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핵은 외투 아닌 심장…햇볕, 강풍으론 못 도려내
- 미국에 북핵은 ‘고슴도치의 털’ 같은 것
- ‘중국의 북한’이 ‘미국의 이스라엘’보다 중요성 커
- 中, 해양세력 강해질 때마다 한반도 군사 개입
2007년 늦가을 유엔, 세계무역기구(WTO), 국제연합인권기구(OHCHR) 등이 자리한 제네바에서 업무차 만난 스위스 출신 국제적십자사연맹(IFRC) 여성 직원은 “북한은 살기에 불편하지만 심성이 착한 이들이 사는 나라”라고 했다. 그는 “북한에서 먹은 단감이 그때까지 먹어본 과일 중 가장 맛있었다”면서 “한국에도 여러 번 가봤지만 단감을 못 먹어봤는데 한국에도 맛있는 단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한국인과 북한인의 차이는 한국인과 스위스인의 차이보다 훨씬 클 것이라고 했다. 북한 정권의 행태가 어떠한지, 핵무장이 한국에 어떤 위협을 주는지 설명해줬으나 그는 북한 정권이 아닌 주민만 본다면서 북한이 괜찮은 나라라는 시각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작곡가 고(故) 윤이상의 권유로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난 ‘생의 한가운데(Mitte des Lebens)’의 저자 루이제 린저도 2002년 사망할 때까지 비슷한 시각을 고수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북한은 가난하지만, 선량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동양의 신비한 나라다. 북한처럼 정권과 일반 주민을 구분해 봐야 하는 나라는 드문 것 같다.
“우리에게도 核우산을…”
객관적 시각을 가졌다면 누구나 북한을 빈곤한 ‘종교적 전제왕조국가’로 볼 것이다. 북한은, 김정은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백두혈통’이 공산주의와 함께 유교, 기독교 등에서 발췌 · 혼합한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정보 통제 등을 악용해 생존하는 최악의 국가 가운데 하나다.
2012년 가을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출장 때 옌지(延吉)시의 숙소에서 북한조선중앙TV를 봤다. 자강도 강계시에서 열린 김일성 · 김정일 동상 제막식이 방송됐는데, 행사 사회자의 말이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 교회에서 하는 설교와 너무나 흡사한 데 놀랐다. 김일성 · 김정일을 하나님 · 예수님으로 대체하면 상당수 한국 교회 근본주의 목사의 설교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기독교를 믿는 일부 중국동포도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논리 전개가 매우 비슷한 데 놀란다고 한다.
북한 정권의 최소 목표는 체제 유지, 최대 목표는 핵무기와 미사일을 이용해 외부세력의 간섭을 배제하고 북한 주도로 한반도를 통일하는 것이다. 물론 북한은 국제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자신들이 주도하는 통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1990년대 초 냉전 종식 이후 외톨이가 된 북한은 거의 유일한 지원국으로 남은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에 몰두했다. 한반도 남쪽에 동족 국가 한국을 적으로 뒀기에 대폭 개방을 하면 한국의 실정을 파악한 주민이 봉기할 수 있어 쉽게 개방할 수도 없다. 결국 3대 세습이라는 공산(共産) 전제왕정으로 이행했다.
북한의 안정을 바라는 중국의 지원이 계속되지만, 과도한 대(對)중국 의존이 정권 안정을 저해한다는 사실을 파악한 평양은 핵무기 개발과 함께 러시아와의 관계 증진은 물론 미국, 일본, 한국과의 관계 개선도 시도했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2007년 3월 뉴욕에서 “북미관계가 정상화하면 북한이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선희 외무성 북미국 부국장은 2012년 3월 미국 시라큐스대 주최 세미나에서 “미국이 한국에 핵우산을 씌워주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핵우산을 씌워주면 핵무기를 개발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사망한 김용순 노동당 비서는 1992년 개최된 북 · 미 고위급 회담에서 북 · 미 간 동맹을 제안하기도 했다.
북한은 사방이 적으로 에워싸인 고립무원의 나라다. 미국을 끌어들여서라도 체제를 유지하려 한 것 또한 그래서다. 지난해 10월 4일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폐막식 때 황병서(북한군 총정치국장)와 최룡해(노동당 비서)를 한국에 파견하는 등 성동격서 방식으로 중국에 메시지를 전한 적도 있다. 중국은 황병서 등의 인천 방문 후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수많은 정보원과 외교관을 동원했다.
