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호

‘소강국(小康國)’이 한국의 미래 모델

이분법 뛰어넘는 접속·융합의 패러다임으로 뛰어들자

  • 글: 김광웅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kwkim@snu.ac.kr

    입력2004-12-24 17: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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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에 대해, 그리고 미래에 대해 우리는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가.
    • 대한민국은 시대와 패러다임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며 향후 진로에 대한 전략을 진지하게 준비하고 있는가. 한국의 미래상은 ‘작지만 단단하며, 여유 있고 반듯한 나라’여야 한다.
    ‘소강국(小康國)’이 한국의 미래 모델

    한국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사진은 목판인쇄술 등 한국에서 발원한 세계적인 문화와 인터넷 강국, 월드컵 4강 등 한국이 성취한 것을 담아낸 영상물 ‘Korea’s IT’.

    한국의미래를 준비하고 설계하려면 어떤 성격의 국가모델을 설정해야 할까. 최근들어 부쩍 이런 생각이 드는 까닭은 현재 한국의 국가성이 과거로부터 내려온 자본주의 국가관과 다른 궤적을 그리는 듯해서다. 물론 현 시점의 한 편향이 국가의 본질 자체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과거와는 다른 논의가 분분하다는 사실이다.

    과연 국가발전의 진로를 바꿀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바꿔야 할까. 선진자본주의 국가를 지향해야만 할까. 안보국가, 지식국가로 가야할까, 아니면 친환경적 중간 수준의 국가로 나아가야 할까.

    국가에 대한 인식에서 어떤 이는 소국주의를, 어떤 이는 대국주의를 좇는다. 국가의 성격에 대한 인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한 국가의 성격과 이미지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전통, 국토, 인구, 경제력, 정치력, 리더십, 지정학적 위치에 따라 형성된다. 그러므로 한국은 전세계에 괜찮은 나라, 보고 배울 것이 많은 나라, 가보고 싶은 나라, 더불어 협력할 만한 나라 등 자랑스러운 나라로 비쳤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양만이 아니라 나라의 속을 바꾸는 일이 수반돼야 할 것이다.

    이는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나라의 법과 제도, 정책과 프로그램, 방침과 지침 등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때로는 사회와 국민을 얽어매는 거미줄이 된다. 이 거미줄을 하루아침에 걷어낼 수 있을까. 국민을 옥죄는 이 망(網)을 걷어내고 나아가 생산양식까지 바꾼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나라엔 현재 사회와 국민을 옥죄는, 위헌에 해당하는 법과 시행령이 근 100개에 이른다. 대한민국은 철저한 행정국가인 것이다.

    지난 고도성장기에 우리는 목표를 쫓아 허둥댔다. 이제쯤 여유를 가져보면 안 될까. 웬만큼 여유 있고 편안한 나라, 게다가 ‘반듯한 국가’면 더욱 좋으리라. ‘여유’나 ‘반듯’은 서기(西技)보다는 동도(東道)의 의미가 깊은 말이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행정수도를 옮기는데 마치 다리 놓고 도로 닦는 건설프로젝트 세우듯 하는 식은 서기 쪽이지 동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서기 쪽도 제대로 못 된다. 과학적인 것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행정수도를 옮기겠다고 지정한 곳의 최근 10∼30년간 평균 기온, 강수량 수치 하나 밝힌 적이 있는가.

    ‘소강국가’를 지향하려면 국가에 대한 기본 인식부터 바꾸고 시대 변화에 맞게 패러다임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국가의 진로에 대한 바른 전략이 서기 때문이다.

    여유를 갖는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어느 정도 충족된 다음의 이야기다. 여유에는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따라야 한다. 여유 있고 반듯한 나라를 ‘소강국가(小康國家)’라고 칭하면 어떨까.

