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이야기의 힘, 시스템의 승리

영혼으로 만나는 세상

  • 글: 김성태 서강대 강사·영화학

    입력2003-01-22 17: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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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엔터테이먼트 산업의 지배자, 할리우드. 그러나 외부의 수혈 없이는 영생을 누릴 수 없는 창백한 뱀파이어. 그를 낳은 건 찰리 채플린, 그를 키운 것은 존 웨인이었다.
    ‘춤을 춘다. 아니, 차라리 곡예를 부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일상적 조건에서, 정상적인 사람이 저렇게 움직일 수는 없다. 게다가 그처럼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경우란 더더욱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온갖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왜소하고 어정쩡하고 어딘가 덜 떨어진 인물임에도 그는 언제나 최후의 승자가 된다.’

    이는 할리우드 슬랩스틱 코미디(무성영화 시대에 특히 인기를 끈 코미디물의 한 형태. 엉덩방아 찧기, 무언극, 우스꽝스런 충돌 같은 필요 이상의 몸동작이 수반된다)의 전형적인 전개방식이다. 여기서 ‘그’는 찰리 채플린일 수도 있고, 버스터 키튼일 수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볼품없는 남자지만 모든 영웅들이 그렇듯 숨겨진 능력의 소유자이며, 무엇보다 선하고 정의롭다. 관객은 그를 찬미할 수밖에 없다. 평범한, 동시에 위대한 영웅의 탄생이다.

    할리우드의 영광은 바로 그들과 함께 시작됐다. 물론 요즘 할리우드 영화는 그때와 많이 다르다. 꼭 영웅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늘 해피엔딩도 아니다. 이도저도 아닌 복잡한 줄거리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뿌리에는 슬랩스틱 코미디가 있다. 지금의 할리우드 영화는 그에 대한 일종의 확대 재생산이라 할 수 있다.

    성공적인 자기 확장을 이룸으로써 할리우드는 세계 영화들 위에 여전히 ‘물리적으로’ 군림하고 있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외국영화는 사실상 할리우드 영화이며, 심지어 우리는 그것을 기대하고 기다리기까지 한다. 이 대단한 권력을 행사하는 영화들의 시작은 그러나 이처럼 초라하고 볼품없는 광대의 캐릭터, 그것이었던 것이다.

    슬랩스틱 코미디는 1910, 20년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장르다. 사실 장르라는 말이 꼭 맞는 것은 아니다. 당시는 아직 장르 개념이 확립되기 전이었고, 영화는 그저 ‘발명품’에 불과한 상태였다. 그 ‘발명품’이 흥행을 위해 찾아낸 최초의 흥미로운 소재가 바로 슬랩스틱 코미디였던 것이다



    슬랩스틱 코미디 이전에도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대서사극, 환상극 등을 제작해 영화의 새로운 용도(거대한 스펙터클로서의 영화)를 제시했다. 대표작으로 ‘신데렐라’(1900, 프랑스), ‘달세계 여행’(1901, 프랑스), ‘벤허’(1907, 미국), ‘폼페이 최후의 날’(1908, 이탈리아), ‘엘리자베스 여왕’(1912, 이탈리아) 등이 있다. 이중 영화 미학의 첫 발을 디딘 그리피스의 기념비적 작품 ‘국가의 탄생’ ‘편협’ 등은 국내에도 비디오로 출시돼 있다. 하지만 이 모두가 대중적 인기라는 측면에서는 슬랩스틱 코미디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슬랩스틱, 프랑스에서 시작해 미국을 살찌우다

    슬랩스틱 코미디는 프랑스 코미디언 막스 랭데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랭데르는 대략 1905년부터 프랑스에서 슬랩스틱 코미디의 전신에 해당하는 작품들을 만든 감독이자 배우다(채플린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를 자신의 영화적 아버지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슬랩스틱이 발전한 곳은 프랑스가 아닌 미국이었다. 당시 관객들에게 영화는 곧 슬랩스틱 코미디일 만큼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슬랩스틱은 가장 미국적인 형식이 돼버렸다.

