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년에 모든 걸 북한에 쏟아 부었다.
- 그리고 그것을 다 잃었다.
- 눈가에 수시로 눈물이 맺혔으나 그는 울지 않았다.
기근이 도시를 덮쳤다. 소년은 부모를 잃었다.
부모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소년에게 음식을 양보했다. “양식을 구해오겠다”면서 집을 나간 부모가 스무 날 넘게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이 부모를 찾아 나섰다. 부모는 굶어 죽은 뒤 시체 안치소에 잠들어 있었다. 부모 잃은 꽃제비(시장 바닥을 헤매는 집 없는 아이)가 거리에 넘쳤다.
열일곱 살 소년은 “두만강을 건너면 이밥을 먹는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북쪽으로 걸었다. 머릿속엔 쌀밥을 먹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한뎃잠을 자면서 나무열매, 칡뿌리로 주린 배를 채웠다. 운 좋게 배추뿌리를 뽑아먹은 날도 있었다. 밤낮으로 보름을 걸어 두만강을 건넜다. 소년이 발 디딘 곳은 동간도 월청진.
초가집을 발견했으나 집주인을 부를 용기는 없었다. 외양간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이튿날 주인이 소년을 깨웠다. 밥을 먹여주고, 옷을 내줬다. 주인은 “강변에 나가보라”고 말했다. 하릴없이 강변을 걸었다. 50대 남자가 손짓으로 불렀다. 남자는 조선말을 했다. 남자에게 말했다.
“조선에서 왔어요.”
#서울, 2010년 6월
얼굴이 수척하다. 줄담배를 태운다. 속병이 나서 매주 세 번씩 병원에 간다.
▼ 회사가 어렵죠.
“….”
한숨을 내쉰다.
“파산했습니다. 내놓고 말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천안함 사건이 회생의 싹마저 뽑아버렸습니다.”
▼ 한국 공장은요.
“날아갔어요. 안동, 성남 거 다.”
▼ 경제 활동은 가능하죠.
“끝났죠. 개인통장, 신용카드도.”
“재산도, 공장도 다 날아갔다”면서 예순일곱 노인이 한숨을 토한다. 눈물이 눈가에 맺힌다. 담배 쥔 손이 떨린다.
▼ 중국 산둥(山東)성 공장은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 시설도 다 평양으로 옮겼어요.”
▼ 북한에 투자한 돈이 얼마죠.
“1500만달러(180억원). 남북 관계가 이 꼴 나는 바람에 가슴만 타 들어갑니다. 방직기술로 북한 동포를 돕고 싶었는데, 다 끝난 것 같아요.”
#월청진, 1998년 8월
나는 북한과 중국을 잇는 두만강 다리 중앙에 서 있었다. 빨간색 경계선 남쪽에 오른발을, 북쪽에 왼발을 디디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 강변으로 되돌아오는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소년의 손을 잡았다. 맥박이 느려 뛰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에 초점도 없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가 싶어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소년이 말했다.
“조선에서 왔어요.”
북한 사람을 본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몸집은 초등학생인데 나이가 열일곱이란다. 참혹하다는 낱말이 떠올랐다. 소년과 얘기를 더 하고 싶었다. 소년에게 중국 돈 200위안을 줬다. 이튿날 오후 3시 강변에 터 잡은 찻집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옷을 사 입으라고도 했다.
나는 숙소에 돌아왔으나 마음이 괴로웠다. 소년의 얼굴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 밤이 샐 때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저 아이도 행복할 권리가 있고,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는데, 장가는 가겠는가, 자식을 낳을 수 있겠는가, 그 체격으로 사람 구실이나 하겠는가,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죄밖에 없지 않은가.