    왜 소강국가여야 하는가

    21세기 초 한국의 현실과 그 위상은 매우 애매하다. 단적으로 말해서 경제, 무역, 인구 등 인구경제사회학적 지표가 그리 나쁘지 않고 오히려 세계적 수준(11∼15위)에 이르렀는데도 국가나 정부의 경쟁력은 한참 처진다. 더욱이 국제경제 및 국제정치질서에서도 한국의 위상은 주류 대열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선진국은커녕 주변부 국가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란 예감마저 든다. 최근 어느 정신분석학자는 한 좌담에서 한국의 위상을 유럽의 베네룩스3국 중 하나 정도로 치부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 이후 나라의 위상에 혼란을 자초했다. 반미(反美)성향이 더욱 고개를 들고 일부 친북세력이 국정에 참여함으로써 한국의 대내외 이미지를 뒤바꿔놓았다. 물론 정책에서 진보 성향이 없을 수는 없다. 보수만 해도 지난 30년 동안 그 공과(功過)가 뚜렷해 더 이상 허물을 덮고 새 비전을 제시하는 데 뚜렷한 한계를 보인다. 정책의 선회는 어쩌면 시대의 흐름과 궤적을 같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대는 항상 변화를 맞는 법이다. 지금이 반드시 그 때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을 표방하기에 적절한 시기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지나치게 기능주의 또는 도구주의적인 인식에 몰두하다보니 정작 귀한 가치들을 간과한 것이 많다. 따라서 기존 권위와 질서가 과연 존중해야 마땅할 만한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가치를 지녔는가를 따져볼 때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 정부의 정책 전환은 일견 역사적 전환기에 맞는 시도라 하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난 1년여 동안 경제사정이 나빠지고 안보에 관한 국민의 의식이 첨예하게 대립해 사상적 갈등으로 비화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정치 이데올로기 면에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부터 사회민주주의 국가로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제시해 국론 분열을 야기했다.

    과연 나라의 명운(命運)과 진로가 한두 정권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는 것이며, 또 그래야 하는가. 이런 물음이 절로 나오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새삼 시대와 패러다임의 변화에 맞춰 국가의 진로를 확인하는 작업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이러한 작업에서는 기본적으로 국가를 작게 볼 것인지, 크게 볼 것인지부터 정해야 한다. 즉 소국주의냐, 대국주의냐의 문제다. 흔히 미래는 전자공화국(electronic republic)이 될 것이란 말들을 한다. 컴퓨터의 발달로 가상공간을 통해 많은 요소가 거미줄처럼 얽히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한편으론 나라를 이대로 변해가게 둘 것인가, 아니면 진로를 새로 모색해 생산양식부터 바꿀 것인가도 논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 같은 여러 주장들을 감안해 소국-대국론에서 논의를 출발할까 한다. 국가의 규모와 그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논한 뒤 발전전략을 논의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10여년 전 21세기를 준비하며 한국의 미래를 그려본 바 있다. 당시 필자는 한국의 미래 예측이 너무 안이하고, 통시적이거나 통사적이지 못하며 패러다임 변화에 기초한 논의가 드물고 변할 것과 변하지 않을 것을 구분하지 않으며 역사의 반복성과 자기 상사성(self-similarity), 그리고 세계사의 흐름과 함께 한다는 점 등을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신동아’ 1994년 1월호 ‘2020년의 한국을 읽는다’ 참조).

    한국의 미래, 구체적으로는 국가발전의 전제, 목표, 패러다임, 수단과 전략 등을 말하는 데 있어 필자는 ‘소강국가론(小康國家論)’을 제안한다. “웬만큼 여유 있는 국가” “그런 대로 편안한 사회”(이는 덩샤오핑의 표현이다)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웬만큼’과 ‘그런 대로’에 비중을 두고 싶다. 즉 소강국가는 물질적으로 어느 정도 충족되고 남을 배려하며 정당한 법질서를 지키려는 나라를 일컫는다. 완벽한 물질적 충족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이룬다 해도 불행이 더 클 수 있다. 국민소득 2만달러, 3만달러도 좋지만 그보다 정신적 안정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다.

