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균 임기 1년2개월…최단 3일, 최장 3년5개월
- ‘불도저’ 권오병, ‘170cm 이상 서울대 출신’에 인사특혜
- ‘둔마장관’ 유기춘, “각하, 이 둔한 말에게 채찍질을 가해주십쇼.”
- 순시 나선 장관에 촌지 건넨 여교사
- 김옥길 찾아온 신군부, “대학총장만 애국합니까? 누님, 우리 좀 도와주쇼.”
- 교육장관의 대통령 하사금 ‘삥땅’ 의혹 사건
- 교육부 직원들의 장관 길들이기 명약은 ‘스케줄 관리’
1996년 안병영 당시 교육부 장관이 필자에게 교육부 출입 30년을 기념해 수여한 감사패.
필자는 1966년 5월15일부터 꼬박 40년간 교육부를 출입하고 있다. 역대 교육부 장관 48명 중 33명의 장관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사이 부처는 문교부에서 교육부로, 다시 교육인적자원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난 40년간 지켜본 교육장관들의 면면을 돌이켜보며 100년을 내다봐야 할 교육정책이 조령모개(朝令暮改)를 거듭해 신뢰를 잃고, 교육부 무용론까지 제기되는 이유를 찾아보았다.
역대 정권의 교육 각료는 1년이 멀다 하고 바뀌었다. 이렇게 자주 바뀐 것은 장관이라는 자리가 역대 정권의 전리품이어서 그렇다. 1948년 건국 이래 초대 안호상 장관부터 현 김진표 교육부총리까지 48명 장관의 평균 임기는 1년2개월밖에 안 된다. 가장 오래 머문 기간이 3년5개월이다. 단 3일 만에 물러난 장관도 있다. 반면 한 번 하기도 어려운 자리를 두 번이나 차지한 사람도 있는데, 권오병·안병영 전 장관이 그렇다. 권 장관은 제16대 장관으로 취임해 1년 만에 떠났다가 다시 1년 반 만에 제18대 장관을 지냈다. 안병영 장관은 김영삼 정부 때 처음 들어왔으며 노무현 정부 때 다시 한 번 교육부총리로 기용됐다.
필자가 교육부를 처음 출입할 당시 장관이 16대 권오병 장관이니 초대 안호상 장관부터 15대 윤천주 장관까지는 남아 있는 기록에 의존해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꾸짖지 않는 교육, 졸리지 않는 수업’
초대 안호상 장관은 교육법을 제정하고 교육이념을 ‘홍익인간’으로 정립했다. 아울러 교육정책은 ‘일민주의’로 못박았는데, 일민주의의 정의는 ‘남녀 상하 차별 없는 민주주의 교육’이다. 오늘날 부르짖는 ‘양성평등’에 버금가는 교육정책을 일찍이 공교육의 틀로 만든 것이다.
제2대 백낙준, 제3대 김법린 장관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3년간 미군정청 과도기에 시행한 교육정책의 맥락을 살리는 데 힘썼다. 미군정 과도기의 교육정책은 ‘꾸짖지 않는 교육, 졸리지 않는 수업’이었다. 꾸짖지 않는다는 것은 언어폭력과 체벌을 하지 말라는 뜻이고, 졸리지 않는 수업은 교원의 자질과 학습 지도 기술을 겨냥한 것이다.
제4대 이선근 장관 때는 ‘한글파동’을 겪었다. 외국생활을 오래 한 이승만 대통령이 “한글은 맞춤법이 괴이하니 개량하는 게 옳다”고 문제 제기한 것을 장관이 곧바로 정책에 반영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 장관은 “이 대통령이 세종대왕의 뜻을 재천명한 것”이라며 ‘표기법 간소화안’을 발표했다. 간소화안대로라면 ‘믿다(信)→밋다, 밖(外)→박, 높다(高)→놉다, 낳다(産)→나타’로 바뀌어야 한다. 국어학계가 반발하면서 논란이 계속되자 결국 대통령이 직접 “민중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자유에 부치고자 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해 사태가 일단락됐다. 혼란을 빚긴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누가 보고 들어도 뜻을 알아차리기 쉽게 담화문을 쓴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대통령이 즐겨 쓴 “내 말 잘 들으시오” 같은 서민풍 어투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제5대 최규남, 제6대 최재유 장관에 이어 제7대 이병도 장관 때는 역사교육을 바로잡는 시기로 기록된다.
제8대 오천석 장관은 스승상(像) 정립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헨리 반 다이크의 시(詩)‘무명교사 예찬’을 장관이 직접 번역해서 전 교원이 암송하도록 했고 교육계 행사 때마다 낭송했다.
지난해 김진표 현 교육부총리가 마련한 오찬간담회에 참석한 역대 문교·교육부 장관. 앞줄 왼쪽부터 박영식 김숙희 김영식 문홍주 김진표 윤형섭 조완규 오병문씨. 뒷줄 왼쪽부터 이명현 이돈희 이상주 송자씨.
제10대 문희석 장관은 군부 출신으로 해병대 대령 출신이었다. 이름하여 ‘군복장관’으로 문교부에 무혈 입성했다. 각급학교 교육에 ‘혁명공약’ 정신을 주입하기 바빴고 문교부 간부 중 카바레 출입전력이 있는 사람은 가차 없이 파면했다. 재임하는 동안 교육자의 퇴직 후 생계보장제도가 취약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장관 퇴임 후 현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으로 취임해 여의도회관을 건립했다.
제11대 김상협 장관은 고려대 교수에서 장관이 된 학자 출신이었다. 2년여 임기 동안 판공비를 한푼도 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김 장관은 매일 지갑을 비서실장에게 맡겨놓고 돈이 필요하면 지갑에서 꺼내 쓰도록 했다. 따라서 문교부 회계로 처리할 일도, 문교부 예산에서 판공비를 축내는 일도 없었다.
제12대 박일경 장관은 변호사 출신으로 일제 때 전남에서 함평군수를 지냈다. 1962년 10월15일 임명되어 이듬해 3월15일까지 5개월 재임했으니 미처 포부를 펴 볼 기회가 없었다. 고려대 교수 출신의 제13대 이종우 장관 또한 이렇다 할 업적이나 특징이 없다. 국회에서 정책질의를 할 때 이 장관의 답변이 적극적이지 못하면 고려대 출신 의원들이 “선생님 그냥 들어가시지요” 하며 나름대로 ‘스승 대접’을 했다. 제14대 고광만 장관은 1956년과 1957년에 문교부 차관을 지냈으나 장관 취임 4개월여 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제15대 윤천주 장관은 1965년 3월 전남 완도의 섬마을 학교에서 교사가 순직하자 대책수립에 적극 나서 현행 도서벽지교육진흥법을 제정했다. 장관 퇴임 후에는 경기고에 다니던 아들이 박정희 정권을 규탄하는 데모를 주동한 혐의로 곤욕을 치렀다.