#평양, 2008년 8월
평양 동대원구 방직거리에서 평양대마방직 평양공장 준공식이 열렸다. 서울에서 전세기를 타고 250명이 날아왔다. 자주색 넥타이를 맨 은발의 노신사가 연단에 올랐다. 그는 “분단 60년사에서 남북 경제인이 힘을 합쳐 이룩한 민족의 쾌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설이 끝나자 300여 명의 군중이 박수를 쳤다. 노신사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10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평양대마방직은 한국과 북한이 함께 세운 1호 남북 합영기업, 노신사는 평양 진출 1호 한국 기업인. 그는 1968년부터 비단, 면을 짜 돈을 벌었다. 삼베 기술 특허로 ISO9001 인증을 획득했고, 섬유업계 최고 영예인 한국섬유대상(1999년)을 받았다. 2001년엔 신지식 특허인으로 선정됐다. 삼베 팬티를 최초로 개발한 이가 그다.
“나는 북한의 속살을 보았다”
고희(古稀)를 눈앞에 둔 김정태 안동대마방직 회장은, 쉰다섯의 혈기왕성한 사업가이던 1998년 8월 밤새 뒤척이면서도 소년과의 만남이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으리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는 말년에 자신의 모든 걸 북한에 쏟아 부었다. 평양공장 준공은 오랜 꿈이 열매 맺는 순간이었지만, 그날도 그는 웃지 못했다.
▼ 월청진엔 왜 간 건가요.
“1997년 여름, 뉴욕에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프란체스코수도회 소속 신부가 상의할 게 있으니 미국으로 와달라고 했습니다. 신부가 이렇게 말했어요. 미국 신문에 실린 북한 참상이 끔찍합니다. 사람이 굶어죽는 건 정말로 안타까운 일 아닙니까. 우리가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북한 돕는 일에 참여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그는 믿음이 독실하다.
북한 주민이 기근에 신음하는 건 알았지만 북한에 관심을 가질 까닭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북녘은 상식에 어긋난 다른 세상일 뿐이었다.
“뉴욕 관구장을 비롯한 미국 신부 여럿과 한국계 미국인 신부 1명, 수도회 소속 신자들이 만든 가톨릭선교구호회에 참여했습니다. 회원들이 돈을 갹출하고, 후원회를 조직했죠. 유엔 주재 북한대사를 접촉해 국수 제조 설비와 밀가루를 북한에 지원했습니다.”
월청진에 간 것은 미국 신부들과 함께 북한의 참혹한 상황을 직접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
“월청진 거주자의 98%가 조선족입니다. 나머지는 조선족과 결혼한 한족이고요. 탈북자가 거쳐 가지 않은 집이 드물었어요. 가구를 돌면서 실태를 살펴봤죠.”
▼ 꽃제비 소년의 이름은 뭐였나요?
“김. 성. 철. 안 잊어버리죠. 처음엔 중국 아이인 줄 알았어요. 어려운 사람 보면 도와주는 습관이 있어서 돈을 주려고 하는데 조선에서 왔다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우연인지, 인연인지 모르겠지만 그 먼 길을 걷기 시작한 지 16일째 날에 나를 만난 겁니다. 초등학교 3~4학년으로 봤는데 기가 막혔죠. 국가 전체로 볼 때 후유증이 50~100년 갈지 모른다 싶었어요.”
이튿날, 소년은 약속한 대로 찻집으로 나왔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었다. 꽃제비 친구 1명을 사귀어 함께 왔다. 핏기도 없던 아이가 희망찬 얼굴로 나타났다. 먼 길을 와서 뭔가 희망을 발견한 듯했다. 왜 국경을 넘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물었다.
“그 녀석을 통해 북한의 속살을 보았어요. 잃어버린 우리네 미풍양속을 발견했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북한에 마음이 간 이유거든요. 보릿고개 때, 먹을 게 없어 굶는 사람들과 된장 보리밥 나눠 먹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배가 등에 들러붙는데도 부모님께 밥상을 올린 아들 며느리, 그게 내 어릴 적 안동의 풍습이에요. 그걸 본 겁니다. 아, 같은 동포구나 느낀 거죠.”
기관에서 경고를 받다
담배연기가 독하다. 기침이 나온다.
▼ 건강 생각해야죠.
“끊어야 하는데….”
▼ 북한에 전 재산을 털어넣었는데 착잡하죠.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정말 그 열악한 환경에서 기업들이 노력해서 이끌어온 것 아닙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10년 넘게 땀 흘려 간신히 터 잡아가는데 정부가 급작스럽게 중단시키니 기업 처지에선 참으로 황당하죠.”