    경제적·정치적인 국가 위상도 중요하지만 내가 사는 나라가 국제적으로 괜찮은 나라, 보고 배울 게 많은 나라, 가보고 싶은 나라 등 자랑스런 나라였으면 하는 것이다. 대외적으로 비치는 국가의 이미지나 성격뿐만 아니라 그 내면적 속성도 가려봐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국가 안의 여러 속성(법, 제도, 정책 등)이 소강국가를 지향하기에 거침이 없는가, 문제가 있다면 바꿀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논자들이 대개 국가가 내부적으로 안고 있는 여러 제도적·비제도적 속성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국주의냐, 대국주의냐

    나라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는 논의의 출발이다. 한국, 한반도는 어떤 성격의 나라인가. 큰 나라인가, 작은 나라인가. 강한 나라인가, 약한 나라인가. 작지만 강한 나라인가. 크지만 약한 나라인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나라인가. 보잘것없는 나라인가. 문화유산이 풍부해 외국인들이 오고 싶어하는 나라인가, 그 반대인가.

    한 나라에 대한 인식은 시각에 따라 이렇듯 다양하게 나타난다.

    스스로 작은 나라, 약한 나라로 인식하는 것을 소국주의라 하고, 자신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나가려는 것을 대국주의라고 한다. 후자는 경제성장이 뒷받침 됐고 북한에 대해 우월감이 생겼던 1990년대 한국에 나타난 현상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소국주의를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라크 파병을 놓고 벌인 논란을 예로 들면 “미국의 강력한 지원 없이는 한반도의 평화나 사회안정이 불가능하리라는 파병론자들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작은 나라, 약한 나라로 파악하는 관점에 기초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군에 속하고 세계 11위의 교역량을 자랑하며 엄청난 규모의 군사력을 보유한 오늘의 한국을 과연 소국이라 간주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약육강식 논리가 압도하는 국제 상황에서 소국이란 자의식은 “열등감과 우월감, 그리고 현상용인 심리와 현상변경 심리의 복합관계 어딘가에 위치”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소국의식으로부터 두 가지 상이한 정치적 태도가 나타날 수 있는데, 하나는 소국의식을 수용하면서 대응전략을 모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국의 지위를 거부하고 강대국으로 변신하려는 지향이다. 전자를 소국주의, 후자를 대국주의라 하는데 물론 그 구체적 모습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소강국(小康國)’이 한국의 미래 모델

    한국은 아직 ‘여유’와는 거리가 멀다. 사진은 경기침체 장기화로 매출이 급감한 음식점 주인들이 2004년 11월 2일 서울 여의도 한강 둔치에서 세 부담을 낮춰줄 것을 요구하며 솥단지를 내던지며 시위하는 장면.

    소국의식이 정치화하는 계기는 민족주의가 부상할 때다(참고로 구한말 위정척사파의 대표 최익현은 전통적인 사대교린책을 고수할 것을 주장했다. 개화파의 비조인 균세론가 박규수는 조선이 마치 “진(晋)과 초(楚) 사이에 위치했던 정(鄭)과 같은 소국”임을 강조하면서도 “동양의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한다”는 점을 적극 활용하는 전략적 대응을 강조하고, 일본과의 수호조약체결을 주도했다. 그런가 하면 자강론자 신채호는 당시 조선의 상황이 “도덕이 부패하고 경제가 곤궁하여 교육이 부진하며 모든 권리가 타인의 손에 돌아가며 인민의 기상의 타락이 극도에 이르렀다”고 탄식하면서도 과거 영웅적 기상과 정신을 되살림으로써 강한 국가의식·민족의식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잠재적 지향성만으로 본다면 자강의 구상은 대국주의적 성격을, 사대의 구상은 소국주의적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소국주의라고 해서 정치적 나약함이나 사대주의를 강화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사에는 소국의식을 약소민족의 정치적 자주권과 독립을 쟁취하는 적극적 원리로 수용한 민족주의자가 많다. 이를테면, 안중근은 스스로 약함을 부정하지 않되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공존의 논리, 평화의 질서를 구성하려는 적극적 사유양식을 보였다.