    여기서 할리우드를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코드를 미리 머리 속에 넣어 두자. 첫째, 미국 영화 스스로 창안한 것은 없다. 둘째 비슷한 구조와 줄거리를 지닌 영화들이 한꺼번에 만들어지고 아주 오랫동안 시장에 군림했다. 그리고 이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 시스템의 특징과 정확하게 맞닿아 있다.

    슬랩스틱 코미디의 대성공과 약진, 그리고 스펙터클 영화의 대성공은 영화의 발전에 산업화라는 획기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 창고에서 뚝딱거리는 식의 생산으로는 그 엄청난 규모의 흥행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야기의 힘, 시스템의 승리

    찰리 채플린의 대표작 ‘위대한 독재자’

    미국의 스튜디오(제작사)는 대략 1912~28년에 구축됐다. 유니버설사가 1912년, 파라마운트는 1914년, 폭스필름(20세기 폭스 전신)은 1915년에 건립됐다. 그러나 이들 영화사가 규모를 갖추고 확장된 것은 1919년, 채플린과 당시 모험활극 주인공으로 큰 인기를 모은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그리피스 등이 연합해 만든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사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때문이었다.

    채플린 등은 영화의 생산이 좀더 조직적이고 규모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은 인물들이었다. 유나이티드에 이어 콜럼비아(1922), 워너브러더스(1923), MGM(1924), RKO(1928) 등의 거대 제작사가 잇따라 설립됐다.

    비슷한 시기, 영화사들은 동부 뉴욕을 떠나 여러 모로 좋은 조건을 갖춘 서부의 광활한 대지, 할리우드로 이동을 시작했다. 바야흐로 진정한 의미의 ‘할리우드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할리우드는 영화 생산지로서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자연 환경만이 아니었다. 동부보다 개발이 덜 된 탓에 인건비와 땅 값이 쌌다. 주정부도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뉴욕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호조건이었다.

    이 같은 상황은 할리우드의 성격을 규정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부터 영화사의 경제적 이윤이 극대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윤의 극대화를 노린 여러 조치들은 그 자체로 영화생산의 개념을 확정짓는 기초가 됐다. 영화는 하나의 당당한 산업 시스템으로 자리잡았으며, 더 이상 니켈로데온 극장(1905년부터 성행한, 아주 짧은 영화와 버라이어티 쇼 등을 뒤섞어 보여주던 5센트짜리 영화관. 당시 5센트 동전이 구리로 만들어진 데 착안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시대처럼 시정부가 저급하고 유치하다는 이유로 문을 닫아라 마라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1912년, 뉴욕 시정부는 시의 도덕적 질서와 안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이 극장의 폐쇄를 결정한다).

    산업화, 그것은 곧 대량생산을 의미한다. 영화는 그야말로 새로운 노다지였으며, 미친 듯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꿈의 광산이었다. 마치 포드자동차사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자동차를 만들어내듯 모든 공정은 분업화(전문화)되었다. 그렇게 할리우드는 ‘꿈의 공장’이 되었다.

    장인의 시대에서 숙련공의 시대로

    이제 1920년대, 영화 미학이 정점에 달한 동시에 산업적으로는 오늘과 같은 모델이 형성된 시기에 대해 알아보자.

    대량생산은 단순한 경제적 메커니즘이지만 그것이 영화에 적용될 경우, 곧바로 영화적 내용을 결정짓고 그 미학적 수준을 조절하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 대량생산은 보다 더 저렴하게, 또 보다 더 빨리 상품을 만들어내는 일련의 시스템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신속하게 만드는 동시에 돈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 만일 우리가 늘 단순화된 작업, 똑같은 공정만 되풀이한다면, 상품 생산 시간은 급격히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포드자동차의 분업이요 노동의 체계화 아닌가. 할리우드도 영화를 생산함에 있어 기꺼이 이 개념을 차용했다.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이야기를 표준화하면 되는 일이었다.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드느라 애쓰기보다는 어떤 틀을 만들어 그때그때 몇 가지 독특한 상황을 솜씨 좋게 조합해 넣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부극이라면, 늘 등장하는 캐릭터, 사건들이 대략 정리되어 있다. 이렇게 해 아주 쉽게 수많은 아류작을 탄생시킬 수 있다. 바로 이런 생각에서 탄생한 것이 장르 영화다. 서부극, 공포물, 드라마, 멜로물, 형사물, 스타필름 등등. 여기서 장르란 일련의 이야기를 조직하는 법칙 혹은 그에 대한 형식화된 구분이다.

