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호

호주이민 성공列傳

사흘 용접하고 나흘 골프치는 남자, 아이들이 행복해 더 행복한 여자

  • 글: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ipsyd@naver.com

    입력2004-12-28 11:4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절망만 안긴 고국을 떠나 새 출발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먼저 이들의 삶에 주목하자. 성실하고 소박한 마음가짐으로 이민에 성공한 사람들이 있다. 실력으로 승부한 IT전문가, 부단한 노력으로 언어장벽을 무너뜨린 유치원 원장, 동포들에게 따뜻한 목소리를 전하는 방송인, 용접공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퇴직 은행지점장…. 이들이 전하는 의지와 희망의 노래.
    호주이민 성공列傳

    2004년 새해 벽두에 시드니 하버에서 벌어진 송구영신 불꽃놀이.

    통째로뿌리뽑혀본 사람들은 안다.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먼 길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쁘거나 슬플 때 술잔 부딪칠 친구조차 없는 세상이 죽음보다 더 쓸쓸하다는 것을.

    또한 그들은 안다. 사람은 태어나고 성장한 나라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게 가장 큰 축복이라는 것을. 부모형제와 친구들,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향을 떠나서 평생 손님처럼 사는 것이 ‘거푸집 같은 생’이라는 것을.

    그뿐인가. 물신(物神)이 온 천하를 평정해버린 시대에 대궐 같은 저택에 살고 고급승용차를 몰고 다니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다수집단의 중압감에 시달려야 하는 소수집단의 비애를 안다.

    상상해보라. 호주나 미국 같은 다민족국가와는 사정이 다르지만 대한민국 땅에 와서 ‘황금빛 보리밭의 깜부기’처럼 살고 있는 네팔이나 콩고 출신 사람들의 막막한 심정을.

    개의 故鄕은, 분명바다 건너천길 허공 중에 있으리



    오늘도, 어제처럼물결은 높고… 오랫동안개는 어슬렁거린다

    개의 발 아래쪽은늘 위험하였으나그게 生이란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듯

    여기는 남의 나라 땅밤마다, 꿈자리 뒤숭숭한이 세상의 끝이다

    뿌리뽑혀서, 늘발바닥 밑이 허전한개(윤필립 詩 ‘바다 건너’ 전문)

    이민자들 사이엔 불문율 같은 것이 있다. “지금 무슨 일을 하는가”와 “이민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가”를 묻지 않는 것이다. 이건 한국계뿐 아니라 다른 나라 이민자들도 마찬가지다.

    전자는 이민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신분하락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이민자의 처지에서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현재의 신분을 밝히도록 강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호주이민 성공列傳

    호주 LP공립유치원의 박경숙 원장(뒷줄 맨오른쪽)과 어린이들.

    후자의 경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 시리즈’일 가능성이 높거나 “내가 이래봬도 왕년엔…”으로 시작되는 ‘왕년엔… 시리즈’ 같은 자기자랑을 오랫동안 들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에겐들 잘나가던 왕년이 없었겠는가. 저마다 큰 산이고 긴 강이었던 사람들, 그들은 십중팔구 긴 한숨으로 이야기를 맺는다. “젠장맞을! 그놈의 이민바람만 나한테 불지 않았어도….”

    ‘이민폐인’의 가을편지

    2004년 9월의 일이다. 필자는 그때 붙잡은 ‘이민(移民)’이라는 화두를 지금껏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이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걸어오던 한 ‘이민폐인(移民廢人)’ 때문이다.

    시드니의 9월은 봄이 오는 길목이다. 사방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꽃대궐이 펼쳐진다. 아열대성 기후에다 토양까지 기름져 눈길 머무는 곳마다 눈부신 꽃들이 피어 있는 것.

    자연은 겨울을 견뎌내지 않은 씨앗에겐 발아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던가. 비록 시드니의 겨울이 5~20℃를 오르내리는 이름뿐인 겨울이긴 하지만, 겨울을 이겨낸 시드니의 봄이 온갖 꽃들로부터 축하를 받는 주말에 필자는 문득 서울의 가을을 떠올렸다.

    수락산과 송추계곡의 아스라한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서울이 그리울 때마다 편지를 보내는 K후배에게 시드니의 봄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종로거리와 인사동 골목을 걸어다니고 있을 서울의 가을. 그 가을의 안부를 묻고 싶었다.

    [후배 K에게,

    맹하게 꽃들만 지천으로 피워놓은 시드니에서 나는 통곡한다. 나는 죽음 이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딱 한 가지 ‘서울의 가을’만큼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

    너는 모른다. 서울의 가을이 얼마나 아름답고 정겨운지를. 붉게 물든 활엽수들로 치장한 수락산과 송추계곡이 세계 3대 미항 운운하는 시드니 하버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을.

    K야, 큰 서점들이 있던 종로거리와 가난한 시인들의 아지트였던 인사동 골목의 정취를 차마 잊을 수가 없구나. 보도블록 위에 나뒹구는 노란 은행잎을 주워들고 초저녁부터 선술집에 들르던 추억, 서울의 가을 때문에 나는 한동안 앓아야만 할 것 같다.

    K야, 넌 서울의 가을 속으로 걸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나보다 백 배 천 배 행복한 남자다. 계절이 수없이 바뀌어도 찬술 한 잔이 없는 시드니에서 詩가 운다.]

    가끔은 자기가 써놓은 글에 취해서 맥없이 우울해질 때가 있다. 지극히 감상적인 편지를 후배에게 보내놓고, 건강 때문에 절제하고 있던 술까지 한 잔 기울이고 나서 ‘가을 편지’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 때문이었을까. 필자는 실제로 ‘가을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게 종로거리의 은행잎까지 곁들인 종이 편지였으면 좋으련만, 컴퓨터 모니터에서 깜박거리는 커서를 따라 읽어야 하는 이메일이었다.

