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호

한나라당, 백가쟁명 노선투쟁

온건개혁파, ‘수구꼴통’과 결별 시도 소장파는 온건개혁파에 ‘정풍’ 압박

  • 글: 정연욱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jyw11@donga.com

    입력2004-12-24 16: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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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나라당이 변화를 모색하고 나섰다. 당 간판을 바꾸고 체질을 리모델링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분주하다. 문제는 방향이다. 중도냐, 우편향이냐를 놓고 벌써부터 당내 여기저기서 파열음이 일고 있다.
    • ‘한나라당호’의 선장 박근혜 대표의 선택은 과연 어느 쪽일까.
    한나라당, 백가쟁명 노선투쟁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2004년 11월19일 정치발전위원회 연찬회에 참석, 참가자의 말을 듣고 있다.

    한나라당 한 중진 의원은 12월초 출입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당명(黨名) 개정 논의를 화제에 올렸다. 김형오 사무총장이 당명 개정을 공고한다고 밝힌 직후였다.

    “당명을 뭐 하러 바꾸나. 지금 당명을 바꾼다면 대통령선거 앞두고 또 한번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 당명을 바꾼다고 당이 얼마나 변하겠나. 국민은 그런 쇼 없이 편안하게 살고 싶어한다.”

    그는 이어 “나는 줄곧 한 자리를 지켰는데 그동안 당 간판만 4, 5차례 바뀌었다”며 “나중에 내 손자들은 당 간판이 숱하게 바뀐 것을 보고 나를 ‘변절자’라고 하지 않겠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당명 개정 논의에 불만을 토로한 그는 명시적으로 대상을 거명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 과녁이 당명 개정을 주도하는 박근혜 대표 등 지도부에 맞춰져 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박 대표는 17대 총선을 치른 지 8개월이 지난 요즘 당명 개정 드라이브에 재시동을 걸었다. “모든 것을 바꾸겠다”는 총선 공약의 일환이라는 것. 일부 보수 성향 의원들이 “왜 한나라당 간판을 내려야 하냐”며 반발하고 있지만, 박 대표는 “당명을 바꾸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며 물러서지 않을 태세다.

    이것이 한나라당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당내 곳곳에선 파열음이 들려온다. 변화의 당위성엔 공감하면서도 성향에 따라 제시하는 ‘로드맵’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당내 전선(戰線)도 다각화하는 추세다. 박근혜 대표의 리더십을 둘러싼 갈등도 있지만, 국가보안법을 놓고 벌어진 이념적 스펙트럼은 좀처럼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당의 향후 진로를 둘러싼 시각차는 오히려 해묵은 이슈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최근 국가보안법 등을 둘러싼 첨예한 여야 대치 국면에서 한나라당의 내홍(內訌)은 잠시 숨을 고르는 듯 잠잠해졌다. 그러나 잠복기는 그리 길지 않을 듯싶다.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2005년이 내부 노선 투쟁의 분기점이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한나라당 내에서는 당 선진화 프로젝트가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이 프로젝트는 당의 개혁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지만, 정치적 함의(含意)가 거기에만 머무를 것 같지는 않다.

    박근혜 대표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경제, 교육 등 분야별 선진화 과제를 마련중”이라고 했지만, 실무라인에선 선진화 프로젝트를 당 변화의 ‘기폭제’로 삼으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선진화 프로젝트는 당 정체성 문제와 직결된다. 정체성 문제는 곧바로 당내 이념적 갈등의 골에 불씨를 던져 노선투쟁에 불붙일 공산이 크다. 노선 투쟁의 핵심은 인적 쇄신 문제로 불똥이 번질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인화성’이 큰 이슈라는 얘기다.

    한 핵심당직자는 “당헌·당규 개정을 통해 당 정체성을 재정립할 것”이라며 “핵심은 중도 성향 유권자들에게 다가서려는 당 차원의 의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직자는 이어 “당의 노선을 중도 쪽으로 옮기는 문제가 본격화할 경우 이를 주도하는 세력과 이에 반발하는 세력의 충돌이 불가피하지 않겠냐”며 “자연스럽게 인적쇄신 문제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 지도부는 선진화 프로젝트를 통해 당명 개정을 비롯한 변화의 카드를 제시하며 당의 변화를 주도한다는 전략이다. ‘수구꼴통’으로 굳어진 당의 체질을 획기적으로 바꿔 집권 기반을 다지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노선투쟁을 내다보는 접근법은 미묘하게 갈리고 있다. 당내 입지와 정치적 성향에 따라 편차가 크다. 여기에 2007년 대통령선거를 내다보는 정치적 셈법이 깔려 있는 것은 물론이다.