    이로써 할리우드는 정말 ‘공장’이 됐다. 이야기에 법칙을 적용하고, 그 법칙의 각 부분을 책임질 전문가들을 고용해, 여기저기서 따온 장면과 이야기들로 새 영화를 만드는 것. 인물과 상황의 작은 차이 때문에 이들은 각기 다른 영화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같은 형식과 같은 구조를 갖고 있는 것들이었다. 관객들은 속았지만 아무도 그에 마음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들은 서부극의 매혹적인 줄거리에, 멜로물의 따뜻한 위안에 익숙해져 갔고, 그렇게 종류별로 구분된 영화들만을 찾는 ‘중독자’가 되었다. 장르 영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야기의 힘, 시스템의 승리

    ‘가장 미국적인 것’의 상징이 된 서부극 단골 주연 존 웨인

    초창기, 장르는 필연과 금지라는 항목으로 철저하게 규격화된 틀이었다. 서부극에는 필연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요소들이 있고, 반대로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었다. 이는 어길 수 없는 규칙이었다. 게임의 규칙 말이다. 언제나 같은 형식, 같은 코드로 채워진 줄거리들. 그럼에도 장르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비결은 전문가 집단의 등장이었다.

    표준화란 결국 특정 작업의 전문가를 양산하게 마련이다. ‘나사를 조이는 일만큼은 그가 최고’라는 식의. 시간이 갈수록 그는 더욱 단단하게, 더욱 빠르고 모양 좋게 나사를 조이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전문화의 과정을 밟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같은 기능, 같은 형태의 ‘제품’ 사이에도 고가품과 저가품의 질적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아울러 서로 다른 장르간의 교배와 그를 통한 세련된 표현 기법의 개발은 장르 영화에 강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렇게 되자, 사실상, 할리우드 영화의 쉽고도 명백한 줄거리, 숙련된 표현을 따라잡을 만한 타국 영화는 존재하지 않게 됐다. 물론 유럽에서는 미학적으로 할리우드 작품보다 한 차원 높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었지만 흥행을 볼 줄 아는 할리우드의 ‘눈’과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또한 할리우드는 다른 나라의 작품을 모방하거나, 그것을 만든 감독들을 영입했다. 이를 통해 할리우드는 장르의 원칙을 따르면서도 동시에 아주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일련의 작품들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실패로 끝날 경우 수입된 외국 감독들은 자포자기해 도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즈음부터 할리우드는 경쟁상대가 없는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대흥행의 시대였던 1920년대는 배우보다 더 유명한 감독들을 탄생시켰다. 당시 영화들을 보고 싶다면 배우보다는 감독 목록을 작성하는 편이 더 효율적일 정도다. 장르는 곧 스타일이기도 하다. 당연히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진 감독들이 각광을 받았다. 주목할 만한 감독으로는 ‘십계’의 세실 B. 데 밀, ‘눈먼 남편’의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철마’의 존 포드, ‘바그다드의 도적’의 라울 월시, ‘대행진’의 킹 비더, ‘암흑가’의 조지프 폰 스턴버그, 그리고 시외스트룀, 해럴드 로이드, 헨리 킹, 프랭크 보르제이지 등이 있다.

    슬랩스틱 코미디는 미국 최초의 장르영화다. 이를 통해 할리우드는 산업적 성격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 본격적인 장르의 시대가 열리자 슬랩스틱은 다른 장르에 그 ‘리더’의 자리를 내주게 됐다. 바로 서부극이었다.