국민교육헌장과 학도호국단
제16대 권오병 장관은 인사 스타일이 독특했다. 문교부 직원 인사기록카드 우측 상단에 서울대 출신만 적색으로 표시해 승진 때마다 배려했다. 또 키 170cm 이상, 체중 70kg 수준으로 인선했다. 단신이거나 서울대 출신이 아니면 발탁 대상에 들기 어려웠다. 권 장관은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와 대입자격 학력고사를 실시했다.
제18대 장관으로 재임용됐지만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이 통과되어 물러났다. 역대 교육장관 가운데 국회결의로 퇴임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해임 사유는 ‘불도저’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지나치게 강성이라는 것. 왕성한 정책 추진력도 국회의 불만을 샀다.
권 장관은 중학 무시험제와 대입학력고사를 실시한 것 외에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했다. 국회에서 국민교육헌장안(案) 동의를 받을 때 헌장제정위원장인 서울대 철학과 박종홍 교수에게 울산고 교장 출신 설두하 의원이 “헌장에 담은 문장이 보름달처럼 아름답고 너무 어려워서 어린 학생들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면서 “좀 쉬운 우리말로 다듬을 수 없느냐?”고 물었다. 이에 박 교수가 “의원님, 보름달도 굉장한 철학이외다”라고 대답하자 “국회의원이 당신 제자로 보이느냐”며 국회의원들이 발끈해 일대 소란이 빚어졌다. 이때 권 장관이 “동의된 것으로 알겠다”며 사태를 무마하려 하자 공화당 소속 이성수(서울고 교사 출신) 의원이 화분을 들어 회의실 바닥에 던지는 바람에 박살이 났다.
한심한 것은 유신 첫해, 전북대 실내체육관 준공 기념으로 전국교육자대회를 개최할 때 5000명이 넘는 교원대표가 전국에서 몰려와 유신지지 결의문을 채택하면서도 코앞에 있는 순직교원추모탑에는 꽃 한 송이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1996년 5월15일에 안병영 장관이 필자에게 교육부 30년 출입 기념패를 주면서 “무엇을 위하여 30년을 한결같이 교육부에 출입했느냐”고 묻기에 “벌레가 한 밤에 10리를 기어가듯 이제 겨우 사흘 밤을 기어왔다”고 대답했다. 많은 기자가 오래도록 교육부를 지켜보면서 훗날을 위해 증언하면 좋겠다. 이 자리에 밝힌 이런저런 이야기는 모두 양성평등의 지구촌 시대를 살아갈 손녀 손자들을 위해 썼다.
역대 | 이름 | 재임 기간 | 역대 | 이름 | 재임 기간 |
1 | 안호상(安浩相) | 1948. 8.3~1951. 5.3 | 25 | 이규호(李奎浩) | 1980. 5.22~1983. 10.14 |
2 | 백낙준(白樂濬) | 1951. 5.4~1952. 10.29 | 26 | 권이혁(權彛赫) | 1983. 10.15~1985. 2.18 |
3 | 김법린(金法麟) | 1952. 10.30~1954. 4.20 | 27 | 손제석(孫製錫) | 1985. 2.19~1987. 7.13 |
4 | 이선근(李瑄根) | 1954. 4.21~1956. 6.7 | 28 | 서명원(徐明源) | 1987. 7.14~1988. 2.24 |
5 | 최규남(崔奎南) | 1956. 6.8~1957. 11.26 | 29 | 김영식(金永植) | 1988. 2.25~1988. 12.4 |
6 | 최재유(崔在裕) | 1957. 11.27~1960. 4.27 | 30 | 정원식(鄭元植) | 1988. 12.5~1990. 12.26 |
7 | 이병도(李丙燾) | 1960. 4.28~1960. 8.22 | 31 | 윤형섭(尹亨燮) | 1990. 12.27~1992. 1.22 |
8 | 오천석(吳天錫) | 1960. 8.23~1961. 5.2 | 32 | 조완규(趙完奎) | 1992. 1.23~1993. 2.25 |
9 | 윤택중(尹宅重) | 1961. 5.3~1961. 5.19 | 33 | 오병문(吳炳文) | 1993. 2.26~1993. 12.21 |
10 | 문희석(文熙奭) | 1961. 5.20~1962. 1.8 | 34 | 김숙희(金淑喜) | 1993. 12.22~1995. 5.12 |
11 | 김상협(金相浹) | 1962. 1.9~1962. 10.14 | 35 | 박영식(朴煐植) | 1995. 5.16~1995. 12.20 |
12 | 박일경(朴一慶) | 1962. 10.15~1963. 3.15 | 36 | 안병영(安秉永) | 1995.12.21~1997. 8.5 |
13 | 이종우(李鍾雨) | 1963. 3.16~1963. 12.16 | 37 | 이명현(李明賢) | 1997. 8.6~1998. 3.2 |
14 | 고광만(高光萬) | 1963. 12.17~1964. 5.10 | 38 | 이해찬(李海瓚) | 1998. 3.3~1999. 5.23 |
15 | 윤천주(尹天柱) | 1964. 5.11~1965. 8.26 | 39 | 김덕중(金德中) | 1999. 5.24~2000. 1.13 |
16 | 권오병(權五柄) | 1965. 8.27~1966. 9.25 | 40 | 문용린(文龍麟) | 2000. 1.14~2000. 8.6 |
17 | 문홍주(文鴻柱) | 1966. 9.26~1968. 5.20 | 41 | 송자(宋 梓) | 2000. 8.7~2000. 8.29 |
18 | 권오병(權五柄) | 1968. 5.21~1969. 4.10 | 42 | 이돈희(李敦熙) | 2000. 8.31~2001. 1.28 |
19 | 홍종철(洪鍾哲) | 1969. 4.11~1971. 6.3 | 43 | 한완상(韓完相) | 2001. 1.29~2002. 1.29 |
20 | 민관식(閔寬植) | 1971. 6.4~1974. 9.17 | 44 | 이상주(李相周) | 2002. 1.30~2003. 3.6 |
21 | 유기춘(柳基春) | 1974. 9.18~1976. 12.3 | 45 | 윤덕홍(尹德弘) | 2003. 3.7~2003. 12.23 |
22 | 황산덕(黃山德) | 1976. 12.4~1977. 12.19 | 46 | 안병영(安秉永) | 2003. 12.24~2005. 1.4 |
23 | 박찬현(朴瓚鉉) | 1977. 12.20~1979. 12.13 | 47 | 이기준(李基俊) | 2005. 1.5~2005. 1.7 |
24 | 김옥길(金玉吉) | 1979. 12.14~1980. 5.21 | 48 | 김진표(金振杓) | 2005. 1.28~ |
하루는 또 문교부 기자실에 권 장관이 대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창설하는 계획을 결재 중이라는 정보가 날아들었다. 이에 기자들이 장관실로 몰려갔다. 오전 12시 무렵, 석간 신문 마감이 임박했을 때다. 기자들끼리 어떤 일이 있어도 가판에 싣자고 의기투합해서 장관실로 들어가니까 권 장관이 마침 결재서류를 검토하고 있다가 기자들이 몰려오는 것에 놀라 결재판을 뒤집어놓은 채 응접용 소파로 옮겨 앉았다. 그러면서 “웬 일들이냐?”고 물었다.