    게다가 ‘가을 편지’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에 민망할 정도로 삭막하기 그지없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가 늘 사용하던 ‘바다 건너에 사는 선배에게’라는 머리말도 생략된 ‘반박성명서’ 같은 K후배의 이메일.

    [선배는 참 한심하오. 지금 서울이 어떤 지경인데 ‘서울의 가을’ 운운하면서 사람 열받게 만드는 겁니까.

    지금 서울엔 선배가 말하는 가을 같은 거 없어요. 곧 겨울이 올 텐데, 석유값까지 올라 아파트 관리비 엄청 나오겠다는 걱정과 긴 한숨만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시인들이 가까이 있는 사물이나 현실보다는 멀리 있는 이미지와 관념을 조준하는 경향이 있다지만, 선배는 해도 너무한 것 같습니다. 서울 쪽 뉴스는 아예 보지도 않고 삽니까?

    길게 말할 것 없고, 나는 12월 말일까지만 직장에 나갑니다. 자진해서 그만두는 게 아니고 잘리는 겁니다. 선배는 ‘사오정’이란 말 들어봤어요?

    나도 호주로 이민 갈 겁니다. 선배만 믿고 있으니까, 봄이니 가을이니 하는 개똥 같은 얘기는 그만 하시고 이민수속에 필요한 정보나 좀 보내주세요.]

    절교로 끝난 이민논쟁

    후배의 편지는 무례하다 못해 모욕에 가까웠다.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괘씸한 생각보다는 후배의 처지가 궁금해졌다.

    그를 어떻게 위로하고 도와야 할지 막막했다. 20년 가까이 이민생활을 하고 있는 필자이지만, 이민절차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이라 그의 이민을 도와야 하는 건지 말려야 하는지조차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아내에게 자문을 구했다.

    아내의 첫 반응은 “후배를 잘 달래보라”는 것이었다. “실패라곤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라 상대적으로 상처가 컸던 것 같으니 홧김에 일 저지르지 말도록 다독여줘야 한다”는 것.

    마침내 IT(정보기술)전문가로 대기업에 근무하는 K후배와의 길고 긴 ‘이민논쟁’이 시작됐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메일이 오갔고, 필자의 휴대전화는 한순간에 이민 컨설턴트의 도구가 되었다. 필자는 팔자에 없는 이민전문가(?)가 되어 각종 이민관련 법조문과 사례를 모아서 이메일로 보냈고, “이런 건 나도 다 알아요. 뭐 새로운 뉴스 좀 없어요?”라는 후배의 퉁명스런 전화를 수도 없이 받아야 했다.

    그는 이미 여러 권의 이민관련 책자를 독파한 상태였고,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정보들을 모아서 몇 개의 파일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민설명회가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가해 새로운 정보를 챙기는가 하면, 필자말고도 다른 사람과의 이메일을 통해서 이민정보를 얻는 중이었다.

    후배와의 이민논쟁은 시작부터 중구난방이었다. 피차 전문성이 없는 탓도 있지만, 이민을 말리고 싶은 필자의 입장과 하늘이 두 쪽 나도 이민을 결행하겠다는 후배의 강한 의지가 사사건건 부딪쳤기 때문이다. 보통 한 시간씩 이어지는 국제전화로 거친 말들이 오갔고, 급기야 후배로부터 절교편지를 받게 됐다. 허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필자는 그의 절교편지에 답장을 쓰면서, 1995년에 펴낸 산문집 ‘시드니에는 시인이 없다’ 중 ‘잘못 든 길이니 돌아가시오!(Wrong Way. Go Back!)’라는 글의 한 대목을 인용했다. ‘Wrong Way. Go Back!’은 호주의 길거리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도로표지판이다.

    [진부한 얘기지만, 사람의 한평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매 순간 크고 작은 결단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선택해야 하고, 한 번 선택한 길은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면서 한 사람의 생으로 고착된다.

    절대로 수정될 수 없는 지난날의 선택들, 그 선택들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게 우리 모두의 생이 아닐까 싶다.

    이민 초기의 시드니는 환상의 끝에서 어른거리던 신기루였다. 금방 구름 위로 차오를 것 같은 하버브리지와 두둥실 노 저어 갈 수 있을 것 같은 오페라하우스,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 호주는 녹색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무지개였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쑥맥이었던가. 사람 사는 곳에, 밥 먹고 꿈을 꾸는 곳에, 어찌 바람 한 줄기나 구름 한 점이 없겠는가. 신기루의 끝자리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됐을 때, 나는 비로소 호주가 무지갯빛 환상 뒤에 숨어 있는 엄정한 현실이라는 것을 아프게 깨달았다.]

    K후배로부터 답장은 오지 않았다. IT전문가이면서 시를 쓰는 사람답게 정갈한 성격의 후배가,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 초반에 회사로부터 퇴직당한 상처에다 믿었던 선배로부터 받은 상처가 겹치면서 침몰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한국의 30~40대 직장인들 중 이민을 고려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그의 경우는 좀 특별했다.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이 오직 이민밖에 없다는 요지부동의 결정을 이미 내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면서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이민사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와 비슷한 또래의 전문가들이 호주로 이민 와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부단한 공부’의 힘

    김홍종(45)씨는 이민 10년차의 IT전문가다. 세계 150개국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 유니레버 오스트레일리아의 선임 비즈니스 애널리스트로 근무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삼성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김씨는 유니레버 코리아에서 근무하다가 유니레버 오스트레일리아로 일터를 옮기며 취업이민을 한 사례다.

    시드니 노스 록스에 위치한 그의 직장을 찾아갔다. 마침 그의 상관인 밸러리 화이트씨가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여장군처럼 보이는 화이트씨는 “미스터 김은 유니레버 오스트레일리아의 보배다. 그의 성실한 업무자세는 모든 사원들의 귀감이다”라고 말했다.

    김씨의 업무는 비즈니스와 금융 분야 분석. 어느 특정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원료를 사들이고 생산·판매하여 투자금액이 회수되는 사이클을 일목요연하게 기록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구매부서와 영업부서는 물론이고 생산부서까지 지원해야 한다. 각 부서의 IT시스템 이용자들을 유저(user)라고 하는데 그는 늘 유저들과 온라인으로 연결돼 있어야 한다.

