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24일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지난 3년간 조사한 ‘7대 의혹 사건’ 및 각종 탄압사건을 정리한 종합보고서를 발간했다. 여기엔 중앙정보부와 안기부가 주도한 ‘신동아’ 탄압 사례들도 포함되어 있다. 비록 진실위 조사가 우유부단한 결론을 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군사정권 시절 벌어진 언론통제의 진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1968년 중앙정보부에 의한 신동아 ‘차관’ 기사 필화(筆禍)사건과 1987년 안기부에 의한 신동아 제작방해사건에 대한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 조사결과를 발췌, 요약해 소개한다. 원문 표기를 최대한 살렸다. ‘편집자’
1. 시대적 배경
1967년 5월3일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신민당 윤보선 후보에게 승리, 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뒤이은 6월8일 총선에서도 공화당이 117석을 획득, 신민당 44석을 누르고 승리하였다. 그러나 당시 총선결과에 대해 야당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면서 정국이 혼란한 가운데 공화당은 정국안정을 위해 소속의원 제명 등의 조치를 취하였으며, 후계 문제와 관련한 당 내분으로 김종필 당의장은 정계은퇴 의사를 표명하였다.
한편 1968년 북한의 1월21일 ‘청와대 습격사건’ 및 1월23일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10월30일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승복 살해사건)은 남북관계를 극도의 긴장상태로 몰아갔다. 1966~73년 이뤄진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우리나라는 외화획득 등 경제발전의 기회를 얻었으나 전사자 5000여 명, 부상자 1만6000여 명이 발생했다. 그런 가운데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기간 경부고속도로(1968. 2~1970. 7)가 완성되는 등 국내적으로는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었으며, 이에 따른 급격한 정치·경제·문화적 변화가 나타났다.
2. 사건 개요
1968년 월간 ‘신동아’는 12월호에 정부의 차관도입 실태, 차관배정 과정, 차관도입의 공과 등에 대해 심층취재하면서 차관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간 정황을 보도하였다.
동 기사는 ‘신동아’ 정치부 기자 김진배, 경제부 기자 박창래가 1968년 9월 ‘외자도입특별국정감사특위’ 취재 및 국회의원 면담과정을 거쳐 작성하였다. 주요 내용은 차관의 국내기업 배정과정에서 일부 재벌들에게 특혜성 차관이 배정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집권여당은 차관배정의 대가로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했다는 것이었다. 정치자금 ‘4인 공동관리설’ ‘5% 커미션설’ 등 당시 공화당 및 집권층의 뇌물·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의 도덕성을 공격하였다.
신동아 차관 기사 요지
○정부지급 보증하에서 들여온 차관이 산업을 일으키고 수출을 촉진하여 국민소득을 높인다는 점이 인정되나 거대한 정치자금 조성수단이 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음.
○현금 차관, 외화 대부, 연불 형식으로 들어온 차관은 20억달러에 이르고 1963년부터 1968년까지 6년간 도입된 상업차관 약 8억달러의 5%가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가정하면 4000만달러(100억원)로 추산됨.
○공화당이 중앙선관위 기탁금액의 61%를 가져갈 경우 1억5000만원에 불과한데 이 정도 돈으로 두 번의 선거를 치렀다고 보기 어려움.
○집권당의 위상으로 볼 때 일부 정치자금이 체제안정을 위한 긍정적인 부분에서 소비될 가능성이 있으나 세간의 ‘4인 공동관리설’과 관련 정치자금이 일사불란하게 수금, 관리, 배포된다는 설이 있음.
○이는 최근 도입된 외자가 특정 재벌에만 배정되는 결과를 낳게 되고, 결국 권력과 재벌의 결탁 심화 및 차관배정의 불투명성으로 인해 비난을 면키 어려움.
이와 관련 중앙정보부는 동(同) 기사 게재와 연관된 ‘신동아’ 기자 5명(박창래 기자, 김진배 기자, 손세일 부장, 홍승면 주간, 유혁인 차장)을 연행, 반공법 위반혐의를 두고 취재, 집필, 게재 경위에 대해 심층조사하면서 동 기사가 기밀사항으로 당시 세간의 ‘차관망국론’을 퍼뜨려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했다고 주장하였다. ‘차관망국론’은 차관경제가 미·일에 대한 경제적 예속을 가중시켜 궁극적으로는 빈부격차가 심화된다는 주장이다.