    서부극은 할리우드 영화인들에게 장르영화만이 살길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미국만이 지닌 이야기, 말을 타고 총을 쏘고 거친 자연과 싸우며, 정의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미국적 환상’의 진원지가 아닌가. 그 안에는, 내 것만이 옳고 소중하다는 우파적이고 보수적인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을 ‘카우보이맨’이라 부르는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따로 생각하기로 하자. 그 이전에 서부극은 미국만이 아닌, 전세계 관객을 매료시킨 거대한 모험극이며 인간의 사투를 그린 원초적이고 상징적인 장르다. 그렇기에 총 쏘고 말 달린 적 없는 나라 사람들도 서부극에 열광하고 그 강렬한 이야기 짜임새에 매료된 것이다.

    서부극은 그런 점에서 상당히 완성된 미학적 조직을 가진 장르다. 드라마의 완급조절, 하나의 극점을 향해 움직이는 이야기 조각들, 그리고 폭발하는 꼭지점(결투)…. 어떻게 보면 모든 ‘영화적인’ 이야기들은 사실상 서부극이 구축한 틀거리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모방한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할리우드는 서부극과 함께 세계 영화산업의 정점에 자리하게 됐다.

    1920년대를 넘어서면서 할리우드는 새로운 산업의 보고이자 미국민의 자부심이 되었다. 전세계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 앞에서 지리멸렬했다. 소년들은 미국인이 아님에도 꿈속에서 말 달리는 총잡이가 되었으며, 미국인 배우가 되었다. 할리우드는 그렇게 사람들을 깊이 매료시켰다.

    오늘날 우리 역시 할리우드의 이 매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볼품없고 심지어는 역겹기까지 한 영화들도 많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할리우드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너무 흥미롭고 화려하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한 ‘위 워 솔저스’ ‘블랙호크 다운’ ‘트리플 엑스’ 등만 해도 그 내용은 천편일률적이며 무모하고 몰상식하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눈에 이슬이 맺히며, 감동과 흥분으로 저도 몰래 가슴을 졸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할리우드의 힘이다. 흔히 할리우드 영화의 세계 극장가 점령을 막대한 물량공세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할리우드는 ‘이야기하는 법’을 안다. 20세기 초나 지금이나 할리우드가 거대한 꿈의 공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능력 때문이다. 환상을 생산하고 그 환상에 젖어 꿈꾸게 하고, 그 꿈으로부터 감화 감동을 받게 하는 능력이다.

    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할리우드는 세계인들의 일상 깊숙이 침투하게 됐다. 할리우드에서 생산되는 여러 관습적 코드들은 세계의 관객을 중독시켰다. 그리하여 이른바 ‘할리우드적’인 것이 아닌 영화들에는 불편함과 지루함을 느끼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를 바탕으로 할리우드는 영화산업뿐 아니라 그와 관계된 갖가지 새로운 산업적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다.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는 더 이상 ‘영화 한 편’이 아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부대 산업과 경제적 이익 추구를 위한 장치들이 뒤얽혀 있다. 캐릭터 산업, 비디오 산업을 넘어 안방 깊숙이까지 틈입한 영화는 코흘리개 어린아이들까지를 그 추종자로 포섭하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산업군이 되었다.

    이는 할리우드에 대단히 유리한 상황인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위험을 배태하고 있기도 하다. 할리우드는 모든 신경을 오직 경제적 이익이라는 초점에만 맞추고 있다. 그래서야 등 뒤에서 다가오는 위기를 감지할 수 없다.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이 서로의 끄트머리를 살짝 쥐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뛰어난 완성도, 빈곤한 예술성