    소국주의라고 해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함석헌은 부국강병적 발전주의를 거부하는 노자의 평화사상에 근거해 소국의식을 건강한 자의식으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한편 민족경제론의 주창자인 박현채는 대외의존적인 ‘종속형 경제’를 비판하고 ‘국민경제의 자립적 구조’ 창출을 강조했는데, 이는 소국의식의 국가적 전유(專有)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권위주의에 대항한 민주화투쟁은 민중과 민주의 이름으로 국가권력의 일방적인 근대화 지향성에 도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상에서 소개한 여러 입장은 박명규 교수의 논지를 따른 것으로 필자의 원 논문에서는 모두 인용근거를 밝혔다).

    대안적 패러다임의 필요성

    사상가들의 주장은 이러한데, 역대 정부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먼저 이승만 정권은 분단상황을 충분히 활용했다. 강력한 반공·승공 논리를 민족주의적 정서와 연결함으로써 대미종속과 내부의 권위주의를 결합하는 효과를 낳았다.

    박정희 정권은 부국강병론을 내세웠는데, 소국의식을 근대화 기획과 결합했다고 평가받는다. 강대국에 대한 선망이 없지 않은 것이다. 나아가 “대국지향의 체제 이데올로기를 민중의 소국의식과 편의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권위주의적인 통제와 동원을 가능케 하려는 정책이었다.” 오늘날 이것을 ‘종속적 발전전략’이라고도 부르는데 강대국을 지향하는 ‘발전’과 소국의식의 부정적 특징인 ‘종속’이 똑같이 중시되던 시기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한국에 대국주의 경향이 나타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해외로 자본이 나가고 국제적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는 등 대외확장의 경험이 본격화되는 동시에 고도경제성장으로 인한 자신감, 북한에 대한 자신감이 급기야 흡수통일론을 주장하는 분위기로까지 진전됐다.

    한편 1990년대에 부각된 생태주의는 발전주의나 대국주의를 비판하는 사상과 실천운동으로 자리매김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학계 일각에선 1990년대의 변화를 대국주의라는 개념 대신 신부국강병론, 신민족주의론 등으로 규정하는데, 신민족주의 열풍은 “한국 대자본의 성장과 해외진출과 관련되어 있으며 대자본의 이해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한국이 현 세계체제의 반주변부 혹은 반중심부 단계를 넘어서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파악하는 입장이다.

    끝으로 ‘대국주의와 소국주의의 긴장’을 강조하는 시각이 있다. 그런 긴장을 통해 “작지만 단단한 나라, 민족의 존엄과 민중의 권익이 민주적으로 지켜지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주장은 해방 후 김구가 바랐던 국가의 상(像), 즉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는 생각과도 통한다.

    이 같은 입장은 궁극적으로 근대가 우리에게 부여한 ‘감당과 극복’의 이중과제를 해결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대국주의와 소국주의 사이에 가로놓인 긴장을 견지하면서 양자택일의 논리가 아닌, 양자의 한계를 모두 넘어설 대안적 패러다임과 전략을 모색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식 전환이 전제조건

    한국의 미래와 관련해 현재 논의되는 주장-지식국가, 안보국가, 환경국가, 문화국가, 중간국가 등-은 저마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어떤 가능성이 있는가는 한 나라의 역사, 문화, 규범, 국민성, 법제도와 정책, 대외정치경제환경 등과 함수관계를 갖는다. 이를 무시하고, 또한 역사의 반복성과 자기 상사성을 외면하면서 막연히 감지하는 미래의 변화만을 주장한다면 구두선에 그치고 말것이 자명하다.