진실위는 중앙정보부, 안기부 시절 있었던 각종 의혹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조사 결과를 10월24일 보고서 형태로 발간했다. 사진은 중정, 안기부의 후신인 국정원 전경.
이후 중앙정보부는 ‘신동아’가 1968년 10월호에 영문 ‘북괴와 중·소 분열’(조순승 당시 미주리대 교수가 1968년 3월 ‘아시아학회협의회’에서 발표한 기고문)을 번역 게재하면서 김일성을 찬양하고, 북한의 위장선전 내용을 편집 없이 인용·보도함으로써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며 반공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였고, 12월6일 ‘신동아’ 주간 홍승면, 부장 손세일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1969년 4월 중정 수사관은 ‘북괴와 중·소 분열’ 오역 관련 반공법 위반 사건과 관련, 피의자 손세일·홍승면은 반공법 제4조1항에 해당하나 개전(改悛)의 정(情)이 현저하여 기소 유예, 천관우·김상만은 반공법 제4조1항에 해당하나 동 논문 내용을 검토하였다는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에 각각 처분함이 가하다는 의견서를 서울지검 앞으로 송부했다. 서울지검은 1969년 4월19일 신동아 필화사건 관련자 손세일, 홍승면, 천관우, 김상만에 대해 최종 기소유예 및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3. 조사 내용
1) 박정희 정권과 동아일보의 관계
송건호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과 동아일보의 관계에 대해 “1964년 언론파동 때 전국 언론기관이 이미 박 정권에 굴복하고 다만 동아, 조선, 경향, 그리고 대구매일신문만이 자유를 주장하여 저항해왔는데 -중략 - 동아일보만이 권력당국에 유일한 장애물이 되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전 동아일보 출판국장 장행훈은 동아일보의 위상에 대해 “당시 동아방송을 가진 동아일보의 위상은 현재 조선일보나 여러 방송사와 비교할 수 없으며 동아일보는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언론사였다”면서 당시 동아일보가 박 정권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지속 게재해왔던 점을 고려하면 당시 박정희 정권의 언론정책은 대(對)동아일보정책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따라서 차관 필화사건이 발생할 당시 동아일보의 정부 비판적인 기사가 박정희 정권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동아일보사史’에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당시 동아일보가 취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 기조는 여타 언론사보다 강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며, 방송사를 소유한 동아일보의 반정부적 논조가 박정희 정권에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보인다.
2) 중앙정보부의 ‘차관 필화사건’ 개입 배경
손세일 당시 신동아 부장은 ‘차관기사’를 백서 형식으로 작성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는데 연행될 당시 동 기사가 반공법 4조를 위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음’을 고지받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 시절 북한이 남한 내 언론기사를 이용, 대남 선전선동을 한 사례는 많았고 그와 관련 경고 또는 연행조사를 받기는 했으나 차관기사의 경우, 구속기간 및 중정의 대응태도가 전과 달랐다면서 여당의 정치자금과 관계된 민감한 성격으로 인해 차관기사가 문제되었던 것으로 진술하였다. 손세일은 “당시 경영진에서는 동아일보 계열사인 삼양社와 경방(주)에 대한 세무조사 압력을 우려하는 동시에 동아일보 전직원에 대한 병역조사 실시 등 전방위적인 압박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중정부장 김형욱은 사건개입 배경을 1968년 11월22일 김성곤 당시 공화당 재정위원장이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신동아’의 차관기사를 중정에서 조사하도록 사주한 정황을 설명하면서 동 기사의 문제점은 차관과 연계된 정치자금 부분이었으며 이는 차관 수혜를 부여받은 기업과 밀접하게 관련된 정치인들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중정의 개입을 유도했던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김형욱·박사월, ‘김형욱 회고록’, 아침, 1985, 295~301쪽).
그러나 박창래 당시 동아일보 경제부기자는 ‘신동아’ 차관 보도사건과 1968년 3월에 발생한 ‘한국은행 필화사건’의 연관성을 주장하였다. 동 기사는 당시 한국은행이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통화량 긴축정책에 대한 내용으로 주요 내용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지속적으로 도입한 차관에 대한 상환능력 부재로 우리 경제에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탄압을 받은 1968년 12월호 ‘신동아’ 차관 관련 기사와 12월호 표지.
박창래는 “당시 박 대통령이 동 기사가 외자유치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우려하여 한국은행 및 동아일보 관계자들을 조사토록 지시한 것으로 들었다”며 “동 사건 이후 중정이 언론보도에 적극 개입하는 사례가 증가했으며 결국 1968년 11월 ‘차관 필화사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한다”고 진술하였다.
