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호

한국형 호러(horror)물의 끊임없는 귀환과 진화

구미호 vs 여우누이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입력2010-09-02 11: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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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이(여우누이): 어머니, 저는
    • 괴물인가요? 저는 괴물이지요?
    • 얼굴에 털이 나고 코가 솟고
    • 뾰족니가 나는 흉측한 괴물.
    • 구산댁(구미호): 아니다.
    • 넌 괴물이 아니다. 천금보다
    • 귀한, 이 어미의 새끼다.
    • -드라마 ‘구미호 : 여우누이뎐’ 중에서
    1 품기엔 두렵고, 내치기엔 아까운 존재들

    정말 더러운 게 인간의 정이라더니….

    -드라마 ‘구미호’ 중에서

    한국형 호러(horror)물의 끊임없는 귀환과 진화

    과거 구미호는 퇴치해야 하는 ‘끔찍한 타자’였다. 그러나 최근엔 연민과 공감을 자아내는, 우리와 매우 닮은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그녀들은 ‘유혹자’로 나타나 ‘희생양’으로 사라진다. 구미호와 여우누이. 그녀들은 한국형 팜므 파탈의 전형으로, 남성을 향한 공격적인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며 일상의 바깥에서 일상의 중심으로 침투한다. 그녀들의 유혹에 남성들이 완전히 굴복할 때쯤, 그녀들은 사나운 ‘공격자’로 돌변하고, 인간-남성보다 수십 배 강력한 동물적 힘으로 인간사회를 위협한다. 그녀들의 존재는 인간사회의 안정된 질서를 위협하는 ‘침입자’로 규정되고, 인간의 지혜와 기지를 통해 구미호와 여우누이는 드라마틱하게 퇴치된다.

    동물과 인간 사이에서 서성이는 경계적 존재, 구미호와 여우누이. 그녀들은 인간의 유혹자로 나타났다가 인간이 그들에게 마음을 내주는 순간 공격자로 돌변하고 인간이 그 공격에 대응하는 비책을 찾아내는 순간, 처참한 희생양으로 사라져간다. 그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고, 멀리하기엔 너무나 매력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매년 여름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구미호 이야기. 여기에 ‘구미호의 딸’로서 여우누이의 캐릭터가 더해졌다.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서로 다른 고전 캐릭터가 하나의 콘텐츠에서 만나 상호텍스트성을 발휘하는 흥미로운 사례다. 본래 구미호 이야기와 여우누이 이야기는 서로 다른 이야기이지만, 남성의 배신으로 인간이 되지 못한 구미호와 그녀의 딸로 태어나 ‘원치 않는’ 구미호로 성장해가는 여우누이의 이야기는 ‘합체’되어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구미호 설화와 여우누이 설화는 각 지방에서 서로 다른 맥락으로 구전되어왔고 다양한 이본(異本)이 존재한다. 고전의 과감한 재해석과 리메이크가 대중문화의 중요한 원동력으로 자리 잡은 오늘날, 고전의 ‘재해석’ 자체가 새로운 창조적인 이본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로써 구미호와 여우누이 이야기는, 그 누구의 창조물로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는 열린 텍스트가 된다.

    구미호와 여우누이 이야기는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위협적인 여성의 힘을 통제하고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곤 했지만, 21세기의 구미호와 여우누이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를 횡단하는 경계적 존재로서 주목받는다. 즉 구미호와 여우누이가 ‘치명적인 여성, 위험한 여성’에 대한 경계와 추방의 서사였을 때는 구미호의 ‘여성성’이 주목받았지만, 그녀들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사랑과 연민의 주체로 떠오르는 지금 그녀들은 SF 영화의 인조인간이나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고뇌하는 늑대인간에 더욱 가까운 존재가 된다. 21세기 구미호와 여우누이는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그저 ‘인간이 되고 싶다’고 외치던 존재, ‘인간 이하의 존재’로 그려지던 과거의 구미호와 여우누이는 이제 인간이 얼마나 인간적인지, 인간의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존재, 즉 인간의 ‘성립조건’을 다시 묻게 하는 존재로 탈바꿈한 것이다. 구미호와 여우누이 설화는 문자 텍스트로 규정될 수 없는 구전문학이기에 시대가 바뀌어도 계속 ‘버전 업’되면서 ‘새로운 고전’으로 형성되는 흥미로운 텍스트다. 고전이 단지 다시 읽히고 리메이크되는 것이 아니라 고전 자체가 스스로 변형되는 새로운 창작의 현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드라마 ‘전설의 고향’의 최고 인기 캐릭터였으며,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설화의 주인공인 구미호는 21세기에 들어 어떤 문화적 의미로 재해석/재창조되고 있을까.