기자들은 두 패로 나뉘어 한 패는 학도호국단 창설계획서를 빼내 경복궁 담장 밑으로 달려 나가서 급히 베꼈다. 그때는 복사기가 없을 때라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머지 한 패는 장관과 응접탁자를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베끼러 나간 기자들이 돌아오니까 시치미를 떼고 모두 나와 서둘러 기사를 송고했다.
권 장관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점심식사 후 장관실에 들어서는 순간, 학도호국단 창설준비 내용이 석간신문 1면 머리기사로 보도된 것을 보고 놀란 청와대의 불호령에 혼비백산해 “누가 흘렸는지 조사해서 당장 보고하라”고 노발대발했다. 이에 기자들이 “누설은 장관님이 하신 것”이라고 말해 죄 없는 실무자의 목이 날아가는 것을 막았다. 결국 학도호국단은 훗날 유기춘 장관에 의해 실시된다.
“교육감들이 한푼도 안줬다고요?”
제17대 문홍주 장관은 부산대 법대 교수 출신으로 ‘공부하는 학원, 연구하는 교수’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이를 초·중학교에도 확산시키기 위해 진해의 한 초등학교에서 전국 교육감회의를 열고 공개 보고회를 가졌다. 그런데 보고회가 끝나고, 장관이 탄 차가 교문을 벗어날 무렵 길을 막고 서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부산일보 기자이며, 문 장관의 제자라고 신분을 밝혔다.
“장관님, 돈 좀 주고 가시소. 그 돈 혼자 다 쓰실 겁니까.”
여기자의 맹랑한 요구에 문 장관은 “자네 여전하구먼. 역시 기자일 수밖에 없어” 하고는 “돈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여기자는 “교육감들이 한푼도 안줬다 이 말입니까? 어서 가시소” 하며 길을 내주었다. 문 장관의 제자들 가운데 이런 여걸이 많았다고 한다.
제19대 홍종철 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청렴 장관으로 교육계 부패 관료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일요일이면 등산복 차림으로 서울·경기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학교가 보이면 그 길로 찾아 들어갔다. 한번은 의정부 영석고 안채란 교장이 직접 흙벽돌을 찍는 것을 보고 감동해 뒷날 장관실에 불러 격려하기도 했다.
더 기막힌 일화도 있다. 경기도 이천지역에 나갔다가 한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일직 여교사가 장관인 것을 눈치채고 3만원이 담긴 봉투를 내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교장선생님이 계셨으면 이렇게는 대접하지 않으실 텐데 가진 것이 이것뿐이라 죄송하다”며 허리를 굽혔다. 홍 장관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일직 선생님이 이런 일까지 하느냐?”고 물었고 여교사는 “이거 안 받아 가시면 저는 교장선생님한테 혼이 난다”고 통사정했다. 홍 장관은 이를 증거물로 받아와서 뒷날 문교부 간부회의 석상에서 공개했다. 경기도 교육감이 불려와 용서를 구하고, 청와대까지 보고가 들어갔다. 그러나 학교 이름은 끝내 밝히지 않음으로써 여교사를 보호했다. 홍 장관은 가족을 데리고 북한강에 물놀이 갔다가 급류에 휩쓸린 아들을 구하려다 익사했다.
제20대 민관식 장관의 업적은 고교평준화다. 그러나 고교평준화가 ‘순수한 우리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60년대 중반 박정희 정부는 중학 입시경쟁으로 극성을 부리던 초등생 과외를 뿌리뽑기 위해 중학교 무시험입학제를 채택했다. 그런데 중학 무시험입학제가 정착되기도 전에 고교 입시 과열 경쟁이 새로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당시 민관식 장관은 일본 도쿄에 사람을 보내 고교배정 입학제도의 실상을 알아오도록 했다.
공주대 체육과 윤석병 교수와 홍익대부속초등학교 김동연 교장이 선발됐는데, 이들이 조사한 도쿄의 고교배정제는 공립고교에만 적용되고, 사립고교는 자율선택제였다. 이것을 우리 정부가 국·공·사립 구분 없이 무차별 적용해 ‘고교평준화’라고 부른 것이다. 종교계 학교에 배정된 학생들이 문제였다. 그러나 정부는 우리나라엔 국교(國敎)가 없다는 구실로 학교의 방침에 따르라며 학생들의 불만을 억눌렀다.
제21대 유기춘 장관은 전남대 총장 출신이다. 권오병 장관이 추진한 대학교 학도호국단을 마침내 창설했다. 유 장관은 ‘둔마(鈍馬) 장관’으로 불렸다. 유신정권이 탄력을 받던 시절, 대통령 앞에서 “이 둔한 말에게 채찍질을 가해달라”고 말해 ‘둔마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주마가편(走馬加鞭)’에서 주마를 둔마로 바꿔 대통령을 받들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고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지인들이 적당히 하라고 충고했지만 듣지 않았다. 결국 취임 2년여 만인 1976년 12월3일, 장관실에서 뇌일혈로 쓰러졌다.
역대 교육 장관 정원식 권오병 이해찬 안병영 윤덕홍씨.
국사책에서 사육신이 사라진 까닭
제22대 황산덕 장관은 법무부 장관에서 문교부 장관으로 임명된 법학자였다. 서울대 법대 교수 시절, 서울신문에 연재된 ‘자유부인’이 외설이라며 작가 정비석을 고소한 것으로 유명하다. “교육은 한번 잘못되면 100년 후퇴하고 회복도 어렵다”며 “무엇을 하기보다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강조한 그는 재임 중 특별히 추진한 정책이 없다.
황 장관이 가장 힘겨워했던 사안은 사육신(死六臣)이다. 당시 정상천 서울시장이 서면으로 충의공 김문기 선생도 사육신묘역에 현창될 수 있는지를 유권해석해줄 것을 문교부에 의뢰했다. 정 시장은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역을 성역화하고 이를 위한 예산집행의 근거로 삼기 위해 문교부에 유권해석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황 장관은 국사담당 박용진 편수관을 불러 어찌할 것인지 물었다. 장관실에 불려온 박 편수관은 “이 문제는 문교부가 처리할 일이 아니므로 학계에 넘겨 역사학자들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답했다. 결국 국사편찬위원회에 넘겨져 이영희 위원장 명의로 ‘김문기 공도 사육신으로 현창할 수 있다고 사단(史斷)함’이라는 유권해석이 내려져 서울시장에게 통보했다.
그로 인해 사육신 묘역에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참형된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성삼문, 박팽년 여섯 신하에 김문기 공이 추가되어 사육신이 아닌 사칠신(死七臣)이 현창되었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 논쟁이 계속되자 문교부는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사육신 부분을 아예 삭제해버렸다.