5월24일 정부는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 경협·교역 전면 중단을 선언했다. 북한이 저지른 도발에 대한 보복 조처다.
▼ 해군 함정이 침몰했습니다. 정전협정 위반인 데다, 교전 상황에서 벌어진 일도 아니었죠.
“북한이 크게 잘못한 거죠. 인명을 경시하는 건 절대로 용납해선 안 돼요. 아웅산 사건,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도 마찬가지고요. 북한은 꿈같은 데서 깨어나 반드시 사죄해야 해요. 무릎 꿇고 반성해야죠. 그런데 딜레마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숙명이란 게 있어요. 북한 주민이 우리와 같은 민족이란 겁니다.”
그가 전화를 받는다. 목소리가 조금씩 커진다.
“원, 참. 뭐 도와준 게 있다고. 그게 말이 됩니까. 알았어요. 물으니까 답하지. 예, 알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누구한테 걸려온 전화냐고 물었다.
“경고장을 보내네요.”
▼ 누가요.
“기관에서요. 병원에 있는데 KBS에서 찾아와 기업인으로서 통행금지, 통관금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국가가 기업인 보호해줘야지 글로벌 시대에 그게 말이 되느냐, 경제 기초도 이해 못하면 되겠느냐고 대답했죠. 지금 전화는 내 측근한테 온 거예요. 기관에서 지인을 통해 경고장을 보낸 거죠. 정부를 자꾸 비판한다고, 조심하라고. 사실을 말한 건데, 뭐. 신경 안 써요. 도와준 적도 없으면서.”
북한에서 사업하는 이들은 한국 정부, 북한 당국 비판에 조심스럽다. 비즈니스에 누가 될까 싶어서다. 더 잃을 게 없어서일까. 그는 거리낌 없었다.
대마를 키우다
안동대마방직은 중국 산둥성 타이안(泰安)시에서 섬유공장을 운영했다. 대마관리법 탓에 한국에서는 삼베 원료를 마음껏 구하지 못해서다. 치솟는 한국의 인건비도 중국행을 재촉했다.
1999년, 안동대마방직은 월청진에 땅(288만평)을 샀다. 중국산 대마는 품질이 하급. 이탈리아산 대마를 최고급으로 치는데 한국산은 그것에 버금간다. 토질, 기후가 중국의 그것보다 대마가 자라는 데 적합하다. 월청진은 한반도와 환경이 비슷하다.
월청진에서 대마를 키우면서 본격적으로 꽃제비를 돕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술, 담배에 찌들어 있었다. 돈 주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돈 떨어지고, 일 없으면 도적질하는 게 세상 이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란체스코수도회 신부들과 함께 꽃제비를 설득해 북한에 되돌려 보내는 일을 했다. 아이들은 1000달러만 있으면 손수레, 석탄을 구입해 북한에서 장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꽃제비가 국경을 넘기 전 말했다.
“더는 빌어먹지 않고 기술을 익혀서 조국에 회사를 차리겠습니다. 회장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래요.”
그는 북한에 공장을 세우기로 마음먹는다. 자립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업을 기우는데도 안성맞춤인 것으로 여겨졌다.
“중국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예요. 기술을 훔쳐가도 그걸로 끝입니다. 재판할 수도, 보상받을 수도 없어요. 기술 훔쳐간 공장이 네 곳이나 됐어요. 삼베 기술은 세계 최고니, 북한에서 대마를 키우고, 그것을 원료로 삼베를 짜면 누이 좋고 매부 좋겠다 싶었죠. 나한테도 이득이고 북한에도 도움 되는 일이었죠. 그런데 곡식이 부족한 나라가 돈 된다고 알곡 대신 대마를 재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곡식과 이모작할 수 있는지 실험했어요.”
월청진에서 콩, 대마를 번갈아 심었다. 첫해는 실패하고, 이듬해엔 성공했다. 콩과 대마 이모작에 성공한 후 조선족 사업가, 재일동포를 찾아다니면서 북한으로 향하는 길을 뚫고자 했다. 3년간 북한의 당, 내각, 군부, 보위부에 사업계획서를 보냈으나 답이 없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가 소떼를 몰고 방북해 북한의 빗장을 연 뒤 남북 경제교류가 꿈틀거릴 때 일이다.
