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육체가 도달할 수 있는 美의 최고 경지’ 발레. 까치발과 튀튀가 등장하기까지 발레는 어떤 길을 걸어왔나. 알기 쉽고 흥미진진한 발레 입문 다이제스트.
그렇다면 우리가 발레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해보자. 발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아마 잠자리 날개같이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가냘픈 발레리나가 까치발로 무대 위를 떠다니듯 오가는 환상적인 장면일 것이다. 이 간단한 장면 묘사에 발레를 이해하는 핵심 단서들이 대부분 망라돼 있다.
발레용어로는 쉬르 레 푸엥트(Sur les Pointes)라고 하는 까치발은 발레 테크닉의 출발점이자 발레를 다른 장르와 구별하는 중요한 요소다. 튀튀(Tutu)라 불리는 발레의상은 육체의 언어를 천상의 언어로 끌어올리는 데 한몫하는 동시에, 그 변천사가 발레 테크닉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냘프게 보이는 발레리나들의 체격조건 역시 발레를 환상의 예술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니 발레라는 예술의 핵심요소가 무엇인지는 사람들이 이미 부지불식간에 알고 있는 셈이다. 거기에 조금 살을 붙이고, 발레가 어떻게 생겨나 어떤 변천을 거쳤으며, 음악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등을 곁들이면 발레를 즐기는 데 필요한 기본요소는 갖춰지는 셈이다. 거기서 더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개인의 감수성과 발레예술에 대한 관심도에 따라 선택할 문제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 러시아로
발레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기 전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은 발레의 역사다. 발레가 언제 어떻게 생겨난 예술이며 그것이 어떤 변천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하는 역사적 개관은 발레를 이해하는 밑거름이 된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발레는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 궁정에서 싹터, 프랑스로 건너가 꽃봉오리를 맺은 뒤, 러시아에서 화려하게 만개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태동했을 당시의 발레는, 눈부신 테크닉의 향연을 펼치는 오늘날의 발레와 큰 차이가 있었다. 굽 높은 구두에 한껏 부풀린 스커트, 거추장스러운 머리장식 등으로 잔뜩 모양을 낸 왕족과 귀족들이 플로어 위를 우아하게 왔다갔다하며 즐기는, 여흥용이나 사교춤 수준이었다.
발레가 지금처럼 전문 예술가가 무대 위에서 펼치는 극장예술의 형태로 나아가는 토대를 갖춘 것은 프랑스에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명문인 메디치가 출신 카테리나 데 메디치(1519~89)가 프랑스 왕실로 시집가면서 프랑스에 발레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앙리 2세의 왕비가 된 카테리나가 이국에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조국에서 즐기던 발레를 프랑스에 소개한 것이다.
이렇게 전파된 발레가 프랑스에서 화려하게 꽃 피게 된 데는 태양왕 루이 14세(1638~1715)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루이 14세는 서양 춤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발레 스타라 해도 좋을 만큼 발레 사랑이 유별났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외친 프랑스 절대왕권의 상징이자 전쟁광으로까지 일컬어지는 전제군주가 발레 스타라니,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사실이다. 다섯 살에 왕위를 계승해 어려서부터 심리적 압박에 시달렸을 법한 그는 13세 때 처음 발레를 접한 후 춤에 매료되고 만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27편의 발레에 출연했으며 ‘태양왕’이라는 별칭도 사실 발레에서 얻었다. 그가 15세 때 출연한 ‘밤의 발레(Ballet de la Nuit)’라는 작품에서 황제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태양을 상징하는 장식을 달고 나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면서 루이 14세는 발레 출연에 시큰둥해졌다. 그럼에도 발레 자체에 대한 애정은 여전해 그 중흥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661년에 세계 최초의 무용교육기관인 ‘왕립무용아카데미’를 설립했는데 이는 발레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발레의 과학적 원리를 정리하고 교육의 질을 높이는 한편, 왕이 주재하는 공연에 출연할 무용수들을 훈련시키는 일까지 맡았던 이 아카데미는, 발레가 지배계급의 여흥에서 전문가의 예술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발레의 무대가 왕궁에서 극장으로 옮겨지고, 전문 무용가들이 등장하게 되는 발판이 이 학교에서 마련됐기 때문이다.