제23대 박찬현 장관은 부산에서 당선된 제헌국회의원 출신으로 외교관을 역임했다. 이 때문인지 장관에 취임하자마자 문교부 출입기자들을 유럽의 여러 나라에 보내 앞서가는 나라의 교육을 시찰하고, 좋은 점을 우리나라 교육현장에 전파하라고 부탁했다. 필자에게는 문교부 출입 13년 기념패를 주기도 했다. 박 장관은 장관으로 임명되기 전 경향신문 사장을 지냈는데, 그때 ‘경향사도상’을 제정하고, 전국 도처에서 묵묵히 헌신·봉사하는 초중고교 교원을 찾아 시상했다.
제24대 김옥길 장관과 제25대 이규호 장관의 일화는 매우 대조적인데, 뒤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제26대 권이혁 장관은 의료계 출신으로, 대학교 부속병원에 교원 또는 그 가족이 입원할 때 편의를 봐주도록 하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장관이 대통령 하사금에 손을 대?
제27대 손제석 장관은 서울대 교수에서 청와대 교육수석비서관으로 발탁 기용됐다가 1985년 2월 장관 자리에 올랐다. 어머니가 사립 진선여고 이사장이었고, 부인도 교사였다. 손 장관은 2년 넘는 임기를 대과(大過)없이 보냈다. 다만 취임 초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10억원의 하사금을 받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이하 교총)에 전달할 때 벌어진 비화는 지금도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당시 교총의 백순달 사무총장은 전두환 대통령과 대구공고 동창으로 한 반, 한 책상에 앉아 공부한 사이다. 경북 청도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는 부잣집 아들이었던 백 사무총장은 학창시절 가난했던 전 대통령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고 한다. 공고 졸업 후 전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고, 백 사무총장은 경북대 사대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백 사무총장을 전 대통령이 찾아내 교총 사무총장 자리에 앉혔다. 그후 “교총이 교육자들을 위해 벌이는 교원 복지사업에 보태 쓰라”면서 손 장관을 통해 10억원을 하사한 것이다.
하사금 전달식은 교육부 장관실에서 있었다. 교총 사무국 간부들도 참석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교총 일행이 하사금 봉투를 열어보니 1억원짜리 수표가 아홉 장뿐이었다. 사무국 간부들은 “대통령 하사금이라도 (세금으로) 10%를 떼는 것이 관행인 것 같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백 사무총장의 생각은 달랐다. 손 장관이 의심돼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고민 끝에 대통령에게 사실을 고할 작정을 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사금 봉투를 열어보았다. 봉투를 입에 대고 훅 불어대니 속지에 끼워진 1억원짜리 수표가 눈에 들어왔다. 손 장관이 10%를 가로챈 누명을 쓸 위기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역대 교육 수장 중 여성은 김옥길 장관(왼쪽)과 김숙희 장관 둘뿐이다.
이제 시절은 노태우 정권으로 넘어간다. 노태우 정권의 첫 번째이자, 전체적으론 제29대인 김영식 장관은 제주 출신으로 서울대 사대 교수, 한국교육개발원장을 지냈다.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첫 조각(組閣)을 할 때 도별로 안배하는 김에 제주도 출신을 찾다가 교육개발원장이던 그를 기용했다는 후문이다. 임기 10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경질됐다.
정원식 장관에 대한 오해
노태우 정부의 두 번째 교육수장인 제30대 정원식 장관은 후에 국무총리를 지냈다. 정 장관은 처음으로 ‘학교교육과정’을 마련해서 학교마다 학생·지역실정에 맞게 교육하고 운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전교조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전교조가 결성되던 날 정부 대책회의에서 “노동조합 결성을 막기 위해서도 교총과 똑같이 사단법인체의 교원단체를 허용해 복수단체로 인정하자”고 주장했으나 “그냥 두고보다가 전교조가 결성되면 불법으로 규정하고 일망타진하자”는 공안 쪽의 강경론에 밀리고 말았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사람들은 정 장관을 전교조 탄압의 주역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정 장관은 대통령 친인척까지 낀 교육부 실세들이 설치는 바람에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장관자리에서 물러난 뒤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대학에 강의를 하러 갔다가 학생들로부터 달걀세례를 받고 밀가루를 뒤집어쓴 정 장관의 모습을 TV로 보면서 전교조 탄압 후유증을 혼자 감당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뒤이어 제31대 장관으로 교총의 윤형섭 회장이 임명됐다. 윤 장관은 연세대 행정대학원 교수였다. 노 정권이 전교조 문제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교사 3불론’을 발표해 환심을 샀다. ‘3불론’의 첫째는 ‘교사는 정치꾼이 아니다’, 둘째는 ‘교사는 장사(협상)꾼이 아니다’, 셋째는 ‘교사는 길바닥에 드러눕지 않는다’이다. 당시 전교조 교사들은 길에 누워 데모를 하곤 했다. 이 3불론이 마음에 들었던지 노 대통령은 윤 회장을 장관으로 발탁했다. 그러나 결국 대입학력고사문제지 도난사건의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했다.
당시 필자가 “사퇴하는 것으로 면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태를 수습한 뒤 떠나도 늦지 않다”고 말하자 윤 장관은 “내가 사표를 내면 담당 실·국장도 따라올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필자가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장관은 믿지 않았다. 이임식이 있던 날 윤 장관은 필자의 손을 잡고 “옳게 봤다”는 말을 남긴 채 쓸쓸하게 승용차에 올랐다.
후임인 제32대 조완규 장관은 전형적인 학자 출신으로 1992년 1월에 임명되어 이듬해 2월, 노태우 대통령과 함께 물러났다.
“결재 많이 하는 건 죄 많이 짓는 것”
김영삼 정부는 제33대 장관으로 전남대 오병문 총장을 임명했다. 임명되던 날(1993년 2월26일) 오전 6시에 필자가 광주 자택에 전화를 걸어 “아무래도 장관실에서 뵙게 될 것 같다”고 미리 축하인사를 했더니 “아직 정식통보가 없었다”면서 좀 일찍 알려주면 서울행 첫 비행기라도 탈 텐데 아무 소식이 없어 물어보기가 그렇다며 난감해했다. 마침내 오전 7시 뉴스에서 김영삼 정부의 조각이 발표되자 다시 전화를 걸어 정식으로 축하인사를 했더니 오 장관은 “사람 죽겠네. 비행기를 놓쳤으니 내 차로 올라가야 하는데, 오전 10시에 임명장을 수여한다고 어서 오라고만 하니 날아갈 수도 없고 땀 좀 나게 생겼다”며 더 난감해했다. 결국 고속도로 순찰대의 협조를 얻어 ‘최고 속력’으로 달린 결과 임명장 수여식에 제때 참석할 수 있었다.