“2002년 12월, 민경련 산하 새별총회사가 함께 일하자고 제의해왔어요. 우리가 제공한 종자로 해주농업과학원에서 곡식, 대마의 이모작이 가능한지 실험했습니다. 결과는 성공이었죠. 그런데 협의를 위해 북한에 들어가려면 입장료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과거 정부가 참 나쁜 버릇을 들였어요. 그 사람들은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만으로도 돈을 받는 걸 당연시했습니다. 처음엔 5만달러를 요구하더니 나중엔 3만5000달러를 내놓으라더군요. 이건 아니다 싶어 끝까지 버텼어요. 돈 안 주고 계속 기다리니 그냥 오라더군요.”
그는 2003년 11월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 시내에 남북 합영회사를 설립하기로 북한 당국과 합의했다.
정부가 권하다
눈으로 본 북한은 엉망이었다. 산업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했다.
“평양방직공장 설비로 실험해봤습니다. 제품이 다 망가졌어요. 북한 주민들이야 사가겠지만 세계시장엔 명함도 못 내밀죠. 초기 투자를 500만달러로 예상했는데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죠. 한국에서 중소기업이 공장을 지으면 공장 건설 자금은 물론이고 운용비도 지원해줍니다. 개성공단 입주업체를 지원하는 법은 있었는데 내륙 진출 기업을 돕는 제도는 없었어요.”
그는 합의 1년 뒤인 2004년 북한 진출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통일부가 “사업을 계속해달라”고 권했다.
“통일부가 권합디다. 권고대로 남북협력 사업으로 신청했습니다. 약속한 대로 내륙 진출 기업 지원법도 만들어지더군요. 그런데 지금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랄 때는 까맣게 잊고 이제 와선 말라는 거예요. 통일부 관료 중 제정신 박힌 놈, 소신 있는 놈을 단 한 명도 못 봤어요. 북한한테 초청장 받아 방북 승인 요청하면 정부가 허가를 안 내줘요. 지난해 2월28일 마지막으로 공장에 가 봤습니다. 준공식한 뒤 처음이자, 끝이었죠. 금융비용만 연간 10억원이 넘는데 회사가 어떻게 버티겠습니까.”
“고래 싸움에 새우등만 터졌다”고 그는 덧붙였다. 비유가 옳은 것도 같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북한은 엉망이면서 갑갑하기까지 했다. 난관은 끝이 없었다.
“그 사람들 하루빨리 정신 차려야 해요.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책임감도 없고, 생각도 모자라요. 약속도 잘 안 지키고요.”
2005년 6월엔 북한 당국이 공사를 막았다. 공사를 1년6개월 동안 재개하지 못했다.
“강경파들이 평양 한복판에 한국 공장이 들어서면 주민이 동요한다고 주장했답니다. 2005년 6월 노무현 정부가 경공업 지원에 나서기로 했는데, 그것도 영향을 미쳤어요. 남한 정부한테 통으로 받으면 되는데, 개인 기업한테 푼돈 받아 왜 골치 앓느냐는 주장이었답니다. 한심한 일이죠. 공사 중단으로 인한 손실이 컸습니다. 약속을 그렇게 뒤집으면 누가 투자를 하겠습니까.”
공장 건설이 늦어지다 보니 이자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었다. 한국 공장을 정리하고 본사 직원을 해고하면서 버텼다. 퇴로는 없었다.
“공장이 모습을 갖춘 뒤 양말을 시험생산했습니다. 기계 50대 가운데 44대가 전력 문제로 고장을 일으키더군요. 발전 설비를 새로 꾸리는 데만 수십만달러를 추가로 썼습니다.”
과거 정권의 적폐(積弊)
그는 노무현 정부 대북정책이 정치 지향으로 흐르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컸다.
“노무현 정부는 실사구시로 접근하지 않았어요. 남북문제를 정치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입맛에 맞는 것만, 도움 되는 것만 들여다봤죠. 정부 지원으로 이뤄진 비정부기구(NGO) 활동엔 문제가 정말로 많았어요. 북한 관료 놈들도 다 알아요. NGO 덕분에 자기네들이 먹고 산다는 걸.”
