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Ⅰ’<br>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민음사, 324쪽, 1만500원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그러다 삼십여 분이 지나면 잠을 청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에 잠이 깨곤 했다.…나는 잠을 자면서도 방금 읽은 책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약간 특이한 형태로 나타났다. 마치 나 자신이 책에 나오는 성당, 사중주곡,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와 경쟁관계라도 되는 것 같았다.…이 믿음은 윤회설에서 말하는 전생에 대한 상념처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중에서
이것은 현대소설사에서 가장 많이 연구 대상이 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대목, 제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의 출발점이다. 첫 문장부터 범상치 않다. 나는 일찍이 제목만큼이나 소설의 첫 문장을 주목할 것을 주문해왔다. 번역자의 각주처럼 ‘오랜 시간’은 단순히 ‘오랫동안(longtem-ps)’이라는 부사로 쓰인 것이 아니다. ‘오랜(long)’과 ‘시간(temps)’이 결합된 합성어 형태. 번역자의 안내에 따르면, 이는 총 7부로 구성된 방대한 소설의 끝에 배치돼 있는 ‘시간 속에서(dans le temps)’와 연계해 읽어야 한다. 이처럼 시간을 소설 전체에 부각시킨 이 작품은 결국 문학 장르를 넘는 시간에 대한 탐구서라고 할 수 있다. 과장해서 말하면, 시간을 매개로 짜인 세상의 모든 소설은 이 한 편으로 귀결된다고 할 정도다.
회상이라는 마법
소설은 인간을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인간을 둘러싼 사건은 시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다. 극단적으로 말해 거대한 상념으로 이뤄진 회상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등장한 이래 소설에서 더 이상 새로운 시간은 필요하지도, 존재하지도 않게 된 셈이다. 오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과 회상만이 시간의 제국을 형성하며 우뚝 솟아날 뿐이다.
잠을 자러 올라갈 때 내 유일한 위안은 내가 침대에 누우면 엄마가 와서 키스해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녁 인사는 너무도 짧았고 엄마는 너무도 빨리 내려갔기 때문에, 엄마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문짝이 두 개 달린 복도에서 밀짚을 엮어 만든 작은 술이 달린 푸른빛 모슬린 정원용 드레스가 가볍게 끌리는 소리가 들릴 때가 내게는 정말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 그래서 난 그렇게도 좋아하는 저녁 인사가 되도록 늦게 오기를, 엄마가 아직 오지 않은 이 유예 기간이 더 연장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앞의 책 중에서
어린 소년의 엄마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이 회상을 통해 예민하고도 세밀하게 제시돼 있다. 인물의 행동과 그것에서 비롯된 심리가 읽는 이에게 그대로 감지되는 듯하다. 이러한 효과는 작가의 정밀한 시간 의식, 곧 시간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이 강할 때 가능하다. 소설가이자 탁월한 소설 연구자인 E M 포스터에 따르면, 소설가마다 서사를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인 시간을 운용하는 방식이 다르다.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시간을 숨기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뒤엎는 경우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끊임없이 시곗바늘을 뒤로 뒤돌려놓듯이 과거를 현재의 눈으로 뒤돌아보는(회상) 경우다. 광기의 사랑을 통해 인간의 영역을 실험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1847)은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고, ‘어느 신사의 견해와 생애’라는 소설의 부제로 어떤 내용과 형식이든 수용가능하게 장치한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섄디’(1759)는 두 번째 경우,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는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회상이라는 마법으로 시곗바늘을 계속 뒤로 돌리는 지연의 서사이자 유예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시간은 다양한 지류, 다양한 층위로 세분화되는데, 이러한 시간 운용은 기존 소설이 지향해온 기본 요소-인물, 플롯, 주제-를 와해시키는 결과, 아니 경지를 연다. 인물의 비밀, 동시에 세상의 신비를 푸는 열쇠는 파편적인 기억, 그 기억을 환기시키는 접촉들이다. 스쳐지나가면서 언뜻 보았던 누군가의 모습과 풍경, 또는 들리는 소리, 또는 혀에 닿는 감촉과 맛. 찰나적인 미세한 움직임이 과거에 매몰됐던 기억(삶)을 생생하게 불러일으키는 것.
물질적 황홀의 순간
지나가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 마르셀 프루스트, 앞의 책 중에서
물질적 대상이 감각과 만나면 물질적 황홀로 변화되기도 한다. 문학, 특히 예술을 지향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소설은 바로 이러한 순간을 포착하고 증언하는 몫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이 20세기 이후 현재까지 현대소설의 출발점이자 종착지로 평가받아온 데는 물질적 대상을 물질적 황홀로 승화시킨 ‘마들렌 효과’의 창출에 근거가 있다.
어느 겨울날, 집에 돌아온 내가 추워하는 걸 본 어머니께서는 평소 내 습관과는 달리 홍차를 마시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셨다.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왠지 마음이 바뀌었다.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서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가느다란 홈이 팬 틀에 넣어 만든 ‘프티 마들렌’이라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사 오게 하셨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 마르셀 프루스트, 앞의 책 중에서
추운 겨울 외출에서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가 준 따뜻한 홍차에 프티 마들렌을 한입 베어 문 순간을 그린 이 대목은 현대소설사를 통틀어 몇몇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로 꼽힌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1942) 첫 대목, 로캉탱이라는 주인공 사내가 오후의 해변을 산책하다가 아이들이 조약돌로 바다에서 물수제비를 뜨는 것을 보고 자신도 해보려고 조약돌을 집어든 순간의 친근하면서 이질적인 느낌을 추적한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1938)의 한 대목. 이들 장면은 단순히 수많은 단락 중 한 단락에 그치지 않고 소설의 주제와 정체성을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따뜻한 홍차에 작은 마들렌 한 조각을 한입 베어 물었을 뿐인데, 서사는 이전과 다른 양상을 띤다. 물질적 대상(프티 마들렌)이 물질적 황홀로 전환(기억의 복원)될 때마다 과거의 사적인 에피소드가 불쑥불쑥 되살아나 소설을 끝없이 이끌어간다. 맛은 과거 잊힌 어느 시기의 삶을 불러내고, 비로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 … 그것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 온 콩브레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 - 마르셀 프루스트, 앞의 책 중에서
20세기의 작가(베케트)와 비평가(벤야민), 철학자(들뢰즈)를 자극하고 새로운 작품 창작의 전범(典範)이 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970년대부터 세계문학전집의 일환으로 제1권 ‘스완의 사랑’(박은수 옮김, 동화문고, 1972) 또는 ‘스완의 집 쪽으로’(이정 옮김, 삼성출판사, 197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김인환 옮김, 학원사, 1984) 등으로 번역 소개됐다. 1998년대 7부 11권으로 완역(김창석 옮김, 국일미디어판)됐고, 몇 해 전에는 김화영 번역으로 ‘현대문학’에 연재되다 중단된 상태다. 이번에 새롭게 출간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프루스트 전공자 김희영의 번역이다. 프루스트의 미의식 자체인 미묘하고 난해한 문장이 어떻게 우리말로 옮겨졌는지가 감상 포인트다. 총 7권 중 현재 2권까지 번역됐고, 그동안 접한 번역본들과 비교해 프루스트를 가장 가깝게 그리고 가장 깊게 느낄 수 있다.
프랑스의 문학사가 앙드레 모루아의 말처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이 있다. 마들렌 아니 프루스트 효과인가. 겨울 오후, 내가 원하는 것은 따뜻한 홍차 한 잔과 프티 마들렌 한 조각. 그리고 프루스트를 읽는 즐거움 외 모든 것은 사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