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류 경제학을 기반으로 한 기존 경제정책이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이는 ‘인간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주류 경제학의 한계 때문이다.
- 이를 보완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의사 결정 행동을 연구하는 행동경제학이다.
-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선거운동 단계부터 행동경제학 전문가를 자문단으로 영입해,
- 행동경제학을 정책 수립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 ‘행동경제학의 불모지’, 한국은 어떻게 변모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구매할까? 인간은 때론 비합리적인 기준으로 소비를 결심하기도 한다.
행동경제학이란 불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고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 규명하는 경제학이다. 행동경제학의 관점에서 볼 때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소비자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싶다. 행동경제학의 정책 적용 방안에 대해 보다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기를 바라며, 비전공자 입장에서 그 중요성을 논하고자 한다.
먼저 다음의 세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내 자녀가 더 똑똑해 보이는 이유
사례 1 김씨와 이씨는 같은 동네에서 비슷한 면적의 벼 재배농지를 소유하고 있다. 동네에 국책사업 관련 개발이 진행되면서, 이들은 공시지가를 기반으로 하는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책정된 토지 수용 보상금을 받게 됐다. 김씨는 큰 불만 없이 보상금을 받고 이주해 다른 곳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씨는 보상 금액이 너무 적다고 불만을 표시한 후 ‘예외적으로 더 보상을 해줄 수 없다’는 통지를 받자 빨간 띠를 두르고 투쟁의 길로 접어든다.
사례 2 TV를 새로 살 계획인 박씨는 매장 방문 전 180만원짜리 42인치 LED(발광다이오드) TV와 240만원짜리 47인치 LED TV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다른 요건보다 가격을 가장 중시했던 그는 매장 입구에 500만원 상당의 55인치 LED TV가 전시된 것을 보고, 그만 47인치 TV를 구매한다.
사례 3 서씨는 전형적인 위험 회피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투자를 할 때는 위험 분산을 위해 특정 종목 주식을 직거래하는 것보다 다양한 자산에 분산 투자하는 뮤추얼 펀드 구매를 선호한다. 그럼에도 서씨는 기금과 운용비용을 제외하면 기대 수익이 마이너스인 복권을 매주 즐겨 산다.
앞서 소개한 세 가지 경우에 해당되는 사람을 우리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기대 효용 이론(expected utility theory)’에 근간을 둔 주류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경제적 인간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갖고 합리적으로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의사 결정을 하는 인간을 뜻한다. 그렇다면 두 가지 유형 중 실제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형은 무엇일까?
당연히 앞의 사례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첫 번째 사례에서 이씨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왜 그가 ‘보상금액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인지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김씨는 자작농이 아니라 소작을 주던 토지 소유주였기 때문에 공시지가를 기반으로 한 보상 금액을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반면 이씨는 40년 이상 직접 농사를 지어온 자작농이었다. 농사일이 어렵다지만, 그는 농사에서 벌어들인 수입으로 세 명의 자식을 모두 잘 교육하고 결혼까지 시켰다. 이씨에게 이 농지는 40년 이상의 추억이 담긴 의미 깊은 땅이기 때문에, 그는 보상금액이 웬만큼 높지 않고는 굳이 평생을 같이한 땅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새로운 이주지와 대체 농지 역시 이씨의 성에 차지 않았다.
결국 같은 경제적 가치를 가진 농지이지만 개인의 상황에 따라 이들이 평가하는 농지의 가치는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보상금을 집행하는 토지 보상 제도는 60 평생을 촌부(村夫)로 살아온 이씨를 하루아침에 투사로 변화시켰다.
이와 같이 본인이 보유한 자산에 대해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상실하게 될 때 더 큰 보상을 요구하는 현상을 행동경제학에서는 ‘보유 효과(endowment effect)’라고 설명한다. 대부분의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이 더 잘생기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들이 비합리적이어서가 아니라 보유 효과가 크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사례에서 박씨가 완벽하고 합리적인 소비자라면, 그는 매장에 방문하기 전 생각한 대로 저렴한 42인치 LED TV를 구매해야 한다. 하지만 매장 입구에 전시된 55인치 TV를 본 뒤 그는 크기는 좀 작지만 가격은 많이 저렴한 47인치 TV로 마음을 바꾸게 된다. 이런 외부 요인에 따른 선호의 변화를 행동경제학에서는 ‘맥락 효과(contextual effect)’라고 정의한다. 비싼 물건을 잘 판매하는 매장은 고객이 비싼 상품을 선호하게 만드는 나름의 노하우가 쌓여 있다.
세 번째 사례에 등장하는 서씨는 위험을 때로는 회피하고 때로는 선호하는 ‘두 얼굴의 사나이’일까? 기대 효용 이론에서는 기본적으로 ‘위험 회피(risk aversion)’를 가정하기 때문에 분산 투자를 통해 위험을 줄이려는 사람은 절대로 복권과 같이 위험이 높은 상품을 구매해선 안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처럼 상반된 기준의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복권과 같이 당첨될 확률이 낮은 사안의 경우,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당첨될 확률을 주관적으로 더 높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기대수익률 역시 높아진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이 위험을 회피하면서도 복권을 구매하는 이유다.
