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호

1970년대생은 어떻게 민주당을 열렬히 지지하게 됐나

좌충우돌 문민화 時代 살며 자유주의 精髓 습득 못 해

  • 한지원 정치경제평론가·‘대통령의 숙제’ 저자

    입력2023-04-0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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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적 리버럴에 대한 성찰

    • X세대는 문민화 세대

    • 진보적 성과와 편향성 사이

    • 盧 당선과 죽음이란 변곡점

    • 유시민·이진경·박주민·강위원

    • 反보수·親민주당의 지속

    1996년 8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점거 시위에 나선 가운데, 신촌로터리에서 가두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동아DB]

    1996년 8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점거 시위에 나선 가운데, 신촌로터리에서 가두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동아DB]

    1970년대생의 더불어민주당 지지는 유별나다. 진보 세대의 대명사인 1960년대생(86세대)보다도, MZ세대로 불리는 1980~1990년대생보다도 완고하다. 이유가 뭘까. X세대로 불리는 1970년대생의 정치적 선호는 어떻게 만들어졌기에 이다지도 견고할까. 신동아 2월호에 실린 ‘1975년생 화이트칼라는 왜 윤석열이 싫을까’가 뽑은 키워드 ‘리버럴’을 가지고 이 질문에 답해 보겠다.

    신동아 2월호 ‘1975년생 화이트칼라는 왜 윤석열이 싫을까’ 제하 기사.

    신동아 2월호 ‘1975년생 화이트칼라는 왜 윤석열이 싫을까’ 제하 기사.

    1990년대는 장기 문민화 시대

    특정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다른 시기 사람들과 구분되는 어떤 정치적 태도를 공유한다면, 특별한 경험을 함께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긴 시간을 또래와 보내는 10대 후반의 중·고등학교 시절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대학진학률이 높을 때는 20대 초반 역시 중요하다. 1970년대생의 대학진학률은 40~70%다. 대학 시기를 분석에 포함해야 한다. 이 세대가 경험한 특별한 정치적 이벤트부터 살펴보자. 나는 1990년 3당 합당, 1993년 문민정부 출범,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과 정권교체를 꼽는다. 1970년생은 20대 때, 1979년생은 10대 때 이 사건들을 겪었다.

    1990년대는 ‘문민화(civilian)’ 시대였다. 문민화란 군부의 폭력 없이도 잘 작동하는 통치 체제, 즉 문민정부에 적합한 제도와 규범을 만드는 과정을 포괄한다. 한국 국민은 1990년대 이전에 문민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권위적 공권력 없이 질서를 유지하고, 굳어진 독재 시절의 관행을 공정한 법치로 대체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아랍의 봄’이라고 불린 2010년 북아프리카·중동 지역의 민주화 시위가 그런 사례다. 여러 독재자가 물러났지만, 무정부상태의 대혼란을 초래하거나 군부가 쿠데타로 재집권하는 경우가 많았다. 적절한 문민화를 거치지 못한 탓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민주주의가 시민적 덕성을 기반으로 해야 혼란을 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시민적 덕성을 함양하는 제도적·규범적 성숙, 다시 말해 제대로 된 문민화가 꼭 필요하다는 뜻이다.

    문민화를 역진(逆進) 불가의 민주화를 위한 긴 이행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1990년 3당 합당(군사정권의 주류가 포함된 여당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야당이 합당한 사건)은 평화로운 군부 축출 전략을 내재한 문민정부의 사전 단계로 평가할 수 있다. IMF 체제는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도 경제 영역에 남아 있던 군부독재의 유산(관치 경제)을 구제금융이란 수단을 이용해 반강제로 개혁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요컨대 1990년대는 문민정부의 사전 단계와 사후 단계를 포함하는 장기 문민화 시대다.

