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상시험 중 3년간 36명 사망, 약물 인과관계 인정 11명
- 중대 이상약물 반응 3년간 217명, 매년 100% 폭증세
- 부적합 환자 임상 참여 중 사망…식약청 경고로 끝
- 병용약물 허용량 2배 투여, 환자 사망…피험자 보상 없어
- 정신분열증 치료약물 환자 2명 잇따라 자살…“인과관계 없다”
- 골수종 치료제 임상시험 중 올해만 3명 심장관련 사망
- 사망 약물 관련 ‘부작용 보고서’ 올려도 시험 계속
동물실험을 통해서도 신약의 독성과 유해성을 검증할 수 있지만 신약물이 상품으로 시판되려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을 피할 수 없다. 인간에게 신약을 직접 적용해보지 않고서는 그 물질이 인체 내에서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환자가 현재 먹고 있는 음식이나 질환 치료를 위해 함께 쓰이는 각종 약재가 몸속에서 신약과 섞여 어떤 특수한 상황을 만들어낼지도 의문이다.
실제로 인간 임상시험(1·2·3·4상) 과정에서 많은 환자가 약물 이상반응으로 심각한 피해를 보고 심지어는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그래서 선진국 환자들은 현재 시판 중인 약물로 어쩔 수 없는 단계가 아니라면 인간 임상시험에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 선진국은 임상시험에서 생기는 다양한 환자 피해에 대해 나름의 보상책과 유인책을 마련하고 있는데도 임상시험 대상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요즘은 말기 암 환자 중에도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요구하며 시험대상이 되기를 거부하는 이가 적지 않다. ‘의학 진보를 위한 희생’이 일부 국가에 집중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임상 허브’, 인도에서 한국으로
인도가 다국적 제약회사들에게 ‘임상천국’으로 각광 받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선진국과는 정반대의 사정 때문이다. 대물림된 가난으로 아파도 약국 근처에도 못 가는 환자가 전역에 널려 있고, 국민의 대다수는 약물 부작용이 생겨도 군말하지 않는 ‘착한’ 사람이다. 현재 신약 임상시험에 참가한 인도인은 1만여 명, 인도가 임상 대상자를 제공해 얻는 수익은 연 75억달러에 달한다. 임상시험을 중개하는 인도대외공사는 임상시험 수입이 매년 10억달러씩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인도의 10억 인구 가운데는 심장병 환자만 3000만, 당뇨 환자가 2500만, 에이즈 환자 510만, 정신질환자 1000만, 암 환자도 300만명이 넘는다.
다국적 제약사로서는 선진국의 45%의 저렴한 비용으로 임상시험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원하는 환자를 구하기도 쉬운 인도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인도는 지금껏 인간 임상과 관련해 부작용 논란이 단 한 건도 없는 국가다. 제약사 처지에선 1석3조인 셈이지만, 임상시험에 참가하는 인도 빈민들은 무슨 약을 먹는지도 모르고 어떤 부작용이 생겨도 호소할 곳이 없다. 심하게 말하면 선진국 제약사들을 위한 ‘인체실험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다국적 제약사의 임상시험장이 한국으로 이전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에 따르면 국내에서 승인된 신약 임상시험은 2000년 33건(신약 기준)에서 2003년 143건, 2005년 185건, 2006년에는 218건으로 급증하고 있다. 올해엔 상반기에 이미 113건을 넘었다. 다국적 임상시험은 2005년에 전체 임상시험의 절반을 넘어선 이후 올해는 약 70%에 육박하고 있다. 임상시험이 통상 몇 년을 끌고 1건당 수십명에서 수백명의 환자가 대상으로 채택되는 점을 감안하면 임상 참가인원에서 한국이 인도에 뒤지지 않을 공산이 크다.
이처럼 한국이 다국적 제약사의 ‘임상 허브’로 부각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꼽는 한국의 장점은 임상시험의 속도와 품질, 효율성 등이다. 세계적 제약사인 화이자의 조지프 팩츠코 부사장(최고의학책임자)은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아시아의 임상시험 허브로서 필요한 조건을 두루 갖췄다. 특히 수준 높은 개방적 연구인력, 비용과 품질 등 경쟁적인 요소가 뛰어나다”고 했다. 뛰어난 의료인력이 뒷받침돼 정보 수집에서 실수할 확률이 선진국보다 낮고(품질), 사이트에 모집공고를 내면 바로 등록자가 올라올 만큼 환자 모집이 용이하기 때문이다(효율성). 이에 힘입어 서울대병원은 미국 국립보건원(NIH)이 집계한 임상시험 등록현황에서 아시아 최고 수준의 병원으로 선정됐고, 서울아산병원, 삼성의료원, 세브란스병원도 10위권에 들었다.