오 장관은 해직교수 출신으로 교수 직선제를 통해 총장이 됐다가 장관자리에 올랐다. 김영삼 대통령의 의지를 이어받아 전교조 해직교사를 복직시키는 일부터 시작했다. 당시 정해숙 전교조 여성위원장을 장관실에 불러 악수하며 카메라 앞에 선 모습은 교육부의 변화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다.
그러나 전교조 해직교사 복직은 수월치 않았다. 교육감들이 반성을 입증할 각서 제출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 바람에 해직교사들이 가두시위에 나섰다. 경찰이 시위를 주도한 교사를 지명 수배하기에 이르자 오 장관은 필자에게 “세상이 잘못된 것인지 장관이 잘못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제34대 김숙희 장관은 교육부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장관이다. 그 뒤로는 여성이 교육부의 수장이 된 적이 없다.
김영삼 정부의 세 번째, 제35대는 박영식 장관이다. 7개월간 교육부를 맡았는데, “왜 이렇게 바쁜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했다. 한국교직원공제회 경주교육문화회관 개관식에 참석한 박 장관에게 “장관이 이런 데까지 나오시니까 늘 바쁘신 것 아니냐”며 하루에 결재를 몇 건씩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못해도 10여 건”이라며 “오전에 한 결재내용을 오후면 다 잊어버릴 지경”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참으로 딱하다 싶어 “지난주에 결재한 서류 다시 가져오라고 해서 살펴보면 아마 몇 건은 다시 작성해오라고 하고 싶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후 교육부 복도에서 마주친 박 장관은 “그때 해준 말을 듣고 결재서류를 다시 살펴봤더니 잘못 된 게 있어서 수정했다”며 “결재를 많이 하는 것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죄를 짓는 듯싶다”고 말했다.
김영삼 정부 네 번째인 제36대 안병영 장관은 연세대 교수였다. 1년9개월 재임하는 동안 ‘5·31 교육개혁’을 선언하는 등 열심이었다. 5·31 교육개혁은 사교육비 부담 완화 등 고교교육을 대학입시 경쟁의 폐단으로부터 구제해 정상화하자는 것이었다. 고액과외를 규제하고, 교내 보충수업을 통해 사교육 열기를 공교육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다.
“교육개혁에도 적이 있다”
그러나 교육현장과 학부모의 협력에서 한계를 느꼈다. 취임 1년째인 5월31일 출입기자들과 간담을 나누면서 여러 질문과 답변이 있었다. 질문 순서 맨 마지막에 필자가 “교육개혁에도 적(敵)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안 장관이 “있다”고 대답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안 장관은 “기득권의 미련을 버리게 하는 일이 개혁보다 어렵다”며 보수층을 겨냥해 뼈 있는 말을 남겼다. 당시 보수층과 싸워야 했던 안 장관이 노무현 정부의 교육부총리로 재입각한 뒤엔 전교조 등 소위 진보 세력과 소모전을 치른 것은 아이러니다.
제37대 이명현 장관은 김영삼 정부의 마지막 교육부 수장이다. 미국 명문대학 교수 출신답게 학력 경쟁력을 강조했다. 그러나 문민정권 임기 말이어서 그랬는지 만나면 “교육 타령해야 되겠냐, 등산이나 가자”며 껄껄껄 웃기를 잘했다.
김대중 정부 때 교육장관은 7명이다. 첫 번째는 제38대 이해찬 장관이다. 이 장관의 첫 시련은 초중등교원의 정년단축이었다. 대학교수 정년은 65세 그대로 둔 채 초중등 교사만 3년씩 단축해서 62세로 줄이니 초중등 교사들이 당하고만 있을 리 없었다. 교사가 아무리 돈에 욕심이 없다고 해도 교장 연봉이 평균 6000만원이니 3년이면 1억8000만원이다. 교육부에선 ‘호봉 높은 원로교원 1명을 내보내면 초임교사 2명을 쓸 수 있다’는 논리로 교원 정년 단축을 합리화했다. 이 장관은 수행평가를 강요해 또 한 번 교사들의 반발을 샀다. “이미 모든 학교에서 수행평가를 하고 있는데 (장관이 새삼 이야기하는 건) 무슨 유형의 것인지 모델을 제시해달라”는 교사들의 요구에 이 장관도 손을 들고 말았다.
제39대 김덕중 장관은 아주대 총장을 지냈다. 김 장관은 BK21사업을 시행하며 교육부 실무진에 특정 사립대의 연구를 좀 도와주라고 당부한 것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감사원 감사까지 받았다. 장관이라는 멍에 때문에 유구무언으로 감내하듯 덮어버렸다.
제40대 문용린 장관은 여주농고를 나와 서울대에 들어간 수재다. 7개월 남짓 짧은 임기 동안 유아교육의 공교육화를 위해 애썼다. 언제나 웃는 인상이 보기 좋았다.
연세대 총장 출신의 제41대 송자 장관은 2000년 8월7일 취임해 8월29일, 겨우 22일 만에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다.
제42대 이돈희 장관도 5개월여 만에 물러났다. 그러나 ‘교육과정’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大家)였으며 지금은 민족사관고 교장으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4000만이 교육부 장관’
이돈희 장관 이후 교육부 장관은 부총리를 겸직하게 됐다. 2001년 1월29일 임명된 제43대 한완상 장관부터다. 제44대 이상주 장관은 전두환 정권 때 청와대 교육수석을 지냈다. 국민의 정부 마지막 교육장관으로 전교조 등 진보단체의 활동에 마땅치 않다는 반응을 보여 관계가 매끄럽지 못했다.
참여정부 들어 노무현 대통령이 임명한 교육부총리는 현재까지 4명이다. 제45대 윤덕홍 장관은 대구대 교수 출신이다. 2003년 3월7일 취임해 그해 연말 개각 때까지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에 반대하는 전교조 교사들의 연가투쟁으로 시끄러운 나날을 보냈다. 취임 초 교육부 내 하위직 공무원들과 자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눴다. 교육부 안팎에서 인간적이란 평을 들었다. 지금은 교육부 소속 단체인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제46대 안병영 장관은 김영삼 정부에 이어 두 번째로 입각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4000만이 교육부 장관’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교육부 구상 단계에 있는 것이라도 알려지면 정책으로 오도되거나 와전되어 백가쟁명(百家爭鳴)식 반응이 일었다. 안 장관도 전임 장관과 마찬가지로 연일 여론과 소모전을 치르다가 2005년 새해 벽두에 경질됐다. 후에 필자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 “세 번째 입각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운을 떼자 안 장관이 “제가 그 자리에 또 가면 정신 나간 사람이지요” 하면서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도 말라”며 펄쩍 뛰었다.
지난해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교원평가제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를 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 교사들.
제48대 장관인 현 김진표 교육부총리는 지난해 1월28일 임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제부총리를 역임한 김 장관은 자립형 사립고와 특목고 설립, 서울시 학군조정을 둘러싼 논란에 제대로 과녁을 맞히기 어려운 형국이다. 지난 1월, 국무위원식당에서 김 장관과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필자가 “피곤해 보인다”고 말하자 김 장관이 “전문대학에서 오신 분들과 반나절 동안 입씨름을 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에 필자가 “접시를 한 개씩 들고 닦으면 깰 걱정이 없지만 급하다고 두 개, 세 개를 한꺼번에 닦다보면 깨지게 마련”이라고 조언하니 장관도 “공감한다”고 했다.