    2 원한과 복수를 꿈꾸는 여우 vs 추방과 퇴치를 꿈꾸는 인간

    구산댁을 첩으로 들이는 것은 괜찮습니다. 허나 양녀라니요? 우리가 딸이 없습니까, 아들이 없습니까. 누구의 씨인 줄도 모르는 연이를 어찌 양녀로 삼습니까.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 중에서

    한국형 호러(horror)물의 끊임없는 귀환과 진화

    ‘구미호 : 여우누이뎐’의 주인공 한은정. 이 드라마는 구미호 설화와 여우누이 설화를 합체하고 구미호의 ‘계급성’을 문제 삼음으로써 구미호 리메이크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여우누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외부에서 잘못 들어온 계집, 혹은 잘못 태어난 여자아이가 집안을 망치니 경계하라’는 내용으로 해석되곤 했다. 구미호 혹은 여우누이처럼 위협적인 여성을 제거하는 것은 오라버니 혹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구미호 설화에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여성에 대한 공동체의 경계심, 아무리 매력적인 여성이라도 가부장제의 질서를 위협한다면 ‘처치’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 사이에서 서성이던 구미호와 여우누이는 설화의 끝자락에서는 언제나 죽거나 사라짐으로써 ‘욕망의 대가’를 치른다. 구미호가 지닌 욕망의 핵심이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이라면 여우누이의 욕망은 ‘인간의 탈을 쓴 채 인간을 위협하는 여우’의 본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구미호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의 테마는 결국 인간사회와는 섞일 수 없는 구미호의 비극적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었다. 구미호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서 서성이다 결국 ‘비인간’의 세계로 추방되어야 했다.

    21세기에 들어 더욱 과감한 개작과정을 거친 구미호 관련 콘텐츠에서는 구미호를 통한 알레고리적 효과에 주목한다. 구미호를 말하지만, 결국 구미호 ‘이상’의 것을 말하고자 하는 텍스트가 늘어난 것이다. 드라마 ‘구미호 외전’이나 ‘호녀’ 이후 더욱 과감한 원작의 변형과정을 거친 구미호 서사는 단지 ‘옛날이야기’를 넘어 ‘지금-우리’의 절박한 사회문제를 은유하는 서사로 변형되고 있다. 특히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구미호 설화와 여우누이 설화를 합체하고, 구미호의 ‘계급성’을 문제 삼음으로써 구미호 리메이크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수십 년간 반복돼온 ‘전설의 고향’에서 가난한 떠꺼머리총각의 아내로 살면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현모양처형 구미호’. 2010년, 기존의 어떤 드라마에서보다도 더 ‘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구미호는 대가댁의 ‘후처’로 들어가면서 새로운 계급적 환경에 처하게 된다.

    ‘구미호: 여우누이뎐’에서 자신이 천년 묵은 구미호임을 알고 있는 ‘구산댁’과 달리 여우누이 ‘연이’는 자신이 여우의 유전자를 타고났다는 것을 모른다. 인간의 나이로 열 살이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여우가 될 것이니, 그때까지는 이 엄청난 사실을 비밀로 하고 싶은 구산댁. 구미호를 목격한 비밀을 10년 동안 지키기로 약속한 남편의 배신으로 결국 인간이 되지 못하자, 다시는 그 어떤 인간도 믿지 않겠다고 결심한 구미호. 그러나 그녀는 오갈 데 없는 자신을 거둬준 인간 윤두수에게 사랑을 느낀다. 점점 여우의 야생적 본능을 깨닫는 딸 연이조차 반가(班家)의 자제 정규 도령과 사랑에 빠지자 구산댁은 ‘구미호’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더 큰 혼란을 느낀다. 구미호와 인간이 결합하여 더욱 ‘인간적인’ 형질을 지닌 딸 연이와 구미호 자신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는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결정적으로 윤두수는 구미호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그녀를 후처로 맞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친딸 초옥의 불치병을 낫게 하기 위해 구미호의 딸 연이의 간을 희생제물로 이용하려 한 것이다. 윤두수는 구산댁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고, ‘내 울타리로 들어오너라’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윤두수라는 이 강력한 가부장이 통제하는 ‘울타리’ 자체가 매우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 본처와는 딸 하나를 두고 있고, 첫 번째 후실과는 두 아들을 낳았으며, 이제 ‘누구의 씨인 줄도 모르는’ 연이를 데려온 구산댁이 두 번째 후실이 된 것이다. 윤두수의 ‘첫 번째 관심’의 대상이 되기 위해 이 세 여인은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인다. 게다가 친딸 초옥은 오랜 병마와 싸우며 극도로 히스테리한 소녀가 되었고, 연이를 아끼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광기어린 질투심을 느낀다. 윤두수가 철저히 ‘관리’해야 하는 여성이 무려 다섯 명으로 늘었을 뿐 아니라 두 번째 후처인 구산댁과 딸 연이를 향한 온 집안 식구들의 경계심은 윤두수의 가장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자신의 딸’ 초옥을 살리기 위해 ‘타인의 딸’ 연이를 죽이기로 결심한 윤두수와 그의 본처는 시시각각 구산댁과 연이의 생존을 위협하며 ‘구미호의 비밀’에 점점 가까이 다가선다. 이렇게 구미호 설화는 ‘가족’의 테마를 중심으로 끌어들이면서 ‘가족의 울타리’에 포섭되지 못하는 여성들의 피비린내 나는 생존의 드라마로 탈바꿈했다. 구미호는 인간에게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사랑이나마 갈구하지만, 구미호를 형식적인 가족으로 받아들인 인간들은 구미호 모녀를 ‘인간 이하’로 대접하는 것이다.

