니스탄 공격 때 지원을 요청해야 할 나라들일 뿐만 아니라, 중동 평화를 소생시키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온건 성향의 아랍 국가들을 화나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며칠 전 럼스펠드가 이라크를 잠재 공격 목표로 지목했을 때 파월은 한때 자신이 재직했던 합참의장직을 맡고 있는 셸턴 장군에게 다가가 눈을 부라리면서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이 자들을 박스에 도로 집어넣을 수는 없는 겁니까?”

    그러나 월포위츠의 생각은 이미 확고한 상태였다.

    “대통령은 한 사람의 말만 원한다”

    부시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가장 이상적인 결과는 테러리스트가 아프가니스탄에 발붙일 수 없도록 하는 것이고, 또한 미국의 과감한 행동을 보고 이란 등 테러를 지원하는 나라들이 태도를 바꾸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파월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다른 동맹국들도 알 카에다를 추적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알 카에다 외에 다른 테러리스트로까지 전쟁을 확대시키면 동맹국들이 떨어져나가는 결과를 빚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는 이에 대해 대 테러전에 다른 나라들이 훈수를 두거나 조건을 다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언급했다.

    “언젠간 우리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우리는 미국이다.”

    파월은 이에 대꾸하지 않았다. 홀로 대 테러전을 치르는 상황은 그가 피하고 싶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파월 장관은 대통령의 대 테러전 규정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파트너 없이는 전세계적 수준의 전쟁은 물론 아프가니스탄에서조차도 효과적인 전쟁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했다. 강력한 발언은 필요하지만, 정책과 혼동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파월의 생각이었다.

    콘돌리자 라이스는 국가안보회의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 행동이 성공할 경우 다음 목표로 이라크를 상대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폴 월포위츠가 나섰다. 57세의 월포위츠는 늘 부드러운 태도를 취하지만 정책면에서는 강경파였다. 그는 1991년 걸프전 때 사담 후세인을 권좌에 머물게 한 것이 가장 결정적인 실수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부시는 백악관에 들어갔을 때부터 후세인을 흔드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고, 월포위츠는 행정부 내의 후세인 반대파들을 결집시키는 데 주력했다.

    월포위츠는 마침내 기회를 잡았다. 아프가니스탄 공격의 성패는 불확실했지만 이라크는 손만 대면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것이 월포위츠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부시의 비서실장인 앤드루 카드는 월포위츠가 추가 정보나 새로운 논리를 개발하기보다는 그저 ‘이라크라는 북’만 두드려대고 있다고 생각했다.

    월포위츠는 아프가니스탄을 상대하는 것보다 이라크를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더 쉬운가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했다. 부시는 왜 진작에 회의에서 그 점을 부각시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셸턴 합참의장이 대 이라크 공격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월포위츠는 “장관(럼스펠드)이 지시하지 않는 한, 내가 합참의장의 의견에 반대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잠시 휴식 후 회의가 속개되자 이번엔 럼스펠드가 지금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했다. 그는 이라크 주변 지역에 대규모 군대가 배치되어 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전히 목표가 분명치 않다는 점이 우려된다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파월이 여전히 이의를 제기했다. 동맹국 파트너들의 말도 들어야 한다면서 그는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모두 대통령과 함께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라크를 공격하면 그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대통령 곁을 떠날 것이다. 이라크가 9·11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때는 얼마든지 이라크를 칠 수 있다. 지금은 아프가니스탄이다. 이라크가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를 잡기만 하면 우리는 훨씬 더 효율적으로 이라크를 공략할 수 있다.”

    “언젠간 우리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우리는 미국이다”

    백악관을 점령했다고 평가받는 라이스 국가안보 보좌관(왼쪽사진). 부시 미 대통령.

    부시는 이라크 공격에 강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으나 토의를 계속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시간이 흐른 뒤 부시는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밝혔다. 그가 우려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한 지역에서 성공을 거두면 다른 지역에서는 임무가 훨씬 쉬워진다는 것이 내 논리이다. 초점이 흐려지는 것은 대단히 위험스러운 일이다.”