    물론 1940년대까지 할리우드는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그렇다고 이 시기 유럽영화들이 별 볼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영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의 여러 감독들은 영화의 미학적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영화의 의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입장 혹은 시각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재현하는 획기적이고 새로운 표현도구로서의 영화다. 또 한 가지는 이야기를 구사하는 새로운 문화상품으로서의 영화다. 이 둘은 모두 가치 있고 예술적이지만 그 방향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의 영화는 개별 작품이 지니는 미적 완성도, 이야기 구조의 치밀함 등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누벨 바그 시대의 프랑스 영화들,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을 보자. 줄거리는 엉성하고 표현도 긴장감 넘치는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저런 영화들이 어째서 가치 있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리에게 새로운 도구가 하나 있다. 어떻게 쓰는 물건인지 몰라 이리저리 주물러보다 마침내 아주 유용한 용도를 발견한다. 이제 사람들이 오직 그 용도로만 도구를 사용한다. 하지만 그 도구의 쓰임새는 오직 그 하나뿐일까. 어쩌면 다른 가능성은 타진해보지도 않은 채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그런 의문과 탐구, 시도들을 통해 우리는 그 도구의 또 다른 효용과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 발견된 가치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야기의 힘, 시스템의 승리

    거대한 꿈의 공장, ‘유니버설 스튜디오’ 입구

    그런 작업이 영화에도 요구된다. 보통 사람들은 영화를 이야기하는 도구, 재담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영화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유용한 가치일 뿐이다. 누군가는 영화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삶을 뒤흔드는 무엇, 혹은 내용과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이미지 그 자체. 그 또한 영화의 가치이자 독자성이다.

    할리우드 영화는 상당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때로는 미적 완성도에서 흉내낼 수 없는 경지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은 단지 완성도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또한 고정된 틀을 부수고 나가는 혁명과 전복이다. 마치 그림이 캔버스 안에서의 완성도를 추구하는 한편, 그 캔버스를 떠나 현실 속으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입체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 둘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술은 언제나 그러한 두 가지 수준에서 우리를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내적 완성도이며, 또 하나는 완성도 자체를 실험대상으로 삼아 그를 파괴하고 새 길로 나아가려는 시도다. 할리우드가 전자라면, 누벨 바그를 비롯한 (유럽의 실험적) 영화들은 후자다. 문제가 있다면 많은 관객들이 후자를 즐길 만큼 영화의 예술성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사실일 게다.

    바로 그 증거가 1950년대까지 계속된 할리우드 영화의 승승장구다. 대중은 영화의 첫 용도를 ‘재담꾼’으로 설정한 듯했다. 그 역할에 충실한 만큼 할리우드 영화는 많은 각광을 받았다. 프랭크 카프라, 하워드 호크스, 앤터니 만, 멜빈 르로이, 윌리엄 와일러, 프레스톤 스터지스, 오손 웰즈, 마이클 커티스, 존 휴스턴, 앨프리드 히치콕 등이 당시를 화려하게 수놓은 스타 감독들이다.

    그러나 영화는 오락물이면서 동시에 예술품이다. 예술은 고민과 새로움을 요구한다. 할리우드 영화 역시 고착된 관습과 새로운 도전 사이에서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50년대 할리우드는 내적 혼란의 시기였다.

    언뜻 보기에 1950년대는 할리우드가 그 승리를 공고히 한 시기로 여겨진다. 1940년대에 절정을 이룬 장르와 형식이 만개한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정점에 이르면 내리막길을 걷게 마련 아닌가.

    1950년대의 할리우드 역시 그랬다. 새로운 시도나 탐구는 보이지 않고, 스튜디오들은 매너리즘에 빠졌다. 극장가를 찾는 관객의 발걸음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때 할리우드에 새로운 출구를 제시하는 사건이 저 멀리서 발생했다. 장 뤽 고다르 등이 주축이 돼 시작된 프랑스의 누벨 바그였다.