    3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괴물 vs 괴물보다 더욱 괴물 같은 인간

    내 사랑이 피가 되어 흘러내린다 온 세상을 모두 빨갛게 물들인다. 이젠 너만 없으면 돼. 이젠 너만 없으면 돼. 입술을 물고 피눈물을 닦는다. 나의 사랑을 피눈물로 닦는다.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 OST’ 중에서

    한국형 호러(horror)물의 끊임없는 귀환과 진화

    KBS 드라마 ‘구미호:여우누이뎐’에서 구미호의 딸로 등장하는 연이. 엄마가 된 구미호는 제 아이를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감수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캐릭터로 변모한다.

    구미호가 ‘어머니’가 되면서 가장 자주 내뱉는 외마디 비명은 ‘내 새끼’다. 그녀는 오직 ‘내 새끼’를 지키기 위해 구미호의 구미호다움을 버렸다. 그녀는 구미호 사상 가장 ‘인간적인’ 구미호가 됨으로써 기존의 치명적인 팜므 파탈 캐릭터도,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횡단하는 매혹적인 반인반수(半人半獸)형 캐릭터도 완화시켜야 했다. 한국의 고전 설화 캐릭터 중 최고의 팜므 파탈이었던 구미호가 이렇게 ‘내 새끼’만을 챙기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천하의 강심장 구미호 같은 어머니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정작 ‘내 자식’ 하나 제대로 건사하기가 어려워진 팍팍한 현대사회의 은유가 아닐까.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단지 구미호의 복수극이 아니라 내 아이를 살리기 위해 남의 아이를 죽이고자 하는 지독한 어버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딸 초옥과 구미호의 딸 연이, 둘 다 살리고자 하는 것이 윤두수의 지성과 양심이지만 그의 치열한 내면의 고투 속에서 결국 ‘친딸’을 향한 마음이 승리하고 만다. 구미호 모녀의 험난한 인생을 향한 유일한 햇살이었던 윤두수의 양심은 그렇게 산산조각 난다. 그러나 그녀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수호천사가 있었다. 윤두수의 노비인 벙어리총각은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없이 구미호 모녀의 생사를 걱정하고 그녀들을 돕는다. 결국 마지막 희망은 ‘약자들의 연대’ 뿐인 것일까. 아무리 현명하고 고상한 정규 도령일지라도 반인반수의 여자친구를 감당할 수는 없는 걸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상함’을, ‘다름’을, ‘차이’를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까.

    구미호의 최첨단 진화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역설적으로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이나 현란한 분장술이 아니라 ‘옛이야기의 현재성’으로 우리를 긴장시킨다. 아득한 옛날이야기인 구미호와 여우누이의 서사가 바로 오늘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현장감이야말로, ‘우화’로밖에는 현실을 발화할 수 없게 된 현대인의 비애가 아닐까. ‘나보다 약한 사람을 희생시켜야 나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파렴치한 현실 인식이 구미호 모녀를 괴롭히는 윤두수 일가의 최종적인 계산이다. 또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 인식이 현대판 구미호 이야기의 ‘이본’인 ‘구미호: 여우누이뎐’에 반영된 것이 아닐까. 2010년판 구미호와 여우누이 이야기는 사람이 되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동물의 간을 파먹거나 셀 수 없이 많은 남자를 거리낌 없이 유혹하는 치명적 팜므 파탈이 아니라 가혹한 운명과 홀로 싸우는 비련의 여인, 나아가 생존을 위해 뛰고 또 뛰는 하층민 여성들의 알레고리처럼 느껴진다. 구미호의 ‘계급성’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다.

    구미호는 여전히 상투적이고 진부하면서도 그만큼이나 끈질긴 매혹과 신비를 잃지 않은 부동의 납량 특집 캐릭터다. 구미호는 어김없이 ‘귀환’했지만, 상당 부분 ‘진화’했다. 아무리 매력적인 구미호라도 결국 ‘구미호 퇴치론’으로 끝장나던 과거의 구미호 내러티브와 달리, 구미호는 ‘끔찍한 타자’가 아니라 ‘연민과 공감을 자아내는, 어쩌면 우리 자신과 매우 닮은’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스릴과 서스펜스로 승부하던 과거의 구미호와는 달리, 최근의 구미호는 ‘생존’ 그 자체와 싸우는 비련의 여주인공(‘구미호: 여우누이뎐’)이거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코믹 캐릭터(‘내 사랑 구미호’)로 변모하고 있다. 공포물의 단골 캐릭터였던 구미호가 비극적인 멜로물의 여주인공으로 변신할 만큼, 현대인의 삶은 ‘인간다운 삶의 마지노선’에 내몰리게 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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