행동경제학에서 이러한 현상을 ‘객관적 확률에 대한 가중치 함수(weighting function)’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전날 돼지꿈을 꾸거나 주위에 두 자리 숫자가 대여섯 개 보이면 왠지 복권이 사고 싶어지는 경우가 있다. 객관적인 복권 당첨 확률은 전혀 변화가 없지만 개인적인 경험에 따라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당첨 확률은 수십 배 아니 수백 배 높아진 것이다. 복권 구매로 인한 기대수익도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복권을 구매한다.
복권과 같이 이득이 예상되는 경우, 사람들은 위험 선호 경향을 보인다. 반대로 미국산 쇠고기 논란에서 볼 수 있듯 광우병 발생으로 인한 피해가 예상되는 경우, 문제 발생 확률이 아주 희박하더라도 사람들은 극단적인 위험 회피 경향을 보일 수 있다.
‘기대 이론’ VS ‘기대 효용 이론’
대니얼 카너먼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명예교수.(왼쪽) 리처드 탈러 시카고대 경영대 교수.(오른쪽)
1979년 행동경제학의 중심 이론인 ‘기대 이론(prospect theory)’을 발표한 대니얼 카너먼 (Daniel Kahneman)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명예교수와 고인이 된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가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면서 행동경제학은 본격적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넛지’의 공저자로 유명한 리처드 탈러 시카고대 경영대 교수, 조지 로웬스타인 카네기멜론대 심리학과 교수, 콜린 캐머러 캘리포니아 공대 심리학·뇌공학과 교수, ‘상식 밖의 경제학’의 저자인 댄 애리얼리 듀크대 경영대 교수 등이 경제학, 경영학, 뇌공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주요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대중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다양한 서적을 발간해 행동경제학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를 높였다. 특히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선거운동 단계부터 탈러 교수가 경제자문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행동경제학의 정책 적용 범위를 넓혀 가고 있다.
학계뿐만 아니라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기관에서도 행동경제학적 접근 방법을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통화 정책을 담당하는 연방준비위원회(Federal Reserve Board·FRB)는 FRB 시카고에 행동경제학연구소(Research center for Behavi-oral Economics)를 설치해 관련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2003년 6월 처음으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경제학 및 경제 정책에 대한 적용’이란 제목으로 행동경제학 관련 학술대회를 열었다. 2007년에는 이를 확대시켜 저축, 노동, 주택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개인의 의사 결정이 거시 경제 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FRB 시카고는 ‘이자율 변화가 거시 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전체 소비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개인의 정보관련 문제와 의사 결정에서 생기는 편향(bias)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공정 거래 및 소비자 보호 업무를 담당하는 연방거래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 에서도 2007년 ‘행동 경제학과 소비자 정책’이라는 제목 아래 대규모학술 대회를 개최했다. 이를 통해 주택담보대출, 통신 서비스, 신용카드 등 구체적인 산업에서 나타나는 소비자의 의사 결정 편향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정책 적용 방안을 주제로 토론했다.
이처럼 세계 경제학을 이끄는 미국은 이미 행동경제학에 대한 연구 수준도 높을 뿐 아니라 이를 금융, 산업, 노동 등 다양한 분야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요 국책 사업의 타당성 평가에 사용되는 ‘비용 편익 분석’의 경우, 기대 이론에서 설명하는 손실 회피 경향을 감안한다면 비용 부분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
인간의 행동 특성, 조직적 연구 필요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아직도 행동경제학적 접근을 생소하게 여기는 경향이 높다. 개별적인 학술 연구는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경제정책 수립에 큰 영향을 미치는 국책 연구원이나 주요 대학 경제학과에서는 행동경제학과 경제정책에 대한 수준 높은 세미나나 학회가 열리지 않고 있다. 그러다보니 여전히 기존 주류 경제학의 이론적 토대인 ‘기대 효용 이론’에 입각한 경제정책이 많이 수립되고 있다. 이들 정책은 그 실효성을 높이는 데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행동경제학적 접근법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그 연구 결과를 실제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어떤 활동이 필요할까? 먼저 학계와 주요 국책 연구원, 중앙은행 등이 중심이 돼 국내에서 진행되는 행동경제학 관련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이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국내 연구 역량과 기존 연구 내용을 정리하고 향후 연구 방향에 대한 논의도 진행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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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개인이 모이면 전체가 되는 것처럼 개인 수준의 다양한 자료를 모아서 기존 경제정책에 대한 개인의 행동 반응을 연구할 수 있는 패널 데이터를 구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강점인 전자결제 수단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신용카드 결제 데이터처럼 개인의 소비 행동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모아, 실제 다양한 경제정책이 소비자 혹은 기업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어떤 행동을 이끌어내는지 미시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물론 개인정보 보호라는 측면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겠지만, 선진국이 하기 힘든 방법을 우리가 시도할 때 선진국에 비해 더 효과가 높은 정책을 수립, 집행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행동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서 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실험을 진행할 수 있는 연구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행동 연구소(behavioral lab)가 바로 그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인지과학과 뇌 과학에 관련한 연구 기반을 다지고, 연구 인력을 확충하는 데 더 많이 투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