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호부터 문화재 발굴 막전막후 비화를 소개하는 ‘김태식의 고고야담(考古野談)’을 연재합니다. 필자인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은 언론사에서 17년 이상 문화재 분야를 담당한 베테랑 언론인 출신입니다. 한국 문화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언제 탄생했으며, 어떤 가치를 부여받아 오늘에 이르렀는지, 도굴과 발굴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고 갈라지는지, 익숙한 문화재에 얽힌 사건과 인물 비화 등을 중심으로 흥미롭게 재구성해 보여줄 것입니다.
1966년 9월 8일자 동아일보 7면에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불국사 무영탑 도괴 위기’라는 제목의 4단짜리 기사가 게재됐다. 이에 의하면 석가탑은 8월 29일 오후 8시경 경주에서 발생한 규모 2의 지진으로 1층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덮개돌) 사이에 끼어 있던 부식된 쐐기가 주저앉으면서 약 5㎝의 틈이 생기는 바람에 서남쪽으로 7도가량 기울어졌다.
이 때문에 1층 탑신 남쪽 부문 기둥에서 가로, 세로 각 30㎝, 두께 5㎝ 크기인 조각이 땅에 떨어졌는가 하면, 1층 동쪽 부문 기둥은 손바닥 크기만큼 떨어져 나갔고 2층 동쪽 갑석(甲石·반석 위에 다시 올려놓은 납작한 돌) 또한 벽돌 크기만큼이나 떨어져 나갔다. 나아가 2층 서편 옥개석 갑석은 가로 60㎝, 세로 15㎝, 두께 15㎝가량이 허물어지고, 2층과 3층 사이 탑신 모퉁이는 손바닥만큼 떨어져 나갔다.
이 사건을 경북도교육감이 관련 중앙 부처에 보고한 까닭은 당시까지만 해도 문화재 관리 업무를 교육부에서 했으며, 이를 전담하는 조직으로 문화재청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이 교육부 산하였기 때문이다(현재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이런 보고를 받은 문화재관리국은 8일 오전 11시 유형문화재 분야를 담당하는 제1분과 회의를 열어 석탑 훼손 상항을 조사하기 위해 문화재위원인 황수영 당시 동국대박물관장과 임봉식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과장 등으로 구성한 조사단을 현지로 급파했다.
문화재 중의 문화재, 대한민국 대표 문화재 중 하나로 통하는 석가탑이 지진 여파로 무너지기 일보 직전에 처했다는 이 사건은 하지만 이내 엉뚱한 데로 방향을 틀고 말았다. 문화재위 현지 조사 결과 석가탑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도괴 위험으로까지 내몬 원인은 지진이 아니라 바로 도굴꾼들이 탑신에 낸 구멍이었다. 도굴꾼들이 노린 것은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탑신 안에 안치한 각종 귀중품인 탑사리(塔舍利)였다. 하긴 천년을 버틴 석가탑이 규모 2의 지진에 저리 허망하게 망가지기는 힘든 노릇이다.
지진에서 도굴로
이런 사태 전개에 여론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도대체 문화재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불국사에서 버젓이 석탑 도굴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하는 성토가 난무할 수밖에 없었다. 도굴이라는 결론에 이르자 이제 경찰로 불똥이 튀었다. 도굴꾼들을 색출하라는 엄명이 떨어졌으니, 경주경찰서를 뛰어넘어 지금의 경찰청 전신인 치안국이 직접 나서 정상천 수사지도과장을 현지에 급파해 사태 파악에 나섰다.한데 반전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사태 전개가 경찰이라고 달가울 리 없었다. 도굴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책임 추궁에서 경찰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경찰은 문화재위 발표를 거부했다. 무게 수십 t가량이나 되는 탑신 돌을 어떻게 들어올리느냐면서 노골적으로 문화재위와 대립했다.
그러면서 경찰은 실제 탑이 훼손된 부위에서는 도굴 시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당당히’ 맞선 것이다. 9월 14일자 경향신문은 7면에 “현장에서 도굴을 위한 흔적을 육안으로는 발견할 수 없었다”면서 정확한 파손 원인을 가리기 위해 “역학 권위 교수, 물리학자 및 문화재관리위원 등 광범위한 권위자들로 구성된 합동수사반을 편성하겠다”는 경찰 발표를 전한다.