국내에서 이뤄진 임상시험
한국이 다국적 제약사의 임상시험장으로 갑작스레 ‘러브 콜’을 받게 된 시점은 식약청이 임상시험 승인제도를 대폭 간소화한 2003년. 식약청은 기존의 복잡한 조건부 임상시험 승인 시스템을 단순화해 임상시험 허가 처리업무 기간을 30일로 줄였다. ‘판매 허가가 나지 않은 의약품이나 임상시험용 의약품을 인도적 차원에서 동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식약청은 임상시험 절차를 간소화한 이유를 “생명을 위협하는 중대한 질환 등을 가진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다국적 제약사들이 한국을 임상시험 환경이 가장 좋은 곳으로 지목하는 데는 또 다른 결정적 이유가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국내에는 임상시험 과정에서 환자에게 피해가 발생해도 이에 대한 보상조항이나 강력한 처벌조항이 법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또한 임상시험에서 일어난 사고의 원인과 부작용 발생에 대한 조사 의무와 권한을 대부분 시험 기관과 시험의뢰자에게 맡기고 있다.
죽고 상해도 “문제없다”
하지만 환자와 그 가족에게는 임상시험의 효율과 품질, 속도보다 시험 대상자의 안전과 신약의 안전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평가 항목이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환자에게 해를 준다면 모두가 공염불이기 때문이다. 과연 세계적 ‘임상 허브’ 한국의 참모습은 어떨까. 환자는 임상시험 대상자로서의 권리와 안전, 복지를 얼마나 보장받고 있을까.
‘신동아’는 최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장복심 의원과 정형근 의원을 통해 이를 엿볼 수 있는 자료를 넘겨받았다. 이 자료는 2005년부터 2007년 상반기까지 의약품 임상시험 중 발생한 중대한 이상약물반응 목록과 임상시험 기준 위반 사례, 임상시험 중지 사례 등을 담고 있다. 또 임상시험 중 시험약물과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사망 사례들에 대한 시험기관의 보고서도 모두 확보했다. 임상시험과 관련한 이상약물반응과 위반사례가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각 제약사 또는 대학병원이 식약청에 보고한 ‘중대 이상약물반응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에서 임상시험이 급격하게 늘기 시작한 2005년부터 2007년 7월 중순까지 임상시험 중 사망한 환자는 36명에 달한다. 이 중 시험 담당 의료진이 시험약물과 환자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한 경우는 11명. 또한 사망을 포함해 약물 투여로 인해 인체에 중대한 이상반응이 나타난 경우는 217명이며, 이 중 증상과 약물의 연관성이 인정된 사례는 104명이었다. 식약청 임상관리팀 김정미 사무관은 “이 보고서에 실린 내용은 약물이 피험자에게 투약된 후 중대하고 예상치 못한 결과를 빚은 사례만 모은 것”이라고 밝혔다.
2005년 35명(‘인과관계 있음’ 10명)에 그친 이상약물반응은 2006년 88명(‘인과관계 있음’ 36명), 2007년 94명(‘인과관계 있음’ 56명)으로 늘었으며, 임상 약물과 인과관계가 있는 사망자 11명 중 8명이 올해 상반기에 집중 발생했다. 올들어 이상약물반응 사례와 사망자가 속출한 것은 식약청이 올 초부터 임상시험 실시기관에 대한 정기 실태조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올해 이전까지는 이상반응에 대한 임상시험 실시기관의 자발적 보고가 부실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임상시험 도중 사망한 사례를 보면 이상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난 1월18일 뇌동맥 경색증으로 순천향대병원에 입원한 김모(53)씨는 병원으로부터 임상시험 중인 P약물(한국오츠카)을 권유받고 복용한 뒤 사흘 만에 발작을 일으켰다. 반(半)혼수상태에 빠진 그는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결국 뇌출혈로 숨졌다. 담당의사는 식약청에 올린 보고서에서 “약물과 환자의 사망에 인과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2005년 5월 식약청으로부터 임상시험 승인을 받은 이 약품은 이후 약물과 인과성이 있는 이상반응 사례만 5번 보고됐다. 뇌경색과 안면마비, 시선상향 주시 등의 이상반응 사례도 있었다.