프티파가 안무한 ‘레이몬다’의 한 장면
낭만주의가 시들해지면서 유럽 발레가 쇠퇴기에 접어들자 러시아 황실은 유럽의 위대한 안무가와 발레교사들을 러시아로 불러들였다. 루이 디드로(1767~1837), 쥘 페로(1810~92), 아서 생 레옹(1821~70) 등 유럽의 쟁쟁한 안무가, 발레교사들에 이어 프티파도 1847년 러시아 군단에 가세했다. 이후 50여 년을 러시아에서 산 프티파는 처음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극장의 무용수로 이름을 날리다가 약 20년 동안 페로와 생 레옹의 보조 안무자를 거친 뒤, 1867년 드디어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극장(마린스키극장에서 키로프를 거쳐 다시 마린스키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름)의 수석 발레마스터가 된다. 이후 그가 황실극장과 모스크바의 볼쇼이를 무대로 이룩한 업적은 발레사(史)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공적으로 기록될 만하다. 프티파는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돈키호테’ ‘잠자는 숲속의 미녀’ ‘라 바야데르(La Bayadere)’ ‘파키타(Paquita)’ ‘레이몬다(Raymonda)’ 등 무려 57편의 장막 발레를 비롯 숱한 소품과 리바이벌 작품을 남겼다. 마린스키극장과 발레단이 세계 발레예술의 보고(寶庫)로 일컬어지게 된 데는 프티파의 이런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프티파는 특히 클래식 발레의 양식을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2~4개의 독립된 막으로 구성돼 있으면서 줄거리를 전개하는 부분과 춤 자체를 보여주기 위한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 장면이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 프티파 형식의 특징이며, 이는 오늘날까지 고전 발레의 안무 공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고전 발레에서 결혼식이나 왕궁의 축제 등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디베르티스망을 넣기 위해서다. ‘백조의 호수’ 1막에서 각국의 축하사절이 펼치는 춤이나 ‘호두까기 인형’에서 어린 관객들의 박수를 많이 받는 과자왕국 장면에 등장하는 캐릭터 댄스들이 대표적인 예다.
발레 공연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그랑 파 드 되(Grand Pas de Deux) 역시 프티파가 정립한 발레 양식이다. 그랑 파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우선 도입부에 해당하는 아다주(Adagio)가 있다. 남녀 무용수가 느리고 감미로운 선율에 맞춰 등장해 우아한 춤을 펼친다. 이때 눈여겨볼 것은 두 사람의 호흡,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선과 밸런스, 발레리노(남성 무용수)의 세련미 등이다. 이어 바리아시옹(Variation)이라고 부르는 남녀의 솔로가 각각 진행된다. 각자 기량을 마음껏 과시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발레리노는 높고 탄력 넘치는 도약과 빠른 회전으로 탄성을 자아내기 마련이며, 발레리나는 포인트슈즈의 매력을 한껏 과시한다. 마지막 부분은 클라이맥스 중의 클라이맥스인 코다(Coda). 대개 빠른 동작과 현란한 테크닉을 구사하며 객석을 환호의 도가니로 몰아간다. ‘백조의 호수’에서 흑조가 32번의 푸에테(Fouett· 한쪽 다리로 다른쪽 다리를 채찍질하듯 차면서 회전하는)를 선보이는 것도 바로 이때다.