중국도 北 ‘지정학적 숙적’
북한의 대(對)중국 불신은 오랜 역사를 가졌다. 단적인 예가 1956년 개최된 북한 노동당 전당대회. 당시 김일성은 친(親)중국 연안파(延安派) 세력 강화와 중국의 간섭으로 인해 정권 상실 위기에 처했다. 그때 전당대회장에서 권총을 빼들고 연안파 지도자 윤공흠과 최창익을 위협한 이가 최룡해의 아버지인 헤이룽장성 지둥(鷄東)현 출신 최현이다.
2013년 봄 베이징의 한 호텔에서 한국 언론의 베이징 특파원과 반농담조로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쓰면 최룡해도 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지둥현의 조선족 동포들과 함께 최현 · 최룡해 부자의 공덕비와 동상을 세우면 의심 많은 김정은이 최룡해를 믿지 못해 제거할 것이라는 얘기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해 중국을 견제하는 등의 방식으로 동북아시아 정치의 판을 바꾸려는 뜻도 가졌다. 미 · 중 등 강대국 정치의 희생양이 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다 인구 약 2배, 국내총생산(GDP) 50배가 넘는 한국에 흡수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심도 지녔다.
옛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멸망의 위기에 처한 북한은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이후 생존을 고민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북한이 적(敵)으로 상정한 나라에는 한국, 미국, 일본 외에 지정학적 숙적 중국도 포함된다.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나라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지만 직접적 위협은 한국, 중장기적 위협은 중국으로부터 올 것이라고 평양은 여긴다.
김정일 말기에 동양 최대 규모인 무산 철광 등을 담보로 중국으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려다 실패해 평양의 일개 구역 실무자로 좌천당한 바 있는 이수용 외무상은 중국에 대한 의심과 혐오감이 매우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 · 중 경제협력 강화는 북한의 개혁 · 개방을 유도한다는 긍정적 측면, 그리고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 및 북한의 대(對)중국 의존도를 심화하는 부정적 측면을 아울러 가졌다.
동아시아-서태평양 지역에서 미 · 중 간 전략적 이해관계의 불일치는 북한의 생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적대적 외부 환경에 둘러싸인 채 경제난을 겪는 북한이 보통 국가였다면 수십 번 붕괴했을 것이다.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에 집중해 생존하고 있다. 정권 생존을 위해서라면 외부 세계가 평양을 완전히 봉쇄하더라도 핵무장을 강화하려 들 것이다. 김정은을 포함한 지도부는 핵무기를 포기하면 정권에 대한 내부 구성원들의 신뢰조차 상실해 리비아 카다피 정권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줄다리기 외교’로 생존
사면초가의 북한 지도부는 핵무장을 통해 안보를 확고히 한 다음 경제 발전을 이뤄낼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이른바 핵 · 경제 병진(竝進)정책을 추구하는 까닭이다. 북한은 미 · 중 간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이용해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베이징으로부터 정치 · 경제적 지원도 받는다.
그러면서 평양은 대(對)중국 레버리지를 확보하고자 러시아와 미국뿐 아니라 일본에도 접근한다. 북 · 일관계가 정상화하면 연간 교역 규모가 2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며 일본의 대(對)북한 유 · 무상 원조가 연 17억 달러, 북한인의 일본 방문은 연 1만5000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북한은 앞으로도 미 · 중 간, 일본을 포함 여타 관련국 간 전략적 이해관계의 차이를 이용해 생존을 도모할 것이다.
중국은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때 북 · 중 접경지역에 최신형 전투기를 배치한 후 즉각 투입 가능한 지상군 병력 30만 명을 포진했다. 베이징 외교가에도 비상이 걸렸다. 김정일 없는 북한이 안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 정변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많은 이가 관심을 기울였다. 중국이 어떻게 나올지도 베이징 외교가 인사들의 큰 관심거리였다.
중국은 김정일 사망 발표일인 2011년 12월 19일 베이징 주재 한 · 미 · 일 · 러 4개국 대사를 초치해 북한의 안정을 해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튿날 후진타오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원자바오 당시 국무원 총리 등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주(駐)중국 북한대사관에 설치된 김정일 빈소를 방문했다. 이를 통해 중국은 대내외에 김정은 정권과 북한의 안정을 지지한다는 뜻을 명확히 표명했다.
