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에도 수십번씩 상황이 변하는 증권시장에서 지난 5년간 증시의 향방을 족집게처럼 예측한 김영익 대신증권 상무. 증권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가 최근 자신의 어려웠던 과거를 털어놓아 화제가 되고 있다. 초등학교만 나온 그가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유수의 증권사에서 초고속 승진 가도를 달린 비결, 그리고 ‘예측의 귀재’가 전망한 향후 5년간 증시의 방향을 들어봤다.
돈이 없어 중학교도 못 간 소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소년은 지금 한국의 내로라하는 ‘큰손’과 ‘돈줄’을 쥐락펴락하는 금융맨으로 성장했다.
교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친구들 앞에 서기가 창피해, 땀에 전 몸을 지게 밑에 숨긴 시골 소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소년은 지금 ‘팬레터’까지 받는 증권가 명강사가 되어 대중 앞에 선다.
검정고시를 거쳐 어렵사리 지방대학에 들어간 경제학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서강대 경제학 박사와 영국 옥스퍼드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을 마치고 대학원 학생들을 가르친다.
서른한 살에 입사한 늦깎이 증권맨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면서 아직 차장, 부장인 입사동기들을 제치고 임원자리에 올랐다. 그는 여전히 ‘최고령 현업 애널리스트’로 각종 상을 휩쓸고 있다.
삶이 꼬일 때 점집 찾듯
이 모두가 한 사람의 이야기다. 김영익(金永翊·48) 대신증권 리서치센터장(상무). 증권가에서 그는 정확한 예측력으로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유명인사다. 그런 그가 ‘증시 전망가 김영익’이 아니라 ‘인간 김영익’으로서 자신을 내보였다. 최근 ‘프로로 산다는 것’이라는 자전적인 책을 펴낸 것. 독자들은 ‘인간 김영익’의 역경 극복담에 박수를 보냈다. 인터넷 서점에는 이런 평들이 올랐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이나, 풍족하고 부유한 환경 속에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흘러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희망과 꿈을 부여해주는 책’(Kimkesung)
‘나는 돈이 없어서 이것밖에 안 된다, 가난한 집 자식은 성공하기 힘들다…이런 말들이 그에겐 핑계일 뿐이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을 시작하는 그를 보면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Touch_i)
‘주저앉은 내 자신을 격려해주고 싶을 때 다시 꺼내 읽고 싶은 책’(nirvana)
낯설었다. 5년여 동안 증권담당기자로 그를 만났지만, 그가 책 속에서 말한 ‘인간 김영익’을 만난 적은 없다. 그가 언제 돈이 없어 중학교 문턱에도 가지 못했다고 말했던가. 자신이 검정고시 출신이라고 말한 적이 있던가.
없다. 그의 배경에 대해 들은 것이라곤 ‘전라도 깡시골 출신’이라는 것 정도. 인터뷰 자리에서든, 사적인 식사 자리에서든,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할 땐 어눌했고 시장과 경제에 대해 말할 땐 유창했다. 여태껏 증시에서 그의 이미지는 역경을 이겨낸 ‘한 인간’보다는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최고의 프로’ 에 가까웠다.
증권가에서 그의 입지는 탄탄하다. 지난 6월 중순 ‘머니투데이’가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 증권기자 등 증시 전문가 2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그는 ‘한국 증시를 움직이는 파워 10인’ 중 7위로 꼽혔다. 1위는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2위는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였다.
증권가 인사로만 따지면 김 상무의 순위는 적립식 펀드 열풍의 주역인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다음이다. 200조원 가까운 자금을 움직이는 오성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9위), ‘증권사의 종가’ 대우증권 손복조 사장(10위)보다 순위가 높다.
그가 증시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의 배경엔 ‘정확한 장세 예측력’이 있다. 오죽하면 증권기자들이 그한테 붙인 별명이 ‘족집게 선생’이겠는가. 사람들이 삶이 꼬일 때 점집을 찾듯, 증권기자들은 장세가 어려울 때 김 상무를 찾는다.
‘족집게 선생’이 잠 못 이룬 밤
그가 증시 전망가로 그다지 도드라지지 못했던 2001년 9월, 그는 “곧 주가가 급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닷컴 붐이 붕괴된 후 떨어진 주가가 다시 오르던 때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며칠 뒤인 9월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로 무너지면서 주가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
테러 직후, 그가 이번엔 반등을 예측했다. 모두가 추가 테러 위협에 떨며 주식을 내던지듯 팔아대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얼마 후 코스피 지수는 470대에서 920대까지 오르며 급상승세를 탔다.