    X세대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이 시대를 겪었다. ‘문민화’ 세대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1970년대생의 독특한 정치적 선호는 이 문민화 과정과 깊게 연결돼 있다는 게 나의 가설이다. X세대를 규정하는 단어 중 하나인 ‘리버럴’도 이와 관련이 깊다. 문민화의 핵심이 바로 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정치 관행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를 간단하게 정의하면 전체주의 친화적인 정부와 문화를 견결하게 비판하는 포괄적 사상이다. 17세기 잉글랜드 명예혁명, 18세기 미국 독립혁명, 19세기 프랑스혁명, 20세기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는 전제정, 파시즘, 사회주의(공산당 독재)를 비판하고 방지하는 선봉에 있었다. 미셸 푸코는 자유주의를 인류가 최초로 만들어낸 내적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현대적 통치성이라고 규정한다. 현대적 정부를 안정화하는 문민화는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를 제도와 규범에 도입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민화 세대인 리버럴 X세대는 얼마나 자유주의를 체화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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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장판 속에서 싹튼 리버럴

    1977년생인 나는 고교 시절 반일 민족주의에 푹 빠져 있었다. 비장한 감정까지는 아니었다. 한 해는 일본 만화 ‘슬램덩크’에 열광하다, 다음 해에는 한국이 일본을 침략한다는 내용의 만화(이현세 작가의 ‘남벌’)를 열독하는 식이었다. 김진명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 등 ‘국뽕’이 짙게 스민 소설도 여럿 읽었다.

    나만 이렇게 좌충우돌했던 건 아니었다. 시대 분위기였다. 세계화, 자유무역을 주창한 김영삼 대통령은 최대 무역 상대국이던 일본을 앞에 두고 민족주의 선동을 반복했다. 1995년에는 문화재로서 가치가 컸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부숴버리기도 했다. “주류 질서의 전복자”라고 불린 ‘서태지와 아이들’은 새 시대의 코스모폴리탄 세계관이 아니라 ‘하여가’ ‘발해를 꿈꾸며’ 등의 곡으로 주류 질서의 민족주의를 노래했다.

    당시 언론은 ‘신세대’ 담론을 쏟아내고 있었다. 1993년 동아일보는 4월부터 12월까지 장장 8개월간 34회에 걸쳐 기사를 내보냈다. 한 광고회사는 미국에서 1960년대생에게 붙였던 별칭인 X세대를 한국 신세대를 칭하는 캐치프레이즈로 만들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X세대란 별칭의 기원이 됐다. 담론의 내용은 의외로 단순했다. 신세대의 특징을 개인주의·소비문화·자유분방함·반권위주의 등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예로 동아일보 기획 기사의 마지막 로그라인은 “합리 바탕 기존 질서 해체 성향, 상품화로 소비향략 왜곡 우려”였다. 합리적인데 해체적이라니! 자본주의적 발전이 곧 상품화일진대 경제성장 속에서 소비 향략이 걱정이라니! 당시 기사를 지금 보면 기자들도 얼굴이 화끈거릴 것이다.

    미지수 X란 별칭처럼 1970년대생의 문화는 이렇게 모호한 것이었다. 이질적인 요소들이 정제되지 않은 채 뒤섞였다. 따져보면 문민화 과정도 비슷했다.

    1990년대 문민화의 중간 도착지는 1997년 말의 국가 부도였다. 원인은 간단히 말해 문민정치의 실패였다. 독재의 유산인 정경유착은 선거자금을 매개로 새로운 형태로 발전했고, 재벌은 경제적 방종으로 치달렸다. 민주주의 성지라고 할 입법부는 극한의 정치 갈등 속에 정치 혐오를 키우는 진흙탕으로 전락했고, 노동운동은 갈등을 해결할 제도를 만들지 못한 채 군부 시절의 억압적 노동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부와 정면에서 충돌했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 1996년 말 노동법이 날치기 통과됐고, 민주노총은 총파업에 돌입했으며, 해외 단기차입을 상환하지 못한 대기업들이 그다음 해 줄지어 부도났다. 솔직히 말해, 이런 난장판에서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좌충우돌 뒤죽박죽인 시대였다. X세대의 리버럴도, 문민화도 일관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자유주의의 정수(精髓)를, 문민화의 정수를 습득하지 못했을까.

    1993년 2월 24일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민주대개혁 촉구대회’를 열고 ‘문민정부에 바란다’는 대자보판을 설치했다. [동아DB]

    1993년 2월 24일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민주대개혁 촉구대회’를 열고 ‘문민정부에 바란다’는 대자보판을 설치했다. [동아DB]

    메이지유신 때보다도 못한 해석

    현대 사상의 기준이라 할 자유주의에는 두 개의 중심이 있다. 하나는 개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다.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지만, 실은 유럽 현대화의 수백 년 역사가 여기에 담겨 있다.

