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朴의 통일과 국민통합 철학, DJ와 같아
- 갈등지수 OECD 2위, 사회적 갈등 비용 연 246조 원
- 대통합 위해 역지사지(易地思之), 구동존이(求同存異) 필요
- 국민대통합은 남북통일 인프라 닦는 일
중재와 설득의 달인
국민대통합위원회를 이끄는 한광옥(72) 위원장은 지난 대선을 앞두고 파격적 변신을 한 인물이다. 대표적인 ‘DJ맨’으로 30년 가까이 민주당을 이끌어왔던 그가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한 것. 여기서 더 나아가 박근혜 대통령의 가장 큰 정책이라 할 ‘국민대통합’ 실현을 진두지휘한다.
그의 변신에 대해 일부에서 말이 있었지만 그는 “국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또한 “박근혜 정부의 국민대통합 정책을 돕는 게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뜻을 계승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눈빛에서 ‘사심(私心)’보다는 ‘진심’이 느껴졌다.
한 위원장은 70대의 나이에도 혈색이나 피부가 무척 좋아 보였다. 특유의 온화한 미소와 부드러운 말투도 옛날 그대로였다. “건강해 보인다”고 하자 “얼마 전에 건강검진을 했는데, 신체 나이가 50대 중반으로 나왔다”며 웃었다.
▼ 특별한 건강 비결이 있다면요.
“새벽 4시30분쯤 일어나 한 시간 정도 운동을 합니다. 헬스장을 가거나 하는 건 아니고, 집에 작은 뜰이 있어서 거기서 해요. 20여 년 전부터 꾸준히 해요. 당 사무총장, 대변인을 할 때였는데, 거의 매일 밤 기자들을 상대하다보니 체력적으로 버티기가 힘들더군요. 살기 위해 운동을 시작한 거죠. 게다가 2010년 집사람이 폐암 3기에서 말기라는 판정을 받았어요.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집사람이 내게 ‘당신이 수간호사’라고 할 정도로 열심히 병간호를 했어요. 암환자는 특히 식이요법이 중요해서 철저히 관리해야 합니다. 저도 집사람 식단에 맞춰 2년 반 동안 음식을 먹다보니까 저절로 건강해지더군요.”
▼ 부인의 병세는 어떤가요.
“암은 완치란 게 없는 병이라 늘 조심하고 잘 관리해야 합니다. 이젠 혼자 움직일 만큼 많이 호전됐어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나와서 일할 수 있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열일 제쳐두고 옆에서 간호해야죠. 그 무엇보다도 집사람 건강이 우선이니까요.”
남다른 부부 금실을 자랑하는 한 위원장 부부는 대표적인 영호남 커플이다. 한 위원장은 전북 전주, 부인은 경남 진주가 고향이다. 또한 한 위원장은 1998년 제1기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노사문제를 풀어갔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초대 상임의장도 지냈다. 우리나라 헌정 사상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내는 동력이 된 ‘DJP연합’을 성사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협상과 타협, 중재와 설득의 달인이라 할 만하다. 국민대통합위원회를 이끌어갈 적임자란 평가를 듣는 이유다.
30년 만의 두 번째 선택
▼ 정치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서울대 문리대 60학번입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4·19를 맞았죠. 그 후 군정연장 반대시위를 하다 감옥에 가기도 하고, 3선 개헌 반대투쟁 등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1981년 11대 총선에 출마하게 됐죠.”
1982년 10월 그는 대정부 질의를 통해 ‘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김대중 석방’ ‘대통령 직선제’ ‘전두환 대통령의 민정당 총재직 사퇴’ ‘언론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 등을 주장한다. 하나같이 금기 사안이었다. 신문에서 내용을 쓰지도 못 하고 ‘한광옥 의원이 정치 현안에 대해 질의했다’고 한 줄로 짤막하게 보도했을 정도다. 그만큼 그의 대정부 질의는 정치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큰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DJ와 인연을 맺었다. 1985년 DJ와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자 대변인을 맡았다. 그 과정에 국가보안법 위반 및 국가모독이란 죄명으로 감옥에 가기도 했다. 이후 평화민주당, 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등 줄곧 DJ와 함께 했다. 총재 비서실장, 사무총장, 부총재, 최고위원을 거쳐 대통령비서실장으로 DJ를 보좌했다.
▼ 2002년 대선 전엔 새천년민주당 당 대표도 했는데요.
“2년 가까이 대통령비서실장을 하다 2001년 9월 당으로 돌아와 당 대표를 했어요. 당시 아무도 민주당이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추진한 게 정당 사상 최초로 국민경선제를 도입하는 거였어요. 당을 개혁하고 국민에게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믿었죠. 처음엔 반대가 엄청났어요. 별의별 험한 말이 다 나왔지만 그걸 다 참아내며 두 달 동안 설득했죠. 그걸 보며 강운태 의원이 ‘생불(生佛)’이란 별명을 붙여주더군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국민경선제의 혜택을 누린 게 노무현 전 대통령이죠.”
