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함으로써 기독교인이 기독교 문명을 파괴하고 기독교인을 약탈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십자군이 반대의 길로 달려간 데는 이익을 노린 각 지역의 모략이 있었다.
1963년 교황 바오로 6세(오른쪽)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만나 악수하고 있다.
1054년 교황 사절단은 동·서 로마 교회, 즉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의 통합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다. 그러나 우위권을 놓고 양쪽 모두 양보하지 않아 교황의 사절 훔베르트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체룰라리우스에게 파문 선고를 내렸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역시 파문으로 맞섰는데, 이것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가 공식적으로 갈라선 분기점이었다.
황제권 위의 교황권
이는 오랜 기간 잠재한 갈등이 수면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갈등의 핵심 원인은 로마 교황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 대해 우위권을 주장한 데 있다. 기독교는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 제국에서 하나의 종교로 인정받게 됐다. 그 후 기독교는 로마의 행정조직과 똑같은 교회 조직을 갖게 됐다. 신도 위에 사제, 사제 위에 주교, 주교 위에 대주교와 총대주교가 있는 구조였다.
기독교는 이러한 조직으로 4세기와 5세기에 걸쳐 그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4세기경엔 로마,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의 5개 도시에 총대주교가 있었다. 그런데 5세기 중엽 로마 총대주교(교황)인 레오 1세가 “로마 교황이 가장 우월한 지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가 베드로를 전체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명했고, 로마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이니 가장 우월하다고 한 것이다.
그 근거로 마태오 복음서 16장 18~19절에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공동번역성서 마태오 복음서)라고 돼 있는 구절을 내세웠다.
이 구절에서 ‘반석’은 라틴어로 ‘petro’(돌 또는 반석)라고 돼 있는데, 이를 고유명사로 보면 대문자로 시작하는 ‘Petro’가 되어 베드로(Petrus)를 가리킨다. 한마디로 예수는 중의법을 구사해 베드로가 교회의 책임자임을 암시한 것이다.
이러한 베드로가 로마의 주교였으니 로마 교황은 계승자로 권능을 이어받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로마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순교했고, 제국의 수도라는 점도 로마 교황의 우위권 근거로 작용했다.
하지만 총대주교는 관할구역을 갖고 있기에, 총대주교 사이에서 우위권 구분은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러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5명의 총대주교 중 로마 교황만이 서로마에 있고 나머지는 동로마에 있으니, 로마 교황만 게르만족의 위협에 시달리게 됐다. 서로마 멸망 직후부터 7세기까지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로마 교황을 보호해줬다.
726년 성상파괴령을 계기로 로마 교황과 동로마 황제는 갈라서고 말았다. 로마 교황은 새로운 보호자를 물색하다가 프랑크 왕국의 실권자였던 샤를 마르텔과 그 후계자들을 만났다. 800년 크리스마스 때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왕궁이 있던 아헨(Aachen)을 방문해 샤를 마르텔의 손자인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황제’ 대관식을 해줬다. 그가 바로 카롤루스 대제, 샤를마뉴였다.
교황과 프랑크족의 결합은 절정에 올랐다. 프랑크족은 게르만족의 한 분파였으므로 카롤루스 대제가 서로마 황제에 오른 것은 야만족이 로마의 황제가 된 것을 의미했다.
이로써 로마 제국은 뚜렷하게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제국으로 나뉘게 됐다. 서로마 제국에는 게르만족이 침입해 주인이 돼, 로마 가톨릭과 결합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다. 이 세계에서는 교황이 황제 대관식을 해줬으니 교황권이 황제권보다 위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결별
동로마 제국은 게르만의 침입을 물리치고 로마의 명맥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리스 문명의 성격을 많이 받아들여 비잔티움 제국으로 불렸다. 기독교를 공인할 때 총대주교는 황제 아래에 있었는데 동로마제국은 이 전통을 이어나갔다. 서유럽과 반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차이들이 쌓여 9세기 초 로마 제국권은 두 세계로 완전히 분열됐다.
그럼에도 옛 서로마 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와 비잔티움 제국의 동방정교회는 통합 노력을 기울였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성상파괴와 성상유지를 반복하다가 성상유지로 돌아섰으니, 동·서 로마 교회의 분리를 가져온 요인은 사라졌다고 할 수 있었다. 지속적인 노력 끝에 11세기 중반 교황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다. 하지만 로마 교황의 우위권에 대한 의견차이로 상호 파문을 주고받으며 결정적으로 분리되었다.
