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헛헛함 벗고 소녀 감성으로 귀환
덕질은 숙제 마친 나를 위한 보상
인간의 3단계 욕구 채워주는 팬덤 활동
심리학자인 김은주 작가는 “트로트 가수의 덕후가 된 엄마나 아내를 비난하지 말고 기꺼이 응원해 주라”고 조언했다. [지호영 기자]
신간 ‘영웅앓이’(박영사)를 쓴 저자로 기자와 마주한 심리학자 김은주 작가는 임영웅을 언급할 때마다 양 볼이 발그레해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랬다. 김 작가도 지금 임영웅에 빠져 있다. 임영웅은 2020년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 ‘미스터트롯’에서 진(眞)으로 뽑힌 후 전국적으로 ‘영웅앓이’ 신드롬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트로트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김 작가가 자발적 임영웅 덕후가 된 것은 우연이었다.
“부친이 5년 이상 병상에 누워 계셨어요. 어느 집이나 가족사가 있듯이 저희 또한 자랑스럽지 못한 일이 있어서 부모님이 서로 원수처럼 지냈죠. 부친의 말년이 굉장히 외롭고 쓸쓸했어요. 그 바람에 제가 5년 동안 아버지를 돌봤는데 4월 26일 세상을 떠나셨어요. 병간호하면서 정이 든다고 하잖아요. 생전에 아버지에게 신경질도 많이 내고 간병하기 힘들다고 투정도 했는데 막상 떠나시고 나니까 가슴 한구석이 없어지는 듯한 공허함과 슬픔과 죄책감이 몰려왔어요. 굉장히 힘들었는데 그때 우연히 ‘영웅 님’(임영웅)의 노래를 들으면서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후부터 ‘미스터트롯’은 물론이고 영웅 님이 출연한 방송을 몇 달 동안 찾아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위안을 얻었어요. 마음을 공부하는 사람임에도 스스로 치유하지 못한 상처가 음악을 들으면서 아무는 게 정말 놀라웠어요.”
김 작가는 임영웅이 자신에게 준 특별한 경험과 위안에 보답하고 싶었다고 한다. 글 쓰는 재주밖에 없으니 글로 고마움을 표현하자며 쓰기 시작한 원고는 한 권의 책으로 태어났다. 임영웅에게 헌정하는 마음으로 썼다는 ‘영웅앓이’에는 임영웅의 노래로 위로받은 중년의 심리 해석과 트로트가 핫한 이유, 팬덤의 사회적 심리 등이 담겼다. 타깃은 트로트 팬덤을 이끄는 5060세대 여성이다.
임영웅은 떡잎부터 달라
트로트 가수 임영웅은 20만 명에 육박하는 팬덤 ‘영웅시대’를 몰고 다닌다. [뉴스1]
“임영웅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다.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탄탄한 노래 실력, 우아한 포즈, 안정감 있는 목소리로 사람을 끌어당긴다. 곡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능력도 뛰어나 무대마다 관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감정을 경험하게 한다. 무대를 벗어난 임영웅 또한 매력이 넘친다. 고달프고 힘들었던 삶을 씩씩하게 견뎠고, 강한 맷집과 자존감으로 웬만한 어려움을 꿋꿋하게 이겨낸다. 힘든 상황에서도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타인에게 받은 작은 온정도 잊지 않고 은혜를 갚는 의리가 넘치는 멋진 사람이다.”
김 작가가 임영웅을 극찬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처음에 그는 임영웅의 훤칠한 외모와 절제된 모습에 신뢰감과 호감을 느껴 노래를 경청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노래를 듣는 동안 무릎을 탁 칠 정도로 강한 흡인력과 소름 끼치는 울림이 전해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목소리로 편안한 감동과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안기는 가수는 나훈아 이래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그의 ‘웅지순례’가 시작된다. 웅지순례란 임영웅과 인연이 깊은 곳을 찾아다니며 추억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영웅 님이 무명 시절 자주 간 식당에 가서 주인들을 인터뷰했어요. 사람에게는 영성의 레벨이라는 게 있는데, 심리학자로서 내가 영웅 님에 대해 간파한 것이 맞는지 검증해 보고 싶었어요. 역시 영웅 님은 무명 때부터 남달랐더군요.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10시간씩 연습할 만큼 자기 관리가 철저했어요. 주위 사람들은 물론 밥집 아주머니들에게도 인사를 그렇게 잘한답니다. 뜨고 나서도 잘난 체한 적이 없대요. 늘 겸손과 배려가 몸에 배어 있다고 해요. 자기 혼자 테이블을 차지한 것이 미안해 다른 손님에게 양보하거나 서서 먹을 정도로요.”