과연 이 환자는 자신이 참가한 임상시험의 위험성에 대해 얼마나 알까?
이 약물에 대한 임상시험 의뢰기관인 서울아산병원은 기관윤리심의위원회(IRB)를 열고도 “임상시험이 중지돼야 한다는 의견이 (순천향대병원으로부터) 제출되지 않았다”며 임상시험을 계속할 뜻을 비쳤다. 이 약물의 경우 임상시험과 관련된 윤리 문제를 심사하는 IRB의 운영주체인 서울아산병원이 임상시험 의뢰의 주체임과 동시에 임상시험을 맡은 시험기관이다. 식약청 임상관리팀 담당자는 “임상 약물이 환자의 사망과 인과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 병용 투약한 아스피린이 문제였다. 이미 예상된 이상반응이었고, 임상약물에는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2006년 8월24일 골수에 악성 종양이 생기는 다발성 골수종 증세로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한 이모(75)씨는 B약물(한국얀센)을 주사 받고 나흘 후 발작을 일으키고 맥이 극도로 빨라지는 증세를 보이다 심장정지로 사망했다. 담당의사는 “이씨의 사망이 시험약물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식약청에 보고했다. 하지만 보고 시점은 4개월 후인 지난 2월22일이었다. 이 약물에 대한 이상약물반응 보고 주체인 한국얀센은 사례보고서에서 “미국에서도 45세의 여인이 사망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부적합 환자 임상 중 사망
골수종 치료제로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되던 이 약물은 2005년 9월 ‘이전에 치료 경험이 없는 다발성 골수종 환자를 대상으로 다른 약과 비교 시험하기 위해’ 임상시험이 승인됐는데, 최근에도 시험 대상자 중 한 명이 심장관련 이상반응으로 사망했다. 지난 1월19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다발성 골수종 환자 최모(73·여)씨. 시험기관의 최초 보고엔 약물과 사망원인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고 돼 있었지만, 추적조사를 벌인 후엔 ‘인과관계가 있다’로 수정됐다. B약물은 그간 십이지장 궤양 출혈, 위막성 대장염 등 주로 소화기관 장애와 관련된 이상약물반응이 보고됐다. 식약청 최승진 사무관은 “이 약물은 이미 시판돼 널리 처방되고 있는 약물이라 심장마비와 같은 부작용이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의견이다.
간암과 폐암(비소세포폐암) 치료제로 임상시험이 진행된 C약물(바이엘코리아)도 2005년 11월 이후 17차례 이상 중대 이상약물반응이 보고됐다. 그중 사망자는 5명. 그 가운데 한 명인 김모(61)씨는 C약물로 폐암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던 지난 2월21일 호흡정지와 부종, 감염 증세 등을 보이다 사망했다. 담당의사는 “심한 무기력증, 피부 발진, 환자상태 약화의 이상반응이 나타났으며, 해당 약물과 관련성이 의심되고 사망의 주 원인인 호흡곤란도 관련성이 있다”고 식약청에 보고했다.
한편 김씨의 사망과 관련된 실태조사에서 식약청은 김씨가 임상시험 대상자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환자였음을 발견하고, 지난 8월 삼성서울병원과 담당의사에게 경고처분을 내렸다. 이 환자는 임상시험 계획에 규정된 혈액응고 검사수치를 벗어났는데도 시험에 참가했다 사망했다. 식약청 김정미 사무관은 “김씨는 약물과의 인과관계는 인정된다고 보고됐지만 최종 사인은 질병의 악화로 인한 것으로 확인됐다. 혈액응고 수치 이상도 환자의 죽음과는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환자에 대한 일부 보상이 이뤄진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2005년 중대 이상약물반응 목록을 보면 김씨와 같이 부종, 무력감, 피로감 등을 호소하는 약물이상반응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보고됐으나 약물과의 인과성이 인정되지 않았다. 다른 사망자 중에도 발작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있었으나 약물과의 인과성은 인정되지 않았다.