노무현 정부 때 여당 국회의원이던 L씨에게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재단의 사무총장이 쫓아와서 협력기금, 그거 5억원만 쓰게 해달라고 그럽디다. 그러면 3억원은 남는다고. 국정감사 때 협력기금 사용 명세를 보니까 문제가 심각하더군요. 사용금액은 있는데 명세가 없는 게 수두룩해요. 아주 큰 액수도 그렇더군요. 종이에 그냥 액수만 적혀 있고 아무것도 없어요. 수백억원짜리도 그렇고. 정말로 심각해요.”
▼ 남북교류협력기금을 눈먼 돈처럼 쓴다는 얘길 들은 적 있습니다.
멀리서 대화를 듣던 안주인이 필요한 게 없느냐면서 다가왔다.
“말을 그리해도 되나. 말을 그렇게 많이 하면….”
그는 아내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단체가 북한에 중고 기계를 기증했어요. 단가가 3억원이랍디다. 정부에서 1억5000만원 받고 나머지는 자기네들이 기업, 개인한테 받은 후원금으로 충당하죠. 그런데 그 기계가 실제로 얼마냐면, 8000만원입니다. 나랏돈 1억5000만원 꿀꺽하고, 후원금에서도 7000만원 횡령한 거죠. 그런 일이 비일비재해요.”
정부가 막다
이명박 정부는 원칙을 강조하면서 북한 길들이기에 나섰다. ABR(Anything but Roh·모든 것을 노무현 정부와 반대로)이란 말이 회자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북한의 변화를 기다리는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를 통해 북한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해체주의라는 외줄에 올라타 북한을 다뤘다.
대통령선거 때의 기대는 실망으로 변했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원칙에 있어서 보수적입니다. 노무현 정권이 과한 게 많았어요. 과거 정권이 만들어놓은 북한의 나쁜 습관 바꿔야 해요. 이번 정권이 그 일 하겠다는 거 참 잘한 일이에요. 성숙하게 기다렸으면 북한이 고개 숙였을 겁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자존심밖에 안 남은 놈들 자존심을 있는 대로 긁어대니, 이거 참. 독재정권은 죽어도 떠들면서 죽는 게 생리 아닌가요. 회사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무시하고, 자존심 긁으면 반발하죠. 대통령이 실용적으로 잘할 줄 알았어요. 애석하고, 안타깝습니다. 참모들이 문제가 많아요. 바보 같은 짓을 했어요.”
▼ 2008년 준공식도 무리해서 열었다면서요.
“아주 힘들여서 했죠. 그래야 출구가 생기니까요. 공장이 돌아야 자금을 융통할 수 있지 않습니까. 10년간 꿈에 그리던 공장을 세웠는데…. 어떻게든지 생산할 방법을 찾았어야 했어요.”
준공식 이후 생산에 나섰지만 회사는 바닥으로 치달았다. 정부가 통행을 막아 기술자의 발이 묶였고 자금난으로 원자재를 살 수도 없었다.
▼ 정부 지원은 얼마나 받았나요.
“35억원이요. 법에 투자액의 40%까지 지원하는 것으로 돼 있으니 정부가 약속을 안 지켰다고도 볼 수 있죠.”
▼ 남북경협 보험 같은 건….
“보험은 개성공단 위주예요. 내륙 진출 기업 중 보험 든 곳 없어요. 아니 한두 곳은 있을 겁니다. 전쟁 나거나 북한이 막아야 보상받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보상 액수도 턱없이 적고요.”
바보 같은 일
천안함 사건으로 안동대마방직이라는 중환자는 뇌사했다.
▼ 개성공단만 살아남은 모습입니다.
