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3만 명…안산에만 5000여 명 밀집
- 하루 12시간 노동에 쪽방생활
- 언어불통, 최저임금, 비자 만료 삼중고
- 150년 이어진 지난한 유랑史
- 법적·제도적 지원 전무…무너지는 ‘코리안 드림’
경기 안산시 선부2동 땟골마을(왼쪽). 다가구주택마다 가스계량기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위). 고려인들의 숙소인 쪽방 내부(아래).
그런데 슈퍼마켓, 미용실, 식당, 노래방 등 유별날 게 없는 가게들의 간판엔 이채롭게도 한국어와 러시아어가 뒤섞여 있다. 행인들의 대화에서도 러시아어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중심가에 해당하는 땟골삼거리엔 닷새 전 ‘고려인 희망 나눔 바자 겸 땟골마을잔치’가 열렸음을 알리는 현수막이 바람결에 춤춘다. 이곳은 국내 최대 고려인 동포 밀집지다. 볏과에 속하는 풀인 띠가 많아 ‘띳골’로 불리다 ‘땟골’로 이름 붙은 마을. 땟골의 고려인은 2000여 명에 달한다.
국내 고려인 6분의 1 거주
국내 거주 고려인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가 매월 발간하는 공식 통계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엔 중앙아시아 고려인을 별도로 통계를 내는 항목이 없기 때문. 다만 김준태 국민권익위원회 조사관의 ‘고려인 동포 권익구제 방안’ 자료에 따르면, 2013년 8월 현재 국내 거주 고려인은 최소 2만2000명 이상이다. 우즈베키스탄 국적 고려인이 약 1만5000명으로 가장 많고, 러시아 고려인 약 4700명, 카자흐스탄 고려인 약 2000명 등이다. 체류자격별로는 방문취업(H-2 비자)이 1만2000명, 재외동포(F-4 비자) 8000명, 기타 영주권 및 결혼이민자 순이다. 그러나 불법체류자까지 합치면 실제론 3만 명가량이 국내 체류 중인 것으로 추산된다.
땟골의 고려인 수는 해당 지역 부동산중개업소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땟골엔 삼거리를 중심으로 반경 400~500m에 200여 채의 다가구주택이 있고, 집집마다 11~15칸의 쪽방이 들어차 있다. 쪽방 거주자 대다수가 고려인인 점을 감안할 때 2000명가량으로 추산할 수 있는 것. 땟골을 포함한 안산시 전체엔 5000여 명의 고려인이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 체류 고려인 전체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숫자다.
유랑과 이산은 ‘현재진행형’
박 따지아나(50) 씨도 ‘땟골 고려인’ 중 한 명이다.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출신으로, 2006년 한국에 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돈 벌러 왔다”고 한다. 고졸 학력임에도 우수리스크에선 경제활동을 할 수 없을 만큼 일거리가 모자랐단다.
박 씨의 직업은 인력파견업체 통역. 오전 7시~오후 8시가 근무시간이다. 한국에 온 첫 4개월은 서울 불광동의 쌈밥집에서 서빙을 했다. 일은 고되었지만 빨리 배웠다. 보수는 월 85만 원으로 박했다. 이후 휴대전화·자동차·냉장고 부품 제조업체, 플라스틱 사출성형 업체 등을 거치는 동안 다른 고려인보다 나은 한국어 실력을 알음알음 인정받아 2013년 6월 지금 직장을 구했다. 그나마 어릴 적 고려인 1, 2세대인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입’과 ‘귀’를 통해 배운 ‘고려말’ 덕분이다.
박 씨는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결혼도 했지만 이혼하게 됐고, 아들 둘을 혼자서 양육하기란 역부족이었다. 1998년 우수리스크로 건너간 그는 러시아 식당 요리사로 일했다. 그래도 생활고는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택한 게 ‘나홀로’ 한국행. 아이들은 카자흐스탄의 오빠에게 맡겼다. 다행히 큰언니가 먼저 한국에 들어와 광주광역시에 살고 있어 정신적 부담은 덜했다.
박 씨는 2007년 4월 땟골에서 만난 러시아 남성과 재혼했다. 5세 연하인 남편도 재혼. 남편은 안산의 한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지금 생활에 만족해요. 통역으로 동료 고려인들이 일자리 찾는 걸 돕고 ‘고맙다’는 말도 들을 수 있으니까. 다만 일부 한국 사람들이 고려인더러 한국말 모른다고 면전에서 ‘바보’라 욕하며 깔볼 땐 무척 속상해요.”
