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호

세계를 향한 열정과 도전-송상현 회고록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장

“인류의 확장된 형사정의(刑事正義) 나는 그곳에 있었다”

  •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8-01-1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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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상현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이 2018년 2월호부터 ‘신동아’에 회고록을 연재한다. ‘세계를 향한 열정과 도전’이라는 제목에 77년 삶이 응축돼 있다. 그는 아시아인 첫 국제사법기구 수장이면서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송상현(宋相現) 전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은 1941년 경기 양주시 노해면(현 서울 도봉구 창동)에서 태어났다.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62년 고등고시 행정과(14회)에 최연소로 합격했으며 이듬해 고등고시 사법과(16회)도 합격했다. 1968년 미국 튤레인대 대학원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받은 후 영국 케임브리지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1970년 미국 코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시아인 첫 국제사법기구 수장

    그는 1972년부터 서울대 법대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1996~1998년 법대 학장을 지냈다. 하버드대 등 미국 여러 대학과 호주 및 뉴질랜드의 대학에서도 한국법을 가르쳤다. 2003년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상고심 재판장)으로 취임해 2009년 3월부터 6년간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으로 일했다. 12년에 걸친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및 소장 활동을 마치고 2015년 한국에 돌아왔다. 2002년에 창설된 국제형사재판소는 유엔과는 독립된 기관으로 대량 학살, 반인도적 범죄, 전쟁범죄, 침략범죄를 저지른 개인 수괴를 수사하고 처벌하는 재판소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정국에서 교육자·언론인·정치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 선생의 손자다. 고하는 동아일보 사장(1921~1924, 1929~1936, 1945)을 지냈으며 1931년 ‘신동아’ 창간 발행인이기도 하다. 송 전 재판소장의 아내는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상협(金相浹·1920~1995) 전 국무총리의 장녀 김명신(金明信) 여사다. 그는 현재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으로 일한다. 아호는 심당(心堂). 

    송 전 재판소장이 신동아에 ‘세계를 향한 열정과 도전’ 제하 회고록을 연재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6전쟁을 겪었으며 미국·프랑스·영국에서 공부한 후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으로 일한 삶은 ‘세계를 향한 열정과 도전’이라는 제목에 응축돼 있다. 동아시아 변방에서 세계로 나아간 대한민국 현대사와도 궤적을 함께한다. 회고록 연재에 앞서 2017년 11월 22일 서울 마포구 유니세프한국위원회에서 그를 만났다. 

    -고향인 ‘경기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풍경은 어땠습니까.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이 원근(遠近)으로 알맞게 병풍을 친 곳입니다. 산자수명하고, 평화로운 농촌 마을이었어요. 친구 녀석들이 창동 사투리로 내 이름을 ‘새니’라고 불렀습니다. 논둑으로 뛰어다니고 시냇가에서 미역 감으면서 놀았지요. 동네 코흘리개들과 참외 서리, 보리 서리 한 것도 떠오릅니다. 물이 풍부해 가뭄을 모르는 곳이었습니다. 물이 많아 소출도 좋았고요. 서울로 편입돼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옛 흔적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고향이 사라져버린 셈이지요. 아쉬운 마음이 있습니다.”

    나의 할아버지, 고하 송진우

    고하 송진우(1890~1945) 선생.

    고하 송진우(1890~1945) 선생.

    1941년생입니다. 일제강점기 기억이 남아 있는지요. 

    “할아버지(고하 송진우)가 국내 독립운동의 구심점에 서 계셨던 터라 일제 왜인들의 감시가 심했습니다. 할아버지와 가족들이 일본인 형사에게 굽히지 않고 의연했던 게 떠오릅니다. 왜인 경찰들이 미친 사람처럼 집에 쳐들어와 식구들을 겁박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입단속을 시킨 것도 생각납니다. 집안에서 시국에 관해 얘기한 내용을 조그만 놈이 밖에 나가 속없이 떠들고 다닐까 걱정하신 거죠. 할아버지는 늘 ‘내가 잡혀가서 행방불명되거나 죽을 수도 있다’면서 행동 수칙을 일러주셨습니다. 한여름에 잡혀가더라도 옷을 두껍게 입고 가라, 겨울에는 동상이 걸릴 수 있으니 옷을 여러 벌 입고 가라, 얼마간의 현금과 몽당연필을 항상 지니고 있어라, 잡혀갈 때 시간이 있으면 손톱·발톱을 깎고 가라 같은 것이었습니다. 독립지사 집안의 생활은 이렇듯 험난했습니다.” 