▼ 30년 넘게 몸담았던 민주당의 후보가 아닌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건 뜻밖이었습니다.
“정확히 2012년 10월 5일 지지 선언을 했어요. 저에겐 1982년 국회에서 DJ 석방 등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정부 질의를 하기로 결단한 후 30년 만의 중요한 선택이었죠. 평생 나라를 위해 일해온 정치인으로서 국가를 위해 뭔가 결단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후보로 나온 세 분 중에선 그래도 박 후보를 지지하는 게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길이라고 판단한 거죠.”
▼ 공개적으로 지지 선언을 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고민 많이 했죠. 당시 통일문제연구원이란 작은 사무실을 운영했는데, 새누리당 당사까지 거리가 불과 10m 정도였어요. 그런데 박 후보를 지원하려 당사까지 가는 게 참 힘들더군요. 민주당 대표까지 한 사람인데…. 열흘을 고민하다 결심한 거죠.”
동서화합 적임자
▼ 당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국민대통합위원장이어서 남을 자극하는 이야기는 삼가고, 긍정적인 이야기만 하려고 합니다. 정치라는 게 나보다는 당, 당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박 후보가 나라를 위해 일할 준비가 가장 잘돼 있었고, 나라를 위해서도 그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 지지 선언을 하기 전에 박근혜 후보를 직접 만났습니까.
“당연히 만났죠.”
▼ 김용환 의원과 함께 만난 건가요.
“김 의원은 과거 DJP연합을 할 때 제 협상 파트너였어요. 1년 넘게 목숨 건 외줄타기 협상을 하면서 신뢰가 쌓였죠. 저보다 10년 선배지만 정말 신사예요.”
▼ 김 의원의 권유가 있었나요?
“김 의원은 저와 박 후보의 가교 노릇을 했다고 해야죠. 박 후보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지지를 결정한 것은 순수한 제 의지였죠.”
▼ 만났을 때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요.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특히 통일 문제, 지역균형발전, 국민통합, 인사 문제 등을 강조하시더군요. 과거 DJ가 강조했던 점이었어요. DJ와 박근혜의 철학에 같은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지지의 바탕이 됐죠.”
▼ 박근혜 대통령과는 그때 처음 만난 건가요?
“대통령비서실장을 할 때 박정희기념관 설립을 추진하면서 만난 적이 있어요. 두 번째 만난 건 2004년 7월이었어요. 박 대통령이 당시 한나라당 대표로 취임하고 동교동으로 인사를 왔어요. 천막당사 시절이었죠. 그때 ‘제 아버지 시절에 받은 상처와 고통에 대해 딸로서 사과를 드린다’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과를 해서 DJ도 깜짝 놀랐어요. 박 대표가 돌아간 후 제게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돌아가신 분이 환생한 듯한 기분이었다. 사과의 말뿐 아니라 진지한 태도에 감동을 받았다’고요.”
한광옥 위원장은 DJ를 모신 것과 박 대통령을 돕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의 소명이라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비서실장 시절(왼쪽), 박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는 한 위원장.
▼ 지지 이유가 있다면요.
“그때 DJ가 박 대표에게 ‘내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동서화합이다. 그 적임자가 박 대표라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역사란 매듭을 풀 수 있을 때 풀어야지 평생 가져갈 수는 없어요. 동서화합, 국민대통합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DJ의 철학이나 박근혜의 철학이 그 점에선 같아요. 통일 문제도 그렇고. 제가 받은 느낌은 통일에 대한 박 대통령 의지가 상당히 강해요. 전 DJ를 모실 때나 지금 박 대통령을 모시는 거나 똑같은 자세예요. 내 나름대로 그 시대 할 일을 하는 거죠. 이 시대에 내가 할 일이 이게 아니겠나 생각해요.”
▼ 국민대통합위원장은 본인이 먼저 하고 싶다고 한 건가요?
“내가 먼저 말할 수 있었겠어요? 그분이 보시기에 내가 적임자라 판단했으니까 맡긴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선거운동본부에 ‘100% 국민대통합위’를 만든 데 이어 당선 후에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국민대통합위’를 신설했다. 그리고 지난해 7월 8일 대통령소속 자문기구인 국민대통합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소통과 공감
▼ 국민대통합위원회 일을 간단하게 설명한다면요.