미군이 北 정권 연장?
중국은 이렇듯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를 매우 높게 본다. 미군의 동아시아 주둔 등 동북아시아에 대한 워싱턴의 지속적 영향력은 중국으로 하여금 베이징 외곽에 위치한 만주와 보하이만(渤海灣)을 지켜주는 참호 격인 북한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동아시아-서태평양 주둔 미군은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을 지켜줄 뿐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북한 정권의 생명을 연장해 주는 셈이다.
가까이는 연평도 포격 도발, 멀리는 6 · 25전쟁, 청일전쟁, 임진왜란까지 해양세력이나 대륙세력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6 · 25전쟁 때도 현대 무기로 무장한 미군이 해 · 공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중국 인민해방군을 패퇴시키지 못했다. 그만큼 한반도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는 사활의 땅이다.
북한은 지리적으로 한국과 중국, 러시아에 에워싸였다. 평양이 느끼는 안보 불안은 한국 못지않을 것이다. 경제난 또한 20년 넘게 지속됐다. 고립무원의 평양이 여유 부릴 공간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북한은 1960~1980년대 중 · 소 사이에서 줄다리기 외교와 1990년대 이후 미국을 상대로 핵무기 외교를 하면서 강대국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경험으로 익힌 듯하다. 북한은 1960년대 중 · 소 분쟁 때 소련 해군 함정을 서해안 항구 남포에 기항하게 해 중국을 견제했다. 평양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을 통해 ‘약한 고리’인 한국을 우선 흔들고, 이를 통해 미 · 중 · 일도 뒤흔드는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체스판’을 유리하게 짜려 한다. 3차례나 핵실험을 강행하고 핵전쟁 불사를 외친 데서 보듯 한국이 대북 강경책을 택하건, 온건책을 택하건 평양은 정권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지만을 기준으로 행보할 것이다.
북한 경제는 군수 분야를 제외하면 사실상 붕괴했다. 생필품 대부분을 중국에서 수입해야 한다. 주요 상거래에선 북한 원화가 아닌 중국 위안화, 미국 달러화가 주로 사용된다. 전기와 석유를 포함한 에너지와 식량 부족은 만성적이다. 그럼에도 시장화가 진행된다. 북한은 최근 경제난 극복을 위해 가족농 도입 등 시장화와 함께 중국을 비롯한 외부 세계와의 경제협력을 추구해왔다. 전국에 3000개 넘는 장마당이 들어섰으며 평양에는 24시간 문을 열고 주문한 물건을 배달해주는 상점도 생겨났다. 외부 세계와의 전자상거래도 추진한다.
낚시꾼이 고기 낚듯
북한은 한국과의 경제협력이 일정 범위 이상으로 확대되면 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 협력에는 소극적일 것이다. 2013년 상반기의 개성공단 사태가 보여주듯 체제 안보 우려가 생기면 남북 경협도 속도를 조절할 것이다. 우리는 긴 호흡으로 인내하고 또 인내함으로써 낚시꾼이 물고기를 낚듯 북한이 우리가 던진 미끼를 물게끔 상황을 조성해가야 한다.
1970~1980년대 동독은 서독이 추구하는 포용적 동방정책(Ostpolitik)의 위험성을 잘 알았으나 정권 유지를 위해서라도 서독의 경제지원이 필요했던 터라 그것에 응할 수밖에 없었고, 소련을 포함한 사회주의권 해체라는 국제 정세의 급변 와중에 결국 서독에 흡수당했다. 독일 통일 당시 서독 총리 헬무트 콜을 배출한 보수우파 기민당 · 기사당 연합은 진보좌파 사민당 출신 빌리 브란트 전 총리가 1960년대 말 입안한 동방정책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통독(統獨)의 길을 닦았다.