    그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돌이켜보면 고하 할아버지를 받들면서 아버지와 나는 대물림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탄압, 6·25전쟁 동안의 고생을 극복하고 적어도 고하의 명성에 먹칠을 하지 않으면서 집안을 유지하고, 굶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아버지도 마음만 먹으면 해방 직후 큰 위법이나 무리 없이 귀속 재산 불하 등을 통해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고, 나도 근 40년 서울대 법대 교수를 하면서 외부의 각종 유혹 등을 물리치지 못한 채 뜬구름 같은 일시적인 정치적 기회에 놀아나면서 정체성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정치적 기회에 놀아나지 않은 것에 자부심이 있는 듯합니다. 

    “할아버지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신 것을 보고 정치 쪽에는 담을 쌓고 지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버지도 제2공화국 장면 내각에서 모 부처 장관 입각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셨어요.” 

    고하는 1919년 중앙학교 교장으로서 3·1운동을 배후 주동해 옥고를 치렀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사장으로 일하면서 민족·민주·민생·민문주의를 구국의 기본 사상으로 독립을 위한 민족의 힘과 얼을 고취하고자 노력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 30일 한현우·유근배 등 6명의 저격으로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서거했다. 

    “정부에 출사(出仕)하라는 제의를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국무총리를 비롯한 행정부의 각종 고위직과 사법부의 고위직 두 번 등입니다. 그러나 나는 교수의 한길을 좌고우면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교수가 정부 고위직으로 출사하는 것은 찬반이나 장단이 있을 수 있겠으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볼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나는 누구나 그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노력해 명성을 떨치고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정치권에 갔다가, 로펌에 기웃거리고 그게 다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일 뿐입니다.”

    남재 김상협의 조언 “해양으로 진출해야”

    송상현 전 ICC 소장은 “학자가 정치권에 기웃거리는 건 일장춘몽일 뿐”이라고 했다. [박해윤 기자]

    송상현 전 ICC 소장은 “학자가 정치권에 기웃거리는 건 일장춘몽일 뿐”이라고 했다. [박해윤 기자]

    고하의 삶이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봅니까. 

    “우리나라가 독립을 달성하는 데 국내외에서 수많은 애국자가 피와 땀을 흘렸습니다. 독립운동은 여러 갈래의 큰 줄기가 있었습니다. 국내의 크고 작은 의병이나 저항운동 외에 상해임시정부가 있었으며, 무장 군대를 조직해 만주 벌판을 누빈 홍범도 지청천 김좌진 같은 장군도 계십니다. 공산당에 가입하는 것도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고요. 이승만 서재필 정한경 박용만 등이 미국에서 벌인 외교 활동 중심의 독립운동도 있었고요. 고하는 정부도 없던 암흑 시절 갖은 탄압 속에서도 국내에서 중심을 잡고 해내외의 이쪽저쪽을 연결해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습니다. 독립자금을 모아 전달하는가 하면 해외에서 독립운동하던 이들이 선전물을 만들 때 사용한 활자도 고하가 마련해 보내준 것입니다.” 

    60년 가까이 법학에 천착했습니다. 왜 법학을 공부했습니까. 

    “초·중·고등학교 다닐 적 훗날 장인이 되는 남재 김상협(1920~1995·국무총리, 고려대 총장을 지냈다) 선생 댁에 매년 세배를 갔습니다. 고려대 정치학과 교수이던 남재 선생이 한국은 해양으로 진출해야 한다면서 법학을 공부해 커다란 바다에 관한 법의 체계를 세워보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남재 선생이 동경제국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법학을 공부하셨더군요. 일본에서 공부한 이들은 고등문관시험(고시)에 합격해 관계로 진출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흔들림 없이 학문의 길을 택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는 경외심이 들었습니다.”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꿰뚫어 보는 안목과 식견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은 반도이고 해안선이 긴 데다 해양 진출과 수출로 먹고살아야 하니 법대에 가서 공법인 해양국제법과 사법인 해상법을 공부해 두 분야를 아우르는 법체계를 연구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남재 선생 말씀을 듣고 법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판·검사 하지 않은 까닭

    1962년 고등고시 행정과(14회)에 최연소로 합격했습니다. 이듬해엔 고등고시 사법과(1963)를 통과했고요. 