고려인 박 따지아나 씨(왼쪽)와 이 알렉세이 씨.
“아이들? 당연히 보고 싶죠. 하지만 너무도 고생했던 아픈 기억 탓에 러시아나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조상의 고향인 한국에 정착하고 싶죠. 더 이상 유랑은 싫어요.”
박 씨의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한국말이 서툴긴 해도 고려인 중에선 ‘유창한’ 편이기 때문. 국내 체류 고려인 중 열에 아홉은 언어소통의 어려움을 가장 심각하게 여긴다. 한국어라곤 단어 몇 개 아는 수준이거나 전혀 모르는 이도 많다. 고려인이 할 줄 아는 말은 대개 러시아어뿐. 강제이주로 유라시아 대륙 곳곳으로 흩어진 이후 고려말 교습을 금지당한 탓이다.
‘국경 너머, 차별 너머’
고려인은 1863년 구한말 폭정과 가난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해 마을을 이룬 한인들의 후손. 일제 강점기였던 20세기 초반엔 망국의 한을 딛고 연해주를 독립운동 전초기지로 삼으며 치열한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기도 하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집단 강제이주 명령에 따라 18만여 명이 수천㎞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2만5000여 명이 숨지는 참극을 겪어야 했다. 교육 수준이 높고 강인하며 성실했던 이들은 한때 구소련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1991년 구소련 붕괴 후엔 다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독립국가연합(CIS) 전역에 흩어져 살며 아직도 유랑을 거듭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고국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다. 720여만 명에 달하는 재외동포 중에서도 지난한 역정을 지닌 이들의 수는 현재 50만 명을 헤아린다.
유랑이 멈추지 않는 건 CIS의 신생독립국들이 저마다 자민족 우선정책을 펼치는 탓에, 토착어가 서툴고 러시아어밖에 모르는 고려인들이 상대적으로 좋은 직업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 게다가 물가마저 치솟아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수많은 고려인이 러시아행과 한국행을 택했다. 이렇듯, 수난의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같은 민족임에도 고려인들이 한국 땅에서 영영 ‘이방인’에 속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고려인들은 한국에 온 뒤부터 자신이 ‘아기’가 된 기분이 든다고들 해요. 조선족과 달리 한국말을 못하니 불이익을 당해도 항변할 수 없고, 몸이 아파도 병원조차 혼자 못 찾아가죠. 언어 장벽으로 인해 주민세나 벌금 납부 방법조차 잘 모릅니다.”
땟골삼거리에 자리한 고려인 한글야학 ‘너머’의 김승력(46) 대표는 “비자 연장 등 체류 문제, 임금체불과 차별대우 등 노동 문제, 의료 문제, 주거 문제 등이 고려인들의 공통된 애로사항”이라고 말한다.
‘너머’는 고려인 동포 지원 시민모임. 명칭은 ‘국경 너머, 차별 너머’라는 뜻을 함축한 것. 2011년 5월 고려인을 위한 ‘사랑방’ 형태로 문을 연 이래, 땟골 고려인 규모가 한층 커진 지금까지 정부의 무관심과 외면 속에서 힘겹게 모국 생활을 이어가는 이들의 고충을 해소하려 애쓰고 있다.
김 대표를 포함한 상근자 4명과 자원활동가 10여 명이 힘을 보태는 ‘너머’의 주된 활동은 한글야학 운영, 출입국사무소 제출서류 지원과 비자, 월세계약, 은행 업무 등 생활민원 해결을 위한 통·번역 지원, ‘별별상담소’ 운영을 통한 노동문제 상담, 긴급 의료지원 및 구호, 모국 탐방여행 및 문화체험 운영 등이다.
김 대표에 따르면, 땟골에 고려인 쪽방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때는 2004년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재외동포법) 개정 무렵부터다. 2007년 재중동포와 고려인을 대상으로 한 ‘방문취업제’가 시행되면서 ‘코리안 드림’을 안고 땟골로 모여드는 고려인이 급격히 늘었다. 대부분 성인 혼자나 부부가 일자리를 찾아온 경우다. 낮밤 2교대로 일하는 고려인 중 상당수는 월세를 아끼려 2~3명이 쪽방 하나를 공동으로 쓰기도 한다.