    부시의 두 번째 걱정은 각료들이 이번 전쟁을 걸프전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파월, 체니, 월포위츠 등 부시의 참모들은 모두 아버지 밑에서 걸프전을 치렀던 당사자들이다. 걸프전에서의 그들의 경험이 이번 새로운 전쟁에 그대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부시의 생각이었다.

    그런 가운데 월포위츠는 럼스펠드가 말을 하는 도중에 끼여들어 이라크전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대통령의 말을 격려로 알아듣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럼스펠드는 월포위츠가 끼여든 것을 무시하는 듯했으나 양미간이 찌그러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럼스펠드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휴식 시간에 비서실장이 럼스펠드와 월포위츠를 따로 불러내 조언했다.

    “대통령은 국방부를 대표해서 한 사람만 말하는 것을 원한다.”

    CIA 비밀공작원 게리의 돈 가방

    2001년 11월26일 수요일 오후 12시30분, 북부 아프가니스탄. 둥근 얼굴에 안경을 쓴 한 사나이가 CIA 소속인 러시아제 Mi-17 헬리콥터에 올라타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밝은 표정의 이 사나이를 태운 헬리콥터는 안조만 통로를 통해 1만5000 피트의 판쉬르 계곡을 거슬러 올라갈 참이었다.

    게리(59)라는 이름의 이 사나이는 부시 대통령이 치르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최초의 중요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그가 동행한 팀은 CIA의 비밀 준군사 조직원들로 CIA 본부와 직접 교신이 가능한 통신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게리의 양다리 사이에는 가죽끈을 동여맨 금속상자가 놓여 있었다. 미화 300만달러가 들어있는 현금 가방이었다. 화폐 일련번호가 모두 다른 100달러짜리로만 채워진.

    CIA의 아프가니스탄 비밀공작 팀장인 게리는 100만달러가 든 가방을 다른 공작원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여러 차례 수행한 적이 있었다. 300만달러짜리 가방 운반도 늘상 해오던 일이었다. 이번 임무가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기 재량에 따라 300만달러를 분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CIA의 이같은 공작을 32년째 해 온 베테랑이었다.

    그는 9·11이 터졌을 때 90일 일정의 은퇴 준비과정에 들어가 있던 참이었다. 9월15일 캠프 데이비드에서 하루 종일 전시 내각회의가 있은 직후 그는 상관인 CIA 반테러국장 코퍼 블랙의 연락을 받았다. 블랙이 게리에게 말했다.

    “은퇴 준비중이란 것을 잘 알지만 지금 적임자가 필요하다. 당신이 갔으면 좋겠다.”

    게리는 경험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의 2대 주요 언어인 파슈토와 다리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었다. 게리는 대답했다.

    “알았다. 내가 가겠다.”

    그는 이슬라마바드 지부장이었을 때 몇 차례 아프가니스탄 비밀 여행을 한 적이 있다. 북부동맹군 지도자와 회동할 때는 20만달러가 든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곤 했다. 게리야말로 아프가니스탄 비밀공작의 적임자였다.

    부시의 눈물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은 원래 TV 토크쇼 출연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백악관에서 10월 첫째주 아미티지에게 토크쇼 출연을 요청했을 때 그는 점잖게 거절했다. 그러나 백악관은 계속 밀어붙였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으로부터 미국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대중에게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미티지는 파월에게 백악관의 요구사항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파월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지금 다시 냉장고 안에 들어가 있다.”

    10월4일 늦은 아침, 부시 대통령은 국무부를 방문했다.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격려의 말을 하던 끝에 그는 눈물을 보였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백악관 대변인 아리 플라이셔는 대통령의 눈물을 보면서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 오늘인가?

    백악관으로 돌아왔을 때 부시는 집무실로 플라이셔를 불렀다.

    “오늘 아침 플로리다에서 탄저병 사건이 터졌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얼마나 퍼져나갈지 우리는 모른다. 하나인지 둘인지…. 우리가 모르는 게 너무나 많다.”

    아리 플라이셔가 대통령의 눈에 두려움이 깃든 것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백악관의 의회담당 파견관 닉 칼리오가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부시의 집무실로 갔다. 부시는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칼리오가 난데없는 서류에 의아해하자 부시가 물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는가?”