이는 당시 동아일보 ‘청와대 예산 삭감기사’(1968년 11월23일) 및 차관 도입시 공화당의 정치자금 조성의혹 제기 등을 문제 삼아 박정희 정권이 ‘동아일보 길들이기’를 시도했다는 당시 장준하 신민당 의원 및 동아일보 등 언론 관계자들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는 대목이다.
장준하 의원은 1968년 12월16일 ‘언론자유침해에 관한 질문’이란 제목의 국회 대정부 질의를 통해 “동아일보는 간단하게 추려서 ‘청와대 예산을 깎아라’ 하는 제하로 기사화했던 것인데 이것이 심히 대통령에게 노여움을 샀고 대통령 자신이 이번에 동아일보의 버릇을 고치라고 강력한 지시를 내렸다는 믿지 못할 소문도 퍼지고 있는데…공화당 정권은 차기 집권을 비롯한 영구집권의 야욕을 달성하기 위해서 눈엣가시로 보이는 언론기관을 완전히 어용화 내지 무력화시켜야 하겠다는 계획 밑에서…가끔 뻗대는 동아일보마저 완전히 숨을 죽여버려야 되겠다고 하는 저의에서 미리부터 벼르고 있던 일이라고 보고 싶습니다”고 주장했다(제67회 국회 회의록 제34호).
당시 차관사건 관련자들이 조사받은 내용을 살펴보면 손세일은 조사과정에서 ‘차관기사’ 게재경위 및 기사내용의 축소·수정과 관련 허위사실 게재 여부에 대해, 박창래는 정치자금 부분의 출처에 대해 조사를 받았는데 동 기사 내용에 반공법을 적용하려 했으나 출처가 공개 자료인 만큼 결국에는 문제 삼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반면, 김진배는 정치자금 부분 외에도 동 기사 작성에 동아일보 간부의 지시가 개입되었는지를 집요하게 신문받았다며 모종의 정치적 목적이 설정되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인상을 받았다고 진술한 바 있다.
비록 당시 중정이 동 사건에 개입한 직접적인 배경을 문서나 증언을 통해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동아일보가 공화당 정치자금의 원천이었던 차관도입 과정을 기사화하여 촉발된 것은 분명해 보이며 점차 ‘동아일보 길들이기’ 단계로 확대되었을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겠다.
3) 차관사건과 ‘3선 개헌 공작설’
신동아 차관 필화사건을 통한 ‘동아일보 길들이기’ 목적이 ‘3선 개헌을 위한 공작이었다’는 의혹과 관련, 손세일은 “처음엔 공작적 차원이라고 생각지 않았으나 이후 진행되는 과정과 3선 개헌이 결정된 후 결과적 입장에서 판단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이는 국회에서 야당의원들이 제기한 것처럼 영구집권을 위해 박정희의 3선 개헌안을 추진하던 정치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국민복지연구회 사건
○1968년 5월24일 공화당내 김종필계 의원 김용태 회장, 최영두 부회장, 송상남 사무총장이 조직한 국민복지연구회가 김종필을 1971년 차기 대선후보로 추대하기 위한 비밀조직이었다 하여 박정희가 이들을 제명 조치(당시 복지회가 김종필을 대선후보로 추대하려 했는지, 제명조치 배경이 박정희 3선 개헌을 위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동 사건으로 차기 대선후보였던 김종필은 1968년 5월30일 정계를 은퇴).
윤치영 공화당의장 개헌시사 발언
○1969년 1월7일 윤치영 공화당의장 서리는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조국근대화와 조국중흥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완수할 수 있으며 이러한 기본입장에서 현행헌법상 문제점이 있다면 앞으로 검토 연구될 수 있다”라고 선언.
○이후 1969년 1월8일 공화당은 정책위원회 의장단회의를 열어 “현행헌법에 걸려 있는 대통령 연임금지를 포함한 여러 문제점을 3월 전당대회를 전후하여 공식 검토하겠다”고 발표.
그러나 김진배·박창래 기자를 조사한 국정원 보유자료를 보면 ‘차관기사’의 출처에 대한 조사결과 후 소견내용에서 ‘일부 날조한 사실이 있으나 관련법규 미비’를 들어 훈방조치를 건의하고 있어 3선 개헌을 위해 동아일보를 순치시킬 목적으로 중정이 ‘차관기사’를 이용했다고 보기에는 중정의 공작의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안기부에 의한 제작 중단 사태로 발행이 늦어진 1987년 ‘신동아’ 10월호 표지와 문제가 된 이후락 인터뷰 기사.