임상시험기관에서 약물에 대한 ‘부작용 보고서’까지 작성해 제출했지만 임상시험이 중단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진행성 고형암(장기와 피부에 생기는 암) 치료제로 임상에 들어간 K약물(종근당)이 그것. 진행성 고형암 환자로 이 임상시험에 참가한 김모(70)씨는 2006년 9월15일 고열과 패혈증, 호중구·혈소판 감소 증세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서울대병원측은 당시 작성한 ‘부작용 보고서’를 통해 “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한 상태이며 이는 시험약물과 연관 가능성이 높다”고 식약청에 보고했다. 김씨는 급성 호흡곤란과 신부전, 간부전 등 다기관 장애를 일으켜 10월2일 사망했다. 병원측은 다시 올린 이상약물반응 보고서에서 “이 환자의 사망과 시험약물 간에 연관관계가 있다”고 재확인했다.
그해 12월에는 폐암에 걸려 같은 임상에 참가했던 환자가 김씨처럼 패혈성 쇼크 현상을 보여 사망했고(‘인과관계 있음’), K약물과 인과성이 인정되는 이상약물반응을 보인 환자만 15명에 달했다. 그중 김씨와 같이 혈구의 감소증세를 호소하는 경우가 6명, 폐렴에 걸린 사람이 2명이었다.
심지어 정신분열증을 치료하기 위해 임상시험에 참가했다 오히려 자살충동을 느끼거나 실제로 자살한 사례도 있다. 2005년 정신분열증 치료제 시험약물 C(한국룬드백)를 복용한 환자 2명이 자살했다. 그중 한 건은 추락사였다. 이외에도 자살인지 아닌지 불명확한 1건의 사례가 더 있다. 시험기관들은 한 해에 3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는데도 모두 약물과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미국에서 우울증 치료제의 자살충동 욕구 상승과 관련해 FDA(식품의약국)에 대한 청문회가 열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남자에게 웬 임신검사?
자살 사건이 있기 3~4개월 전 임상시험에 참가한 환자가 “지하철에 뛰어들고 싶다”며 자살충동을 보인 사례도 있다. 당시 식약청 이상약물반응 보고 목록에는 “인과성이 있다”고 기록돼 있으나 시험의뢰기관인 제약사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식약청 김정미 사무관은 “사실 정신질환자가 자살하는 경우 그 원인이 약물에 있는지를 판단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부검을 해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렵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한편 C약물에 대해 인과성이 인정된 이상약물반응 케이스는 파킨슨증후군, 정좌불능, 환청 등이 주류를 이뤘다.
같은 약물에 대해 환자의 이상약물반응이 거의 비슷하게 나왔는데도 어떤 시험기관은 인과성을 인정하고 어떤 곳은 인정하지 않는 사례도 많고, 시험기관인 병원은 인과관계를 인정하는데 시험의뢰기관인 제약사가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식약청으로서는 시험기관의 담당자 소견과 IRB 보고서에 의존할 뿐 광범위하고 정확한 조사를 벌일 여력도 권한도 없는 실정이다.
이런 형편은 식약청이 장복심 의원실에 제출한 임상시험 기준 위반 행정처분 내역을 보면 그대로 드러난다. 시험기관이나 시험의뢰기관이 작성한 보고서나 처방전에서 발견한 오류에 대한 행정처분일 뿐, 식약청이 직권으로 환자의 몸 상태와 환자 가족에 대한 정밀조사를 벌인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가령 ▲환자에게 1회분 약물만 넣어 각각 포장해줘야 하는데 100정이 들어 있는 약곽을 통째로 준 것이 문제가 돼 5개 대학병원과 해당 제약사가 경고처분을 받았다 ▲환자가 임상시험 해당질환 이외의 다른 질환이 있는데 이를 치료하지 않은 채 임상에 참가시킨 것으로 드러나 경고했다 ▲임상시험 서류에 남성 환자의 임신검사 결과를 표기했다고 처벌했다…는 식으로, 단순 실수에 대해서 경고한 데 지나지 않는다.