그는 임영웅의 인성이 어릴 때부터 빛났다며 일화를 소개했다.
“영웅 님이 어릴 적 녹슨 양동이에 광대 쪽 얼굴이 찍혀 흉터가 생겼어요. 그 때문에 어머니가 밤새 울고 있는데 어린 영웅이가 씩 웃으며 ‘내 얼굴에 나이키가 생겼다. 보조개 같지’라고 말했대요. 겉모습은 어린아이지만 그때 이미 어른 자아가 있었던 거죠. 심리학적으로 얘기하면 회복탄력성이 뛰어난 겁니다. 회복탄력성은 어떤 시련이 닥쳐도 좌절하지 않고 긍정화해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나는 기질을 말합니다.”
임영웅의 매력에 빠진 5060세대에게 임영웅은 어떤 존재일까. 김 작가는 “내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잠자던 설렘 세포를 깨우는 연인 같은 존재”라며 “영웅 님이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오빠라고 불러달라고 했을 때 너무나도 행복했다”고 고백했다. 트로트 열풍이 불면서 여러 가수의 팬덤이 생겼다. 중년 여성이 주축이다. 김 작가는 중년 여성을 중심으로 트로트 팬덤 활동이 활발해지는 이유를 ‘보상 심리’와 ‘자기 존중’의 욕구로 설명했다.
“저도 머지않아 60대로 접어드는데 이 나이가 되니 마음에 헛헛함이 생겨요.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며 살았는데 남은 게 없다고 느껴지거든요. 이대로 죽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내 안의 수줍은 소녀 감성을 건드린 트로트 가수를 향한 특별한 감정을 나를 위한 선물 내지 보상으로 여기는 겁니다. 빈집 증후군처럼 내 숙제를 다 했으니 이젠 오롯이 나를 위한 상을 주자는 마음인 거죠.”
소속감의 힘
팬덤 활동을 통해 중년 여성은 그동안 느끼지 못하던 소속감과 연대감을 얻는다. 김 작가에 따르면 이는 엄청난 성취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는 인간의 욕구가 5단계로 발전한다고 봤다.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소속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 욕구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어도 충족되지 않던 3단계 애정·소속 욕구가 팬덤 활동으로 채워진 셈이다.트로트 팬덤은 ‘최애’ 가수의 노래와 영상을 스트리밍하고, 음반과 각종 굿즈를 사며 행복감을 느낀다. 각종 기념일이나 재난이 발생했을 때는 기부, 헌혈, 봉사 같은 사회 공헌 활동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도 앞장선다. 이른바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는 것이다.
팬덤 현상의 역기능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대표적인 역기능은 편가르기다. 이는 경쟁 구도를 기반으로 한 정치인이나 스포츠 팬덤에서 주로 나타난다. 트로트 팬덤은 자기편이 아니라고 해서 적으로 보진 않는다.
김 작가는 덕질이 “중년 여성의 우울한 삶에 활력을 불어넣고 심신을 모두 건강하게 만든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엄마가 밝아지면 가정 분위기도 밝아지는 효과가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엄마가 우울하면 집안 분위기가 어두울 수밖에 없어요. 반대로 엄마가 유쾌하면 집안 전체가 환해집니다. 그러니 트로트 가수에 빠진 엄마나 아내를 비난하기보다 기꺼운 마음으로 응원해 주세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지지해 주세요.”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방송,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대중문화를 좋아하며 인물 인터뷰(INTER+VIEW)를 즐깁니다. 요즘은 팬덤 문화와 부동산, 유통 분야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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