‘동아일보사史’ 역시 3선 개헌 공작설과 관련 “차관 필화사건에 영구집권에의 길을 닦자는 저의가 숨어 있었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고 하여 다분히 추측성으로 쓰고 있는 대목으로 신동아 차관 필화사건이 ‘오역사건’으로 확대된 정황은 동 사건 발생시점이 공화당의 3선 개헌 추진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 전후에 증폭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시 일련의 사건(‘복지회사건’ ‘공화당 개헌검토 발언’ 등)들과 유기적으로 연계된 정황이 드러나지 않음에 따라 동 사건에 대해 3선 개헌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평소 동아일보의 정부 비판적인 논조를 문제 삼았던 것은 사실이며 중정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4) ‘오역사건’으로 확대된 배경 및 관련자 해임 배경
당시 중앙정보부는 차관기사와 관련하여 동아일보 관련자들을 연행 조사 후 훈방 조치하였는데, 당시 중정 내부 자료를 살펴보면 허위사실 및 기밀유출과 관련하여 집중조사를 벌였으나 별다른 위법사실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결국 훈방조치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후 1968년 신동아 10월호에 번역 게재된 ‘북괴와 중·소 분열’(영문)을 재론하여 최종적으로 반공법 제4조1항 위반혐의를 적용, 손세일·홍승면은 기소유예, 천관우·김상만은 불기소 의견을 검찰에 송부하였다.
동 사건은 이미 1968년 12월 차관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중앙정보부 당사자와 신동아 사이에 일이 거론되어 신동아 11월호에 ‘빨치산 운동의 지도자라고 번역한 것은 ‘공비의 두목’이라는 말의 오역이었다’라는 정정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일단락된(‘동아일보사史 3권, 동아일보사, 1985. 339쪽) 사안이었음에도 차관 기사에 반공법 적용이 어렵자 내부 종결된 사안을 재거론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당시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는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받을 당시 차관 기사나 오역 기사에 대해 특별히 조사받은 바 없었다고 기술하여 “조사 연행의 목적이 기사 내용에 있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였다.
이 부분에 대한 국정원 자료는 존재하지 않으나 앞서 제기되었던 차관 기사 사건이 ‘동아일보 길들이기’ 차원에서 추진되었을 경우 오역 기사 사건은 중정이 동아일보를 압박하기 위한 시기적으로 가장 가까웠던 수단으로 보이며 이를 통해 동아일보를 강하게 압박했다고 판단된다. 이후 동아일보는 1968년 12월7일 조순승의 오역 기사 게재에 대한 사과문을 게재하고 1968년 12월10일 홍승면, 손세일을 의원면직시키는 한편 천관우가 제출한 사표를 수리하였다.
한편 차관 기사 및 오역 사건 이후 중앙정보부의 동아일보 간부 해임요구 여부와 관련, 1968년 12월 동아일보 정치부장 이웅희와 중정부장 김형욱 간 대화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문공부 장관 홍종철이 ‘신동아’ 간부 해임을 요구했다고 알려졌으나 손세일은 고재욱 사장의 말을 빌려 ‘신동아’ 간부 3인에 대한 해임요구를 한 것은 중정이었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김형욱은 자신을 찾아온 이웅희에게 홍종철 당시 문공부 장관 또는 정일권 총리 접촉을 주선하여 사건 해결책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홍종철 문공부 장관은 동아일보 사장 고재욱에게 관련기자 해임을 요구하고 동아일보측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동 사건이 마무리되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김형욱·박사월, ‘김형욱 회고록Ⅱ, 아침, 1985, 298~301쪽).
그러나 현재 추가증언 및 자료를 확보하기는 어려워 보이며 당시 권력 구조 관계에서 문공부의 역할은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동 사건은 처음부터 중정 주도하에 전개된 사건인 바 동아일보 간부 해임에 중정이 직간접적으로 개입되었다고 추정된다.
4. 평가
신동아 제작 중단 탄압에 맞서 철야 농성을 하는 출판국 기자들(오른쪽)과 항의 플래카드를 내건 동아일보 기자들.
