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이재명 팬덤의 ‘레트로 매카시즘’

[강준만의 회색지대] 정치 팬덤이 정당 먹어버린 민주당 비극②

  •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입력2024-05-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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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속 면한 이재명·조국, 수감된 송영길의 차이

    • 이재명 구속영장 기각이 가져온 나비효과

    • 起死回生 이재명, 공천권 쥐고 복수혈전

    • 군사독재 ‘1971년의 만행’ 민주당이 재연

    • 정치가 종교 된 극단적 양극화 체제

    [Gettyimage]

    [Gettyimage]

    “이재명은 유창훈(영장전담 판사)이라는 뜻밖의 구원자를 만나 구속을 면함으로써 다시 한번 자신의 정치생명을 건 투쟁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에겐 행운이었겠지만, 민주당에선 정치 팬덤이 정당을 먹어버리는 갈등이 극한대로 고조되는 비극이 일어나게 된다.”

    지난 호에 쓴 글의 마지막 단락이다. 지난해 유창훈의 이재명 구속영장 기각은 ‘9·27 사건’이라고 불러 마땅할 정도로 한국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아니 이미 영향을 미쳤지만 앞으로 더 큰 영향을 미칠 현재진행형인 사건이다. 유창훈이 구속영장을 기각한 시각은 2023년 9월 27일 새벽 2시 23분쯤이었다. 이 시간까지 자지 않고 결과를 기다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에 대한 통계는 없지만, 그런 사람이 꽤 많았다는 설은 무성했다. 짐작일 뿐이지만, 지역적으론 호남인이 가장 많지 않았을까.

    구속영장 기각됐다고 ‘비열한 공작’이라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23년 9월 27일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유창훈 영장 전담 부장판사는 이날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 등 혐의를 받는 이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고 밝혔다. 
[공동취재사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23년 9월 27일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유창훈 영장 전담 부장판사는 이날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 등 혐의를 받는 이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고 밝혔다. [공동취재사진]

    자신들이 한국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지키고 싶어 하는 호남인들은 단지 물적 이익을 위한 지역주의적 선택을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건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고 싶어 한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이라면 모를까 민주화된 세상에서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 등의 혐의로 구속된 정치인을 대놓고 지지하기는 쉽지 않다.

    지역주의 투표 행태라는 게 상당 부분 주변의 ‘획일화 압력’에 순응하는 게 아닌가. 그런 혐의로 감옥에 구속된 정치인에 대해선 획일적 순응을 거부하거나 심적 갈등을 겪는 사람도 적잖이 나오게 마련이다. 밤을 새워가면서 이재명의 구속 여부를 확인하고 싶어 한 사람 가운데엔 이런 사람도 적지 않았을 거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최종 법적 판결이 어떻게 나오건 구속 여부는 정치인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4·10 총선에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맹활약을 한 이재명·조국과 구치소에 구속 수감돼 소나무당 대표로 광주 서구갑에 옥중 출마한 전 민주당 대표 송영길을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재명은 송영길과 마찬가지로 재판, 그것도 9개 혐의로 여러 재판을 받는 피의자이고, 조국은 항소심에서도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둘 다 구속을 면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유롭게 정치 활동을 하고 있잖은가. 오죽하면 송영길의 가족이 3월 26일 광주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는 야권 정치인이 많지만 유독 송 대표만 지금 차가운 겨울 감옥에 억류돼 있다”며 송영길의 보석 석방을 눈물로 호소했겠는가.



     3월 6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 다목적홀에서 열린 소나무당 창당대회에서 모니터에 송영길 소나무당 대표의 영상이 나오고 있다. 송 대표는 1월 31일 정당법 위반 및 정치자금법 위반,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혐의로 구속 기소됐고, 3월 14일 광주 서구갑에 옥중 출마를 선언했다. [뉴시스]

    3월 6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 다목적홀에서 열린 소나무당 창당대회에서 모니터에 송영길 소나무당 대표의 영상이 나오고 있다. 송 대표는 1월 31일 정당법 위반 및 정치자금법 위반,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혐의로 구속 기소됐고, 3월 14일 광주 서구갑에 옥중 출마를 선언했다. [뉴시스]

    이재명이 구속됐다면, 민주당은 풀이 죽고 기가 꺾였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유창훈 덕분에 구속을 피했다. 이에 열광한 민주당은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열고 대통령 윤석열의 대국민 사과와 법무부 장관 한동훈의 파면을 요구하는 입장문을 168명 의원 전원 명의로 채택했다. 민주당은 “윤석열 검사독재정권의 무리하고 무도한 ‘이재명 죽이기’ 시도가 실패했다” “애초부터 영장 청구는 부당한 검찰 폭력이자 정치 보복이었다” “정권의 참혹한 국정 실패를 감출 요량으로 검찰권을 동원, 악용한 비열한 공작, 그 자체였다”고 주장했다.