    오전 9시에서 오후5시까지인 근무시간 외에 발생하는 돌발사태는 휴대전화로 처리한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24시간 가동되는 생산부서에서는 새벽 2시에 전화를 걸어오기도 한다.

    유니레버 유저들에게 김씨는 그야말로 ‘캡’이다. 아무리 귀찮은 일이라도 적극적으로 업무를 지원해주고 제반 문제들을 깔끔하게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게 경쟁이 심한 호주 IT업계에서 김씨가 호주사람들을 제치고 승승장구하는 비결이다. 아무리 실력으로 승부하는 IT업계라지만, 실력에다 성실성까지 겸비하면 백전백승인 법.

    그렇다고 그에게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비영어권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이지만 이민 초기에 겪었던 언어장벽과 문화차이는 그를 주저앉게 만들 뻔했다. 특히 1년이 멀다하고 발전하는 IT업계에서 새로운 기술을 익힌 젊은 세대들과 경쟁하는 것은 이중 삼중의 고통이었다. 그는 이 모든 어려움을 ‘기도의 힘’과 ‘부단한 공부’로 극복했다고 한다.

    한국의 팀워크, 호주의 개인기

    김씨는 삼성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긴다. 직속상관으로부터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삼성이 자랑하는 팀워크는 개인기를 중시하는 호주 기업에서도 직장인의 좋은 덕목으로 평가받고 있다.

    삼성의 시스템이 팀워크 위주로 운영되기 때문에 개인에게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 경향이 있는 반면, 유니레버 오스트레일리아는 개인에게 거의 모든 권한을 주고 책임을 묻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호주에선 조직에 순응하는 사람보다는 강한 개성을 갖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직원을 높이 평가한다. 이런 추세는 젊은 세대일수록 더 심해서 직장인의 나이는 거의 의미가 없다.

    이 말은 거꾸로 나이가 많다고 해서 항상 불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도 된다. 실력과 성실성만 갖추고 있으면 나이가 많은 IT전문가들도 얼마든지 젊은 세대와 경쟁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씨다.

    호주이민 성공列傳

    유니레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근무하는 김홍종씨.

    IT선진국인 한국에 IT전문가들이 넘치다 보니 해외진출을 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얘기를 해달라고 했더니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전에는 주로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개발분야에서 디벨로퍼(developer)로 활약했는데, 점점 그 기능이 줄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도로 옮겨가는 추세다. 지금 호주에선 업무분석 분야만 통하는 상황인데, 그 분야도 공급과잉 상태여서 IT전문가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나 IT와 비즈니스가 결합되는 업무는 지금도 전문가가 부족하다. IT기술뿐 아니라 업무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인데, 한국 IT전문가들의 미래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

    주어진 시간만 충실하게 일하고 여가를 즐기면서 살아가는 호주 직장인들은 비즈니스 분야를 열심히 파고드는 끈기가 부족하다. 남들이 갖고 있지 않는 분석자료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무형의 자산이다. 거기에다 한국인 특유의 창의력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당부할 것은 자신의 경력을 잘 서류화하라는 것이다. 한국 IT전문가들의 기술력은 세계 톱클래스다. 문제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소개하는 데 서툴다는 점이다. 특히 호주 기업들은 입사희망자가 어떤 역량을 갖고 있는지 자질구레한 것까지 알고 싶어한다. 하다못해 취미활동을 한 것까지도 사진에 담아두면 자기를 소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부디 한국의 IT전문가들이 해외로 많이 진출해 높이 평가받기 바란다.]

    퇴근 후엔 골프장으로

    김씨의 취미는 골프다. 공식 핸디는 15. 그러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저녁내기라도 했다가는 십중팔구 그에게 밥을 사야 한다. 그는 싱글 핸디를 목표로 밤낮 없이 칼을 간다. 체력강화를 위해 아침 조깅을 빠뜨리지 않고, 요즘같은 하절기엔 회사 울타리 너머에 있는 뮤어필드 골프코스에서 거의 매일 연습 라운딩을 갖는다.

    5시에 퇴근하자마자 텅 빈 골프코스로 나가 혼자서 라운딩을 시작하면 해지기 전에 18홀을 거뜬히 돌 수 있다. 근무시간이 조정 가능한 근무여건 덕분에 오전 7시에 일을 시작해서 오후 3시에 퇴근하는 날은 골프친구들과 라운딩을 벌이기도 한다. 자신이 편한 시간을 택해 주 40시간만 일하면 되기 때문이다. 에핑의 숲 속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골프장 옆에 붙어 있는 회사까지는 자동차로 10분이 채 안 걸린다.

    김씨는 골프를 하지 않는 아내와 자녀들을 위해 테니스도 친다. 테니스 실력도 웬만한 선수 뺨치는 수준이다. 그야말로 만능 스포츠맨인 것.

    하지만 김씨에겐 직장이나 골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신앙이다. 그에게 “직장생활을 포함한 모든 삶은 궁극적으로 기독교신앙을 실천하는 것”이다. 2000년 유니레버 베트남에서 1년 동안 근무할 때도 그는 현지인들을 상대로 일대일 제자양육을 통해 선교활동을 했다. 김씨가 은퇴 후 선교사로 살고 싶어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의 표정과 대화에서 성공한 직장인의 여유가 느껴졌다. 이유를 물었더니 예상했던 대로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했다. 크리스천이 아닌 필자는 “‘하나님의 은총’보다는 김 선생의 연봉 때문 아니냐”고 대놓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손을 내저으며 “그건 절대로 아니다. 연봉으로 치자면 한국에서 받는 것만 못하다”면서 “다만 일과 여가생활을 함께 영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연봉은 12만 호주달러다. 한화로 9600만원 정도 된다. 그러나 세금으로 48%를 납부하고 나면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은 훨씬 줄어든다. 물론 퇴직연금 등을 회사에서 납부해주기 때문에 실제소득은 조금 더 많다.