다만 당시 중앙정보부가 ‘신동아’ 게재기사에 반공법 위반혐의를 적용하면서 타당한 위법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건내용 조사와 관련 없이 동아일보 기자·간부를 수시 구인하여 위협적 분위기를 조성했던 부분, 최초에는 차관기사의 반공법 위반혐의를 조사하다가 직접적 관련이 없는 과거 기고문 오역을 문제 삼는 등 수사의 일관성을 상실한 부분, 반공법을 위반했을 경우 최종적으로 사법적 판단을 요청했어야 함에도 해당 언론사 간부가 해직되는 선에서 편법적으로 해결된 정황 등은 수사 목적이 문제된 기사내용의 위법성에 있지 않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동아일보는 동 사건 이후 정부권력에 대한 비판기능을 일부 상실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해당 언론인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내용인 바 박정희 정권이 당시 ‘신동아’의 차관 기사에 불만을 품고 언론에 개입한 정황이 인정된다.
▼ 1987년 ‘신동아’ 제작방해 사건
1. 시대적 배경
1985년 2월12일 총선에서 승리한 신민당은 1987년 대통령 간선제하에서는 정권교체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직선제를 요구하는 개헌투쟁에 나서게 됨에 따라 여야간 갈등이 고조되었다. 이후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4·13호헌(간선제 유지) 선언 및 6월 이한열 군 시위 중 부상(7.2 사망)에 따른 국민저항을 타개하기 위해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직선제를 근간으로 한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이후 1987년 10월27일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신헌법이 국민투표를 거쳐 통과되고, 10월30일 김대중은 대선출마 선언 후 평화민주당을 분리하여 창당하였으며 통일민주당은 11월9일 김영삼을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6·29선언’에도 불구 대선정국에 따른 혼란과 대학생들의 시위는 지속되었으며 올림픽 개최를 앞둔 상황에서 1987년 11월29일 발생한 KAL 858기 폭파사건으로 사회 분위기는 냉각되었다. 1987년 12월16일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제13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에도 정국혼란은 지속되어 1988년 6월27일 ‘5共비리조사를 위한 특위’가 국회에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2. 사건 개요
1987년 9월20일 안기부는 김대중 납치사건(1973. 8) 관련 전 중앙정보부장(1970. 12~1973. 12) 이후락의 증언내용을 게재한 월간지 ‘신동아’ 및 ‘월간조선’ 10월호 발행을 중단시키기 위해 인쇄소를 점거하자 ‘신동아’ ‘월간조선’ 출판국 기자들은 9월21일부터 철야농성에 들어간 데 이어 편집국 기자들 역시 기자총회를 열고, 언론탄압 중지를 요구하는 성명 발표를 통해 대응하였다.
9월22일 동 사건이 AP, 마이니치신문 등 해외 언론사를 통해 전파된 후 9월25일 민주당, 민추협 등 정치권 및 국민적 비난여론이 높아가자, 9월27일 민정당은 ‘신동아’ 등 제작 중단사건 관련 정부의 공명정대한 처리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한편, 9월28일 문공부 장관 이웅희는 “이후락씨 인터뷰 기사는 언론사의 자체 판단에 맡긴다”는 요지의 공식입장을 발표하여 사건은 종료되었다.
동 사건은 정부측이 주장한 ‘국익’과 언론사가 주장한 ‘보도자유’가 상충한 대표적 사례로서 당시 정부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한일간 외교 문제 비화 가능성 및 전 중앙정보부 부장의 재직시 직무상 알게 된 비밀에 대한 증언은 실정법 위반임을 주장하여 언론기본법(1987. 11.11 폐지) 제53조 ‘편집인 등이 정당한 사유 없이 범죄를 구성하는 내용의 공표를 배제하지 아니한 때’에 위배한다고 주장하면서 관련기사 삭제를 요구했다.
‘신동아’ ‘월간조선’ 및 대한변협 등은 이후락의 증언내용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밝히는 중요한 사안으로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며 동 사건이 이미 공개된 사안임을 들어 국익에 반하는 내용도 아니며 언론사에 김대중 납치관련 이후락의 증언은 직무상 비밀 또는 국가이익과 무관하다는 반론을 제기하였고, 실정법 위반 부분은 간행물 발행이후의 문제로 안기부의 인쇄소 점거는 강압적 사전검열로서 명백한 위헌임을 주장하였다.