    개인과 자유의 역사는 현대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구실을 한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시작한다. 종교개혁에서는 부패한 로마 가톨릭을 대체하기 위해 개인의 양심을 강조했다. 또한 다른 기독교를 믿어도 탄압하지 말라는 의미로 종교적 관용, 즉 자유를 끄집어냈다. 17세기에는 개인이 왕에게 방해받지 않고 재산을 소유할 자유(존 로크)가 주목받았고, 18세기에는 시장에서 자유롭게 거래하는 개인이란 의미로(애덤 스미스), 19세기에는 정부가 모든 개인에게 평등하게 보장해야 할 사회적 자유라는 의미(존 스튜어트 밀)로 그 함의가 확장됐다. 따라서 자유주의를 주류화하는 문민화는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하는 질서를 만들고, 개인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갈등을 조정하는 제도를 설계해야 하며, 시회적 권리를 더 확고히 존중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유럽적 경험이 없는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개인과 자유의 참뜻을 파악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메이지유신 직후 일본에서 번역어를 만들었던 과정을 살펴보자. 당시 individual은 처음에 ‘혼자’라고 번역되다가, 사회와 연관해 설명해야 하는 맥락이 많다 보니 후에 “홀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의 독일개인(獨一個人)으로 번역됐다. 나중에는 독과 일이 떨어져 개인이 됐다.

    당대를 대표한 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individual에 해당하는 일본어 단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좌절을 느꼈다고 한다. liberty나 freedom은 부정적 의미인 ‘제멋대로’와 ‘사치하다’란 뜻을 포함한 한자 단어 ‘자유’로 번역됐다. 물론 이는 부적절했다. liberty는 freedom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조건이 사라진 상태를 뜻했고, freedom은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선택할 수 있는 개인의 능동적 상태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봉건적 질서의 지배층엔 두 단어 모두 위험하다. 그렇다 보니 끝까지 제대로 된 번역어를 찾지 않았다.(이나부 아키라, ‘번역어 성립사정’, 일빛)

    느닷없이 150여 년 전 이야기를 꺼낸 것은 1990년대 리버럴의 사정이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유와 개인을 사전적 의미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당연히 적절한 실체를 가진 행동 규범으로 습득하지도 못했다.

    1990년대 중반, 대학 사회 여론을 이끈 가장 힘 있는 조직은 단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었다. 하지만 ‘불패의 애국대오’를 내건 한총련은 이미지로서 리버럴조차 흉내 내지 못한 조직이었다. 집단 문화를 강조했고, 1997년엔 “강위원(의장) 따라 하기” 같은 지도자 숭배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개인과 자유가 아니라, 조직과 충성을 강조하는 전형적 전체주의 문화였다. 내가 저학년이었을 때 한총련 계열 선배들은 개인과 자유를 미국의 타락한 문화라고 가르쳤다. 자유는 “제멋대로”, 개인은 “혼자만 살아가는 이기주의” 정도로 해석했으니, 메이지유신 때보다도 못한 해석이라고 하겠다.

    1990년대 서울 소재 대학들에서는 신좌파로 불리는 흐름도 유행했다. ‘우 조교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반(反)성폭력 운동이 크게 일어났고, 동성애자와 장애인 등 소외당하는 소수를 주체로 한 운동도 주목받았다. 일상의 권력과 문화를 비판한 포스트모던 철학이 유행했고, 운동권 스타일의 지식인보다 영화·음악에 관한 세련된 분석을 전하는 문화평론가들이 인기를 얻었다.

    이런 새로운 흐름도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자유주의가 이룬 성취를 충분히 파악하고 비판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반성폭력 운동은 일상화된 성폭력에 경종을 울렸지만, 동시에 ‘피해자 중심주의’를 과도하게 확장하며 사실관계나 쟁점을 따지는 것마저 ‘2차 가해’로 처벌하는 편향에 빠졌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인간(자유를 누릴 수 있는 개인)으로 정한 현대적 형사사법의 진보성은 과소평가됐다. 일부 사회운동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오남용해 갈등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단순화한 후에 피해자의 요구를 절대화했다. 특히 민족주의 운동이 피해자 심성을 매개로 한 반일 캠페인을 자주 조직했다.