    “그 연봉으로는 호주생활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고 하자 그는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라면 가계의 큰 몫을 차지했을 교육비, 의료비 등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에 낭비만 하지 않으면 부족하지 않다”고 말했다.

    대학 입학을 앞둔 12학년 아들과 9학년 딸을 둔 김씨는 남매가 둘 다 공립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교육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 또한 과외를 시킬 필요가 없으니 사교육비도 전혀 들지 않는다. 거기에 파트타임으로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아내의 수입이 가정경제에 큰 보탬이 된다. 1년에 몇 차례 떠나는 가족여행 경비를 아내가 벌어서 모으는 셈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새기고 산다. 사람인 이상 불만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행복과 불행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본다. 내가 한국에 계속 살았다고 해도 아마 행복했을 것이다.”

    호주이민 성공列傳

    LP유치원을 운영하는 박경숙 원장과 TAFE 매거진에 보도된 박 원장에 대한 기사.

    박경숙(47)씨는 누구에게나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다. 타고난 심성도 그렇지만 직업이 유치원 원장이다 보니 늘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마음으로 살기에 그럴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가 신산(辛酸)하기조차 한 이민생활을 통해 모든 걸 넉넉하게 받아들이는 삶의 철학을 터득했고, 생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가혹했던 언어장벽을 뛰어넘으면서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박씨는 지금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끼는 ‘공부중독자’다. 한국에서 대학원 유아교육과정을 졸업했지만 시드니대 교육대학원에서 유아교육과정을 다시 밟았다. 유치원 교사나 원장이 무슨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느냐고 의아해하겠지만 호주의 교사자격관리가 그만큼 엄격하다. 물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언어장벽 때문이다.

    대학에서 가정교육학을 전공한 박씨는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2년 동안 가정과목 교사로 재직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아이들을 좋아했던 터라 학교를 그만두고 대학원 유아교육과에 진학했다.

    내친김에 유학까지 가보자고 생각한 그는 토플(TOEFL) 시험과 GRE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미국 아이오와주립대 유아교육 석사과정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미국 유학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대학원 과정에 필요한 학비를 감당할 만한 재정적 뒷받침이 부실하다는 게 이유였다. 크게 실망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침 그 무렵(1987년)은 호주가 영어연수 등의 명목으로 적극적인 유학생 유치작업에 나섰을 때였다. 그는 우선 영어라도 더 공부하자는 계획으로 시드니 UTS대 영어연수과정에 입학했다.

    그런데 당초 계획과 달리 그는 호주 입국 1년 만에 결혼을 하게 됐다. 배우자는 시드니 공항으로 친구를 마중하러 나갔다가 만난 박원익(48·부동산 에이전트)씨로, 그는 1981년에 부모와 함께 호주에 온 이민 1.5세였다.

    박씨는 결혼과 출산 후에도 남편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영어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당시 박씨를 가르친 영어선생님들이 ‘Madam Vocabulary’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을 정도였다.

    영어공부가 끝나자 그는 시드니대 대학원 유아교육과에 입학했다. 호주의 교육철학과 유아교육 현실을 알고 싶었던 것. 전공을 살려 호주에서 취업을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했기 때문에 대학입학허가는 바로 나왔다. 또한 한국에서 취득한 가정교사자격증과 교직에 2년 동안 몸담았던 경력, 대학원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한 것이 인정돼 서류심사만으로 유아교육 정교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만만하게 보았던 영어라는 복병이 박씨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예습을 열심히 한 덕분에 강의는 어렵지 않게 들었지만 코스워크 과정의 토론시간이 문제였다. 동료학생들과 교수의 토론 내용과 질문을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 질문을 알아듣지 못하니 답변도 할 수 없었다.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앉아 있으려니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눈이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려 강의가 끝나면 학교 잔디밭에 벌렁 드러눕기 일쑤였다.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차창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자괴감을 느꼈다.

    좌절의 바닥에서 솟아오르다

    박씨는 1년을 버틴 끝에 휴학을 신청했다. 말이 휴학이지, 영어 공포감으로 다시는 학교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새색시의 몸과 마음은 영어 스트레스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차라리 직업전선에 뛰어들자고 생각했다. 교사자격증이 있었으므로 일단 펜리스 시립유치원에 응시해 합격했다. 호주 유치원엔 자격증이 필요 없는 교사보조(Assistant)와 준교사(Child Care Worker), 정교사(Teacher), 그리고 원장(Director)이 있다.

    그는 아무 경험도 없었지만 자격증만 믿고 정교사를 지망했다. 하지만 그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아무리 유치원생들이지만 영어로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씨를 보조하는 호주 출신 교사보조들이 동양계인 그를 무시하고 괴롭혔다. 텃세나 시샘 정도가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실수하도록 유도했고, 실수를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모욕을 줬다.

    박씨는 그때의 굴욕감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당장 그만두고 싶었지만 패배를 인정하는 것 같아 오기를 부리다가, 결국 취업 3개월 만에 쫓겨나다시피 유치원을 그만뒀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 보기가 민망한 건 물론, 무엇보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무참히 무너졌다.

    “내가 호주를 너무 만만하게 본 것 같다. 다시는 대학이나 유치원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으리라.”

    막상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분노는 진정됐지만, 구할 수 있는 직업이 단순노동직에 한정됐다. 물론 처음엔 그게 훨씬 마음 편한 이민생활이 될 것 같다는 자포자기의 심정도 들었다.

    하지만 단순노동이라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호텔에서 청소하고 침대보를 갈아주는 메이드 업무를 신청했다가 ‘체력이 따라줄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렇다고 직업도 없이 이민생활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이번엔 버섯농장에서 버섯 따는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결과는 또다시 낙방. ‘손이 느리다’는 이유였다.