3. 조사 내용
1) ‘신동아’ 등 제작중단사건 관련 위법성 논란
(1) ‘국익’과 ‘언론의 자유’ 상충시 판단기준에 대한 이해
정보기관의 ‘신동아’ ‘월간조선’ 제작방해 사건은 국익과 언론보도의 자유가 상충한 사건으로 국익의 개념은 ‘국가가 추구하는 이익’으로 정의될 수 있으나 국가와 시대에 따라 상이하며 국가이익이 정부이익 및 국민적 이익과 일치하는지에 대해 정해진 바 없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따라서 특정사건에 대한 ‘공표주의’와 ‘기밀주의’가 국가발전이라는 공통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상호 대립되기보다 방법상의 갈등이며 상호 경쟁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으로 이는 당시 사건을 판단할 특정 원칙은 없으며 정부 및 언론사측 주장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균형적 시각이 요구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 우리나라의 경우 헌법상 ‘언론·출판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아울러 앞서 모든 기본권은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 등을 침해할 수 없다고 하여 공표주의(언론보도) 또한 제한될 수 있음을 기술하고 있는데 당시 정부측이 주장한 대일외교와 관련된 국익손상 측면과 언론사가 주장한 사회정의 및 공공복리 측면에 대한 객관적이고 균형적인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동 사안은 사법적 판단 없이 정치적으로 마무리됨에 따라 당시 안기부나 정부가 출판물 제작을 중단시킨 객관적이고 진정한 동기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며 또한 동 사건이 국익과 언론자유의 상충부분 외에 정보기관의 출판물 제작방해가 사전 언론검열이라는 절차적 측면과 전 정보기관장의 직무관련 내용에 대한 진술이 비밀누설죄에 해당된다는 논란이 추가적으로 제기되었다.
(2) ‘김대중 납치사건’ 관련 한일 정부의 외교적 문제점 검토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1973. 8.8.)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일본 수상은 1973년 9월7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일본측 입장에 대해 한국 정부의 주권침해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답변하면서 진상규명은 철저히 하여야 하나 현재까지 한국정보기관의 조직적 범행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아울러 한국과의 우호관계는 불가결한 것으로 대(對)한국 기본방침은 변경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을 밝혀 동 사건으로 한국과의 관계손상을 원하지 않는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같은 해 11월1일 오히라(大平) 외상 역시 기자회견에서 “이번 사건은 한일간에 일어난 불행한 국제적 형사사건이며…한일 양국으로서 수사는 계속하지만 한일간의 갈등이 더 이상 계속되면 양국관계에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한국 정부가 취한 조치를 평가하고 외교적 결착을 보기로 했다”면서 “이 사건은 주권 침해가 최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일본측에는 결정적 단서가 될 만한 증거가 없으며 한국측도 공권력 개입은 없다고 한다”면서 사건의 외교적 봉합을 희망했다.
1974년 8월15일 발생한 재일한국인 문세광의 육영수 저격사건 후 한국은 1975년 7월22일 일본측에 김동운(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일본주재 1등서기관. 중정직원으로 김대중 납치에 관여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을 증거부족으로 불기소 처분 후 면직했음을 통보하고 아울러 문세광 저격사건과 관련 일본의 테러방지노력 및 수사결과를 요청하였다. 1975년 7월22~23일 한일 외상회담(서울)에 참가했던 미야자와(宮澤) 외상은 “한국은 김대중 사건에 대해 최선을 다했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김대중 사건은 완결했다”고 선언하였다. 1977년과 1979년 후쿠다(福田)·오히라(大平) 수상은 ‘김대중 납치’와 관련 각각 중의원에서 한국 정부의 공권력 개입은 없었다고 재차 증언하여 더 이상 양국간 외교문제는 없는 것으로 확인한 바 있다.
따라서 1987년 당시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1973년 한국 정부의 ‘김대중 납치’를 인정할 경우 일본 정부가 동 증언을 외교 문제로 인식하여 일본은 ‘김대중 납치’ 사건 재조사 및 자국에서 발생한 납치행위가 일본 주권을 침해한 국제법 위반임을 들어 한국에 사과를 요구해야 하며 김대중 납치행위를 인정한 한국 정부는 국가의 도덕적 위신 하락 및 그에 따른 국가사죄와 배상을 감수해야 할 사안으로 대두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후락은 1987년 9월28일 외교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 정부의 공권력 개입은 전혀 없었다’면서 이전 인터뷰 내용을 전면 부인하였다.