오늘날 공연되는 클래식 발레의 상당수는 바로 프티파의 손길을 거친 작품들이며 대부분 프티파 양식을 따르고 있어 프티파만 제대로 알면 고전 발레가 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잡해 보이는 수학문제도 공식을 알면 쉽게 풀 수 있듯이 발레에도 양식화된 특징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발레를 이해하는 지름길을 발견할 수 있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우아한 자태(위)와 오랜 훈련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발
까치발은 무용수가 고관절 이하 부분을 몸통 바깥쪽으로 완전히 돌리는 외전(外轉), 즉 앙 드오르(En Dehors)와 함께 발레 테크닉의 출발점이자 발레를 다른 장르와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피루에트(Pirouette·선 자리에서 팽이처럼 팽그르르 회전하는 동작)나 푸에테 등의 각종 회전 동작은 발끝으로 서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발레리나의 온갖 화려한 테크닉은 바로 이 까치발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발레리나들이 처음부터 발끝으로 춤을 췄던 것은 아니다. 발레의 역사에서 살펴보았듯 이탈리아 궁중발레는 굽 높은 구두를 신고 공연했다. 그렇게 시작된 발레가 오늘날의 클래식 발레 양식으로 확립되기까지는 적어도 200~300년의 세월이 필요했고, 그 세월이란 다름 아닌 발레리나가 발끝으로 서는 데 걸린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까치발이 언제 처음 시도됐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낭만주의 시대의 신화적인 발레리나 마리 탈리오니(1804~84)가 선구자인 것은 틀림없다. 탈리오니 이전에 파니 비아스(1789~1825) 등이 1820년대에 이미 발끝으로 섰다는 기록이나 그 모습을 묘사한 석판화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누가 처음으로 까치발을 시도했든 간에 탈리오니로 인해 까치발이 완벽한 예술적 가치를 획득했다는 평가에는 이론이 없다. 탈리오니가 1832년 ‘라 실피드(La Sylphide)’에서 발끝으로 무대에 등장, 마치 천상의 요정처럼 무대 위를 떠다니는 장면은 발레사의 가장 혁신적인 순간이자 낭만주의 시대의 개화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기록됐다.
한 명의 발레리나가 탄생하기까지
까치발은 발레 동작을 더없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주지만 발레리나에게는 엄청난 대가를 요구한다.발레리나들이 발끝으로 서기까지, 혹은 거기에 바탕을 둔 각종 테크닉을 마스터하기까지 치러야 하는 고난은 가혹하기까지 하다.발톱이 수차례 빠지는 것은 보통이고 발등 뼈에 금이 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계속되는 멍과 상처로 발가락이 온통 거뭇거뭇하게 변하거나 엄지발가락이 안으로 몰리고 뿌리 부분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무지외반증도 흔하다.
외전 또한 마찬가지다. 외전이 가능해지면 무용수의 다리는 고관절로부터 해방돼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멀리 뻗어나갈 수 있게 된다. 이 자세는 발레의 다양한 테크닉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될 뿐 아니라 발레 동작을 다른 어떤 움직임보다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비결이다. 발레리나의 다리가 춤을 출 때 유독 길어 보이는 것도 그 덕택이다. 발레의 가장 기본적인 테크닉인 발의 다섯 가지 포지션도 여기서부터 나온다.
문제는 이 자세가 하루아침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발뒤꿈치를 맞대고 발끝을 180도 밖으로 벌리는 앙 드오르는 일견 간단해 보이기도 하지만 허리 아래를 온통 몸의 중심으로부터 밖으로 틀어야 하기 때문에 오래 훈련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앙 드오르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8~9세부터 수년 동안 매일 체계적인 훈련과 연습을 거듭해야만 한다.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외전이 되고 나면 발레리나들은 십중팔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양발을 밖으로 벌리며 팔자걸음을 걷게 되기 십상이다.
발레리나들은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만 보고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데 우아한 자태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물론 춤으로 단련된 균형 잡힌 몸매가 눈길을 끌기도 하고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걷는 모습에 기품이 서려 있어 군중 속에서도 돋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발레리나를 한눈에 알아보게 하는 진짜 이유는 바로 앙 드오르의 부산물인 팔자걸음 때문이다.
까치발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바닥에 닿는 부분을 평평하고 딱딱하게 만들어 발끝으로 서는 것을 편안하게 해주는 포인트슈즈다. 이 독특한 모양의 분홍빛 비단신으로부터 발레에 대한 동경이 시작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포인트슈즈야말로 발레리나들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다.