“그것도 바보 같은 일이에요. 개성공단 폐쇄는 북한에 아무런 부담이 안 돼요. 개성공단은 지렛대로 못 씁니다.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얻는 돈이 1년에 4000만달러밖에 안 됩니다. 노무현 정부가 개성을 정치 목적으로 활용하더니 이번 정부도 똑같아요. 아무것도 몰라요. 실물경제를 잘 안다면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을 겁니다. 북한 다루는 법을 그렇게 모를 수 있나 싶습니다. 한국기업은 개성공단에서 돈을 많이 버는 반면 북한은 인건비만 받습니다. 문 닫으면 북한이 손해 보는 건 별로 없고, 우리가 손해 보는 건 크죠. 하지만 500여 개 내륙 진출 기업에서 북한으로 흘러가는 돈은 연간 3억5000만달러, 아니 4억달러 가까이 되는데, 이건 북한에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내륙 경협을 지렛대로 북한을 압박했다면 효과가 있었을 겁니다. 말 잘 안 들으면 내륙 기업 철수시키겠다는 식으로요. 그런데 레버리지로 쓰지도 않고 그냥 막아버렸습니다.”
그는 기업가 마인드, 실용주의로 북한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역이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100억달러를 교역하면 부가가치가 300억달러가 넘습니다. 공짜로 퍼주지 말고 기업가 마인드, 실용주의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게 양쪽이 다 사는 길이에요. 그간 내륙 진출 기업이 국가에 낸 세금이 2조원은 될 겁니다. 50억달러어치를 거래하면 부가가치세만 5억달러 아닙니까. 그 어려운 환경에서 국가에 세금 내면서 꾸려온 겁니다. 그러면서 북한을 바꿨습니다. 요즘엔 북한 정권의 말이 주민에게 다 먹히지 않습니다. 주민이 세상 돌아가는 걸 알게 된 거죠. 지금 이렇게 중단하면, 정부가 참, 길게 볼 때도 그게, 안타까운 일이죠.”
▼ 평양공장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요.
“기계는 오랫동안 서 있으면 망가집니다. 다시 돌리려면 100만달러가량이 필요할 겁니다. 기업인들이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외화벌이하면서 세금으로 국가의 곳간을 채웠습니다. 국민의 도리를 잘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언젠가 정부가 반드시 책임져야 할 겁니다. 정부가 막을 권리가 없습니다.”
평양공장엔 간부 요원으로 뽑아놓은 북한 근로자 350명이 근무한다고 한다.
“중견 기술 요원으로 뽑은 사람들인데 죽을 지경일 겁니다. 우리가 북한에서 물류사업도 합니다. 트럭이 40대 있는데, 직원들이 지금 그걸로 먹고살아요. 100만~150만원이 나한테 와야 하는데 그것도 안 옵니다. 손해는 나 혼자 봐야죠. 지금은 수입이 하나도 없습니다.”
▼ 생활은 어떻게 하나요.
“딸이 용돈을 줍니다.”
▼ 후회는 없습니까.
“어떤 박사가 교류협력사(史)의 산증인으로서 책을 쓰라고 하더군요. 노동집약 산업은 출구가 북한밖에 없습니다. 중국은 이제 안 돼요. 국민소득 5만달러 시대를 여는 열쇠가 북한에 있어요. 실용주의로 접근해야 해요.”
▼ 쓸데없는 짓 했단 생각 들 때도 있나요.
“…글쎄요. 언젠가 내가 만든 공장이 남북 관계에 기여하리라고 봅니다. 부품이 다 녹슬겠지만 교체하면 되거든요.”
▼ 정부에 보상을 요청할 생각은요.
“공장에 투자된 것을 가지고 정부에 보상을 요청할 생각은 없습니다. 기업가로서 판단해서 투자한 것이니까. 하지만 정부가 중단시켜서 손해 본 부분은 끝까지 문제 삼을 겁니다. 정부에 낸 세금만큼이라도 인정받아야 합니다.”
▼ 공장이 있고, 기술이 있으니까, 회생할 소지도 있겠지요.
“건강이 지켜주면…. 못 견디게 힘들어요. 정신적 고통이 크니까. 정신적 고통을 말로는 표현 못해요. 지금도 몸이 못 이겨서 병원을 밥 먹듯 드나듭니다.”
1호는 상징성이 크다. 개척자라는 뜻이다. 그는 실패한 개척자다. 수시로 눈가에 눈물이 맺혔으나 그는 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