북한이 3차례 핵실험에 나서고 미사일 발사를 수시로 감행했는데도 한국은 물론 미 · 중도 평양 정권의 생존에 결정적 타격을 주는 제재는 취하지 않았다. 핵무장을 추구하던 이란에 대해 그러했듯 미국은 독자적으로 강력한 대북 제재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한다면 북한은 붕괴 위기에 처할 수 있다.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공 · 사기업이 미국의 제재가 무서워 북한과의 거래를 끊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조처를 고려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선지, 대북 제재가 전쟁 등 한반도의 불안을 야기할 소지를 우려해선지, 북한이 계속 말썽거리로 남아 있는 게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선지 북한이 붕괴할 정도의 제재는 가하지 않았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반도 문제의 최대주주이자 G2인 미 · 중이 북한에 부여하는 전략적 가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2012년 12월 미 · 중 양국 유엔 주재 대사가 북한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의 성격을 놓고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설전을 벌였을 만큼 두 나라는 북한 문제와 관련해 이해관계를 달리한다.
‘햇볕정책’ 둘러싼 소모전
북한 권력집단에게 핵무기는 ‘햇볕’ 혹은 ‘강풍’으로는 벗길 수 없는, 외투가 아닌 심장 그 자체다. 핵무기는 심장이기에 햇볕정책이나 봉쇄정책, 그 어느 것으로도 쉽게 도려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햇볕정책’이 맞다, 아니다를 놓고 끊임없는 소모전을 벌인다. 독일의 진보좌파, 보수우파가 국익 앞에서 의견을 모았듯, 우리도 핵을 포함한 북한 문제 해결 방안을 두고 진보좌파, 보수우파가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분열해선 안 된다.
핵무기를 포함한 북한 문제는 미 · 중이 타협하지 않는 한 해결되기 어렵다. 아직 북한을 전략적 자산으로 보는 베이징이 산소호흡기 노릇을 계속하는 한 북한은 핵무기와 함께 생존을 지속해갈 것이다. 북한은 이처럼 자체 생존동력과 함께 중국의 지원도 있는 터라 고사(枯死)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또한 동아시아의 현상 유지를 선호한다. ‘상승 대국’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화하는 ‘기존 대국’ 미국으로서는 ‘고슴도치의 털’과 같은 북핵 문제 해결에 팔을 걷어붙일 이유가 없다.
우리는 미 · 중 양국이 전략적 이해관계 상충 등으로 북한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지 않으려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스라엘군의 어느 장성은 “외국군이 주둔하는 나라의 국민은 정신이 부패한다”고 했다. 생명과 직결된 안보를 남에게 맡기는 나라는 언젠가 당하게 돼 있다. 북핵 문제에 가장 ‘목마른’ 나라는 우리다.
중국 지도부는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 등의 역사를 철저히 연구해 국가정책 수립 때 참고한다. 춘추시대 초강대국 진(晋)나라 헌공(獻公)은 이웃 소국 우(虞)나라 군주에게 괵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군대를 보내고자 하니 길을 빌려줄 것을 요구했다. 길을 빌려주면 많은 금은보화를 보내겠다는 약속도 했다. 이에 넘어간 우나라 군주는 진나라의 의도를 간파한 재상 궁지기의 반대와 괵나라의 거듭된 간청에도 길을 열어줬다. 괵나라를 점령한 진나라 군대는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도 멸망시켰다. 중국에 북한은 해양세력을 견제하는 입술과 같은 존재다.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이 한반도, 특히 북한 지역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초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한강 이북을 점령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1950년 6월 남침 이후 남진을 계속하던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발이 묶이는 등 패전의 기미를 보이자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중국 총리는 유엔에 “중국은 이웃 나라 조선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우려하며, 조선반도 문제에 개입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30년 내전에서 승리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다.
해양-대륙세력 각축
미군이 주도하는 연합군이 38선을 돌파하고, 평양-원산 선을 넘어 압록강-두만강 유역까지 거세게 몰아붙이자 인민지원군(의용군)을 빙자한 30만여 명의 중공군이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넜다. 적유령산맥과 개마고원 골짜기 깊숙이 매복한 중공군은 북진하던 연합군을 기습공격해 대파하고 12월 5일 평양을 점령했으며,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 이남까지 밀고 내려왔다. 중공군이 금강 방어선까지 연합군을 밀어붙였다면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해 적화통일이 이뤄졌을 공산이 크다.