    할리우드의 기준으로 볼 때 누벨 바그 감독들의 작품은 ‘영화’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누벨 바그가 할리우드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할리우드의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50년대의 끄트머리에서 던져진 이 화두는 얼마 후 할리우드를 강타했다. 그 충격으로 할리우드에는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 수많은 독립영화인들이 태어났다. 그렇게 할리우드는 ‘외부의 것’을 들여와 발전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외국→미국 내 독립영화계→메이저영화계로 이어지는 변화와 실험의 고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는 할리우드에 무엇인가 ‘모자란 것’이 있음을 말해준다. 할리우드는 늘 새로운 것 같지만 결코 새롭지 않다. 예를 들어 디지털 작업에 대한 가장 새로운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은 미국이 아닌 유럽이다.

    할리우드는 미국의 자존심이자 가치이며, 동시에 환상이고 꿈일 뿐이다. 놀랍지만 한계도 명백하며, 대단하지만 음흉하다. 할리우드 영화가 미국식 이데올로기의 선전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은 이제 상식에 속하는 일이 돼버렸다. 그 영화들이 미국 내부의 문제를 들춰내고 비판하는 것조차 일종의 ‘대변(代辯)’ 혹은 선전이나 옹호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스파이크 리나 팀 버튼처럼 비판의식 강한 감독 또한 ‘지적 보수주의자’라는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미국식 삶을 비판하고 낱낱이 해부하는 듯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들은 자본주의의 가장 첨예한 상징인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비판의식마저 팔아먹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비판만 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할리우드에는 분명 남다른 가치와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단선적인 시각으로 재단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쨌든 우리는 앞으로도 할리우드 영화를 볼 것이다. 그 막강한 힘과 강한 생존력은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할리우드의 그 놀라운 힘을 구성하는 또 다른 요소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할리우드가 가진 영향력의 상당 부분은 스타로부터 나온다. 어떤 배우가 출연하느냐에 따라 흥행 수익은 현격히 차이가 난다. 할리우드 초창기, 영화계를 이끈 것은 감독이 아닌 배우였다. 감독의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영화가 예술적인 평가를 획득한 이후부터였다.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도 감독이기 이전에 배우였다.

    장르의 시대에도 배우는 여전히 영화의 중심이었다. 스타는 아메리칸 드림의 산증인이었으며, 온갖 이야기의 중심부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배우의 아름다움, 배우를 둘러싼 화려함, 그들을 따라다니는 부와 명예. 오직 스타만을 위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른바 스타 필름이다. 해리슨 포드가 없는 ‘인디애나 존스’, ‘식스 데이 세븐 나이트’는 생각할 수가 없다.

    할리우드가 선사하는 또 하나의 선물은 ‘사건’과 ‘상상력’이다. ‘에이리언’과 ‘딥 임팩트’는 얼마나 대단한가. 할리우드는 사건들을 조합하고 창출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에 대해 생각에 잠기게 한다. 환상은 출구이며, 현실의 매혹적인 블랙홀이다. 할리우드는 우리에게 그 블랙홀을 선사한다.

    할리우드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기술력이다. 그들의 영화제작 관련 기술은 가히 최첨단이라 할 만하다. 그들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도를 계속 한다. 신기술은 영화를 포장하는 데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 기술을 팔아먹는다. 할리우드를 흉내내고 싶어하는 이들이 그것을 산다. 구매자가 겨우 그 기술을 소화할 때 즈음이면 할리우드는 또 다른 버전의 향상된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할리우드의 뛰어난 기술력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 할리우드의 내일을 보장하는 보증수표와도 같다.

    엄밀히 말해 오늘날 대부분의 영화는, 국적과 상관없이 사실상 모두 할리우드 영화다. 할리우드가 만들어놓은 생산의 법칙, 분배의 법칙, 재생산의 법칙을 충실히 따라간다. 그것이 가장 경쟁력 있고 수월한 영화 생산 방식이라는 것을 경험과 모범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품으로서의 영화.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분명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공이다. 그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지만, 만일 상품화하지 않았더라면 영화는 지금껏 생존할 수 있었을까.



    영화는 이제 일상이며, 삶의 일부다. 단순한 ‘발명품’이었던 것을 지금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것은 분명 할리우드의 공이다. 그것만으로도 할리우드 영화는 분명 가치가 있다. 다만 지나친 것이 문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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