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국무총리와 장관 후보자들이 대거 낙마했다. 후임 인선에도 비상이 걸렸다.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만한 도덕성과 전문성을 갖춘 인재 찾기가 난망한 탓이다. 우리보다 앞서 인사청문회를 시행 중인 미국에서는 장관뿐 아니라 차관보를 임명할 때도 국회 청문 절차를 밟는다. 도덕성 검증도 철저히 한다. 그러나 ‘죄송 청문회’가 벌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 연방하원의원을 지내며 이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김창준 전 공화당 의원이 한국과 미국 인사청문회 운용의 차이점을 들여다봤다. <편집자>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국무총리 및 일부 장관 후보자의 탈법과 부도덕성이 드러나자 야당은 부적격 후보 사퇴 촉구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대한민국 국회의 이번 인사청문회를 지켜보면서 나는 감탄했다. 미국의 청문회와 다를 게 없다. 무척 발전했다. 다시 말하면 ‘공직자의 비리와 거짓말을 끝까지 추적해 캐내는’ 나라로 바뀐 것이다. 한 치의 비리도 받아들이지 않는 국민들의 여론은 더욱 세련됐다. 가난에서 벗어난 대한민국 국민이 이젠 사회 정의를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예전 같으면 별것 아니라며 대충 눈감아주고 넘어갈 것으로 믿었을 대한민국 정치 지도자들은 이번 청문회를 통해 단단히 침 한 대를 맞았다.
이것은 민주정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선진국이 겪는 변화이기도 하다. 행정 각 부처의 장이 되려면 그에 합당한 자질을 갖춰야 한다. 그 자질에는 법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둘 다 포함된다. 법적인 문제는 오히려 간단하다. 최소한의 법도 지킬 줄 모르는 전과자가 장관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관건은 도덕적 자질이다. 무엇이 도덕적으로 문제 되는지는 그 나라의 문화와 전통에 따라 다소 다를 수 있다. 사실 장관 같은 행정수반은 국민 특히 젊은이가 존경하고 본받고 싶어하는 역할 모델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흠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선진국의 문화다. 이에 비춰보면 이젠 대한민국도 선진국이 된 셈이다.
미국인들은 전통적으로 거짓말을 가장 비난해왔다. 서부영화에서 ‘Liar(거짓말쟁이)’란 말은 가장 굴욕적인 비난이다. 이 말이 나오면 결국 권총싸움으로 끝난다. 검찰 조사에서 거짓말이 드러나면 끝장이다. 국회 증언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을 때 역시 ‘성스러운 국회에 대한 모욕죄’로 형사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정치판은 거짓말투성이였다. ‘아니면 그만’으로 넘어가고,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는 허리를 굽혀 사과하면 인정 많은 한국 국민은 지체 높은 분의 사과를 오히려 칭찬하며 받아들였다. 이젠 다르다. 너무 많이 속아왔고, 이 정도 정치적 쇼에 넘어가기엔 국민의 수준이 매우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뀐 한국 사회를 인식 못한 채 도덕적 문제는 사과 정도로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던 것이 이번에 화근이 됐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 부통령이던 테네시 주 출신 앨 고어는 부통령 재직 당시 45세의 대표적인 남부 젠틀맨형이었다. 고어는 그 깨끗한 이미지를 계속 유지해 결국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공천돼 연방 공직 경험이 없는 공화당의 조지 부시 텍사스 주지사와 대결하게 됐다. 처음에는 고어가 압도적으로 선두를 달렸고 모두가 그의 승리를 점쳤다. 하지만 막판에 악재가 생겼다. 연방정부 건물 안에서 정치자금 모금 활동을 못하게 돼 있는데 이를 깜박 잊고 백악관 집무실에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모금운동을 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가장 나쁜 잘못은 거짓말
기자회견 때 솔직한 사과를 기대했던 기자들에게 놀랍게도 공무원이 아닌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으니 법적 하자가 없다는 법이론으로 오히려 강의를 했다. 물론 법대 출신인 그의 이 법 해석이 틀린 건 아니지만 이런 말장난은 고어를 참신하다고 생각했던 국민에게 실망감을 안겼고 결국 그의 인기는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에 추락해버렸다. 당시 고어가 과오를 인정하는 솔직함을 보였더라면 대통령이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고어의 사례는 미국 국민이 얼마나 도덕성을 중시하고, 거짓말을 싫어하는지를 보여준다.