    부시는 의회 의원들을 통해 정보가 언론에 새나가는 것에 대해 노발대발했다. 칼리오는 부시가 내민 서류를 받아들고 서둘러 읽어내려갔다. 파월과 오닐 재무장관, 럼스펠드, 애시크로프트 법무장관, 조지 테닛, FBI 뮐러 국장 등에게 보여줄 메모였다. 제목은 ‘의회 발표문’으로 되어 있었다. 대통령의 서명이 들어간 대통령 명령이었다. 그 내용은 소위 말하는 빅8(상·하원 양당 지도자, 상·하원 정보위원장 및 선임의원)만 비밀정보나 민감한 내용의 법 집행 정보를 받아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의회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 통제 조치였다.

    칼리오는 지금 막 읽어본 그 서류를 마치 본 적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직언했다.

    “안 됩니다. 의회에 대한 정보 제한조치는 그야말로 재앙을 불러오는 길입니다.”

    535명 중 527명의 의원들에게 산소 공급을 중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설명도 붙였다. 그러나 부시의 결심은 단호했다.

    “상관없다. 가지고 가라.”

    “언젠간 우리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우리는 미국이다”

    9·11 사태 직후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보회의

    오전 9시30분에 시작된 10월16일의 국가안보회의는 CIA 부국장 매컬린의 보고로 시작되었다.

    “CIA 2진이 오늘밤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갔다.”

    굿 뉴스였다. 럼스펠드와 아미티지가 북부 동맹군에게 어떻게 군사 장비를 조달할 것인지 물었다. CIA가 할 것인가, 국방부가 할 것인가.

    이제 출범 10개월밖에 안 된 부시 행정부였다. 각 부처마다 제 목소리를 냈고 서로 얼굴 붉히는 일도 많았다. 각 부처의 고위직급 자리가 다 채워지기 전부터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파월 장관은 당초 아미티지를 럼스펠드의 밑, 즉 국방부 부장관으로 추천했다. 럼스펠드도 아미티지를 인터뷰해 보겠다고 했다. 럼스펠드는 아미티지에게 당신이 곧고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대놓고 말하겠다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럼스펠드의 대답은 “당신이 내 밑에서 부장관을 할 가능성은 50%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미티지도 지지 않고 “내가 부장관으로 장관을 모실 가능성은 0%”라고 응수했다.

    10월16일 아침 럼스펠드는 특수군의 아프가니스탄 투입이 늦어지는 것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합참의장과 북부동맹군은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되고 있다. 북부군이 폭격 중단을 요청하면 합참의장은 언제든 중단할 준비가 되어 있다.”

    럼스펠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CIA와의 의사 소통 문제였다. 대화 도중 럼스펠드가 분을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렸다.

    “이것은 CIA가 주도하고 있는 전략이다. CIA가 전략을 세우고 우리가 집행한다.”

    CIA 부국장 매컬린은 럼스펠드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자기 상관인 테닛 국장이 늘 프랭크스 장군을 보스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매컬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리 팀은 합참의장과 같이 일을 하고 있다. 우리는 합참의장을 지원하고 있고, 합참의장이 책임을 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럼스펠드 “아니다. 당신들이 책임을 지고 있다. 모든 접촉은 당신들이 한다. 우리는 당신들을 따라갈 뿐이다. 우리는 당신들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간다.”

    아미티지 “FUBAR.”

    부시 “뭐라고? 무슨 말이냐 그게?”

    FUBAR(Fucked Up Beyond All Recognition)란 일이 엉망진창으로 뒤죽박죽되었을 때를 일컫는 오래된 군대 용어다.

    아미티지 “나는 누구의 책임 아래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때 비서실장 앤드루 카드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김이 빠져 있었다. 그때 부시가 입을 열었다. “책임은 내가 진다.”

    아미티지 “아니, 아니, 아니다. 대통령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누가 책임자인지는 나도 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여기가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책임자가 누구냐라는 것이다.”

    부시는 나중에 이런 식의 토론에 크게 실망했다고 말했다.

    “나는 분명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아무 말도 안하는 것이 최선일 때도 있다.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국가안보회의 토의 때 부장관이 장관의 의견에 반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때 나는 라이스를 바라보면서 회의를 잘 정돈하라고 말했다.”