    그러므로 국가의 미래설계를 함에 있어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가능한 처방을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선 새로운 생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것이 급선무다. 시대와 사회가 바뀌고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가는데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는 이들이 새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않으면 큰 문제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분법의 극복 ▲부분과 전체를 함께 보는 것 ▲공간개념에 대한 인식의 전환 ▲소유가 아닌 접속에 대한 인식 ▲융합의 시대에 대한 인식 등이다.

    첫째, 이분법의 지양은 오늘날과 같은 양자 패러다임의 시대에서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된다’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을 합쳐 하나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이다.

    다시 말하면 ‘안보국가는 안 되고 환경문화국가는 된다’가 아니라 ‘국가의 안전도 보장하고 친환경문화국가나 친인성(인간존중)문화국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에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가 어느 경우에나 타당해야 한다. 이를테면, ‘미국은 안 되고 중국은 된다’와 같은 발상은 전근대적인 것이다. ‘산업화는 안 되고 환경화는 된다’는 언술도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인권은 되고 안보는 안 된다’는 인식도 마찬가지다.

    현재 노무현 정부의 국가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여러 정책에서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부정적인 인식이라는 오해를 살 염려가 없지 않고 동시에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둘째, 국정을 맡은 정부는 부분과 전체를 함께 볼 줄 알아야 한다. 과거의 패러다임에서는 부분 따로 보고 전체도 따로 보았다. 이제는 전체를 부분의 합이라고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체를 보는 중요성을 더 강조한다. 그렇다고 부분이 소중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부분이 곧 전체라고도 한다. 따라서 정부는 허브라는 인천 영종도를 중심에 두면서도 상하이(上海)를 보고 간사이(關西)를 보고 나아가 북동아시아의 질서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 분야에 대한 인식에 그치는 게 아니라 다른 분야에 대한 인식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는 다양화, 다원화, 지방주의를 지향한다.

    현 정부는 과학 너무 몰라

    셋째, 공간개념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다. 허브나 노드(nod) 같은 물리적 공간을 무시할 수 없으나 오늘날의 공간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흐름의 공간(space of flow)이지 장소의 공간(space of place)이 아니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는 동북아시아의 중요성이나 인천 영종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되 그것의 유동성과 역동성을 더 중시하고 그렇게 인식해야 한다. 어느 한 곳에 고착하는 인식은 과거의 생각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만일 연기와 공주에 기업도시를 건설하든 또 다른 허브를 만들든 간에 서울과 이들 도시 사이의 흐름부터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넷째, 접속의 시대에 대한 인식이다. 이젠 소유가 아니라 접속과 활용의 시대다. 내 장기(臟器)에서 나온 특수 단백질이 내 것이 아니고 이를 발견한 대학연구소의 것이 되는 시대다. 우리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도 활용만 할 수 있다면 힘은 거기서 나온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산(時産)이지 물질적 재산이 아니다. 용미(用美)나 용중(用中), 용일(用日)을 주장하는 것이 이런 시각일 것이다.

    다섯째, 융합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인식하고 정부는 기능간 경계를 뛰어넘는 크로스 오버를 지향해야 한다. 한 분야에 집착해선 안 된다. 융합의 시대엔 네트워크가 당연시되고 전략적 제휴, 가상조직 등이 활성화되며, 수평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평면적 위계질서를 선호하게 된다. 하이어라키(hierarchy)가 아니라 헤테라키(heterarchy)다. 나아가 자연, 인문, 사회 등 기능적 분업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인지과학으로 통합돼가는 과학의 세계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융합의 시대에 인문사회과학의 도움 없이 자연과학과 공학이 날개를 펼 수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분법적인 발상으로 과학진흥책을 수립한다. 요즘엔 재료공학과 패션의류직물이 만난다. 전기전자학, 물리학, 그리고 의학이 만난다. 과거에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가 만나 함께 일을 하는 것이다. 복잡성의 시대(era of complexity)에선 당연한 일이다.