    포스트모던한 지적 분위기에서 X세대가 주도한 ‘정체성의 정치’ 역시 진보적 성과와 동시에 심각한 편향을 노정했다. 정체성의 정치란 집단이나 개인 사이 차이를 강조하며 소수자의 인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지칭한다. 이 운동들은 제도적 차별을 해소하거나, 기회를 박탈당한 소수자에게 우대 조치를 해주는 제도 개혁에서 적잖은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운동이 성장하며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성을 부정한 채 파편화된 개인의 정체성만 강조하거나, 소수자에게 생물학적·문화적 우월성을 부여하는 역편향을 보여주기도 했다. 앞서 본 번역어 성립 과정에 비유하면, 혼자와 제멋대로라는 오역을 외려 원래 뜻보다 더 긍정적이라고 평가한 셈이었다.

    민주당으로 수렴된 21세기

    1990년대를 거쳐 형성된 X세대 리버럴은 21세기 들어 한국 사회의 방향을 비트는 중요한 변수로 등장했다. 시작은 2002년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아마도 ‘리버럴’이란 수식어를 가장 많이 받았던 정치인일 것이다. 반권위주의를 외친 그는 X세대의 리버럴 이미지를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통해 구체적 실체로 만들었다.

    2009년 그의 죽음은 X세대 리버럴을 이전과는 다른 맥락으로 구체화했는데, 이때부터 “리버럴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누가 리버럴한 대통령을 죽였는가?”라는 반(反)보수 정치의 서사가 X세대를 사로잡았다. 야당이 된 민주당이 주도한 세 차례 촛불시위는 이런 반보수 정치를 완성했다. 반보수라는 규정에는 X세대 리버럴의 결함이 드러나지 않는다. 보수에 대한 혐오만 필요하지 자신의 정치적 태도에 관한 포지티브한 규정이 필요 없어서다. 그만큼 변화도 필요 없다. X세대의 완고한 정치적 태도가 이렇게 완성됐다.

    X세대 리버럴은 수많은 지식인, 정치인을 통해서도 민주당과 견고하게 결합한다. 지금까지 서술한 주요 사건들의 주인공이었던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민주당에 있다.

    “서태지, 주류 질서의 전복자”라는 문구를 만든 문화비평가 강헌 씨는 좌파명리학이란 황당한 이론을 가지고 민주당 대선후보들을 극찬했다. 리버럴 지식인의 대명사이던 유시민 씨는 무조건 민주당 편을 드는 어용 지식인을 자처했다. 포스트모던 철학 인기를 선도한 이진경 씨는 2019년에 앞장서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지지했다. 민족주의 운동을 피해자 중심주의와 결합해 큰 성공을 거둔 윤미향 씨는 민주당 위성정당 소속으로 비례대표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됐다. 1990년대 초 신좌파 학생운동의 일선에 있던 박주민 씨는 세월호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민주당 의원이 됐다. 1997년 한총련을 이끈 강위원 씨는 2019년 이재명 당시 경기지사에게 발탁돼 경기도농수산진흥원장을 지냈다. 반보수 운동의 선구자였던 딴지일보를 창간한 김어준 씨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를 거쳐 민주당의 가장 강력한 스피커가 됐다. ‘영원한 제국’에서 시작해 X세대가 공유한 정조대왕 신화는 문재인 정부 정통성을 정조로부터 끌어내려는 민주당 정치인들에게 지금도 종종 소환된다.

    정신적 부도 상태

    정리해 보자. X세대는 문민화 세대란 점에서 리버럴이란 호칭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이 리버럴은 불행히도 자유주의의 요체를 담지 못했다. 문민화 시기 국가 부도에 비유하자면, 현재 X세대 리버럴의 반보수·친민주당 태도는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정신적 부도 상태일 수도 있다. 내가 환갑이 되는 15년 후면 60대에 진입한 X세대가 가장 큰 세대 집단이 된다는데, 1인 1표의 민주주의로 대결하면, 젊은이가 늙은이를 절대 이길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하는 셈이다. 늙은이의 리버럴이 한국 사회를 어디로 이끌지 벌써 걱정된다. 1990년대에는 학생운동을, 2000년대 이후에는 진보적 사회운동을 해온 나부터 반성한다. 이 글의 비판은 나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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