사망 사고와 관련됐거나 환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반 사항이 드러났는데도 단순 경고 조치에 그친 경우도 눈에 띈다. 병용 약물을 2배 이상 투여해 환자가 사망한 사례에선 담당의사에게만 경고처분을 내렸고, 환자가 임상시험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혈액응고 수치 이상) 환자를 폐암 치료제 임상시험에 참가시킨(환자 사망) 담당의사와 병원도 경고처분만 받았다. 식약청 임상관리팀 관계자는 “사안의 중대성에 따라 경고와 임상시험 1개월 배제 판정을 하고 있는데, 처벌규정이 미미한 게 사실이다. 그래서 법 개정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시험기관 입만 바라볼 뿐
식약청이 임상시험기관의 중요 과실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임상시험 과정에서 환자가 사망하거나 중대한 합병증을 얻는 등 부작용이 발생한 경우 원인을 정확하게 밝히기 위한 환자 부검이나 가족에 대한 직권조사 권한이 법이나 지침으로 명확하게 규정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환자가 임상시험 도중 사망하거나 심각한 합병증을 얻는다 해도 시험기관이 가족에게 관련사항을 고지하게 돼 있을 뿐 지도관리 관청인 식약청이 고지 여부와 그 내용을 확인할 방법은 없는 상태다. 또 피험자에 대한 보상 내용은 임상을 시작할 때 환자 또는 그 가족과 시험기관이 ‘계약’을 통해 결정한다. 이것 역시 결과처리가 어떻게 됐는지 시험기관이 거짓말을 해도 식약청은 밝혀낼 방법이 없다. 식약청 담당자는 “시험기관이 알아서 잘 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도 정부가 이런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일은 없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현재로선 시험기관이나 해당 IRB가 ‘문제가 없다’고 하면 법적으로 추가 검증을 강제할 방법이 없고, 유족이 나서서 임상시험의 문제를 밝힐 수도 없다. 이런 사정 때문에 2005년 이후 시험약물과의 인과성이 인정된 11건의 사망 사례에 대해 단 1건의 부검도 이뤄지지 않았다. 약사 출신인 장복심 의원은 “대부분 환자가 질환이 있는 상태에서 병원의 권유에 따라 임상시험에 참가하기 때문에 병원에서 해당 질환이 악화돼 숨졌다고 하면 유가족은 대꾸할 엄두도 못 낸다. 이런 경우 식약청이 임상시험 이상약물 반응과의 인과성을 유가족에게 자세하게 설명하고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을 밝힐 수 있는 법적 강제수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식약청이 다국적 제약사의 임상시험을 직권으로 중지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그렇게 하려면 식약청이 임상시험의 부작용을 스스로 조사해서 밝혀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인력이나 법적 기반이 갖춰지지 않은 현실이다. ‘신동아’가 입수한 지난해 8월 이후 식약청의 임상중지 사례 5건은 모두 제약사가 자발적으로 중지한 경우다. 만일 제약사가 스스로 임상시험을 중지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한국화이자의 고지혈증 치료제 T약물은 외국에서 사망 사례가 발생했고, 퀸타일트랜스내셔널코리아의 혈관 치료제 A약물은 심혈관 이상반응 발생률이 높았다. 아펙스코리아의 간염 치료제 P약물은 동물시험 결과 악성 종양이 생겨났으며, 한국오가논의 갱년기장애 치료제 L약물은 유방암을 앓았던 환자의 재발률이 높아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진정한 임상 허브로 거듭나려면
한편 정형근 의원은 “식약청은 한약제제도 의약품이기에 의약품임상시험기준에 따라 임상시험을 해야 한다고 보고 있으나, 지금까지 식약청으로부터 승인받고 진행된 한약제제 임상시험은 1건도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암을 비롯해 뇌질환, 간질환 등에 대한 한약제제의 다양한 임상시험 공고가 쏟아지고 있지만 정작 식약청에선 이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정 의원은 “이런 한방 신약물도 식약청의 임상시험 허가를 받지 않으면 모두 불법이다. 한방 신약이 공신력을 얻으려면 당연히 식약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그렇게 해야 피험자의 안전과 인권도 보호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불과 10년 전 한국은 까다로운 임상시험 조건 때문에 현대의학이 전혀 손쓸 수 없는 질환에 대해서도 새로운 임상약을 제대로 쓸 수 없던 임상 후진국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계의 다국적 제약사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국이 최고의 임상시험장”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한국이 진정 세계 최고의 임상시험 전문국가로 입지를 굳히려면 환자의 인권과 안전을 보장할 수 있도록 2중, 3중의 검증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은 장래에 한국은 다시 임상시험의 불모지로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