    “1962년 고등고시 행정과 시험이 마지막으로 시행됐습니다. 이듬해부터 3급 채용 시험으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5급 행정고시가 됐습니다. 행정과 합격자는 내무부 수습 과정을 거친 후 군수 혹은 경찰서장으로 임명됐습니다. 이른바 ‘고시 패스’를 하면 어린 나이에도 군수 발령을 내던 식민지 시대의 관행이 이어졌습니다. 군수 발령을 받으면 대학생 교복을 입은 채 부임하기도 해서 일본어로 ‘쓰메에리 군수’라고 일컫곤 했습니다. 쓰메에리란 대학생 교복 목둘레 안쪽에 달린 흰 플라스틱으로 된 칼라를 뜻합니다.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자도 어린 나이에 판·검사로 임용됐고요. 20대 판·검사에게 ‘영감’이라는 존칭을 쓰면서 ‘모시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군수, 경찰서장, 판·검사를 마다하고 유학을 떠난 이유는 뭔가요. 

    “세계를 향한 열정과 도전의식 같은 게 있었나 봅니다. 당시 80세가 넘으신 할머니께서는 옛날 생각으로 고을의 군수나 검사로 진출해야 한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집안에서는 법조계나 정부에 출사하는 것을 두고 찬반 의견이 팽팽했고요. 부모님은 내 결정에 따르겠다는 융통성 있는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6·25전쟁 때에는 가족이 피난을 못 갔습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때까지 명륜동 집에 파놓은 방공호에서 3개월을 지냈습니다. 아버지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단파 방송을 들으셨습니다. 단파 라디오가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 고문이 피난 국회에서 연설한 내용을 방송했습니다. 아버지가 ‘한국은 혼자가 아니다(Korea is not alone)’라는 대목을 듣고는 나를 붙잡고 안도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당시 식구 중 영어를 조금이라도 알아듣는 사람은 아버지가 유일했습니다. 열 살밖에 안 됐을 때 일인데 앞으로는 영어를 못 하면 사람 구실을 못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경험도 유학을 결심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서울에 나뒹굴던 시체들

    풀브라이트 (Fulbright) 장학금 첫 세대인가요. 

    “내 앞에 몇 사람이 더 있습니다. 그러나 법학으로는 내가 처음일 겁니다. 토플 시험이 그때 처음 들어왔어요. 600점을 맞았습니다. 한국에서 당시 최고 점수였죠. 검사장을 지낸 이건개라는 친구와 내가 600점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토플이 자리 잡은 뒤에는 600점은 높은 점수가 아니었죠. 640, 650점 받는 이가 수두룩했으니까요. 여하튼 토플 시험에서 1등을 했기에 전액 장학금으로 미국에 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장학금은 어떤 형태로 지급되는 것인지, 학위는 어떻게 받는 것인지 개념조차 잘 몰랐습니다. 하버드대의 H자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요. 선례가 거의 없었으니 물어볼 곳도 없었어요. 유학한 대학에 가보니 먼저 다녀간 선배 유학생들이 남겨놓은 각종 요령과 자료도 없고 한국인 거주자도 없었습니다. 한국의 활자 매체를 읽거나 한국말을 하거나 한국 음식을 먹을 일도 없었죠. 기숙사 방에서 벽에 대고 혼자 우리말을 중얼거리는 나를 발견하고 실소한 적도 있습니다.” 

    박사학위를 마친 뒤에도 공직에서 일할 수 있었을 텐데요. 

    “대학의 강단에 서는 결정은 굉장히 힘든 선택이었습니다. 처우가 너무 열악했으므로 요즘 대학교수를 생각하면 안 돼요. 언제부터인가 쌀 소비량이 줄어들고 있지만 1970년대만 해도 겨우 밥만 먹고 사는 형편이었으므로 쌀만 먹고 다른 것은 못 먹었습니다. 교수 월급을 받으면 한 달 먹을 쌀부터 샀습니다. 쌀값을 지출한 뒤 교수 서넛이 1주일에 한 번씩 서너 번 동태찌개에 ‘카바이트 막걸리’를 마시면 월급이 동이 났습니다.” 

    학자로서 형사법과는 인연이 없는데도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이 됐습니다. 

    “6·25전쟁 때 군대에 소집되기에는 나이가 어렸습니다. 열 살이었으니 집 밖에 나가 돌아다녀도 북한군이 신경을 쓰지 않았지요. 명륜동 집에서 배낭을 짊어지고 고향인 창동으로 가 먹을거리를 구해오는 일을 맡았습니다. 돈암동을 거쳐 미아리고개 넘어 수유리를 지나면 창동입니다. 1시간 40분이면 걸어갑니다. 고향에 가서 감자 같은 것을 얻어 와 호구했습니다. 창동을 오가는 길에 미군 B29의 폭격이 있으면 혼비백산해 타조가 모래에 대가리만 처박듯이 숨었습니다. 도랑에 머리를 박고 있다가 고개를 드니 시체가 쌓여 있는 겁니다. 염천(炎天)에 시체 썩는 냄새가 고약했어요. 금방 죽은 사람, 썩고 있는 시체, 부패해 다 분해된 시신이 나뒹굴었습니다. 당시의 전쟁 혐오의 기억이 나를 은연중에 국제형사재판소로 이끈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인간이 이렇듯 적대시하면서 서로를 죽일 수 있는지, 어떻게 이리 잔인할 수 있는지 가끔 생각했습니다. ‘평화가 가장 중요하고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관념이 그때 머릿속에 각인됐습니다.”