결별하긴 했으나 서유럽인과 비잔티움 제국 주민들은 같은 기독교인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우는 한 서유럽인들은 도와줘야 했다.
1070년대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패한 비잔티움의 황제 미카엘 7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서유럽 내부에서 벌어진 세속 권력과의 갈등에 정신이 없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와 성직자 임명권을 놓고 대결하다 황제에게 ‘카놋사의 굴욕’을 겪게 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 그레고리우스 7세는 십자군을 제창하지 못했다.
1094년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콤네누스가 다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황제는 소아시아 반도의 절반 정도를 잃고 있었다.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회복시키기 위해 서유럽 기사를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잔티움 황제의 생각과는 달리 ‘기독교의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소아시아의 영토 회복은 부차적인 문제가 됐다.
서유럽을 출발한 제1차 십자군은 헝가리와 불가리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그때 알렉시오스 황제는 자신의 지휘를 받으며 보수를 받고 싸워줄 하급 기사들을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십자군에는 높은 신분의 기사들이 포함돼 있어 당황했다. 황제는 그가 원하던 대로 일을 진행하기 위해 기사들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으려고 했다. 맹세를 하면 이들을 콘스탄티노플로 받아들여 식량 등 물품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서로 다른 생각
십자군은 맹세를 하지 않았다. 당시는 보급에 어려움이 있었기에 식량 등의 물품은 현지 조달이 원칙이었다. 현지에서 마련해주는 세력이 없으면 약탈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십자군은 물품 마련을 위해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농촌을 약탈했다. 상황이 꼬여가자 황제는 요령 있게 십자군 지도자들과 협상해 어느 정도의 편의를 제공해주는 대신 충성의 맹세를 받아냈다. 그리고 재빨리 그들을 소아시아 반도로 내보냈다.
놀랍게도 1097년 6월 십자군이 투르크의 수도였던 니케아를 점령하자, 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가 니케아를 접수했다. 십자군은 팔레스타인을 향한 원정에 나섰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투르크로부터 스미르나, 에페소스, 사르데스 등 소아시아 반도의 일부를 탈환했다.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한 십자군은 주변지역까지 점령해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고 에데사 백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티오키아 공작령 등의 봉건국가를 세웠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십자군의 이러한 행위를 그에게 바친 충성의 맹세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십자군 덕택에 소아시아 반도의 상당 부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는 데 만족해야 했다.
예루살렘을 탈환했다는 면에서 제1차 십자군전쟁은 성공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이 힘을 합쳐 기독교도들이 세운 국가를 공격해 여러 지역을 함락시켰다. 그리하여 제2차 십자군 원정이 이뤄졌으나 실패했다. 이슬람에서는 살라딘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해 이슬람 세력을 통합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십자군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옛 동로마와 서로마 지역의 관계 증진에는 기여했다. 관계가 개선되기만한 것은 아니다. 십자군은 보급의 현지 조달을 위해 빈번하게 약탈을 자행했기에 비잔티움 주민들의 반감을 샀다.
비잔티움인들은 서유럽인들에 대해 변덕이 죽 끓듯 하고 배신을 밥 먹듯이 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소아시아에서 빼앗긴 영토를 서유럽 방면에서 보충하려고 했다. 서유럽 영주들은 이것을 위협으로 보았다. 이때문에 독일 황제인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중요한 목표로 삼기도 했다.
양측은 무엇보다도 지중해 상업권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지중해 무역은 베네치아가 주도하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일찍부터 비잔티움 제국 내 상업에서 상당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해상무역에서도 특권을 갖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를 통과해야 지중해로 나갈 수 있었으므로 비잔티움 해군의 보호 아닌 보호에 의존해야 했다. 그들은 많은 대가를 치르고 비잔티움 제국의 항구를 사용하거나 제국 내 상업을 독점하는 권리를 받았다.
11세기 말 알렉시오스 황제는 특권을 베네치아에 한정하지 않고 피사에도 부여했다. 그의 아들 요안네스 황제는 제노아에도 특권을 줬다. 베네치아의 경쟁자를 만들려는 심산이었다. 1171년과 1182년 베네치아의 독점에 불만을 품은 비잔티움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제4차 십자군 결성의 속사정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의 독점적인 지위에 안심할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해결책은 비잔티움 제국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기회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뒤, 원정 목표를 콘스탄티노플 정복으로 바꾸는 것으로 봤다.