    나아가 이젠 사이보그를 생각해야 할 때다. 칩을 머리에 심으면 정신질환의 고통이 가실 때가 곧 올 것이다. 심장을 대체하고 다리를 만들어 끼워넣을 수도 있다. 화학반응을 전기신호로 바꿔 전달하던 것을 신호가 직접 작동하여 병을 고친다. 화학반응을 이야기하는 것은 인체가 생화학물질(chemico-physiology)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본질이 쉽게 바뀔까. 역사는 반복하고 자기 상사성을 갖는데 어떤 전략으로 나라의 진로를 바꿀 수 있을까.

    앞에서 말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21세기와 22세기를 준비하면서 기본 입장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 다음엔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추구할 것인지가 숙제로 남는다.

    먼저 유전자를 조작해서 체세포를 바꿀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즉 국가와 정부가 변화와 발전을 위한 정책을 펴면 그 분야의 문제가 해결되느냐의 문제다. 정책을 잘 만들어 집행하면 문제가 풀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견에 불과하다. 국가의 각 정책은 논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항상 부딪친다. 산업정책과 환경정책의 논리가 정반대이고, 안보정책과 인권정책의 논리가 평행선을 긋는다. 과학과 교육 정책이 노동정책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으며 재정과 금융의 정책논리가 항상 수렴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노무현 정부는 소득 2만달러 달성을 주창하면서 한편으로 분배와 평등을 강조한다. 정책논리가 이러할진대, 하나의 정책이 성공하면 그 이면에서 다른 문제가 불거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유전자를 조작해서 체세포를 바꿀 수는 없다. 세포군을 조작해서 집단을 바꿔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세포군은 막 자체가 이중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친수성(親水性)과 배수성(排水性)을 동시에 갖기 때문에 하나의 성격으로 간주해 접근하면 항상 실패한다. 정책은 모두가 이중성 내지 다중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여러 논자가 단기, 중기, 장기 정책을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별개가 아니다.

    정책을 통해 국가의 비전을 구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부가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정책을 펴야 한다. 이를 위해 예산을 배정하고 집행해야 하며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둬야 한다. 이것이 예부터 고착된 생각과 방식에 의해 주어진 국가 정부의 임무다. 현 정부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입으로 말할 뿐 어느 정책에서도 체현된 것을 필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면 현 시점에서 처방은 무엇인가. 사람을 바꿔가는 것이다. 즉 교육과 훈련을 통해 인식을 바꾸자는 얘기다.

    이미 인식이 고착된 사람은 버린다. 새롭게 자라나는 사람에게 희망을 걸고 교육시킬 도리밖에 없다. 그들에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한 인식과 ‘아름다움’과 ‘비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사람이 숨쉬고 법이 바로서는 그런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와 현재의 교집합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다. 반드시 융합의 영역에서 할 일이 생긴다.

    ‘여유 있고 반듯한’ 나라

    국가발전의 목표가 물질적으로 잘살아보자는 것에 한정될 수는 없다. 당연히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답게’는 한 쪽으로 몰리고 쫓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갖고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삶을 말한다. 최대한의 만족이 아닌 ‘어느 정도’의 채움만으로 여유를 갖고 ‘비움’의 아름다움을 나눌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가자.



    소강국가론을 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지만 단단한 나라, 민족의 존엄과 민중의 권익이 민주적으로 지켜지는 나라”를 만들어가야 한다. 정당한 법질서를 지키고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사회여야 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환경만이 아니라 인성도 파괴됐다. 절대빈곤을 벗어나기 위한 물질적 충족만을 추구하던 이제까지 발전전략의 틀을 넘어서 이제 ‘웬만큼 여유 있는 국가’를 이뤄가야 한다. 그리고 좀 ‘반듯한 나라’이면 더 좋지 않겠는가. 완벽한 선진자본주의 국가(그 실체가 존재할지는 의문스럽지만)가 되기보다 ‘소강국가’를 종국적인 단계로 삼으면 어떨까. 어쩌면 (전략적인 개념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입장이 환경친화적 문화국가나 인성친화적(인간존중) 문화국가를 구현하는 첩경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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