“박 대통령은 국민대통합이야말로 이 시대에 우리가 꼭 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위원회는 우리 사회에 내재된 상처와 갈등을 치유하고, 공존과 상생의 문화를 정착시키며, 새로운 대한민국의 가치를 도출하기 위한 여러 정책과 사업에 대한 자문 등을 통해 국민대통합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구실을 하고자 합니다.”
▼ 출범한 지 7개월이 지났습니다.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위한 토대를 세우는 기간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기획정책’ ‘대한민국통합가치’ ‘갈등예방조정’ ‘국민소통’ 등 4개 분과위원회별로 무엇을 할지 조정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국민대통합 추진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중앙부처와 시·도, 외부 전문가, 시민단체, 종교계, 연구기관 등과의 네트워크도 구축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시민단체, 종교단체와의 소통 채널 마련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그 결과 중앙부처와 시·도에 국민통합정책책임관을 지정하고, 국민통합정책협의회를 구성했으며, 민관 연구기관이 참여하는 정책연구협의회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갈등관리포럼도 만들었습니다.”
▼ 대통합을 위한 국민제안공모도 실시했는데요.
“국민대통합을 이루는 데 우리의 일방적인 아이디어만으로 사업을 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많은 의견을 듣고 함께 계획을 세우려고 합니다. 지속적인 국민대통합 정책과제 발굴과 개선을 위해 정책별로 관계부처,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회의도 하고 국민제안공모를 하는 등 정책과제를 발굴해 국민대통합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 그동안 현장의 목소리도 많이 들었겠습니다.
“전국 17개 시·도를 돌며 지역소통 공감릴레이를 진행합니다. 경북, 충남, 강원, 전남에서 진행했으며, 앞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또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국민공감토론회와 공청회도 열었습니다. 앞으로 국민대통합 가치와 문화가 확산될 수 있도록 관련 정책 및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갈 계획입니다.”
▼ 지역을 돌며 느낀 점이 있다면요.
“중앙에서 생각하는 것과 지역의 생각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국민이 정부 정책을 잘못 이해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국민과 정부 사이에 소통이 잘 안되고 있다는 것이죠. 제가 노사정위원장을 할 때는 IMF 외환위기 상황이어서 어려움을 빨리 수습해야겠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통일 문제나 국가 정책에 대해 국민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요. 소통에 더 많이 신경을 써야겠고, 범국민적 차원의 홍보를 많이 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계층·지역·이념·세대 갈등 심각
‘국민대통합’은 누구나 공감하는 명제다. 하지만 현실에서 가능하냐는 회의론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 한 위원장은 “컵에 물이 절반쯤 남은 것을 보고 물이 반 컵밖에 없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직 반이나 남았다고 희망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희망을 갖고 대통합을 이루기 위해 내 지혜와 경륜을 보태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 우리 사회의 갈등이 어느 정도 심각한가요.
“우리나라 갈등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인종 갈등을 겪는 터키 다음으로 높습니다. 갈등으로 인해 지출되는 사회적 비용이 연간 82조~246조 원에 달한다는 전문 연구기관 보고서도 있습니다. 국민 갈등이 우리가 선진국대열로 올라서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역에서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있는 한 위원장. 그는 취임 후 전국을 돌며 민심을 듣고 있다.
“지난 50년간 우리 사회는 세계적으로도 유례 없는 초고속 성장을 했습니다. 1960년대 초만 해도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됐는데, 지금은 2만5000달러에 달합니다. 250배 이상 늘어난 거죠. 이처럼 압축성장을 하다보니 갈등도 압축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를 다 해소하려면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 어떤 갈등이 가장 심각하다고 보십니까.
“빈부격차로 인한 계층 갈등이 심합니다. 예전엔 계층 상승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고착화해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서울만 해도 강남과 강북의 차이가 심하지 않습니까. 지역 갈등 역시 선거 때만 되면 도드라지는 문제입니다. 이념 갈등도 역사를 보는 시각부터 달라 심화되고 있습니다. 고령화시대가 되면서 일자리를 놓고 세대 간 갈등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 4가지가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 정치권이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국민갈등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저도 국회의원을 해봤지만, 국회의원과 국민은 배와 물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국민 의식 수준에 따라 국회의원이 선택되는 것이죠. 이젠 국민 의식이 높아져 막말을 하거나 폭력을 사용한 정치인은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습니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국회도 더욱 자정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합리적인 공론의 장을 외면하고 선동적인 포퓰리즘으로 국민을 현혹하면 그 사회는 혼란이 가중돼 발전이 없습니다.”
▼ 얼마 전 여야 정치인들이 함께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했습니다.