2004년 5월의 주가 하락과 2005년 주가 상승, 올해 2분기 말 주가 하락까지, 그는 주가의 큰 변화를 늘 먼저 예고하면서 시장의 신뢰를 쌓았다. 김 상무의 예측력은 하루에도 수백억원의 돈을 움직인다. 그의 전망에 따라 ‘큰손’인 기관투자자들이 주식, 채권을 샀다 팔았다 하기 때문이다.
그는 광고모델도 한다. 대신증권은 ‘부자 만들기 펀드’라는 적립식 상품 광고에 그를 모델로 내세웠다. 대신증권이 ‘김영익’이란 브랜드에 거는 자신감이 엿보인다. 투자자에게서 받는 신뢰에, 초고속 승진에, 인기 작가에, 광고모델에….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인다.
8월4일, 대신증권 리서치센터장실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런데 그의 뺨이 서너달 전 만났을 때보다 더 홀쭉하다. 귀밑 흰 머리카락도 전보다 더 눈에 띈다. 몸피도 꽤 준 듯하다.
“제가 지난해 말부터 2006년 2분기에는 주가가 크게 하락할 것이라고 했거든요. 근데 주가가 4월, 5월초까지 올랐잖아요. 그때 잠을 잘 못 자서 5kg 빠졌어요.”
2분기에 들어선 4월초, 코스피 지수가 1400대를 넘어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자 대신증권 리서치센터의 전화벨은 쉬지 않고 울려댔다. ‘대신증권의 증시 전망에 따라 주식을 매도했는데, 주가가 올라 손해를 봤다’는 항의 전화였다. 회사 영업담당자들은 “리서치센터가 부정적인 전망을 내놔서 영업을 못하겠다”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부하직원들이 회사 안팎의 불만에 응대하지 못해 애를 먹자 그는 “센터장이 다 시켰다고 해라, 애널리스트(기업분석가)들은 시장을 낙관했지만 센터장이 말을 안 듣더라고 둘러대라”고 지시했다. 할 수 있다면 자신이 혼자 다 책임지고 싶었다.
그런 날 밤이면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들었다가도 한두 시간 만에 저절로 눈이 ‘번쩍번쩍’ 뜨였다. 옆에서 자는 아내가 깨지 않게 조심했건만, 결국 아내도 그의 마음을 알아채고 말았다.
5월 중순, 결국 그의 예측대로 주가가 폭락하자 아내는 그의 휴대전화로 주가 ‘중계방송’을 했다. 나중엔 중학교 2학년인 아들 찬이까지 “주가가 떨어진다”며 거들었다.
“자다가도 일어나서 휴대전화로 미국 주가를 확인했어요. 어떤 땐 일부러 꺼놓고 자다가도 다시 켜서 확인하고…. 제 증시 인생에서, 그 한 달 보름이 제일 힘들었어요.”
‘스타’와 ‘사기꾼’
‘족집게 선생’에게도 잠 못 이루는 밤이 있다니. 지난 5년간 최고의 증시 예측력을 보여준 그가 아닌가. 최고의 증시 전망가가 그런 불안을 느끼다니? 과거, 증시 최고의 분석가 자리에 올랐던 어떤 이는 “내가 틀린 게 아니라 시장이 틀린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지금 그는 시장에서 거의 발언권을 잃었지만….
증시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남보다 한 발자국만 앞서 가는 사람이 이긴다.’ 너무 많이 앞서 가는 사람은 시장의 군중심리를 버텨내지 못해 소신을 꺾기 쉽다. 반대로 아주 조금 앞서 가는 사람들은 큰 변화에 대처할 시간을 충분히 얻지 못해 시장 대응에 실패하기 쉽다.
또 이런 말도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시장만큼만 해라.’ 증권맨이든 펀드매니저든 시장이 좋을 땐 좋은 만큼만, 나쁠 땐 나쁜 만큼만 실적을 내면 회사에서 해고당하지 않고 장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새벽 6시면 출근하는 김영익 상무는 오전 9시 전후 ‘파이낸셜 타임스’를 정독한다.
경제부터 정치, 사회, 자연재해까지 온갖 변수에 노출된 증시에서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건 신의 영역에 가깝다. 어떤 장세에서 정확한 예측력을 과시하던 베테랑이 다른 장세에선 전혀 힘을 못 쓰는 경우를 증권가에선 종종 볼 수 있다. 그렇게 증시의 주무대를 떠난 베테랑도 부지기수다.
그러기에 증시에서 김영익 상무의 존재감은 독특하다. 그는 자신의 소신을 과감히 피력한다. 그리고 증권가에선 이례적으로 무려 5년여 동안 자신의 예측력을 증명했다.