    우선 당권을 쥔 박 대표 진영은 공개적으로 ‘온건개혁론’을 표방하고 있다. 이른바 ‘자산과 부채 승계론’이다. 과거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진 당의 역사를 잘못된 것은 고치고 이어갈 것은 계승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박 대표는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당내 일각의 ‘당 청산론’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 때문에 당 선진화 프로젝트가 폭발성을 띠기는 어려운 것 아니냐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영남권 중심의 보수 성향 의원들은 이런 변화의 움직임에 시큰둥한 반응이다. 이들은 섣불리 중도로 옮기다가는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도 놓치는 꼴’이라며 당의 보수적 정체성을 분명히 할수록 지지층을 더욱 결집시켜 집권 기반을 다질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들에겐 뿌리깊은 ‘영남 적자(嫡子)론’이 자리잡고 있다.

    반면 온건개혁론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지도부가 명운(命運)을 건 당 개혁이 무늬만 바꾸는 겉치레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현실과 타협해버리면 아무것도 건질 수 없다는 절박감도 배어 있다.

    우선 이재오, 김문수, 홍준표 의원 등 비주류 진영이 재창당 수준의 당 개혁을 강하게 촉구하고 나섰다. 물론 노선 투쟁의 주도권을 선점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이들은 박 대표 체제의 온건개혁론에 날을 세운 느낌이다. 최근 불기 시작한 ‘뉴 라이트(New Right) 운동’이 이들의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들이 소속된 국가발전전략연구회는 12월11일 경주에서 뉴 라이트 운동을 주도하는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 서경석 조선족교회 목사 등과 토론회를 갖고 한나라당에 대한 자성의 ‘쓴소리’를 쏟아냈다.

    박계동 의원은 “한나라당은 이제 정풍(整風)과 같은 자기 혁신이 있어야 하며 새로운 사람을 들여야 한다”고 했고, 홍준표 의원도 “당내 파괴와 해체를 통해 혁명에 나서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재오 의원은 이에 “한나라당은 인적쇄신 등 혁명을 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차기 대권주자인 손학규 경기지사는 노선투쟁의 지향점을 더욱 분명히 했다. 손 지사는 12월13일 당 출입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한나라당의 주도세력이 미래지향적 자유주의 세력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아무리 새 피와 젊은 피를 수용하더라도 낡은 틀로는 안 된다. 당의 기본 틀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 지사의 행보는 내년부터 본격화할 노선 투쟁에 대비,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겠다는 포석으로 보인다. 여기엔 민주화운동 경험과 도정(道政) 경험을 아우른 자신의 리더십이 당의 미래지향적 방향과 맥이 닿아 있다는 자신감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또 다른 대권 주자인 이명박 서울시장은 사태를 관망하며 대응 수위를 조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시장도 뉴 라이트 운동을 주도하는 K목사 등과 교감을 나누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정국 상황에 따라 자기 목소리를 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시장과 손 지사가 비주류 강성그룹과 교감을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 박 대표의 당 개혁이 미적지근할 경우 노선 투쟁은 걷잡을 수 없는 내분 사태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게 당내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박근혜, 이회창·최병렬 전철 밟나

    당내 비주류 인사들이 박 대표를 겨냥해 노선투쟁의 기치를 든 것은 박 대표 주변에 강경 보수성향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 최근 박 대표와 김덕룡 원내대표 등 지도부의 대응이 노선투쟁의 빌미가 되고 있다는 것.

    박 대표가 국가보안법 정국에서 “열린우리당의 국보법 폐지 당론 철회가 없으면 대안 논의도 없다”며 여야 절충의 가능성을 차단한 것이 단적인 사례로 지적된다. 국보법 사수(死守)에 매몰되면서 국보법의 전향적 개정 가능성을 내비치던 ‘개혁성’이 실종됐다는 설명이다.

    홍준표 의원이 최근 기자들과 만나 “국보법 (처리) 국면이 박근혜 체제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며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쇄신운동이나 신(新)정풍운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와 관련, 당내에선 박 대표가 이회창 전 총재나 최병렬 전 대표와 비슷한 3단계 코스를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이 전 총재와 최 전 대표의 전철을 박 대표가 밟기 시작한 게 아니냐는 것.

    이 전 총재와 최 전 대표는 ‘개혁성’을 앞세워 당권 탈환에 성공했으나 곧바로 대세론에 안주했다. 당내 다수파의 기반 굳히기에 빠져들수록 역설적으로 그들의 무기인 개혁성은 퇴색해갔다. 끝내 이들은 국민으로부터 ‘가장 비개혁적’이란 불명예를 안고 물러나야 했다. 이 전 총재는 2002년 초 ‘당권·대권 분리’ 논의를 거부하면서 ‘비개혁적’이란 낙인이 찍혔고, 최 전 대표는 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한 결단을 주저하다가 소장파의 역풍에 부딪쳐 낙마했다.