그리하여 ‘추악한’ 제4차 십자군이 결성됐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사이의 반감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4차 십자군 결성은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가 제창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주요 도시를 빼앗긴 서유럽은 먼저 이집트를 공략해 팔레스타인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만들려 했다. 이집트로 가려면 배를 이용해야 하므로 베네치아에 모여들었다.
십자군은 항해 비용을 조달할 수 없었다. 그때 베네치아의 도제(doge·총독)가 “부족한 항해 비용은 무력 원조로 대신하라”고 제안했다. 즉 베네치아를 도와 헝가리의 자라(Zara)라는 도시를 정복하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크로아티아에 있는 자라는 아드리아 해에 면한 항구도시다. 자라는 베네치아가 지중해로 나가는 전진기지로서 적지였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인 약탈
1202년 11월 자라 시민들이 성벽에 십자가를 걸어놓았는데도 십자군은 자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목표는 자라가 아니었다. 도제의 꾐에 빠진 십자군은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도제가 십자군에게 금전적 보상을 약속했던 것이다.
비잔티움 내부의 사정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한몫했다. 1196년 알렉시오스 3세는 황제이던 동생 이사키오스로부터 제위를 빼앗고, 그를 장님으로 만들며 황제에 즉위했다. 이 때문에 이사키오스는 아들인 알렉시오스(후일 알렉시오스 4세)와 함께 신성로마 제국 슈바벤 공작의 지원을 받아 복위를 노리게 되었다. 1203년 6월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 항구로 들이닥치자 알렉시오스 3세는 도망치고 알렉시오스 4세가 즉위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알렉시오스 3세가 왕실의 귀금속을 가지고 달아난 것이다. 새 황제는 도와준 십자군에게 내놓을 것이 없었다.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된 십자군은 1204년 기독교 세계의 최대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파괴하고 같은 기독교인을 약탈했다. 이는 베네치아가 사주해서 만은 아니다. 콘스탄티노플의 화려하고 발전된 모습도 십자군의 약탈을 자극했을 것이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인구는 40만~50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학자들은 100만에 육박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3세기 초 서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는 파리였는데, 인구는 10만 남짓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유럽인의 눈에 콘스탄티노플은 엄청난 규모였다. 대도시를 만들려면 많은 도시인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콘스탄티노플은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위용은 대단했다. 도시를 둘러싼 성벽은 마르마라 해안에 8km, 골든혼 지역에 7km, 그리고 육지에 6.5km가 있었다. 높이는 12~15m에 달했다. 그렇게 높은 성벽임에도 여행자들은 성벽이 낮다고 느꼈는데, 그것은 성벽 뒤로 궁전, 대경기장, 소피아 대성당의 둥근 지붕 등 거대한 건축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건물들은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었으니 서유럽에서 온 기사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4차 십자군에 참가했던 로베르 드 클라리라는 연대기 작가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40곳 중에 우리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발견한 것만큼의 부를 가진 도시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스인들은 전 세계 부의 3분의 2가 콘스탄티노플에 있고 나머지 3분의 1은 세계에 흩어져 있다고 말했다. (…) 어느 궁전에는 방이 줄줄이 500칸이나 있었다. 방은 모두 황금 모자이크로 장식돼 있었다. 그 궁전에는 크고 작은 성당이 30채나 있었다. 얼마나 부유하고 고급스러운지…. 경첩이나 빗장조차 평범한 쇠로 된 것은 없고 모조리 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성소피아 성당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도시의 다른 곳에는 황금의 문이라고 불리는 성문이 있었다. 이 성문은 평소에는 열리지 않다가 황제가 전투에서 승리해 돌아올 때에만 열린다. 황제는 황금으로 된 마차를 타고 귀환한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분열됐다. 1204년 5월 16일 베네치아의 도제 단돌로(Dandolo)의 지지를 받은 플랑드르 백작인 보두앵이 소피아 대성당에서 황제의 관을 썼다. 비잔티움인은 서유럽인을 ‘라틴’인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유래해 라틴 제국이 탄생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4등분되어 4분의 1은 보두앵에게 귀속됐다. 4분의 2는 베네치아인들에게 돌아갔고, 나머지 4분의 1은 황제의 봉토로 기사들에게 분배됐다.