“대학 총장만 애국합니까?”
역대 교육 각료 중 여성은 제24대 김옥길, 제34대 김숙희 장관 두 사람뿐이다. 김옥길 장관은 취임식에서 “대학 총장(이화여대) 출신답게 장관자리를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교육부 밖에서는 신군부세력의 이미지 구축에 열을 올리며 숱한 홍보대책이 쏟아지고, 장관 이름으로 발표하라는 보도자료가 줄을 이었다. 그때마다 김옥길 장관은 거절했다. “교육은 교육자에게 맡기면 누구보다 잘 해낸다”는 게 김옥길 장관의 거부 이유였다. 그렇게 5개월5일을 버티다 해임되고 만다.
1980년 5월21일 오전, 이임식장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외부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저 오늘 떠나갑니다”로 말문을 연 김옥길 장관은 이임사에서 장관으로 임명될 당시의 정황을 소상히 밝혔다.
“이대 총장실에 앉아 있는데 웬 낯선 군인 서너 명이 계급장도 명찰도 달지 않은 채 찾아와서는 ‘누님, 우리 좀 도와주시요’하기에 ‘누구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계엄사령부에서 왔는데 우리 군은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것’이라며 ‘문교부 장관을 맡아달라’고 하기에 ‘못한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대학 총장만 애국하는 줄 아느냐’면서 ‘나라가 어려울 때 함께 나서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윽박지르더군요. 이렇게 해서 장관이 된 겁니다.
그후 학생 데모가 격렬해지고 ‘군부 강도정권 물러가라’는 구호가 장관실에까지 들려오고, 최루탄 연기 때문에 문을 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정장 차림에 지휘봉을 든 계엄사령관이 찾아와 ‘이화여대 때문에 데모진압이 어려우니 도와주셔야겠다’고 하기에 ‘본시 내가 저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의롭지 못한 것을 보거든 그냥 두지 말라고 했는데 이제 와서 장관이 됐다고 그러지 말라고 한다면 그게 먹혀들겠느냐’고 했어요. 그랬더니 알았다면서 인사도 없이 나간 뒤 장관을 그만두라고 해서 오늘 이렇게 떠납니다….”
김옥길 장관은 “이제 떠나면 문경새재에 지어놓은 초막으로 돌아가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이렇게 세 가지 소리만 들으면서 살다가 눈을 감겠다”며 “혹시 문경새재를 지나거든 내 집에 들러 시원한 물 한 사발 들면서 바쁜 걸음이지만 쉬어가라”고 했다. 이렇듯 이임사의 마지막은 신군부 세력을 꾸짖고 타이르듯 비장했다.
김옥길 장관은 비록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취임 직후 ‘교복자율화’를 시행했다. 갑작스러운 발표에 교육계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혼돈에 빠졌던 것은 난센스다. 심지어 교수 출신의 어느 사립여고 교장은 장관을 찾아와 “교복을 자율화하라고 했으면 지침을 주셔야지 그냥 지시만 하면 어떡하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이에 장관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출입기자들을 모아놓고 ‘교복자율화’ 정책을 설명했다. 당시 김옥길 장관은 “여기서 교복은 교육의 자율화를 상징하는 것”이라며 “이래도 못 알아듣겠느냐”고 호소했다. “교육자율화 깃발을 어디에 꽂으면 교육자들이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교복이라는 언덕에 꽂은 것”이라고 부연했다.
“교육의 진수는 모성애”
전두환 정권은 김옥길 장관을 경질했지만 교복자율화 정책은 억누르지 못했다. 후임 이규호 장관이 고스란히 넘겨받았다. 달변에 문장력까지 뛰어난 이 장관은 3년5개월을 재임해 역대 교육장관 중 최장기를 기록했다. 이 장관은 전임 장관의 교복자율화에 이어 ‘두발자율화’를 내걸고 중고생의 머리를 귀밑 3㎝이상 5㎝까지 허용했다. 두발자율화는 금세 확산됐으나 교복자율화는 진행이 더뎠다.
결국 이 장관은 청와대 업무보고 자리에서 곤욕을 치렀다. 전두환 대통령이 “두발자율은 잘 되는데 교복자율이 안 되는 이유가 뭐냐?”고 물은 것이다.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전 대통령은 “교복자율화라는 용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교복이라는 말 대신 ‘복장자율화’로 고쳐서 아무거나 마음대로 입으라고 하면 될 것 아니냐”고 다그쳤다. 즉각 ‘복장자율화’로 고쳐 권장하니 효과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김숙희 장관은 김영삼 정부가 두 번째로 임명한 이화여대 교수 출신 장관이다. 김숙희 장관은 취임 초 전교조 해직교사 복직문제로 고심했다. 해직교사 복직 방침은 김영삼 대통령의 강한 의지에서 비롯됐다. 일부 시·도교육감이 반발하자 장관이 직접 나서 설전을 벌이면서까지 독려했다. 교육감 대부분이 “해직교사가 반성의 빛이 보이지 않으면 복직시킬 수 없다”면서 각서를 요구했고, 해직교사들은 이를 거부했다. 참다못한 장관이 서울시 교육감실로 찾아가 “저들(해직교사)은 당한 사람이고 당신들은 누려온 사람들인데 각서를 이유로 복직을 안 시키면 되느냐”면서 교육감이 못하면 장관이 하겠다고 호통을 쳐 화제가 됐다.
김숙희 장관의 취임은 제6차 초·중등교육과정 개편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검정교과서 심사 등 전문성을 요하는 업무까지 겹쳐 더욱 분망했다. 이 와중에 어느 사립대 재단에서 김 장관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가 단단히 망신을 당한 일은 유명하다. 교육 현안을 의논하고 싶다는 제의를 받고 만찬에 응했는데, 헤어질 때 사립대 재단측에서 장관 승용차 트렁크에 웬 꾸러미를 하나 싣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깜짝 놀라 제지하고 들어내 돌려줬는데 현찰로 500만원쯤 되어 보였다고 한다.
김숙희 장관은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육의 진수는 모성애”라고 힘주어 말했다. “짐승도 암컷은 제 새끼를 가르친다”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인은 어머니가 키웠다는 것이다.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는 가정에 있고 이것을 푸는 스승은 어버이라고 했다. 자식이 열 살 때 들은 부모의 말은 뜻을 모르니 알아듣기 어렵고, 스무 살 때 들으면 말 같지 않아 반항하고, 서른 살에 들으니 반은 맞는 것 같아 마흔 살에 다시 들었더니 틀린 것이 없어서 쉰 살에 그 옳으신 말씀을 더 듣고자 했으나 이미 계시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김 장관이 말한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다.