    결국 다시 용기를 내 대학원에 복학했다. 여전히 힘들기는 했지만 이번엔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덤벼들었던 첫 해와는 달리 귀가 열리고 입도 열리기 시작한 것.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TAFE(단과대학) 산하 웨더릴 파크 유치원에 취업했다.

    박씨는 펜리스 시립유치원에서의 쓴 경험을 되새기면서 이번에는 정교사가 아닌 준교사로 지원했다. 스스로 직책을 하향조정한 것. 거기에다 웨더릴 파크 유치원은 새로 개원한 곳이어서 텃세도 없었다.

    일이 풀리기 시작하니 모든 게 순조로웠다. 준교사로 1년 반 동안 업무를 익히고 나니 함께 일하던 정교사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됐고, 그는 정교사로 지원해 승진했다. 그후 교사로 재직하던 중 원장이 다른 곳으로 발령받았다. 박씨는 전임 원장의 적극적인 추천에 힘입어 엄격한 심사를 거친 끝에 생각지도 않았던 원장이 됐다. TAFE 산하 20개 유치원에서 유일한 동양계 원장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시 쓰는 원장님

    그는 웨더릴 파크 유치원에서 원장으로 근무한 5년 동안 아주 높은 평점을 받아 ‘TAFE 매거진’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민 초기에 겪었던 박씨의 실패가 훗날 성공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2000년 7월, 박씨의 성공가도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어머니가 위암 판정을 받은 것. 그는 남편과 사별한 후 4남매를 키워 대학 교육까지 시킨 어머니를 위해 헌신할 때라고 생각했다. 유치원측의 만류에도 박씨는 사직서를 내고 어머니 간병에 나섰다.

    그는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오랜 소망이던 시 창작을 시작했다. 호주한인문인협회에서 개설한 ‘바다건너 시 창작교실’에 등록해 시 창작 과정을 공부한 것.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시를 공부한 때문인지 그의 습작품 중에는 어머니에 관한 시가 유난히 많다.

    어머니를 위해서 쓴 그의 시들 중에서 한인동포신문 ‘디 오세아니아 프레스(TOP)’에 게재된 작품 하나를 소개한다. 그의 어머니는 완치돼 지금 건강하게 지내고 계신다.

    허물어진 담장 너머마른 싸리 빗자루 같은가을나무 한 그루

    한 잎 두 잎, 이파리를다 뜯어내며 견뎌낸 그리움인가찬바람을 맞는 나목(裸木)따-악, 따-악제 가슴만 때리고 있다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는겨울 참새의 꿈을 좇아나무는 귀 기울이며하늘을 향해 오르고 있다

    그대, 다시는 푸르를 수 없으리저녁노을의 야멸찬 구박에도벌거벗은 가을나무는따-악, 따-악연신 손뼉까지 치면서하늘 향해 노래부르고 있다(박경숙 詩 ‘가을나무’ 전문)

    이민 1세대는 경제적 자립이 최우선이라고 말하는 호주 동포사회 풍토에서 박씨처럼 시 창작을 공부한다는 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 사실 쉰 가까운 나이에 ‘지적 허영’이 아닌 ‘지적 욕구’를 끊임없이 유지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박씨는 어머니의 완치 이후 유치원으로 돌아와 지금은 블랙타운에 위치한 LP공립유치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블랙타운 카운슬 산하 24개 공립유치원 원장 중에서 유일한 동양계다. 박씨에게 호주 진출을 꿈꾸는 한국의 유치원 교사들에게 조언을 부탁했다. 다음은 그의 답변을 요약한 것이다.

    [무엇보다 호주의 유치원 업계엔 일자리가 많아 유치원 교사직으로 취업이민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기회의 나라다. 한국에서 취득한 자격증을 호주 자격증으로 바꾸는 것도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일단 취업을 하더라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이외에 교안 및 행정서류를 작성하고 보고하는 일이 많아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보수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갈수록 개선되고 있다.

    호주이민 성공列傳

    사흘은 일하고 나흘은 골프를 친다는 용접공 P씨.

    호주로 이민 와서 사설 유치원을 경영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몇 말씀 드린다면, 호주는 유치원 설립 및 운영규정이 공사립에 관계없이 몹시 까다롭기 때문에 사전에 유치원 경영과 관련된 법령을 충분히 연구해야 한다. 가령 한국처럼 빌딩을 임대해 유치원을 개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호주의 유치원은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자격, 규격, 허가조건 등에서 전혀 예외규정이 없다.

    한국에서 오신 분이 집 한 채를 사들여 개조, 유치원을 개설하겠다는 계획을 들려주길래 호주의 현실을 전했더니 몹시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정식으로 투자해서 유치원을 운영하면 영주권도 얻을 수 있고 수익성도 상당히 높다.]

    용접공이 의사보다 많이 번다

    용접공 P씨(52)는 호주 이민 4년차다. 그는 세칭 일류대 출신에다 잘나가던 직장인이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직업은 은행지점장. 은행이 직장의 꽃이었을 때 입사해 24년 동안 한 은행에서만 근무했다. 그런 그가 한창 일할 나이에 은행에서 퇴직한 사연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한 얘깃거리도 아니다. 모두 다 IMF 경제위기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명예퇴직을 1년 정도 앞두고 호주로 여행을 왔다. 자신이 청춘을 바쳐 일한 은행에서 쫓겨나는 아픔을 달래기 위해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그는 주로 국제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영어는 웬만큼 할 수 있었다.

    여행 마지막 날, 우연히 한국음식점에 들렸다가 한인동포들을 만났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동포들이 골프를 끝내고 와서 저녁식사를 하던 중이었는데, 골프를 좋아하는 P씨가 이들의 대화에 끼여든 것.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들의 이력이 만만치가 않았다. 대부분 대졸에다 한국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 현직을 물었더니 모두 용접공이라고 대답해서 P씨는 깜짝 놀랐다.