발레를 배울 때 처음부터 포인트슈즈를 신는 것은 아니다. 열 살 이전에 발레를 시작하면 대개 2~3년 정도 훈련을 받은 뒤에 신게 되는데 처음에는 덧버선처럼 생긴 부드러운 발레슈즈를 신은 상태에서 발뒤꿈치를 들고 똑바로 서서 버티는 훈련을 충분히 한 뒤 포인트슈즈를 신는다. 섣불리 포인트슈즈를 신게 되면 잦은 부상으로 고통받기 쉽고 신체가 제대로 발육하지 않을 위험도 있다. 포인트슈즈의 바닥에 닿는 면은 불과 3㎝ 정도인데 그 지점에 체중을 다 실어야 하는 만큼 발가락이나 무릎은 물론 튼튼한 허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포인트슈즈를 신느라 눈물깨나 흘린 뒤 발톱이 처음 빠지면 발레리나들은 마치 통과의례를 치른 듯 뿌듯한 느낌마저 갖는다.
그래서 발레리나들의 발은 울퉁불퉁 못생겼다. 얼마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 출신의 프리마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이 한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클로즈업된 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발레 역사는 치마 길이가 짧아진 기록”
발레의상, 튀튀도 빼놓을 수 없다. 치마 길이만으로 클래식 발레인지 로맨틱 발레인지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튀튀는 발레 양식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발레의 역사는 치마 길이가 짧아진 기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치마 길이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18세기의 발레리나 마리 카마르고(1710~70)다. 카마르고는 여자가 무대에서 절대로 발목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황제의 칙령을 어기고 치렁치렁한 치마를 발목 위 길이로 싹둑 잘라버려 발레리나들을 우스꽝스러운 의상으로부터 해방시킨 주인공이다.
이탈리아 궁중발레에서 오늘날처럼 눈부신 도약이나 빠른 회전을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데는 의상에도 큰 원인이 있었다.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 만큼 온갖 치장을 한 채 테크닉을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전문 무용수가 등장하면서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변화는 남성에게서 먼저 일어나 좀더 높은 도약, 빠른 회전을 시도하는 무용수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18세기는 남성 무용수들의 황금시대로 일컬어진다. 알고 보면 그것도 의상과 큰 관련이 있다. 바지가 치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동이 편한데다 여성들은 사회적 편견 때문에 온갖 까다로운 규칙에 얽매어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 13세는 1714년 여자 무용수들은 발목을 덮는 의상만 입어야 한다는 칙령까지 내린 터였다.
하지만 천부적인 재능으로 남성 못지않게 어려운 스텝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카마르고는 남성들의 눈부신 모습을 보면서 우스꽝스러운 의상에 만족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어느날 밤 한 남성 무용수가 머뭇거리다 자신이 등장할 순서를 놓쳐버리자 카마르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나가 활력 넘치는 테크닉과 연기로 빈자리를 너끈히 메웠다. 볼테르는 이러한 카마르고를 ‘남자처럼 춤춘 최초의 발레리나’라고 일컬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칭찬이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발을 이용한 동작, 즉 발레의 매혹적인 스텝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할 카마르고가 아니었다. 드디어 그는 자신의 테크닉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사건을 저지르고 만다. 과감하게 스커트를 발목 위로 자르고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황제의 칙령을 어긴 것도 심각한 문제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이 발목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부도덕한 일로 치부했으니 결과는 말하나마나였다.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관객들은 카마르고의 용기를 택했다. 문제의 사건(?) 이후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그와 반비례해 발레리나의 치마 길이는 짧아져만 갔다. 한번 짧아지기 시작한 치마 길이는 걷잡을 수 없었다. 낭만주의 시절에는 이른바 로맨틱 튀튀라고 불리는 무릎 길이의 종 모양 스커트로 발전했고 급기야 다리 전체를 그대로 드러내는, 접시처럼 확 퍼진 스커트, 이른바 클래식 튀튀가 발레의상의 대명사처럼 바뀌었다. 또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몸에 착 달라붙는 타이츠가 선보였고 그것도 모자라 현대무용에 이르러서는 누드 공연이 하나의 조류를 이루고 있다. 스커트가 짧아지다 못해 아예 사라지고만 것이다.