    그날 회의가 끝난 후 콘돌리자 라이스는 럼스펠드를 상황실장이 쓰는 작은 방으로 따로 불러내 만났다.

    라이스 “돈(도널드 럼스펠드), 이건 군사작전이고, 당신이 진정으로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럼스펠드 “안다. 그러나 CIA에게 일을 빼앗긴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다. 그것 역시 조지(조지 테닛 CIA 국장)의 작전이다.”

    라이스 “한 사람이 책임을 진다.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다.”

    럼스펠드 “알았다.”

    나중에 라이스는 대통령에게 그녀가 럼스펠드에게 무얼 말해 주었는지 보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각하, 각하는 쿼터백을 두어야 합니다.”

    부시 “내가 쿼터백이 아닌가?”

    라이스 “아니오, 각하는 코치입니다.”

    CIA 무장 팀과 북부동맹군은 탈레반에 대한 미군의 폭격이 개시되었을 때 알 카에다와 탈레반이 교신하는 라디오 통신을 감청했다. 폭발음과 아수라장이 된 현장의 소리가 그대로 잡혔다. 감청팀의 귀에 가장 많이 들린 것은 비명 소리였다.

    콘돌리자 라이스는 상황실에서 카불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카불 함락의 첫 소식은 미 정보계가 보내온 것이 아니라 언론 보도를 통한 것이었다.

    12월7일, 탈레반의 남부 기지였던 칸다하르도 함락되었다. 파쉬툰 동맹군과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맡게 되었다. 이 소식을 알리는 기사는 신문 1면 머리를 장식했다. 그러나 성대한 기념식은 뒤따르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은 승리의 퍼레이드나 항복 문서 조인식 같은 것은 없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아프가니스탄이 함락되었다는 것의 의미가 불명확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110명의 무장 CIA 요원과 316명의 특수군 병사, 그리고 대규모 폭격으로 탈레반 전복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조지 테닛 CIA 국장은 CIA가 성취해 낸 일이 자랑스러웠다.

    돈이 아프가니스탄 부족을 움직였다. 테이블 위의 돈다발은 여전히 전세계적인 언어였다. CIA는 아프가니스탄에 지출한 비용이 현금 7000만달러밖에 안 된다고 추산했다. 이 중 일부는 야전 병원 운영비였다. 대통령은 전체 전쟁 기간을 통해 이것을 ‘최대의 거래’라고 생각했다.

    CIA 본부에서는 전쟁 기간 내내 ‘마술지도’라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술지도란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움직이는, 수십 개가 넘는 고가의 인적 자산과 재원(공작원)을 전자지도 위에 표시해 놓은 것이다.

    공습이 있기 직전 이들에게 가장 먼저 대피 명령이 내려졌다. 무려 100회가 넘는 이동 명령이 내려졌으나 전쟁 초기 단계에서는 단 하나의 ‘자산’도 살해되지 않았다.

    에필로그

    2002년 1월9일, ‘워싱턴포스트’의 댄 발츠(Dan Balz) 기자와 나(보브 우드워드)는 9·11의 첫 10일의 이야기를 다룬 기획 기사용 인터뷰를 위해 럼스펠드의 사무실로 갔다. 발츠 기자가 녹음기를 작동시키고 9·11사태 이튿날 럼스펠드 장관이 제기했던 문제에 대해 먼저 질문했다. 빈 라덴과 더불어 이라크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었느냐는 질문이었다. 럼스펠드는 질문을 듣자마자 폭발해 버렸다.

    “×××…, 도대체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한 거야! 제길, 모든 비밀 얘기를 다 해줬단 말이잖아….”

    나는 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럼스펠드는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서 녹음기를 의식하고는 마치 다른 사람이 소리를 지른 것처럼 꾸며댔다. 옆에 배석해 있던 민간인 특별보좌관 래리 디리타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둘러댄 것이다.

    “래리, 내 옆에서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하나? 이젠 그만하지 않겠나?”

    나는 녹음 테이프에 18초반의 공백을 넣으면 해결된다고 말해 주었다. 나중에 국방부에서 공개된 19장짜리 인터뷰 기록물에는 럼스펠드의 폭발 장면과 ‘xxx’ ‘제길’ 같은 단어들은 다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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