    공소시효 없는 국제형사법정

    앞으로 연재할 회고록의 핵심 내용이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으로 일할 때 일입니다. 국제형사재판소의 근거 조약인 로마규정이 인류사(史)에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로마규정은 1998년 6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유엔전권외교회의가 채택한 상설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을 위한 규정 조약을 말한다. 국제형사재판소의 필요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꾸준히 제기됐으나 냉전에 따른 동서 대결로 인해 결실을 보지 못했다.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에도 르완다와 보스니아에서 인종학살 사태가 벌어지면서 국제형사재판소 설립 문제가 국제적 관심사로 등장해 로마회의가 개최됐다. 

    “제1·2차 세계대전에서 600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제2차대전을 치른 후 인류가 깨달은 게 있습니다. 핵전쟁이 될 제3차 세계대전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엔을 만들어 평화를 유지하자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또한, 유엔 산하에 국제사법재판소를 설치했습니다. 총을 들고 싸우지 말고 법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집단 안보 체제는 불완전하나 평화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인류는 유엔 안보리의 집단 안전보장 체제와 국제사법재판소의 분쟁 해결 체제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집단살해 범죄, 반인도 범죄, 전쟁범죄 등 국제적으로 중대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국제법상으로 형사처벌하는 방법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양심과 정의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범(戰犯)이 부당하게 면책된 채 부정 축재한 재산으로 호의호식하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데 합의가 이뤄진 것입니다. 현직 국가원수라도 면책은 없으며 종국에는 국제형사재판소의 처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 법 규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정부의 지시로 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처벌 대상이 된다. 또한, 국적이 로마규정 당사국이 아닌 경우에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회부결의로 국제형사재판소의 수사와 처벌이 가능하다. 최고 형량은 종신형이다. 로마규정이 발효된 2002년 7월 1일 이후에 발생한 범죄만 처벌할 수 있다.

    “ICC 설립은 인류의 성취”

    송상현 전 재판소장은 현재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으로 일한다. [박해윤 기자]

    송상현 전 재판소장은 현재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으로 일한다. [박해윤 기자]

    “콩고민주공화국의 군벌 토마스 루방가가 국제형사재판소에 잡혀 왔습니다. 반군 지도자로 3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죽인 죄를 저지른 대가로 처벌됐습니다. 이처럼 범인을 잡아 처벌하는 것이 고전적 의미의 응보적 형사 정의입니다. 응보적 정의를 달성하면 형사 절차가 완성·종료되는 것이었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고전적 형사 정의의 개념을 더욱 확대했습니다. 범죄 수괴를 잡아 처벌하면 응보적 정의를 실현해 속은 시원하겠으나 피해자들의 고통과 한을 풀어주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조사와 처벌로 끝내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법원이 중심이 돼 피해자를 구제하고 배상하라는 게 최근 10년간 등장한 확장된 회복적, 치유적 형사정의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국제 형사정의는 응보적 정의 외에 회복적, 치유적 정의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유니세프, UNDP(유엔개발계획), 월드뱅크처럼 국제형사재판소도 피해자신탁기금을 통해 전쟁범죄 등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을 구제·지원하는 사업을 벌입니다. 직업 훈련과 의료 서비스는 기본이고 팔다리가 잘린 이들에게 의수족을 제공하고 강간 피해자의 트라우마가 사라질 때까지 심리상담을 제공합니다. 마이크로 크레딧을 통해 융자도 해주면서 자립 기반을 다지도록 도와주기도 하고요. 피해자 마을의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실시합니다. 아이들이 영어가 네이티브인데도 ‘스쿨(school)’의 뜻을 모릅니다. ‘What is school’이라고 물으면 아버지가 사람 죽일 때 쓰는 도끼 망치라는 식으로 답하는 경우도 있어요. 

    의견이 다르면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에게 조정 타협의 과정을 가르치는 평화 교육도 제공합니다. 국제형사재판소의 직접 지원을 받은 피해자가 현재 30만 명이 넘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은 확장된 형사정의를 구현하는 인류의 성취라고 하겠습니다.” 

    동아시아 변방에서 세계로 나아간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면서 주역인 송 전 재판소장의 회고록은 2018년 2월호부터 본격적으로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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