김숙희 장관은 ‘용병(傭兵)’ 발언 파문으로 비운을 맞았다. 영관급 이상 고급장교 집단 연수에서 특강을 하던 중 베트남 파병에 관해 언급한 것이 ‘용병’설로 와전돼 장관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1995년 5월12일 이임식 때 “대과(大過) 없이 장관직을 마치고 한국의 전형적인 여인상을 지니신 제 어머니 곁으로 돌아갑니다”라고 말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김숙희 장관의 어머니를 만나보기 위해 봉원사 맞은편 언덕에 있는 김 장관 댁을 찾은 적이 있다. 예고 없이 찾아간 방문객 앞에 어머니는 딸(김 장관)이 벗어놓은 스타킹을 손에 들고 나왔다. 스타킹에 백열전구를 넣고, 미어진 자국을 접착제로 깁고 있었던 것이다. 마당 한쪽에 벽오동 한 그루가 있기에 본래 있던 것이냐고 물었더니 “집 지을 때 구해 심은 것으로 자식들이 그 뜻을 알고 지켜주니까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고 했다. 어머니가 벽오동을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려는 게 아니었다. 본래 봉황은 구만리 장천을 날면서 아무리 쉬어가고 싶어도 학이 머물다 간 벽오동 가지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자식들이 장성해서 친구를 사귀더라도 봉황처럼 아무나 집안에 들이지 말라는 게 어머니의 뜻이었다. 이러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 ‘교육의 진수는 모성애’라는 교육철학을 지닌 김숙희 장관이 오래 머물면서 교육의 진수를 뿌리내리지 못한 것은 아쉽다.
장관을 노리는 세 가지 함정
40년을 지켜본 교육부 장관들은 한결 같이 세 가지 함정에 빠져 헤매다가 아쉬운 고별사를 하곤 했다. 첫 함정은 스케줄이다. 하루 일정이 조찬 모임으로 시작되는 것은 다반사다. 그러니 장관들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내 몸이 아니다”라고 하소연한다. 일정에 쫓기는 나날이 계속되니 차분하게 정책을 구상할 겨를이 없다. 늘 “급하다”는 교육부 직원들의 성화에 쫓기듯 결재를 하다 보면 자신이 정책을 결정하는 장관인지, 결재서류에 사인만 하는 도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고 한다. 각급 학교장이 해야 할 일까지 장관이 결재해야 하는 교육부의 특수성이 장관을 결재더미에 압사할 지경으로 몰아넣는다.
사정이 이러니 교육부 직원들이 장관을 길들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스케줄 관리’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일정을 빡빡하게 세워서 한두 달 ‘돌리면’ 장관은 어느새 머리를 비우고 일정만 따라다니게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함정은 방문객이다. 장관실에 찾아오는 내방객은 크게 두 부류다. 장관이 다급해서 자문(諮問)하기 위해 불러들이는 경우와, 장관의 의사와 상관없이 나름의 목적이 있어서 찾아오는 경우다. 그러나 어느 경우라도 장관과 평소 알고 지낸 처지가 아니면 장관을 찾아오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장관은 단소리와 쓴소리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방문객 중엔 감언이설로 장관을 치켜세운 뒤에 인사 청탁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장관은 그런 사람을 경계하는 것으로 화를 막을 수 있다.
세 번째 함정은 인맥이다. 어느 부처, 조직이건 인맥이 형성되지 않은 곳이 없다. 특히 관료사회는 인연, 지연, 학연 중 어느 것으로도 인맥을 형성한다. 그 인맥은 부처 안팎에 관계없이 연줄을 맺고 이어져 암약으로 시작된다. 인맥은 차단하기보다 급소를 찾아 처방하는 것이 비책이다.
교육부가 수립한 정책들이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는 건 교육정책에 대한 논의의 중심에 학생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차츰 평정을 찾고, 일에 재미도 붙는다. 이 과정에서 국가 권력의 핵심기구에 서 있는 것을 실감하고 매사 육감에 의지한다. 특히 사람을 조심하고, 말수가 적어진다. 언론을 의식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것이 2기병이다.
취임 6개월 전후가 되면 벌써 개각을 의식한다. 뭔가 좀 알 만하다 싶을 때라 평균 임기는 채우고 싶어진다. 이 시기에 겪는 불안감을 3기병이라고 한다. 다행히 개각에서 유임되면 더 이상 바라는 것도 없어지면서 평온을 되찾고 날이 가건 달이 가건 무디어진다. 그런 어느 날 뜻밖의 경질 소식을 듣고 ‘오뉴월 뙤약볕도 남 주기 싫다’는 말을 실감한다. 어떤 장관은 이임식을 마치고 나올 때 머리는 텅 비고 다릿심이 빠지더라고 한다. 이러니 장관이 바뀔 때마다 정책의 인수·인계가 제대로 될 턱이 없다.
文敎部와 問敎部
교육부는 수장만 자주 바뀌는 게 아니라 명칭도 두 번이나 갈아치웠다. ‘문교부’는 건국 이래 1990년 12월26일까지 지속됐다. 1990년 12월27일 ‘교육부’로 바뀌었는데, 당시 윤형섭 장관은 부처 이름을 바꾸라는 윗선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풍문이 자자했다. 일설에 따르면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 후 향리에서 촌로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는데 한 노인이 “문교부가 하는 일은 왜 그렇게 실정을 모르는 것이 많으냐”며 “문교부의 문(文)자를 물을 문(問)자로 바꾸어서 국민에게 좀 물어보고 나서 하게 일을 하면 교육이 제대로 될 것”이라고 쓴소리를 한 것이 발단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이름을 바꾸게 되었는데 노인의 말대로 ‘問敎部’로 하기는 그렇고, 교육을 도맡은 부처의 상징성도 살려야겠기에 고심 끝에 교육이라도 제대로 잘 해보자는 뜻에서 ‘교육부’로 결정했다는 후문이다.
‘교육부’가 다시 이름을 바꾼 것은 김대중 정부 때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1월29일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로 개칭했다. 동시에 장관을 부총리 겸직으로 격상했다. 부총리 겸직 장관은 재경부에 이어 두 번째. 주목할 것은 국민의 정부가 교육부 장관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으로 격상하면서 처음 임명한 한완상 교육부총리에게 당부한 사항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 교육부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면서 부처 명칭을 바꾼 세 가지 이유를 천명했다. ‘첫째, 대학은 자율에 맡기되 경쟁력이 없는 대학을 국민의 혈세로 지원하는 것을 재고하라. 둘째, 초중등교육은 지방주민자치에 속하는 것으로 중앙정부가 더 이상 관여하거나 간섭하지 말고 시·도 교육자치에 권한을 이양하라. 셋째, 교육인적자원부가 명실상부한 국가 인력자원의 산실로 제 구실을 다하기 위해서는 관계 부처끼리 두뇌자원을 공유해서 집중 관리하고 새 천년을 살아갈 2세 국민의 국제경쟁력을 탄탄하게 다져주는 디딤돌이 되게 하라.’ 김대중 대통령은 특히 한국이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이용하고 영어도 가장 잘하는 나라가 되어 글로벌 시대의 중심에 서게 하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왜 교육인적자원부는 여전히 대학을 손아귀에 쥔 채 뭐가 그리 아까운지 놓으려 하지 않고, 초·중등교육의 권한에 미련을 두고 지방교육자치에 이양하지 못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인적자원부’답게 국가 인력자원관리에 도움을 주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노동시장의 인력수급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결국 교육인적자원부는 대학과 초·중등교육, 산업발전에 간접적으로도 기여하지 못해 ‘저개발 부처’라는 오명이 따라도 할말이 없는 처지다.