    그중 한 사람인 K씨로부터 연락처를 건네받았다. 그는 서울에서 고등학교 물리교사를 하던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용접을 하다니…. 그런데도 골프를 즐기고….’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P씨의 머리엔 어떤 ‘운명적인 영감’이 떠올랐다. 서울로 돌아간 그는 K씨와 연락을 하면서 용접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용접학원에 등록했다.

    퇴직을 앞둔 은행 업무엔 시간여유가 많았다. 그는 은행보다는 주로 용접학원과 현장에 나가서 실습을 했다. 불똥이 튀는 바람에 팔에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미래의 전망’ 때문에 별로 아프지 않았다. 명퇴를 당하는 처지에도 매일 웃고 다니는 P씨를 두고 부하직원들이 수군거렸다. “명퇴 충격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는 퇴직을 준비하면서 호주를 다시 찾았다. 주택구입과 자녀교육 등의 사정을 미리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때도 K씨가 많은 도움을 줬다.

    P씨는 퇴직과 동시에 호주로 왔다. 퇴직금으로 융자 없이 주택을 구입한 후 K씨를 따라다니면서 바로 용접 일도 시작했다. 주말마다 K씨와 골프를 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가족들이 영어 때문에 고생하는 것말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그는 지금 A급은 못되지만 일 잘하는 용접공으로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 사무직으로 굳어진 몸이 말을 잘 안 듣는 게 문제일 뿐 용접 일은 아주 재미있었다. 적어도 P씨에게는 그랬다. 늘 영업실적 때문에 시달려야 하는 은행일에 비하면 훨씬 좋은 직업이었다.

    P씨의 하루 일당은 480 호주달러. 용접공으로 일하며 일주일에 사흘 일해서 버는 돈이 한화로 약 115만원이다. 물론 세금공제 전의 액수다. 이만한 돈은 학비와 의료비가 전혀 들지 않는 현실을 감안하면 4인 가족의 생활비로 전혀 부족하지 않다. 게다가 아내가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P씨 가정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가난한 농촌 출신인 P씨는 어려서부터 검소한 생활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그가 지출하는 돈은 골프비용이 거의 전부다. 일을 하지 않는 날은 거의 매일 골프코스에 나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골프비용은? 그가 멤버십을 갖고 있는 C골프클럽의 경우 연회비가 1300 호주달러다. 한화로 104만원 정도. 호주는 평생회원권이 없고 해마다 연회비를 내기 때문에 104만원만 내면 1년 내내 골프를 마음껏 칠 수 있다.

    P씨가 골프에 매달리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은행에 근무하면서 나빠진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에 있을 때 골프가 너무나 하고 싶었던 운동이기 때문이다. 현재 핸디 17인 P씨는 “골프처럼 신나는 인생은 없다”면서 용접을 할 때나 골프를 할 때나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호주이민 성공列傳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유화정씨.

    참고로 2004년 10월15일자 호주 일간지 ‘헤럴드 선’에 보도된 기사 일부를 인용한다.

    [호주의 기술인력 부족사태로 전기기술자, 용접공, 기계공, 배관공 등의 몸값이 크게 올라 이들의 연봉이 의사나 건축설계사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노동관련단체의 발표에 따르면 2만1000명 정도의 기술인력이 추가로 공급돼야 할 만큼 호주의 기술인력 부족사태는 심각한 상황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부 분야 기술자들의 연봉은 10만 호주달러를 웃돌고 있다.

    기술인력 부족사태로 이들의 용역비가 지난 1년 동안 12.5%나 올랐다. 이는 국가경제에 어려움을 주고 금리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반영하듯 몇몇 지역신문들에서는 ‘연봉 10만달러 에어컨 전기기술자 구함’이나 ‘연봉 7만달러 부엌싱크대 설치기술자 구함’ 등의 구인광고가 실렸다.]

    동포에게 전하는 사랑의 목소리

    호주 국영방송국 SBS(Special Broad- casting Services)의 한국어 프로그램은 6만여명의 한인 동포들에게 한국과 호주의 뉴스를 전하고 음악 프로그램도 방송한다. 호주 SBS는 1975년 호주에 살고 있는 200여 소수민족을 위해 설립한 국영방송국. 이 중 SBS 라디오 프로그램은 68개 언어로 방송돼 특히 이민자들의 청취율이 높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언어로 방송되는 SBS 프로그램은 어디서나 인터넷(www.sbs.com.au/radio)을 통해 들을 수 있다.

    SBS 라디오 한국어 프로그램에서 뉴스와 ‘유화정의 금요음악산책’을 진행하는 유화정(45)씨의 별명은 ‘유소녀(少女)’다. 책임프로듀서인 주양중 PD가 늘 소녀처럼 맑은 심성으로 살아가는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그의 방송을 들으면 마치 두 사람인 것 같은 착가에 빠지게 된다. 뉴스를 진행할 때는 찬바람이 불 것 같은 음성인데, 음악방송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 천상 소녀이기 때문이다.

    유씨는 고등학교 시절 방송반 활동을 했고, KBS와 MBC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경력도 있다. 그 당시 차인태 아나운서의 칭찬 몇 마디가 지금까지 그를 마이크 앞에 앉도록 만들었다. 바이올린을 전공한 유씨는 대학에서도 방송을 진행했다. 주로 음악방송이었는데, 휴식시간에 벤치에 앉아서 음악을 감상하는 학우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

    그의 방송경력은 졸업 후에도 이어질 뻔하다가 이른 결혼으로 중단됐다. KBS 아나운서로 연수를 받다가 결혼 때문에 포기한 것. 그러나 아이 둘을 출산한 후 KBS 사회교육방송과 EBS에서 활동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유씨의 남편 김정열씨는 약사다. 제약회사에서 근무했고, 10년간 약국을 경영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가족 모두 건강했다. 바로 그런 시점에서 남편이 삶의 변화욕구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국 약사 자격증을 얻었다. 그리고 미국 정착을 희망했다.