하지만 자연풍화라고 주장하는 경찰도 못내 미심쩍기는 했는지, 불국사 파출소에다 특별수사본부까지 차리고는 사건 수사에 본격 착수한다. 합동수사반 편성을 발표한 날 경찰 수사본부는 경주시 교리에 거주하는 채모(38) 씨와 경주시 인왕리 거주 김모(44) 씨 2명을 유력한 용의자로 검거해 수사본부로 연행해서 범행을 추궁하는 한편, 또 다른 용의자 16명을 수배했다. 조사 결과 채씨는 그해 2월 중순 영덕군 영해면 이시리 신라고분에서 도굴한 물품을, 그리고 김씨는 8월 6일 통도사 경내에서 도굴한 골동품을 각각 경주 시내에서 팔다가 붙잡힌 전과자들이었다. 이런 보도로 보아 석가탑 도괴 위기 사건이 알려지면서 전국 골동품 업계는 경찰의 일제 수사로 초비상 사태에 들어갔을 것이다.
나아가 이 석가탑 사건은 연쇄 파고를 일으켰다. 자연히 다른 문화재 현장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없는지를 새삼 살피게 된 것이며, 이 과정에서 경주 지역 국보 39호 나원리 오층석탑 또한 도굴을 시도한 흔적으로 보이는 파손 상태가 9월 14일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는 석가탑 파손이 도굴에 의한 것임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방증이기도 했다. 석탑을 전문으로 도굴하는 자들이 꼭 석가탑 한 곳만 건드리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석가탑과 나원리 석탑은 같은 도굴단에 의한 소행일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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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뜨고 당한 경주경찰
당시 이 사건을 전하는 언론보도를 보면, 이 도굴 사건 뒤에는 재벌이 있었다는 요지의 사설이나 시론이 쏟아졌다. 삼성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도굴단 배후에 삼성이 있었다는 명시적인 언급은 없었다. 하지만 이는 이병철 회장에게도 엄청난 부담으로 돌아온다. 석가탑 도굴이 국내 굴지의 재벌가를 소용돌이에 몰아넣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그렇다면 경주경찰서와 경북도경을 중심으로 꾸린 현지 경찰수사본부는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석가탑 도굴 진범을 놓치고 서울시경에 그 공로를 빼앗기고 말았을까. 동아일보 9월 23일자 3면에 실린 ‘수사 경쟁으로 검거 늦어’라는 제하 4단짜리 기사에서 그 실마리를 풀 수 있을 듯하다. 경주발로 작성된 이 기사는 요컨대 실제 사건 해결은 경주경찰이 다 했지만 그 공로를 서울시경이 가로채갔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이번 도굴단 주범 김모와 또 다른 김모를 11일 낮에 검거한 곳은 경주경찰서다. 이들을 추궁한 결과 경주경찰서는 다른 공범인 윤씨와 유씨가 서울 성북구 정릉동 이병각 씨 집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이에 이들을 체포하고자 경주경찰서는 김시권 경사를 반장으로 하는 형사대를 13일 서울로 보낸다. 경찰은 주범 김씨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데리고 갔다.
경주경찰서는 이병각 씨 집을 수색해야 한다는 데 무척이나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이에 경주경찰서는 수사 협조를 위해 마침 경주경찰서장을 지낸 정문식 서울시경 수사과장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면서 협조를 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기사에 의하면 정 과장은 “이씨 집은 영장이 있어도 수색하지 못하니 내려가라”고 지시한다. 이에 경주경찰서 형사대는 서울에서 철수하고 만다. 그 후 경주경찰서는 윤과 유 등 일당 7명에 대한 구속영장과 이병각 씨 집에 대한 압수영장을 극비리에 발부받아 17일 다시 서울로 올라가 서울시경에 보고했다고 한다.
이런 보고에 서울시경은 이 도굴범 일당을 자기들이 붙잡은 것처럼 발표하고, 18일 서울지법에서 재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집행했다는 것이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은 이 와중에 경주경찰서가 임의동행 형식으로 데려간 도굴단 두목 김모마저 빼앗기고 허무하게 발길을 돌렸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는 그에 대한 정문식 과장의 반박이 첨부돼 있다. 기사에서 그는 “터무니없는 말이다. 전 경주경찰서에서 있을 때 모두 내 옛 부하들이었는데 내가 그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어쩐지 경주경찰서가 하는 말이 더 타당한 것처럼 들리기는 한다.
석가탑 도굴 사건은 이처럼 반전이 거듭된 드라마였다. 도굴이 생계형 범죄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돈을 노린 욕망이 있으며, 문화재를 노린 재벌가의 뒤틀린 욕망도 있었다. 또한 책임 회피를 위한 떠넘기기도 있었고, 출세를 향한 가로채기도 있었다.
김태식
● 1967년 경북 김천 출생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학사, 선문대 고대사·고고학 석사
● 저서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직설 무령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