오후 8시 이후면 땟골삼거리에서 출퇴근하는 고려인들이 승합차에 타고 내리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왼쪽) 고려인 한글야학 ‘너머’에서 면학에 몰두하는 고려인들.(오른쪽)
김 대표는 “현행 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결혼이민자 중심으로 운영되는 만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이 고려인을 위한 고려인종합지원센터를 마련해줘야 한다”며 “고려인의 훼손된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활동도 병행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땟골에 합법 체류자만 있는 건 아니다. 고려인에 대한 F-4 비자 발급 기준이 완화되고 있지만, 취업 문턱은 여전히 높다. F-4 비자는 입국이 자유롭지만 전문직이 아닌 단순노무행위엔 종사할 수 없게 돼 있다. 11월 22일에도 F-4 비자를 소지한 땟골 고려인 5명이 안산 시화공단에서 일하다 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의 단속에 걸려 사흘간 구금됐다가 벌금 100만~200만 원씩을 내고 풀려났다. 두 번째로 적발되면 추방된다.
“방에 버섯이 자란다”
오후 6시, 저녁식사를 위해 땟골삼거리 인근 고려인 식당을 찾았다. 주인은 2년 전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김 알렉(55) 씨. 우즈벡에선 한때 종업원 50~60명을 거느린 식당을 경영했지만, 현재 하루 매상은 5만~6만 원. 44.16㎡(약 13평) 규모의 식당엔 테이블이 6개. 기자 일행을 제외하곤 손님이 없다. 고려인들이 퇴근하기 전이어서다.
차가운 돼지 육수에 얇게 저민 돼지고기와 오이, 당근, 양배추 등을 고명으로 올린 고려인식 잔치국수를 먹고 나서 쪽방촌을 둘러본다. 간이 부엌을 포함한 16.5㎡(5평) 남짓한 한 쪽방에선 김 나제즈다(66) 씨가 ‘아자아자 한국어’란 교재로 한글 공부를 하고 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로 발이 시리다. 빠듯한 생활비로 겨울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또 다른 쪽방은 벽면이 온통 곰팡이투성이다. ‘너머’의 김영숙(47) 대외협력국장은 “한 고려인은 워낙 곰팡이가 심하게 슬자 ‘방에서 버섯이 자란다’고 농담하더라”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오후 8시를 넘으면 땟골은 비로소 ‘고려인 거리’로 되살아난다. 인력파견업체 승합차들이 속속 도착해 삼삼오오 고려인 근로자를 내려놓고 야간 근무조 근로자를 태우기 시작하면 낮 동안의 고요는 간 곳 없다. 곧바로 쪽방으로 찾아드는 이, 시장에서 식재료를 흥정하는 이, 지인과 인사를 나누는 고려인들로 삼거리는 가득 찬다. 승합차 행렬은 밤 9시를 넘어서도 꼬리를 문다.
오후 8시30분. 또 다른 고려인을 만났다. 막 일을 마치고 땟골로 돌아온 이 알렉세이(33) 씨.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온종일 경기 화성시의 자동차 안전벨트 제조업체에서 일한 뒤 12인승 통근 승합차를 타고 온 참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엿새 동안 하루 8시간씩 일하고 잔업 근무까지 더해 그가 손에 쥐는 월급은 150만~160만 원.
카자흐스탄 국적인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키르기스스탄에서도 10년 동안 살았다. 한국에 온 건 2008년. 목적은 앞서의 박 씨와 마찬가지다. “돈 벌러 왔어요.” 카자흐스탄의 전문대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한때 키르기스스탄에서 상점 점원과 외국인 대상 운전 일을 했지만, 보수가 한국 돈으로 월 25만 원에 불과해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힘겨웠다고 했다. 한국엔 쌍둥이 형과 같이 왔지만, 결혼한 형은 이내 카자흐스탄의 아내와 자녀를 돌보려 돌아갔고, 미혼인 그는 남았다. 인력파견업체를 통해 여러 업체를 전전했지만, 점차 성실함을 인정받아 고려인 친구 소개로 현 직장에 다니게 됐다.
“누가 뭐래도 난 카레이스키”
이 씨의 숙소는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17만 원짜리 쪽방. 한 달에 쓰는 돈이라곤 월세와 난방비, 휴대전화 요금, 용돈을 합쳐 60만 원가량. 나머지는 부모, 형, 삼촌에게 생활비로 송금한다. 한국 땅에 와 있는 그가 카자흐스탄의 한 고려인 일가 생계를 책임진 가장 구실을 하는 셈이다. 그래서 그의 하루 일과는 일, ‘너머’에서의 한국어 공부, 지쳐 잠들기의 연속이다. 야학에서 한국말을 1년 넘게 배웠지만 아직도 서툴다. 그래도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그에겐 나름의 취미활동이 소소한 즐거움이다. ‘너머’의 동아리 중 하나인 고려인 밴드에서 전자기타를 친다.