    당내에선 박 대표도 최근 2단계인 ‘대세론’ 안주 국면에 진입한 게 아니냐는 얘기가 무성하다. 자칫 자파 인사들을 끌어들이는 데 급급해 획기적 당 쇄신의 끈을 놓칠 경우 박 대표를 따라다니는 ‘대중적 인기도’도 ‘찻잔 속에 태풍’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

    한 소장파 정치학자는 “박 대표는 한나라당을 전일적으로 지배하던 ‘이회창 체제’에 맞서 과감하게 ‘NO’를 외쳤다. 이런 ‘강단’이 국민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줬던 것”이라며 “그런데 요즘 박 대표는 정쟁의 늪에 빠지고 자파 의원을 확보하는 데 급급한 인상을 준다”고 지적했다.

    박 대표를 지지하는 주류 진영에서도 이 같은 시각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다. 박 대표의 ‘상품성’을 인정하면서도 최근 현실과 타협하는 듯한 보수 일변도 행보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

    박 대표의 한 측근은 “취임 초 여의도연구소가 극비리에 실시한 표적집단면접(FGI)에서 한나라당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박근혜’에 투영되지 않아 박근혜의 상품성은 건재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그러나 최근 들어 박 대표 주변에 강경 보수 인사들이 집중 포진하며 완고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박 대표가 한나라당의 일상성에 빠져들고 있다는 징후”라고 비판했다.

    또 하나의 복병 ‘이회창 변수’

    실제 박 대표가 취임 초기 내건 개혁적 구호는 이미 빛이 바랜 지 오래라는 느낌이다. 호남에 다가서려는 변화의 노력은 정의화 의원만이 외롭게 펴고 있을 뿐 당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챙기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의 조선노동당 입당 의혹은 때 아닌 사상논쟁으로 번져 한나라당의 변신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 됐다. 한나라당을 향한 시중의 독설이 기정사실화하는 양상이다.

    한나라당의 진로와 맞물린 또 하나의 ‘복병’은 ‘이회창 변수’다. 이미 서울 남대문 부근에 개인사무실을 연 이 전 총재는 정치와의 절연을 선언했지만 이 전 총재 주변 상황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전 총재 주변 인사들은 박 대표의 리더십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할 경우 자연스럽게 ‘이회창 대망론’이 부상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최근 이 전 총재 측 인사가 한 대권주자 진영 인사를 찾아가 “만약 이 전 총재가 움직일 경우 당신들이 먼저 반대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는 후문이다. ‘이회창 변수’는 당이 걷잡을 수 없는 내홍에 휩싸일 경우 자연스럽게 전면에 떠오를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와 관련, 이 전 총재가 당을 맡아 추스리되 나머지 인사들은 대권 후보군으로 재편하는 2원적 당 운영 설계도가 벌써부터 나돌고 있다. 이 전 총재의 당권 복귀설은 향후 내각제로의 권력구조 개편 가능성과 맥이 닿아 있어 주목된다.

    박 대표 진영이 소속 의원 접촉에 주력하며 당내 기반 굳히기에 돌입한 것도 사실상 이 같은 움직임과 무관치 않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이명박 서울시장과 손학규 경기지사 등 차기 대권주자의 당내 진입 장벽을 높이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박 대표측이 진입 장벽 쌓기에 급급할 경우 이 시장과 손 지사는 최악의 상황에서 당과 결별하는 수순을 밟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005년은 시련이자 기회의 해

    한나라당의 노선 투쟁은 심상치 않은 외부 상황과도 맞물려 있다. 당 개혁의 성패가 향후 정국에 미칠 파장이 심대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마(魔)의 30%’ 지지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일시적으로 지지층이 결집하고 있는 반면 한나라당에 비우호적인 유권자층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 개혁에 실패할 경우 다수의 중도 성향 유권자가 한나라당을 외면할 것이라는 게 지도부의 고민이다.

    박형준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은 “한나라당 지지율은 30%선이지만, 반(反)한나라당으로 볼 수 있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을 합하면 여전히 45%선을 유지하고 있다”며 “한나라당은 반한나라당 정서층을 공략하는 데 전략의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이 2006년 초 지도부 구성을 앞두고 치열한 내부 노선 투쟁을 벌이는 것도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 새 지도부가 열린우리당과 ‘반한나라당’ 공조 전선을 구축하면 한나라당으로선 마땅한 돌파구가 없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민주당의 향배도 문제다. 여권이 지방선거 전후 민주당과 전격 통합, ‘호남+충청’연합을 통한 영남 포위전략을 또 다시 구사한다면 한나라당은 속수무책이라는 게 정치권내 중론이다.

    한 3선 의원은 “당내 10%의 꼴통 세력을 정리해서라도 중원(中原)의 15%를 차지한다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런 뼈아픈 변화와 노력이 없으면 한나라당은 불임정당으로 역사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05년은 한나라당에 시련이자 기회의 한 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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