발레의상의 역사에서 카마르고의 혁신에 버금가는 중요한 변화는 1832년 ‘라 실피드’에서 나타난다. 당시 마리 탈리오니가 입고 나온 로맨틱 튀튀가 그것이다. 화가인 외젠느 라미가 디자인한 무릎과 발목 중간 길이의 이 아름다운 종 모양의 스커트는 발레의 낭만적인 환상을 자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라미는 발레리나가 공기처럼 가볍게 나풀거리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얇은 천을 여러 겹 겹쳐 이 스커트를 고안했는데, ‘라 실피드’ 이후 약 100년간 이 치마는 발레리나의 공식 복장이 되다시피 했다. ‘지젤’ 2막에서 윌리(요정)들이 입고 나오는 순백의 의상이 바로 로맨틱 튀튀다.
‘발레리노의 교과서’로 불리는 영국로열발레단 주역 이렉 무카메도프의 역동적인 춤
이처럼 발레에서는 치마 길이와 모양 하나도 사조 및 테크닉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치마가 짧아지면서 발레리나들의 다리 테크닉도 날로 현란해졌는데 어여쁜 다리가 스커트 자락 밑에 갇혀 있었더라면 아마 발레를 천상의 춤으로 격상시킨 까치발의 묘기나 공중을 날아다니는 듯한 환상적인 발동작은 개발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다면 발레는 계속 남성의 예술로 남지 않았을까.
음악과 춤의 힘 겨루기
발레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 중에서 작품의 완성도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음악이다. 발레와 음악의 관계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의문은 춤이 먼저냐 음악이 먼저냐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이 있어서 그에 맞춰 춤을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발레의 줄거리와 춤을 구상한 다음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작곡하는 것일까. 오늘날에 와서는 질문 자체가 의미 없을 만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선택의 문제가 됐지만 옛날에는 춤과 음악의 역학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고전 발레 시대에는 단연 발레가 먼저였다. 어떤 작품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구상이 끝나면 대본을 쓰고 그 대본에 따라 작곡가에게 곡을 위촉했다. 이 경우 음악은 춤에 종속적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음악 자체의 완성도 못지않게 얼마나 춤추기에 편리한가 하는 점도 중요한 평가기준이 됐다. 그러다 보니 무용가들은 영감이 떠오르지 않거나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 음악을 탓하거나 곡의 일부를 뭉텅뭉텅 마음대로 잘라내 버리기도 했다. 발레음악의 귀재이자 러시아음악의 거장인 차이코프스키 역시 ‘백조의 호수’ 초연 당시 음악이 3분의 1 가까이 잘려나가는 수모를 겪었으니 다른 작곡가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춤과 음악의 관계를 역전시킨 사람은 스트라빈스키다. 그의 무용음악들은 곡이 먼저 쓰여지고 춤이 따라온 경우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은 춤의 내용과 스텝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20세기의 걸작으로 꼽히는 니진스키의 ‘봄의 제전’ ‘페트르슈카’ 등이 대표적인 예다.
발레와 음악의 대결관계는 신고전주의의 창시자 조지 발란신(1904~83)에 이르러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된다. 발란신은 “모든 음악은 발레로 만들 수 있다”고 선언하며 춤과 음악의 완벽한 조화를 이뤄냈다. 그의 발레들을 보고 있으면 발레리나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기보다는 마치 춤으로 펼쳐지는 음악의 이미지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는 발레를 요정과 공주 이야기에서 해방시켰으며 발레가 스토리 없이도 춤과 음악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장르임을 증명해 보였다.