그의 비자는 고려인과 재중동포에게 발급되는 H-2. 3년 체류기간을 채운 후 1년 10개월까지만 연장 가능한 비자다. 하지만 12월 중 연장한 기간마저 만료될 예정이라 곧 한국을 떠나야 할 처지다. 그래서 걱정이 많다. 갈 곳도 정하지 못했다. 카자흐스탄의 부모를 모시고 말이 통하는 러시아로 갈까도 생각 중이다.
이 씨에게 “스스로 어느 나라 사람이라 생각하느냐”고 정체성에 대해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입을 열었다. “카자흐스탄에선 저더러 ‘카레이스키(고려인)’라고 했고, 한국에선 ‘넌 동포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러시아에 가면 또 뭐라고 할지 모르죠. 그렇더라도 저는 분명 카레이스키입니다. 단 한 번도 카레이스키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사실 이 씨의 사례는 안산이나 인근 화성지역 등의 공단 근로자로 살아가는 고려인의 전형이나 다름없다. 대다수가 3D업종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고, 시급 4860원에 불과한 최저임금을 받는다. 이마저 악덕 사업주의 고의적인 임금체불, 사업체 도산 등으로 떼일 때도 잦다. H-2 비자 만료를 걱정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비자 만료일이 곧 한국에서의 경제활동을 포기해야 하는 날이기 때문.
다행히 최근 들어 고려인에 대한 인식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광주시의회는 2013년 9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고려인 주민 지원 조례’를 제정해 고려인의 안정적 자립을 위한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광주 광산구 하남·평동공단 등지에선 현재 1000여 명의 고려인이 일한다.
경기도의회 강득구 의원은 지난 11월 14일 경기도 여성가족국 행정사무감사에서 도내 31개 시·군 거주 다문화가정이 6만4404가구에 달하며 이들에 대한 지원 예산도 연간 163억1900만 원에 달하지만, 고려인에 대한 지원은 전무하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이에 앞서 안산시의회도 10월 21일 사회적 지위가 취약한 고려인의 처우 개선을 위한 ‘고려인 안산 간담회’를 개최한 바 있다.
최선은 한국 거주, 차선은 러시아행
2014년은 러시아 한인 이주 150주년이 되는 해(제정러시아 당국이 고려인 이주를 공식 허가한 1864년과 실제 연해주 이주가 시작된 1863년을 각기 원년으로 보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다. 이와 관련, 11월 30일 국회 의원회관에선 몇몇 국회의원실과 (사)동북아평화연대, ‘너머’의 공동 주최로 ‘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발족식 및 기념 심포지엄’도 열렸다.
밤 9시30분, 야학의 한국어 수업이 시작됐다. 11시30분까지 이어진다. 뒤늦게 일을 마치는 단 한 명의 고려인에게라도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게끔 돕기 위해서다. 6개월 초급반, 이후 6개월 중급반으로 총 1년 과정인 강의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뤄진다. 교재는 연해주 우수리스크사범대학 한국어 강사 경력을 지닌 김 대표가 직접 만든 것.
학생 연령대는 20~60대까지 다양하다. 행여 김 대표의 설명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일제히 귀를 쫑긋 세운다. 이날 수업 내용은 ‘누구’와 ‘무엇’에 관한 것. 본관(本貫)이 뭔지도 배운다.
다양한 국적. 그러나 우리와 피부색, 얼굴 생김새, 성(姓)까지 같은 이들의 뿌리는 하나다. 다문화가족과 함께 ‘국민행복시대’를 여는 데 소홀함 없이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 밝혔으면서도 선진국 출신의 잘사는 재외동포만 우대하는 한국은 이들에게 과연 따뜻한 모국인가. 고려인들이 사랑하는 시인 김준의 시 ‘나는 조선 사람이다’의 구절구절이 이들의 뒷모습에 오버랩된다.
“나는 로씨야 원동/ 이만 강변 조선 사람이다/ 백두산 신령이 먹이지 못해/ 멀리 강 건너로 쫓아낸/ 할아버지의 손자로다./ 로씨야의 ‘마마’보다도/ 카사흐의 ‘아빠’보다도/ 그루시야의 ‘나나’보다도/ 조선의 ‘어머니’란 말이/ 내 정신의 뿌리 더 깊다.”(원동(遠東)은 고려인의 초기 정착지인 연해주 일대를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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