흔히 교육부는 환경과 토양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은 교육부를 에워싼 혁신·자문기구의 운영이 미치는 영향 탓이다. 장관을 직접 보좌하는 교육부 조직은 재량의 범위가 협소한 반면, 자문세력이 펼치는 운신의 폭은 훨씬 광범위하다.
절반은 장관 책임, 나머지 절반은?
교육부 직속기관을 예거해보면 학술원, 국사편찬위원회, 국제교육진흥원, 국립특수교육원, 교원소청심사위원회, 교육인적자원연수원의 6개다. 유관단체는 사립중·고교장회, 전교조, 교총, 대학법인협의회, 유치원총연합회, 전문대학법인협의회, 교우회, 주부교실, 교육개발원, 학원총연합회 등 27개 단체다.
대통령 직속이면서 교육부와 직접관계인 교육혁신위원회는 위원장(설동근 부산시교육감 겸임)을 비롯해 17명 위원이 포진하고 김진표 교육부총리와 청와대 비서실의 정책실장은 당연직 위원이다. 또 교육부 정책자문위원회는 6개 분과위에 각 12명씩 교육전문가 72명과 위원장, 부위원장을 두고 있다. 이 6개 분과는 교육기획재정분과, 교육과정분과, 교원정책분과, 인적자원정책분과, 교육복지분과, 국제교육분과로 자문을 분담한다.
교육부 소속 단체는 사학교원연금공단,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교육학술정보원, 교직원공제회, 대학교육협의회, 사학진흥재단, 전문대학교육협의회, 학술진흥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의 9개 단체다.
이렇듯 방대한 자문기구와 연구·학술단체를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한자(漢字) 문화권에 속한 우리나라는 중국이 수년 전부터 간체자를 사용하고 있는데도 초중고생 한자교육에서 번체자(정자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유엔은 오는 2008년부터 모든 공식 중국어 문서에 번체자 사용을 중단하고 간체자만 쓰기로 결정했지만 우리나라 한자교육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중국 정부는 중국어의 제2국제어화 방침을 선포하고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해마다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사람 수가 급증하고 있으나 교육부는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육부 직제는 차관 다음으로 학교정책실장을 두고 있으며, 교육부엔 학교정책과도 있다. 그런데 올해 처음 교육혁신위원회 학생위원으로 지방 사립여고 2학년생을 위촉했다. 그 학생위원이 회의 참석차 서울에 와서는 “교육부에 학교정책과가 있는 걸 알았다”며 “학생들이 모르는 학교정책은 낯설다”고 토로했다. 그 학생은 “학생부터 알고, 학교정책을 세워달라”며 “친구들로부터 대학입시 제도를 너무 자주 바꾸지 말도록 건의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전했다. 회의가 끝날 무렵에는 “학생들의 의사전달 통로가 학급회의에서 시작되는 것이 순서인데 학교 실정은 그렇지 못하다”면서 “학급회의 활성화가 관건”이라고 주장했다. 여고생 한 명을 참여시킨 것만으로 교육혁신위원회는 학생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다.
교육부가 수립한 정책들이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는 건 교육정책 및 현안에 대한 논의 중심에 학생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학교의 존립 가치는 학생 교육이다. 정책의 효과는 행정에서 드러나는 것을 우위로 삼지 말라고 했다. 학교현장의 학생 교육에서 찾는 것이 순리다. 따라서 교육정책의 산실인 교육부 장관 자문기구의 위원 선택에 혁신이 필요하다.
노태우 정부 중반 때 국회교육위원회에서 교육자 출신 한 의원이 교육부 장관에게 “10년 후의 교육과 20년, 30년 후의 교육 변화에 대비할 비전을 제시하라”면서 “10년도 내다보지 못하는 교육부라면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것”이라며 몰아세웠다. 이는 정책의 부재도 문제지만 장관이 시행 중인 정책의 진수도 모르고 임기를 시작하는 탓에 훗날이 걱정스럽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표되고 시행한 교육정책은 어느 하나도 장관 혼자 결정해서 독단으로 처리한 게 없다. 사전에 예고하고 설명했으며 자문도 받았다. 장관에게 절반의 책임이 있다면 나머지 절반을 책임져야 할 곳은 따로 있다. 장담하건대 교육부 무용론을 해부하기 위해서는 교육 풍토와 정책 환경에 과감히 메스를 대야 한다. 오랫동안 지켜본 바 장관이 잘해보려고 애써도 결과가 신통치 못한 데는 변명할 여지가 있다.
손녀 손자를 위하여
5월15일 ‘스승의 날’은 매년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러나 스승의 날과 관련이 깊은 ‘순직교원추모탑’은 교육계에서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다. 이 추모탑은 전북 전주 공설운동장 한편에 서 있다. 40여 년 전 청소년적십자회 초중고생들이 스승의 날을 정할 때 병상에서 신음하다 이름 없이 숨진 무명교사와, 제자들을 위하여 살신성인한 스승을 기리기 위해 6m 높이의 돌탑을 세우고,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꽃다발을 바치며 참배하고 있다.
탑신에 새긴 헌시는 전원시인 신석정이 지은 것으로 ‘스승님 감으신 눈망울에/ 눈망울이 비추인 광망 속에/ 트이어 온 역사여 길이 빛나라’고 했다. 역대 교육장관 중에 전북도교육청을 순시하는 길에 이 탑에 참배한 이는 정원식·안병영 장관 정도다.
특히 정 장관은 재임 때 ‘스승의 날’ 전 날 미리 전주에 내려가 전북지사와 전주시장이 동석한 만찬 자리에 학부모 대표 500명을 초대해 “내일 아침 스승의 날은 순직교원추모탑에 모두 참배하자”고 제안했다. 전주시장이 화들짝 놀라 급히 환경미화원들을 총동원, 추모탑 주변을 대청소하느라 소동이 빚어지긴 했지만 그 뒤로 전라북도에서는 스승의 날 기념 도민 행사로 순직교원추모탑에 참배한다.
전국 도처에 순직한 교원의 사도비가 흩어져 있지만 교육부에서 전혀 관리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안병영 장관 때 스승의 날에 맞춰 교육방송에서 순직사도비에 얽힌 사연을 드라마로 엮어 방영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