2015년 8월 현재도 중국은 △한반도의 분단은 미 · 소의 책임이며 △6 · 25전쟁은 기본적으로 내전이고 △민족 내부 문제에 외세가 개입할 권리는 없으며 △항미원조(抗美援朝), 즉 인민의용군의 한반도 파병은 미국의 위협하에 중국의 생존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청나라는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끊임없는 침략과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 등 농민반란으로 인해 멸망의 위기에 처했는데도 1894년 6월 일본에 맞서 대군을 조선에 파병했다. 청군은 평양을 비롯한 육상은 물론 압록강 하구와 웨이하이(威海) 앞바다 등 해상에서 일본군과 맞붙어 연전연패했다. 그 결과 일본에 타이완과 랴오둥 반도를 할양하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도 상실했다. 일본은 러 · 독 · 불 3국 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되돌려줬으나,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해 지금의 다롄(大連)시 일대인 관동주를 빼앗았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는 몽골족의 거듭된 침공, 누르하치가 이끄는 만주족의 흥기(興起), 농민반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4만여 명의 육군과 5000여 명의 수군을 조선에 파병했다. 1598년 종전 무렵에는 14만 명 이상의 대군을 조선에 주둔시켰다.
역대 중국 정권은 이렇듯 한반도가 해양세력의 영향력 아래 들어갈 만한 상황마다 국력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벗어난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다. 중국이 한반도에 부여하는 전략적 가치는 미국이 한반도에 부여하는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크다 하겠다. 중국에 북한은, 미국이 이스라엘이나 멕시코를 생각하는 것 이상의 비중을 지녔다.
‘아직 망하면 안 되는 나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7월 16~18일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허룽시 방문과 백두산 등정에 이어 7월 27일에는 만주의 중심도시 선양(瀋陽)을 방문했다. 허룽시가 고향인 중국동포에 따르면 시진핑은 호룽시 방문 때 수행한 중앙과 지방 공산당 간부에게 지린성 등 지방정부 차원에서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중국은 한편으로는 유엔의 대북 제재를 이행하는 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의 숨통을 틔워주려 한다. 북한의 핵무기는 허용할 수 없되, ‘아직 망하지는 말아야 할 나라’라고 여기는 것이다.
2013년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과 그해 12월 자행된 장성택 처형 이후 서방 국가들은 중국의 대북 정책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한국의 일부 언론은 중국이 한반도의 안정보다 ‘(한반도가 아닌) 북한의 비핵화’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해나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인 상당수가 북한에 대해 실망감을 넘어 혐오감을 갖는다. 많은 중국인이 북한의 세습체제를 비웃는다. 3차 핵실험과 장성택 처형은 북한을 향한 중국인의 마음을 더 멀어지게 했다. 일부 지식인은 자국의 대북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 정부로서도 장성택을 처형하면서 나선항 등 토지 임대차 문제와 자원 헐값 수출 문제 등을 제기한 김정은 정권을 곱게 볼 리 없다. 그럼에도 외교부 훙레이 대변인은 “이것(장성택 처형)은 조선의 내정”이라고 선을 그었다.
북한은 면적 12.3만㎢, 인구 2400만 명, GDP 240억 달러의 소국이지만 중국 처지에선 육지로는 만주, 바다로는 보하이만과 연접하고, 숙적 일본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동해로의 출구 격이라 요충지 중의 요충지다. 나선항에서 일본 열도를 향해 컴퍼스로 원을 그리면 북으로는 홋카이도, 남으로는 규슈까지 동해에 인접한 일본의 모든 도시가 미사일 사정권에 들어간다. 미 · 일에 비해 해 · 공군력이 약한 중국 처지에서 육지로 연결된 북한의 군사전략적 가치는 상당하다.
北 · 中 동상이몽
한국과 미국 등의 외교관, 군 장성, 학자 중 일부가 장성택 처형 후 중국이 북한을 전략적 자산(assets)이라기보다는 부담(liability)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이는 중국이라는 큰 호수의 표면에 이는 잔물결만 보고, 심층(深層)도 그럴 것이라고 오해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중국의 진심은 국가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러시아가 북한을 포기한 후 영향력을 상실한 사례에서 얻은 교훈’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극찬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골칫거리이기는 하지만 국가안보에 꼭 필요하기에 중국이 북한을 중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 역시 중국을 믿지 않지만 정권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기에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한다. 북 · 중 관계에서 공산혁명동지라는 이념적 유대는 껍데기만 남은 지 오래다. 남아 있는 것은, 믿을 수 없고 밉살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전략적 이해관계 불일치 아래의 일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