고어의 사례는 김태호 총리후보 낙마와 매우 닮았다. 김태호 후보는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과의 관련성에 대해 검찰조사 결과 아무 문제가 없어 검찰이 내사 종결했다는 간단한 답변만 되풀이했고, 각종 의혹을 덮기 위해 앞뒤가 안 맞는 거짓말로 일관했다. 경남도지사를 지낸 40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차기 대통령후보군에 거론되던 참신하고 깨끗한 이미지의 그는 이 여파로 그만 추락해버렸다. 도덕적 문제가 있을 경우 거짓말을 하거나 회피할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직분을 사양했어야 했다.
문제 드러나면 자진 사퇴
미국에서는 물의를 일으킨 장관후보가 스스로 사퇴하는 경우가 흔하다. 미국 의회에서 함께 일한 동료 의원 가운데 빌 리처드슨이 있다. 그는 민주당 소속이면서도 공화당원인 내게 와서 항상 농담을 건네고 인간성도 좋았다. 남미 계통 미남으로 한때 공화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탁월한 정치인이다. 클린턴 정부 때 유엔대사와 에너지부 장관도 지냈다. 그 뒤 뉴멕시코 주지사로 당선됐고 민주당 안에서는 ‘뜨는 별’로 평가받으며 2008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런 그를 상공장관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지역구 내 기업과의 유착 의혹이 불거지면서 리처드슨은 청문회 시작 전 스스로 후보직을 사퇴했다. 자신의 스캔들이 오바마 행정부에 누가 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미국 상원 민주당 원내총무를 지낸 거물 정치인 톰 대슐도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자진 사퇴했다. 대슐은 오바마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운 선거전략가이자 가까운 친구로, 오바마는 대통령 당선 직후인 2008년 12월11일 그를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하고 이를 상원 법사위에 제출했다. 대슐 자신이 20년간 상원의원으로 활동한 터라 쉽게 인준받을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뜻밖의 세금 문제가 튀어나왔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운전기사를 고용하면서 세금 신고를 전혀 안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대슐은 이를 안 뒤 벌금까지 합쳐 12만8000달러를 국세청에 납부하고 부랴부랴 무마하려 했지만 국민의 거센 비난을 인식한 뒤, 청문회를 불과 며칠 앞두고 사퇴했다. 그 역시 새로 출발하는 오바마 행정부에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사퇴 이유로 들었다. 오바마는 성명을 통해 “대슐 의원은 실수를 저질렀고 대슐 본인도 그 잘못을 인정했다. 그는 잘못을 변명하지 않았으며 나 역시 모든 것을 인정한다”며 그의 사표를 받아들였다.
한때 ‘뜨는 별’로 불리던 히스패닉계 여성 정치인 린다 차베스는 2001년 부시 대통령에 의해 노동부 장관에 지명됐다. 하지만 이후 남미 과테말라에서 온 불법 이민 여성을 가정부로 고용한 사실이 밝혀져 자진 사퇴했다. 줄리아니 뉴욕시장 재임 당시 뉴욕 경찰 커미셔너를 지낸 버나드 케릭도 2004년 부시 대통령에 의해 국토안보부 장관에 지명됐다가 불법 이민자 채용 경력이 드러난 뒤 자진 사퇴했다.
인준 요청 거부하는 의회의 힘
미국의 인사청문회는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한다. 미국 의회에는 상원 하원 양 의회가 있다. 하원의원은 전부 435명, 인구 약 62만명당 한 사람을 뽑는다. 그래서 435명에 62만명을 곱하면 미국의 전체 인구 수가 나온다. 지역구가 없는 의원은 없다. 상원은 인구가 많은 캘리포니아, 텍사스, 뉴욕, 일리노이 주 같은 몇 개 큰 주가 단합하면 의회를 쥐고 흔들 우려가 있어 생겨난 것이다. 크든 작든 무조건 한 주에 2명씩, 그래서 전부 100명이다. 알래스카와 델라웨어, 다코타 같은 작은 주들은 상원의원은 2명인 반면 하원의원은 1명이다. 반대로 캘리포니아같이 큰 주는 상원의원은 2명이지만 하원의원은 53명이나 된다. 하원은 지역구민을 대표하기 때문에 주민들의 호주머니 사정, 즉 예산을 먼저 심의하는 권한이 있고 상원은 인사 문제에 권한이 있다. 대통령은 단지 각료 후보자를 추천만 할 뿐, 임명은 법사위원회를 거쳐 상원에서 최종 결정한다.