    남편의 뜻에 따라 가족 모두가 미국 LA로 사전답사 여행을 떠났다. 간간이 총소리가 들리는 LA는 무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친구의 딸과 함께 맥도날드에 가게 됐다. 햄버거를 주문했는데 종업원이 일회용 포크와 케첩 등을 아무렇게나 한 움큼 집어주었다. 유씨가 가게를 나서며 남은 걸 돌려주려 하니까 남편 친구의 딸이 “창피하다”면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여기선 다 그래요”라면서.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주변을 돌아보니 멀쩡한 물건들이 여기저기 쓰레기더미로 쌓여 있었다. 그 일을 겪은 후에는 도무지 미국에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LA가 미국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민 와서 살 나라는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유씨의 반대로 미국이민 계획은 중단됐다. 항상 아내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남편도 두말 하지 않고 동의했다. 귀국하는 길에 들른 미시간주는 마음에 들었지만 거기도 미국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 무렵 남편이 부모님을 모시고 호주에 사는 형님을 방문한 후 뉴질랜드로 여행을 떠났다. 약국을 경영하는 10년간 휴가조차 제대로 갈 수 없었던 남편이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떠난 해외여행이었다. 여행중에 남편이 전화를 걸어 “여보, 당신이 여기 와서 살면 참 좋아할 것 같다”고 했다. 유씨는 새삼 남편이 외국으로 나가고 싶어한다는 것과, 한번 시작된 이민 욕구는 잠재울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말을 이용해 온 가족이 호주를 방문했다. 말로만 듣던 ‘한여름의 크리스마스’가 아주 신기하게 느껴졌다. 또한 오페라하우스 바로 옆에 있는 왕립식물원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황홀할 정도였다.

    결국 이민을 가기로 했다. 문제는 호주냐, 뉴질랜드냐였다. 그런데 당시 호주는 이민 문호를 닫아버린 상태였기에 자연스럽게 뉴질랜드로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호주와 뉴질랜드를 여행한 후 꼭 1년 만에 뉴질랜드 이민이 결행됐다. 당시 뉴질랜드엔 유씨 가족과 비슷한 유형의 한국 이민자들이 많았다. 대부분 전문직 종사자들로, 나이와 처지가 비슷하다 보니 쉽게 친해졌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6개월도 안 되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쾌적한 건 좋은데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던 것.

    그때 뉴질랜드 이민자들 사이에선 ‘골낚’이라는 은어가 유행했다. ‘오늘은 골프치고 내일은 낚시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재미있는 골프와 낚시도 매일 반복하다 보면 지루해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유씨 부부는 골프와 낚시를 즐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유씨가 뉴질랜드 카톨릭 방송국에서 방송을 시작했다. 뉴스, 인터뷰 프로그램과 ‘유화정의 음악산책’이라는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뉴질랜드 동포신문에 문화칼럼을 연재하던 남편이 뉴스 스크립터로 가세해서 방송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뉴질랜드는 너무 작은 나라였다. 유씨 부부에게도 그랬지만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면 좀더 ‘큰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0년,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딸이 시드니 콘서바트리움에 합격하면서 가족 모두가 호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형제국가(brother country)이기도 하지만 ‘타스만 협정’에 따라 두 나라의 국민(시민권자)이 어느 곳에 거주하든 영주권을 자동적으로 인정한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영주권을 취득하고 2년이 경과하면 시민권 취득 자격을 부여한다. 또한 시민권 취득이 힘든 미국과는 달리 정부에서 시민권 취득을 적극 권장한다.

    유씨는 뉴질랜드에 5년 반 동안 거주한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호주 입국과 동시에 호주 영주권자가 됐다. 지금은 2년 동안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유예하는 제도가 도입됐지만, 그다지 불편한 점은 없다.

    호주에는 이런 식의 ‘징검다리 이민’으로 입국한 뉴질랜드 출신 한국 이민자들이 상당히 많다. 뉴질랜드가 이민을 개방했던 시기에 호주가 이민의 문호를 닫은 게 원인이다. 지금은 두 나라 모두 이민 규모를 축소한 상태다.

    유씨는 “호주는 뉴질랜드를 확대복사 해놓은 것 같다”고 한다. 경관은 물론이고 사회·문화적으로도 유사한 점이 아주 많다는 뜻이다. “다만 동질성이 강한 뉴질랜드 한인 이민그룹과는 달리, 이민역사가 40년 가까이 되어 동질성이 거의 없는 호주 한인이민그룹에선 사람 사귀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유씨 부부는 이스트우드에서 ‘럼블즈(Rumbles)’라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오전 7시에 문을 열어 오후 5시 이전에 문을 닫는 전형적인 호주 스타일 카페다. 주로 아침시간과 점심시간이 붐빈다. 매우 아름다운 이 길모퉁이 카페 옆으로 기차가 지나가고 근처에는 쇼핑센터 광장의 등나무가 하늘을 가득 덮고 있다. 카페 가까운 곳에 있는 채널7 방송국 직원들과 지역주민들이 단골이다.

    약사 출신의 유씨 남편이 여러 명의 종업원들과 함께 카페를 운영하고, 방송이 없는 날은 유씨도 일을 돕는다. 워낙 목이 좋고 소문난 카페라서 꽤 높은 수익을 올린다.

    카페 영업이 끝나는 5시경에 유씨 부부와 마주앉았다. 호주와 뉴질랜드를 비교해달라고 부탁했다.

    의외로 부부의 의견은 상당히 달랐다. 남편이 호주의 가능성을 높이 치는 반면, 아내는 뉴질랜드에서의 추억을 더 좋게 보고 있었다. 두 아이는 두 나라 모두 좋다는 쪽이다.

    먼저 남편 김씨의 답이다.

    “사람이 변화를 원할 때, 변화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서울에서 뉴질랜드로, 뉴질랜드에서 호주로 삶의 터전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의지와 결단의 결과지만 행운이 따른 것도 사실이다. 물론 호주가 다 좋은 건 아니다. 살아보니 한국, 뉴질랜드, 호주가 대충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친구들과 술 마시고 싶을 때는 후회를 많이 한다.”

