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박진영
있네, 입추 햇볕은 몽글몽글한 손길로 굽은 허리 낱장을 목화솜꽃처럼
더디게 일으켜 세우네, 팔랑팔랑 낱장 넘기는 바람의 종종걸음이
참매미 떼 눈길을 끌지만 울음 그치고 내려오는 녀석, 없는, 오후,
파르르 울던 낱장에서 젊은 남자가 나와 나무의자에 걸터앉으며
옛 문자숲 흔들어 깨우네, 지난 계절에 심은 살구나무는 잎사귀마다
한 뼘씩 석양빛 그늘을 넓혔을 것인데, 계곡물에 뛰놀던 송사리 떼는
버드나무 아래 연약한 비늘 잃고 열반에 든 지 오래, 집 떠난 사람은
싸리문 너머 기웃기웃했을 것인데, 못내 버성긴 세월을 한 두릅 엮듯
그믐밤 보리밭만이 늦밤까지 수런수런, 말 못한 사연들 훑어내는 바람은
낱장을 차륵차륵 잘도 넘기는데 산등성이의 햇볕은 늙은 아내의
굽은 종아리를 따라 자박자박 걸어왔네, 검버섯 손등 밑 사라진 책을
애써 달래주려고 저녁밥상으로 이끄는데 올해는 참새 보금자리
마련해주고픈 삭정이 몇 개가 영혼의 책갈피에 사뿐히 내려앉는 것이
언뜻 보인 듯하였네
정묵훈
●미술전문지 ‘artplus’에 ‘문학으로 읽는 명화 이야기’ 연재
●2009년 시집 ‘불편과의 악수’ 출간(21문예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