1989년 미국 상원은 대통령이 추천한 장관 후보의 인준을 거부했다. 존 타워 국방장관 후보였다. 타워의 문제는 술을 과하게 마신다는 것과 여자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술을 마셔도 사고를 치지 않고 여자를 좋아한다고 해도 성추행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기에 아무런 법적 하자가 없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도덕성을 문제 삼고 결국 부결시켜버린 것이다. 인준에 동의만 해준다면 앞으로 일절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맹세도 동료 의원들은 믿지 않았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의회의 인준 부결에 유감의 뜻을 밝혔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만민국에선 아직까지는 아무리 폭탄주를 즐겨 마시고 여자를 좋아해도 이를 문제 삼지 않지만, 머지않아 장관이 되려면 술과 여자를 멀리해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이제 대한민국의 도덕 기준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청문회를 통해 한국 사회의 높은 도덕성 기준을 확실히 실감했고 이를 계기로 성큼 선진국으로 다가선 것이다.
앞으로는 청문회 제도 개선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현 제도 안에서는 도덕성 기준을 아무리 높게 해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인선의 원칙은 엄격하다.
첫째, 현역 의원이 장관이 되려면 의원직을 사퇴한 뒤 특별선거를 통해 후임자를 선출해 인수·인계를 한 후에야 청문회에 나간다. 미국에서는 현역 의원이 장관을 겸할 수 없다. 행정부를 감시하는 의회 의원이 동시에 행정기관의 장이 될 수 없다는 게 이유다. 동시에 단 한 시간도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원칙 때문이기도 하다.
“밀어붙여 될 일 아니다”
둘째, 청문회 이전에 면밀한 조사를 거쳐 도덕적인 흠이 조금이라도 발견되면 다른 후보를 찾는다.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조 베어드를 법무장관으로 내정하기로 하고 그에게 문제가 없나 사생활적인 면까지 면밀히 조사했다. 그 결과 불법 이민자로 추측되는 남미계 부부를 고용해 자동차 운전, 자녀 양육, 집안 청소를 맡겼다는 사실이 발각됐다. 베어드 지명 5일 만에 이를 철회한 클린턴은 서둘러 뉴욕 출신 여성판사 우드를 2차 내정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우드 판사 역시 똑같은 경우로 7년 전 불법 이민자를 보모로 고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클린턴은 즉시 다시 지명을 철회하고 다른 후보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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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사전에 야당지도자를 조용히 만나 의견을 듣는다. 야당의 강력한 반대가 있을 때는 대개 다른 후보를 물색한다.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6월 라니 기니어라는 여성 변호사 겸 법학교수를 인권담당 법무부 차관보로 지명했다. 차관보 정도는 별문제 없이 통과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기니어의 경우 인종차별 철폐법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고 지나치게 진보 성향이라는 이유로 공화당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지명을 철회했다. 1997년에는 오랫동안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을 지낸 앤터니 레이크를 CIA 국장 후보로 지명했다가, 의회에서 공화당이 그의 외교정책이 지나치게 사회주의적이고 그의 사상이 공산주의(Marxism)에 가깝다며 강력하게 비판하자 자진 사퇴시켰다.
넷째, 의회의 결정이 마지막이다. 의회의 반대에도 대통령이 고집을 부려 장관 임명을 강행할 수는 없다.
이런 기본원칙 때문에 미국에서는 장관직에 지명된 후보가 자진사퇴한 사례도 많지만 아예 장관직을 사양하는 경우가 더 많다. 본인에게 도덕적 문제가 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본인이다. 끝까지 밀어붙여보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의 풍토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