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류 회장이 1989년에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사무총장으로 일할 때, 마침 이 회장이 수석 부회장을 맡아 두 사람은 더 가까워졌다. 이 회장이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이 됐을 때는 류 회장이 부회장으로 일했다. 두 사람이 함께 로마 등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교회와 사회 안에서 평신도의 역할과 중요성을 부각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의 희생과 봉사 정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도 젖어들었다. 그런 그를 이 회장은 이렇게 평했다.
“평신도협의회에서 류 회장을 처음 봤을 때에 키 크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어요.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같이 일을 하다보니 일관되고 책임감 있게, 자신의 일처럼 열성을 다하더군요. 무엇보다 상대방을 편하게 해줘요. 그래서 우리 회사에 스카우트하려고 알아봤더니 제약회사 사장이더군요.”
평신도협의회는 전국의 성당을 찾아다니며 일하는데 류 회장은 성당의 신부들에게서 이 회장에 대해 매번 같은 말을 들었다. 회의나 행사가 끝나고 작별인사를 할 즈음에 이 회장에게 구체적으로 몇날 몇시를 밝히며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 회장과 가깝게 지내는 동안 한 번도 이 회장 스스로 불우한 이웃을 도와줬다는 얘길 한 적이 없었다. 그의 선행은 도움을 받은 곳에서 인사를 할 때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1999년경 이 회장과 함께 일본으로 성지순례를 갔을 때 제가 여쭤봤어요. 어떻게 그렇게 남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지. 그랬더니 이 회장께선 지금까지 자신의 힘으로 이뤄진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시더군요. 어려서는 마을사람들이 가난하고 총명한 이관진에게 학비를 대줬고, 100% 수출만 하던 한국샤프도 정부와 회사 직원들의 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요. 저는 이 회장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지요.”
사재 30억원으로 장학재단 설립
이 회장이 나눔을 실천하면서도 잘 드러내지 않는 까닭에 간혹 이 회장이 어느 대학에 적지 않은 돈을 기부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듣게 될 때면 그는 서운한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도 질세라 2001년 현금 5억원과 경동제약 주식 30만주(당시 24억5000만원 상당) 등 사재(私財) 30억원을 출연해 자신의 호 ‘송천’을 딴 ‘송천재단’을 설립했다. 송천재단은 매년 주식배당금과 이자소득으로 조성되는 3억원 이상의 장학금을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지급하고 있다.
사실 장학사업은 그의 오랜 염원이었다. 그는 경기도 화성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여장부인 할머니는 그에게 특별한 심부름을 시키곤 하셨다. 집안 살림은 물론 친척과 소작농의 형편까지 살폈던 할머니는 저녁 끼니때가 돌아오면 늘 그에게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오라고 시켰다.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이 있나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그가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을 발견하고 할머니께 알리면 할머니는 그에게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다며 칭찬해주고, 그 집에 양식을 갖다주라며 다시 내보냈다. “절대 어려운 이웃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게, 살짝 갖다놓으라”는 당부와 함께.
그런데 아버지가 전재산을 쏟아 부어 시작한 제과업이 신통치 않자 자식들이 한창 공부할 때 가세가 급속히 기울었다. 먹고살려면 기술이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그는 실업계인 성동공업 중·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성적이 뛰어났던 그는 성균관대 화학과에 진학했지만 등록금을 감당하기 힘들어 2학년을 마치고 회사에 취직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더니 평소 그를 눈여겨보던 당시 성균관대 변희용 총장이 조용히 불러서 등록금을 대신 내 주고, 또 한 번은 학교 장학금을 받게끔 도왔다. 변 총장의 도움에 힘입어 3학년에 복학해 무사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던 그는 마음 한구석에 그 일이 빚으로 남아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던 그가 장학재단 설립으로 40여 년 만에 마음의 빚을 갚게 된 것이다.
발로 뛴 영업의 결실
화학을 전공한 그는 1969년 젊은 나이에 친구와 동업해 ‘선경제약’을 창업했다. 근검절약하고 성실히 일하자, 회사가 날로 번창했다. 사업에 자신을 얻은 그는 1975년에 ‘유일상사’라는 이름으로 독립하고, 이듬해에 ‘경동제약’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차근차근 회사를 발전시킨 원동력에 대해, 그는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원인은 본인이 직접 뛰지 않고, 하나에서 열까지 남을 시킨 결과라고 말씀하셨다”며 “아버지의 실패를 교훈 삼아 직접 발로 뛰며 영업한 결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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