    아내 유씨가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이민을 통해서 잃은 것도 많지만, 두 아이들이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만족한다. 게다가 내가 하고 싶은 방송을 할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하다. 다만 뉴질랜드의 친구들이 그리울 때가 많다.”

    빈손으로 일군 와인농장

    “이 포도주는 나의 땀과 눈물입니다.”

    시드니 서부지역에 위치한 머지(Mudgee, 신동아 2004년 12월호 602쪽 참조)는 1850년대에 금광이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골드러시는 오래 가지 않았고, 지금은 포도농장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폴란드 출신 이민자 레논 스쿠아마츠(Lenon Scuamazu·54)가 이곳에 거의 무일푼으로 진출한 것이 1980년 초의 일이다. 그는 포도농장을 일구겠다는 원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1978년, 가족과 함께 시드니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의 주머니엔 몇백 호주달러가 전부였다. 인도적 차원의 구제이민이었기 때문이다.

    호주이민 성공列傳

    ‘와인 오스트레일리아 2004’ 행사에서 만난 폴란드인 레논 스쿠아마츠씨.

    그의 가족은 곧 정부주택에 입주해서 실업자수당으로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기를 2년여. 그는 새로운 출발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실업자 신세를 면할 수 없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레논은 사회보장성 직원에게 다음과 같이 획기적인 제안을 했다.

    “나는 폴란드 포도농장 노동자 출신인데, 다른 건 몰라도 포도농사만큼은 자신 있다. 얼마 전 친구가 사는 머지를 방문했는데, 토양과 기후조건이 폴란드와 흡사했다. 그곳엔 아직도 포도농장으로 개발 가능한 땅이 많이 있다. 그곳에서 포도농장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계속해서 실업수당을 받는 것도 미안하고, 이렇게 실업수당에 의존해서 살아가면 내 인생이 무의미해질 것 같다.”

    사회보장성 직원은 레논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그를 NSW주 지역개발부와 연결해줬다. 지역개발부에서는 레논의 포도농장 노동자 경력과 강한 의지를 믿고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황무지에 가까운 오지의 땅을 그에게 임대해주기로 한 것. 호주의 농장은 대부분 정부를 상대로 99년간 임대차 계약을 맺어서 사용한다.

    레논의 포도농장은 머지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으로, 지금이야 번듯한 농장이 됐지만 그가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아주 황량한 들판이었다. 그러나 토양의 질은 아주 좋았다.

    그는 정부로부터 전액 융자를 받아 포도농장을 개발했다. 레논의 예상은 적중했고 포도농장이 수없이 많은 머지 일대에서도 레논의 농장은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좋은 포도농장이 됐다.

    포도농장이 있으니 포도주공장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 레논의 포도농장에서도 포도주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레논 머지 쉬라즈(Lenon Mudgee Shiraz)’가 바로 그것. 그의 포도주는 ‘와인 오스트레일리아 2004’ 행사에서 1000여 제품 중 상위에 입상했다. 2004년 11월28일, 시드니 NSW 무역투자센터에서 열린 시상식 및 포도주 시음행사에서 레논은 이렇게 수상 소감을 밝혔다.

    “폴란드에서 온 무일푼의 실업자에게 땅과 돈을 빌려주고 용기를 준 호주에 감사한다. 평균 40℃를 오르내리는 머지의 여름은 혹독했지만, 나는 호주에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땀을 흘렸다. 머지 일대에 가뭄이 계속될 때에는 내 가슴도 타들어가는 듯했으나, 땅은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 여러분이 지금 시음하시는 ‘레논 머지 쉬라즈’는 우리 가족의 땀과 눈물로 빚어낸 포도주다.”

    “한국과 호주에 절하고 싶다”

    필자의 후배 K는 아직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 먼저 전화를 걸고 싶지만 그가 퇴직할 때까지 기다려볼 생각이다. 이 기사가 ‘신동아’에 나가면 그는 분명히 먼저 연락을 해올 것이다. ‘그동안 적조했다’는 말도 없이, 다짜고짜 기사에 소개된 사람들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물어볼 것이다. 17년 전, 호주 이민비자를 받았던 필자가 서울에서 그러했듯이.

    K후배가 여기 소개된 다섯 사람의 연락처만 받아 적고 전화를 끊어버리기 전에, 필자가 만나본 다섯 사람의 다음과 같은 공통점만은 꼭 전해주고 싶다.

    [K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돈에 절하는(拜金) 시대에, 그들은 죽자사자 돈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그들은 물질보다는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지향했다.

    글쎄, 네가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 비친 이민 성공사례는 절대로 재산가나 명망가들이 아니었다.

    써봤댔자 밥 한 그릇 동전 한 닢 나오지 않는 시를 쓰고, 방송으로 동포들과 대화를 나누고, 한국에서 받던 연봉의 절반도 안 되지만 일과 여가를 함께 즐기면서 살아가는 소시민들이 나의 눈에는 이민 성공사례로 보였다.

    K야, 너는 결국 호주로 이민을 올 것 같다. 하지만 떠나올 때, 절대로 모국에 대한 분노 같은 건 없어야 한다. 서른세 살에 호주로 온 박경숙 LP공립유치원 원장이 인터뷰를 마치면서 한 말을 전하니, 가슴 깊이 담아두기 바란다.

    “33년 동안 나를 잘 키워준 한국과, 영어도 잘 못했던 나를 아무런 차별 없이 살아가게 해준 호주에 절하고 싶다.”]



    매년 펼쳐지는 ‘송구영신 시드니 하버 불꽃놀이’의 화려한 불꽃이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그 불꽃의 배경은 칠흑 같은 어둠이다. 시대의 어둠 또한 그만큼, 아니 그보다 깊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사람들은 ‘희망가’를 듣고 싶어한다. 2005년 새해를 바다 건너 시드니에서 맞는 시인이 ‘신동아’ 독자들을 위해서 ‘희망가’를 부른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