베네치아인들이 가장 많은 이익을 얻었다.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안의 여러 도시, 그리스의 에우보이아 지역과 크레타 섬 등 수많은 항구도시와 해안지역을 얻었다.
제4차 십자군의 공격을 받아 라틴 제국 등으로 쪼개진 비잔티움 제국.
서유럽인들은 오만했다. 그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지방 귀족들을 무시했고 그들에게 복속되는 것을 거부했다. 생산력이 높은 지역인 소아시아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제국의 유럽인 테살로니카와 그리스, 마케도니아 등에만 관심을 가졌다.
비잔티움 제국을 복구하려는 세력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했다. 그들은 니케아를 수도로 삼고 1204년 말부터 소아시아를 무대로 영토를 회복해나갔다. 1261년 마카일 8세가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함으로써 십자군이 세운 라틴 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라틴 제국과 십자군에 의한 약탈과 착취로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단절됐다. 서유럽인들에게 동방정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인정하지 않는 분파주의자들로 비쳤을 것이다. 비잔티움 주민들에게 십자군은 같은 기독교인들을 공격하는 가짜 기독교인이었을 것이다. 그후 700년 이상둘이 서로 마주 앉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700년 만의 화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로마 가톨릭교회와 교황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신앙이라는 초월적 영역에 한정하지 않았다. ‘지상의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해 화해의 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1965년 12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1세가 9세기에 걸친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한 공동선언을 했다.
“1054년 훔베르트 추기경이 이끄는 교황특사들이 미카엘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와 다른 2명에게 파문을 선고하고, 교황의 특사들 역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부터 같은 파문을 받았던 뼈아픈 사건의 기억은 형제 관계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는 공동의 합의로 다음을 선언한다.
첫째, 상처를 입히는 말과 근거 없는 비난, 그리고 비난받을 행동으로 이 시대의 슬픈 사건들을 일으키고 그 흔적을 남겨놓은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둘째, 오늘날까지 가까워지는 데 장애가 되는 파문 선고를 유감으로 생각한다. 셋째, 분열 이전의 불쾌했던 일들, 상호 몰이해와 불신 등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교회공동체에 사실상 분열을 가져온 사건들을 개탄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는 앞으로 서로 존중하며 협력할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로마 교황의 만남은 그 가능성을 높여준 사건임에 틀림없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눈길을 돌려보면 중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콘스탄티노플은 서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였으므로, 이 도시와 총대주교가 누렸을 권위와 중요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점령당한 이래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이슬람 국가인 터키에 속해 있다. 도시 이름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1986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아시아에서 열린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의 날’.
동방정교회의 우두머리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이슬람 국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오스만투르크의 관용이 큰 작용을 했다. 오스만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동방정교회의 포교를 허용하지는 않았으나 기존의 교회 조직을 없애지도 않았다. 소피아 성당과 같은 동방정교회의 성당은 이슬람의 예배당인 모스크로 바꿔 사용했다.
그러나 무조건 관용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동방정교회 성당을 모스크로 바꾸면서 기독교 문화유산을 파괴하기도 했다. 소피아 성당은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으나 내부의 벽면 모자이크는 상당 부분 훼손됐다.
오늘날 이스탄불에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자리 잡고 있고, 동방정교회 신도들은 여전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터키 정부의 이주정책으로 그 수는 크게 줄었지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같은 기독교에 속하는 로마 교황과 갈등 관계였으나 이교도인 이슬람과는 관용과 협력의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전자의 갈등은 십자군에 의한 정복으로 귀결된 반면, 후자의 관용은 지속적 생명력을 가져다준 셈이다.
분열 끝내기 위한 모임
이스탄불에는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이슬람 등 여러 종교세력 간 갈등과 협력, 파괴와 보존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사진 한 장으로 글을 시작했으니 다른 사진 한 장으로 마무리하자. 왼쪽 페이지의 사진이 그것이다. 1986년 10월 27일 이탈리아 아시시(Assisi)에서 열린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의 날’에 모인 전 세계의 종교지도자들을 찍은 것이다.
이들을 초청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행사를 마치며 행한 연설에서 “각자 자신들의 방식으로 기도를 올리며 침묵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함께 평화와 조화 속에서 걸어가고 있음을 느꼈으며 인류가 공통의 기원과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연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