“정치권의 일회성 이벤트로 그치지 않고 꾸준히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나아가서 일반인까지 다양하게 영호남이 화합하고 서로 교류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박 대통령의 불통이 국민통합을 가로막는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분 나름의 방식으로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현장을 자주 찾아다니고 있어요. 소통 방식이 이전의 남자 대통령들과 다르다보니 소통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닐까 싶어요. 시간이 지나면 대통령이 추구하는 소통의 진심을 국민도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작은 실천 큰 보람’ 운동
▼ 대통합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뭐라고 보십니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상대방 처지를 이해하고 생각해야지, 자기 처지에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구동존이(求同存異),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같은 점을 추구하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남을 존중하지 않으면 자기도 존중 못 받고, 남을 배려하지 않으면 자기도 배려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하는데 결국 인성교육, 의식개혁이 필요합니다. 이 일을 우리 위원회가 하려고 합니다.”
▼ 올해 주요 사업 계획이 있다면요.
“국민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실천 중심의 활동을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국민통합 기반 확충, 통합 가치 정립 및 상생 추구, 사회 갈등의 실효적 예방과 조정, 소통과 공감을 통한 통합 문화 확산 등을 추진하려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국민통합지표와 지수를 개발해서 국민통합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고, 국민의식조사도 지속적으로 실시할 겁니다. 또한 갈등이 발생하면 이를 해소하는 제도가 미흡합니다. 사회 갈등의 실효적 예방과 조정을 위한 법령과 제도를 개선해나갈 겁니다. 유럽의 선진국들이 하는 여러 가지 국민참여형 갈등관리기법을 분석해 한국적 공론화 모델을 도출하고 갈등해소방안을 만들려고 합니다.”
▼ 무엇보다 국민의 자발적 참여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국민과 함께하는 운동을 전개할 겁니다. 그 하나로 통합 가치 정립 및 상생 추구를 위해 국민이 함께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실천 큰 보람’ 운동을 진행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캠페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3월 12일 선포식을 합니다. 또한 소통·공감을 통한 통합 문화 확산을 위해 홈페이지, SNS 등을 활용해 ‘국민공감 릴레이’ 등의 캠페인도 전개하고, 지역 현장과 시민사회와의 소통도 계속할 계획입니다.”
그는 “국민이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인식이 퍼져나가면 대통합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미국은 다인종 국가이고, 남북전쟁이란 내전을 치러 지역 갈등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9·11테러가 나자 온 국민이 하나가 돼 위기를 잘 극복했습니다. 우리도 IMF 외환위기 때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건 땐 자원봉사자 물결이 넘쳤습니다. 그런 긍정적인 문화를 확산하는 게 필요합니다. 개인도 중요하지만 국가가 있고나서 개인이 있다는 걸 공감해야 합니다.”
▼ ‘우리는 하나’라는 공감이 생기려면 무엇보다 역사인식, 현실인식이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역사교과서, 천안함 사건에서 보듯 상호불신이 팽배해 있습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인터넷과 SNS 등에서 유언비어가 난무해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번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면 그로 인해 두고두고 갈등을 겪습니다. 정확한 사실을 국민에게 바로 알려야 하고, 건전한 토론 문화를 정착시키는 게 시급합니다. 역사교과서 문제는, 제 개인적인 생각은 통일된 교과서를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특정 집단 주도로 만들면 안 되고 중립적인 인사들로 편찬위를 구성해 객관적으로 집필해야 합니다. 역사에 특정 이념을 개입시키지 않고 공정한 역사를 가르쳐야 합니다.”
해불양수(海不讓水)
▼ 통합을 위해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다보면 불법에도 관용을 베풀어야 하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요.
“관용의 테두리 안에서 실수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지, 불법에 관용을 베풀자는 건 아닙니다.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지만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엄격하게 제재합니다. 불법은 남에게 피해를 주니까요. 박 대통령도 말했듯이 우리도 이제까지의 잘못된 관습, 비정상이 당연하게 정상인 것처럼 여겨지는 잘못된 관행은 고쳐야 합니다. 한국적 가치관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 대통합의 원칙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해불양수(海不讓水)란 말이 있습니다. 바다는 민물, 더러운 물 등 다 받아들이지만 바다 고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국민대통합을 추진해야 합니다. 대통합은 둘을 하나로 합치는 게 아닙니다. 오케스트라는 악기마다 고유의 자기 소리를 냅니다. 하지만 이 소리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냅니다. 그게 진정한 대통합이라고 생각합니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대통합위원장이란 자리는 제가 그동안 축적한 경험을 유용하게 활용하라고 국가가 부여한 소임이라 생각합니다. 후배들에게 지혜롭고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어려울 때 병풍 노릇을 하고 싶습니다. 특히 국민대통합은 앞으로 우리가 이뤄야 할 최대 과제인 남북통일을 이루는 인프라이자 기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옥돌을 갈고닦아 빛을 내는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심정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 박근혜 정부가 성공하는 데 일조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