결국 1987년 당시 정부는 ‘김대중 납치’ 사건과 관련 사건 진상이 이미 알려져 있음에도 외교 문제 발생 및 국제법상 국가책임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사건을 공식화할 필요성과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3) 기타 위법 제기 사항 및 사태추이
동 사건 발생 당시 ‘신동아’ 및 ‘월간조선’ 출판국 기자들은 ‘신동아 제작탄압에 대한 공개질의서’를 국무총리·문공부 장관·안기부장·민정당 총재 앞으로 발송하여 정보기관이 인쇄소를 점거해 ‘신동아’ 보도내용에 간섭하는 것은 명백한 사전 검열로서 위헌이며, 아직 보도되지 않은 기사를 합법적 절차를 무시한 채 저지하는 것은 정부 스스로 실정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대한변협과 인권위도 ‘이후락 증언’ 기사의 법률적 문제에 대한 검토결과 아무런 하자가 없으며 위헌으로 폐지될 운명인 언론기본법의 독소 조항(53조)을 적용한 것은 무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언론기본법(1987년 11월11일 폐지) 제53조 ‘편집인 등이 정당한 사유 없이 범죄를 구성하는 내용의 공표를 배제하지 아니한 때’에 위배된다고 지속 주장하였다.
이에 ‘동아일보’ ‘조선일보’측은 사설에서 동건 관련 ‘비록 언론 보도가 법에 어긋난다 해도 사후의 사법적 대응을 강구하거나 사전억제의 필요성이 제기될 경우에도 법적 절차(가처분)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절차상 하자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전 중앙정보부 부장이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했다는 논란에 대해서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사실상 공개사안이라는 점에서 비밀에 해당하는지, 3공화국 당시 발생한 내용을 5공화국이 책임질 사안인지, 납치와 같은 범죄사실이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지 등의 문제가 지속 제기되었으나 앞서 이후락이 ‘신동아’와의 인터뷰 내용을 부인하고 당시 공권력 개입이 없었다고 주장하였고, 정부가 ‘인쇄저지 방침’을 철회하면서 상기 논란도 종료되었다.
당시 동아일보 출판국장 장행훈은 동 사건에 대해 ‘이후락 증언’ 게재경위를 설명(후술)하며 “당시 신동아 입장에서 동 기사와 관련하여 외교적 파장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 지난 일이고 세상에 다 알려진 사실인바 주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게재이후 사회·정치적으로 문제가 심각해지자 증언내용에 대한 위법성 논란이 제기되었다”며 동 사안 해결을 위해 정부측 타협안(후술)이 제시되었으나 타협안은 거부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이후 이후락이 기자회견을 통해 납치 관련 자신의 증언을 번복함에 따라 일본 정부도 우려와 달리 외교 문제를 야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언급한 바 결국 상기 위법사안들은 여러 논란이 가중되면서 사법적 판단 등이 요구되었음에도 이후락이 인터뷰 내용을 부인하고 정부가 전격적으로 정치적인 양보조치를 취하면서 사건이 종료되었다.
따라서 이후락의 ‘김대중 납치’ 사건 관련 증언 게재 파문은 납치사건이 현재까지도 국익 측면에서 보호될 가치가 있는 외교 문제라는 주장에 대한 타당성 논란이 있었음에도 이에 대해 객관적이고 실체적(사법적)으로 접근하지 못했으며 단지 인쇄소 강제점거로 인한 절차적 불법성으로 정부의 언론정책이 여전히 강압적이라는 인상을 국민에게 각인시켰음은 물론, 정보기관이 ‘6·29선언’ 이후에도 불법적 언론통제를 실시하고 있다는 비난을 초래하였다.
2) 안기부의 김대중 견제 의혹
(1) 1987년 대선 관련 정치상황
1987년 12월16일 대통령선거가 예정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하여 당시 시대를 살펴보면 1986년 11월5일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 수락시 대통령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김대중은 1987년 5월1일 김영삼을 총재로 한 통일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다.
1987년 1월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생 및 6월 이한열 시위 중 부상사건(사망) 등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적 저항 속에서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10.27 개정) 수용 및 김대중에 대해 사면복권을 단행하였다. 이후 1987년 8월5일 노태우가 민정당 총재가 되고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 간 후보단일화 노력이 실패하자 김대중은 11월12일 평화민주당 창당 후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미 해금직후인 7월17일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대선 출마 의사를 밝혀 비공식적이지만 사실상 대통령후보로 활동의사를 표명하였다.