그 비결은 그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내면에선 ‘소신을 지키려는 고집’과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함’이 팽팽한 긴장을 자아낸다. 그 긴장이 그로 하여금 잠 못 들게 한다. 또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끊임없이 노력하게 만든다.
‘오래 울 수 있는 힘’
그 긴장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답은, 어느 하나도 쉽게 손에 넣은 적이 없던, 그의 과거에 있다.
“너, 공부하지 않을래?”
동네 형의 이 말 한마디가 열네 살 소년 김영익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책보 대신 나무지게를 지던 나무꾼이었다. 마을 훈장이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세가 기운 탓이었다. 장남이던 아버지는 두 동생을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보내느라 땅을 팔고도 빚을 졌다. 가족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 형편이라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동네 형을 따라 간 곳은 산남교회라는 작은 교회의 사택이었다. 그 교회 장로 아들과 그의 조카 등 친척들이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이들은 칠판도, 책상도 없는 그곳에서 2년간 중학교 과정을 공부했다. 정식 중학교는 아니었지만 교복도 만들어 입었다. 하지만 학력 인정은 받을 수 없었다.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던 소년 김영익이 검정고시 응시를 결심한 건 ‘축구경기 무산 사건’ 이후였다. 어느 날, 초등학교 때 그와 1, 2등을 다투던 친구가 교회학교로 찾아와 자기네 학교 학생들과 축구경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날부터 교회학교 아이들은 교회숙소에서 합숙훈련을 했다.
경기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다. 자기네 학교 교장선생이 “비공식 학교와의 축구 경기를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단다. 시골학교 아이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이날, 소년 김영익은 ‘정식 중학교 졸업 자격증’을 따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의 검정고시 인생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교과서를 달달 외워 고입 자격을 땄다. 최상위권 성적으로 함평농고에 갔다. 2학년 여름방학, 그는 대입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대입은 만만치 않았다. 검정고시에 합격한 해 전기로 고려대를, 후기로 성균관대를 지원했지만 둘 다 낙방했다. 2년 독학한 실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다음해 서울대 입학을 꿈꾸며 다시 예비고사를 봤다. 그러나 서울대에 갈 점수는 나오지 않았다.
고교 졸업 후 직장에 다니며 그를 뒷바라지하던 누나도 슬슬 지쳐갔다. 그런 상황에서 사립대에 지원하는 건 사치라는 걸 깨달았다. 그날 밤, 그와 누나는 많이 울었다.
다음날, 그는 전남대에 원서를 냈다. “오래 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끝내 승리한다는 것을 그때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고 그는 나중에 그날의 일을 회상한다.
“나를 그토록 충동질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가난을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결코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겪은 가난은 당시의 시대상에 비춰볼 때 대단하게 내세울 만한 남다른 불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 어린 시절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현재의 나보다 좀더 큰 사람이 되고자 했던 의지였던 것 같다. 내가 처한 현실에서 최선을 다 하되,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마지막 지점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은 증권 분석가로서의 지금 내 모습이며,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한결같은 내 자세이기도 하다.”(‘프로로 산다는 것’ 중에서)
증권분석가이자 증권사의 임원으로서, 그의 일상은 매우 빡빡하다. 술자리 때문에 새벽 1∼2시에 귀가하더라도 새벽 4시면 눈을 뜬다. 막 도착한 조간신문 2개를 읽는다. 군대에서 배운 맨손체조를 5분, 명상을 10여 분 한다. 아내가 밤에 식탁에 차려놓은 밥이나 빵을 데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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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상무의 기록에 도전하라
1988년 입사 이후 18년간 그의 출근 시각은 새벽 6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세계시장 동향 점검. 이때 그는 점검 내용을 e메일로 발송하는데, 이 e메일이 증권가에선 꽤 유명하다.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와 증권담당기자들이 그의 e메일을 보면서 일과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e메일엔 주로 간밤에 열린 미국 등 세계 증시 동향과 환율, 금리, 유가, 경기 등 주요 지표 추이가 담겨 있다.
오전 7시부터 일상의 페달은 가속도를 낸다. 오전 7시, 각종 기초 데이터를 컴퓨터에 입력한다. 오전 8시, 애널리스트와 영업담당자를 모아놓고 그날의 시황과 투자종목에 대해 토론한다. 오전 9시 전후, 영국 경제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를 정독한다. 오전 10시, 은행이나 보험사 등 금융기관에서 자산을 운용하는 펀드매니저들을 대상으로 강의와 설명회를 하러 나선다. 집에 돌아가는 때는 보통 저녁 8시에서 10시. 하루 14시간에서 16시간을 일하는 강행군이다.