이처럼 춤과 음악은 때로 긴장관계를 유지했지만 덴마크 출신의 무용가 오귀스트 부르농빌(1805~79)의 말처럼 “발레는 음악의 도움을 통해 시의 수준으로 고양된다.” 음악이야말로 발레의 시적 표현력을 배가시키는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군무의 질서와 역동성은 관객을 춤의 세계로 빨아들인다
하지만 신체의 다른 부분과 상관없이 가슴만 유독 큰 발레리나들도 없지 않다. 그런데 가슴 큰 발레리나들은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다. 우선 연습을 게을리한 것은 아닌가 하는 가시 돋친 선입견이 부담스럽다. 왠지 미련하다는 느낌을 줄까봐 싫다는 발레리나도 있다. 실제 춤추기에도 불편하다. 높이 뛰어올랐다 착지할 때나 빠른 회전 등을 뽐낼 때는 불필요한 진동 때문에 성가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쯤 되고 보니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싶은 발레리나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가슴만은 꼭꼭 숨긴다. 하지만 발레의상은 등이 깊게 파여 있어 브래지어를 착용할 수도 없어 감추는 것이 쉽지 않다. 남모르는 가슴앓이 끝에 나온 고육지책 중의 하나가 랩 요법. 주방에서나 쓰는 투명한 랩으로 가슴을 꼭 싸맨다. 멀리서 보면 전혀 표시가 나지 않고 고정 효과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답답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명의 열기, 또 회전이나 도약으로 인해 흐르는 땀이 꽁꽁 동여맨 랩에 차는 고통이야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발레리나의 몸에서 유심히 봐야 할 곳은, 주관적인 기준이긴 하지만 가슴이 아니라 바로 등이다. 정면을 향해 뽐내듯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당당한 가슴보다 수줍은 듯 비스듬히 돌아선 등이 때로는 은유와 상징의 미학으로 한층 깊은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등의 표현력이라는 것도 각고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냥 고요하게 서 있는 듯한 순간에도 발레리나들은 상체 근육의 상당 부분에 일정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가슴을 쫙 펴고 견갑골 뒤의 근육을 모으면서 어깨를 충분히 끌어내려야 하는데 긴장을 늦추거나 어깨가 구부정한 채 대충 서 있으면 아무런 호소력이 생기지 않는다.
“발레의 테크닉은 발에서, 표현은 상체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상체 중에서도 슬픔의 감정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등이 아닐까. 서정적인 아다주에서 순간 드러나는 등의 깊은 굴곡, 팔을 길게 뻗고 몸을 사선으로 비스듬히 숙일 때 어깨와 등으로 이어지는 선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춤을 테크닉의 향연이 아니라 표현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능숙한 발레리나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경지 중 하나다. 지금까지 다양한 표현의 원천인 발레리나의 뒷모습을 별생각 없이 지나쳐버렸다면 발레 보는 기쁨의 반을 놓쳤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육체가 도달할 수 있는 美의 최고 경지
발레의 역사와 구성원리, 기본적인 테크닉, 그리고 발레리나의 몸에 이르기까지 두루 살펴봤다. 물론 발레사를 장식한 스타들의 이야기, 불멸의 명작들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남아 있지만 이쯤에서 발레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 탐사는 일단 접는다.
춤은 인간의 몸을 통한 것이기에 어떤 표현수단보다 인간의 정서와 가까울 수 있는 장르지만 표현의 추상성 때문에 현대인에게는 어느새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게 되었다. 하지만 춤의 여러 장르 중 발레는 천상의 언어에 비유되는 환상적인 이미지로 폭넓은 계층의 정서에 호소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의 선율에 실어 백조나 실피드가 펼치는 몸짓은 인간의 육체가 도달할 수 있는 미(美)의 최고 경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동화나 시에 바탕을 둔 내용은 어린이들에게는 꿈과 동경을, 어른들에게는 영혼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분석하고 따지기 이전에 그저 각자의 눈높이에서 즐기기만 해도 좋은 장르다. 아름다운 그림 한 편 감상하듯, 고운 선율에 마음을 맡기듯 편한 마음으로 각자 발레 여행을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