따라서 1987년 ‘신동아’ ‘월간조선’ 10월호의 ‘김대중 납치’ 사건 관련 기사게재 저지는 김대중의 위상을 상승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대선 이전 김대중 견제 조치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 ‘이후락 증언’ 게재경위 및 저지배경
당시 ‘이후락 증언’ 보도게재를 처음 기획한 동아일보 출판국장 장행훈은 안기부가 ‘이후락 증언’ 게재 저지를 위해 ‘신동아’ 발간 중단조치 이전부터 개입조치가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이후락 증언’ 게재 금지가 김대중에 대한 견제조치였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김대중이 대선출마 공식화 이전(1987년 10월28일 평화민주당 창당과 대통령선거 출마 의사를 공식선언)이었음을 고려하면 동 주장이 다소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당시 안기부가 ‘신동아’측에 동 기사게재와 관련 요구한 내용에 대해서도 우선적으로 ‘이후락 증언’ 기사 게재를 중지해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를 거절하자 기사 게재는 허용하되 증언 내용을 완화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완화할 부분은 납치사실에 대한 부정은 아니었고 외교 문제 발생과 관련 전직 중앙정보부 부장 이후락의 지시부분으로 이에 대한 기사 수정을 강하게 요구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후락 증언 게재 경위(장행훈 증언내용)
○1987년 6·29선언 이후 8월 김대중 납치(1973. 8.8) 사건에 즈음하여 이후락과 친분 있는 강성재(2002. 3 사망) 기자를 통해 이후락 면담을 기획하고 이종각 동아일보 기자에게 이후락 면담을 추진하도록 하였는데
○이종각 기자가 2차례 이후락을 면담한 결과 1973년 당시 김대중 납치 지시를 시인하고 있어 동 진술내용을 게재하기로 결심
○ 당시 정부의 동 기사 게재를 사전 저지하기 위한 움직임과 관련
-출판국 담당 안기부 직원 ‘신00’이 수차에 걸쳐 ‘이후락 증언’ 기사 게재중지를 요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으며
-이후락측에서도 전(前) 국회의원 이병희(수원시 지역구)씨를 통해 강성재 기자에게 ‘이후락 증언’을 게재하지 않도록 만류하였고
-동아일보 경영진측 입장에서는 동 기사와 관련 압력을 행사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상관이었던 ○○○ 상무가 게재를 자제하도록 얘기한 적이 있으나 이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음.
○사건발생 전날(9월19일) 마지막으로 안기부측이 요청한 기사게재 중지 요구를 거절하자 9월20일 안기부측은 기사게재를 물리적으로 저지하였음.
○이후 당시 안기부 국장 용○○와 전 문공부 홍조실 실장 이○○(당시 안기부 특보), 김종심 동아일보 기자와 자신은 하얏트 호텔에서 만나 기사내용을 완화하자는 데 합의했으나 이후락의 ‘김대중 납치’ 지시 부분을 모호하게 표현한 수정본(홍조실 작성)을 받아본 후에는 합의를 거부하였음.
한편 동 사건 발생 당시 김대중은 ‘이후락 증언’과 관련 언론을 통해 ‘납치 재조사’를 요구하고 한일 양국이 동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사과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사건 발생 시점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출마를 공식 발표하기 이전이었던 이유로 안기부가 동 기사제작 방해사건을 통해 대선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거나 주장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후락 증언 게재 저지가 당시 대통령선거와 연관되었다는 주장은 단지 의혹 수준에 그치고 있으며 ‘이후락 증언’ 게재 저지 시도가 김대중 견제 목적이었다는 주장도 김대중과 정부 여당간 오랜 갈등관계를 표면적으로 해석한 측면이 강하다고 보인다.
4. 평가
당시 정부와 안기부의 사건대응 과정을 살펴보면 ‘신동아’와 ‘월간조선’의 ‘이후락 증언’ 게재를 물리적으로 중단시킨 절차적 위법성을 부정할 수 없으며, 당시 안기부가 관행적으로 언론에 개입하고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간과했다는 비난을 초래하여 결과적으로 정보기관에 대한 국민의 실망을 자초하였다.
당시 집권당 대표 노태우가 언론자유를 보장한 6·29선언을 천명한 바 정부는 문제 기사에 대한 법원의 출판금지 가처분신청 등을 통해 절차적 합법성과 정당성을 확보했어야 했음에도 이러한 절차를 무시했음은 명백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