이런 일정을 소화하는 비결로, 그는 ‘철인’ 수준의 건강과 ‘아침형 인간’ 습관을 꼽는다. 둘 다 가난 덕분이다. 집안이 가난해 나무하러 다니면서, 멀리 있는 교회학교를 다니기 위해 매일 산을 두 개씩 넘으면서 체력은 저절로 길러졌다. 집에 등불이 없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몸에 배 지금도 새벽 4시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가난하게 산 사람이 다 ‘아침형 인간’이나 ‘철인의 체력’을 가진 건 아니다. 어찌 보면 가난은 그의 배경이었을 뿐, 그의 현재를 일궈낸 것은 늘 노력하는 그의 천성이었으리라.
“이 분야에서는 노력하는 사람만이 말년 운이 좋아요(웃음). 애널리스트에게 공부하는 습관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한두 번 경제 변수나 주가를 맞혔다고 기관투자자들이 나를 베스트 이코노미스트나 스트래터지스트로 뽑아주지는 않습니다. 제가 우리나라에서 최고령 애널리스트로 버티는 힘은 딱 하나, 꾸준한 노력뿐이에요.”
그는 증권가의 ‘노력교’ 교주이자 전파자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더 노력해라’하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그의 존재 자체가 다른 ‘노력파’들을 자극한다. 대신증권 리서치센터에 애널리스트가 입사할 때마다 그 중 몇 명은 18년간 매일 새벽 6시에 출근하는 김 상무의 ‘기록’에 도전하곤 한다.
그때마다 그는 “아무개씨가 요즘 나보다 일찍 출근해요”라고 자랑한다. 그런 자극을 그는 즐긴다. 그가 그리 많지 않은 48세란 나이에 자전적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이유도 거기에 있다. 더 많은 이한테 자극제가 되자는 것.
“지난해 봄, 제가 상무로 승진했을 때, 한 신문사에서 제 이야기로 짧은 인터뷰 기사를 썼어요. 그걸 보고 출판사에서 자전적 이야기를 책으로 내자고 연락이 왔어요. 처음엔 내가 무슨 자서전이냐고 거절했는데, 어떤 분한테서 유제품 대여섯 박스와 함께 이런 편지가 왔어요.”
그는 서류파일에 끼워뒀던 신문 조각과 편지 한 통을 꺼내왔다. 신문 조각엔 ‘검정고시 출신 최고의 증권분석가 김영익 대신증권 상무…머리? 학벌? 90%가 노력이죠’라는 제목이 씌어 있었다. ‘야쿠르트’ 회사 로고가 찍힌 편지지에는 학생이 쓴 것처럼 또박또박 쓴 글씨체로 한 장 가득 사연이 들어 있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검정고시 출신으로 한국 증권계의 최고 증권분석사로 자리매김을 하신 김 상무님의 삶은 정말 노력과 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김 상무님의 당연하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그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항상 김 상무님의 건승과 건강을 기원하겠습니다. 밝은 내일을 만들어주시는 노고에 감사드리며 강서지점장 올림.”
격려전화도 잇달았다. 그런 격려가 김 상무에게 자신의 속을 다 털어놓을 용기를 줬다. 거기서 힘을 얻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서문에 썼듯 그는 자신보다 좋은 환경에 있지만 나보다 더 좋은 희망을 갖지 못해 힘겨워하는 누구에겐가 작은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고 싶었단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책 인세 수입 전액을 불우 이웃, 불우 청소년을 돕는 데에 기부하고 있다. 자세히 말하지 않지만, 책을 냈다 하면 1만부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는 필자이니 기부하는 금액이 얼추 1000만원은 넘을 것이다.
‘자신을 신뢰하는 힘’
미국 애리조나 사막에 호피(Hopi)라는 인디언족이 있다. 그 마을을 방문하는 외지인은 깜짝 놀라곤 한다. 사막의 모래언덕 아래에 씨를 심고 기우제를 지내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왔다.
비결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다. 비가 오면 물은 모래언덕 아래로 흘러들었고, 거기서 옥수수와 콩 따위 곡물이 싹을 틔웠다.
사막에 씨앗을 심을 용기가 없었다면, 언젠가는 비가 오리라는 신뢰가 없었다면, 호피 인디언은 사막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미래에도 통하는 원리다. 김 상무는 ‘프로로 산다는 것’에서 이렇게 말한다.
“용기는 자신을 신뢰하는 힘에서 나온다. 자신을 신뢰하게 되는 과정을 이겨내야 프로라는 수식을 당신의 이름 앞에 붙일 수 있다. 프로는 그래서 자신이 만들어낸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