    구속영장 기각됐다고 ‘비열한 공작’이라니!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의 열광이 어찌나 기세등등했던지 마치 정권이 민주당 진영으로 넘어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민주당은 그런 기세를 몰아 2주 후에 치러진 10·11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을 17.15%포인트 차로 무릎 꿇게 만들었다. 언론은 이구동성으로 후보 공천과 관련된 국민의힘의 오만함에 대한 응징이었다고 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9·27 사건’ 효과였다. 그 효과는 반년 뒤 4·10 총선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니, 법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구속할 수도 있고 구속하지 않을 수도 있는 판사의 재량권 덕분에 구속영장 기각률이 법원에 따라 3배 차이가 나고, 같은 법원에서도 영장 전담 판사의 성향에 따라 기각 여부가 들쭉날쭉하다니, “이쯤 되면 로또”라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게 생겼다.

    “당원들이 그들의 정치적 생명 끊을 것”

    로또의 행운을 거머쥔 이재명이 이후 벌인 일은 복수혈전(復讐血戰)이었다. 체포동의안 가결 파동으로 원내대표 박광온과 최고위원 송갑석 등 비명계 인사들이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친명 지도체제’가 더 강고해진 상황에서 이젠 이재명이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이 없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재명의 측근 인사인 강위원은 체포동의안 표결 이틀 전인 9월 19일 “이번에 가결표 던지는 의원들은 끝까지 추적, 색출해서 당원들이 그들의 정치적 생명을 끊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재명은 체포동의안 가결 사태 하루 만인 22일 입장문을 통해 점잖은 언어로 당원들에게 적극 나서달라는 독려 메시지를 전했다. 그건 바로 “민주당의 부족함은 당의 주인이 돼 채우고 질책하고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바로 이날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 유시민은 “구치소에 가더라도 당대표직을 내려놓으면 안 되고 ‘옥중 출마’ ‘옥중 결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유튜브 영상을 올렸고, 이재명은 다음 날 이 영상에 ‘좋아요’를 눌렀다. 과연 ‘옥중 출마’ ‘옥중 결재’라는 희한한 풍경을 보게 될 뻔했으나 영장 전담 판사는 그런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재명의 구속영장 기각 소식이 전해진 지 4시간 30여 분 뒤 진행된 김어준의 유튜브 방송에는 이재명의 지지자들이 몰려들었다. 김어준은 영장 기각을 두고 “(윤석열 대통령이) 자기 정적을 검찰이란 칼로 마구 찔러대는 피 칠갑의 정치쇼를 벌였는데 불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서사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이어 “이재명 대표가 겪는 고초는 지지층에게는 자신이 겪은 것 같은 마음의 빚이 되는 것인데, 선거에서는 유권자들이 쌓아놓은 마음의 빚이 없으면 당선될 수가 없다”고 했다. 동시 접속 시청자 수는 한때 29만 명을 넘어섰는데, 시청자들은 “이재명 대표 꼭 대통령 되어라” “정의는 승리한다” “추석 소원은 이재명 건강 회복” 등의 댓글을 남겼다.

    늘 강성 지지자들과 완벽한 동조화를 과시하는 걸로 유명한 수석최고위원 정청래는 ‘윤석열 사과’와 ‘한동훈 파면’을 외친 동시에 “검찰과 한통속이 돼 이재명 대표의 구속을 열망했던 민주당 가결파 의원들도 참회하고 속죄해야 할 것”이라며 “당원과 지지자 국민들에게 피멍 들게 했던 자해행위에 대해 통렬한 반성과 사과를 요구한다. 그리고 반드시 외상값은 계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식으로 외상값을 받아내겠다는 것인지, 이는 수개월 후 인민재판식 추정에 근거한 ‘공천 보복’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 또한 로또인가. 이 영장 기각 하나가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게 되니 말이다.

    유창훈은 이례적으로 긴 분량인 총 892자의 기각 사유를 제시했다. 이걸 요약하면, ‘위증교사 혐의’만 소명됐다고 봤고, “공당의 대표로서 공적 감시와 비판의 대상의 대상임을 감안할 때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 대장동 사건, 백현동 아파트 개발 특혜 사건, 쌍방울 대북 불법 송금 사건과 관련해 구속 기소된 사람은 최소 24명 정도인 데다, 이들 사건에서 최종 결재권을 가진 사람은 이재명이었는데, 공적 감시 대상이라서 증거인멸의 염려가 없다는 건 난센스가 아닌가. 오히려 정반대로 당대표의 지위가 범죄 유관자의 증언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므로 증거인멸의 우려가 크다고 보는 게 상식이 아닐까.

    이재명이 로또 행운을 누리게 된 과정에 대해 다음 날 뒷이야기가 전해졌다. 조선일보 기자 양은경의 기사에 따르면, 이재명은 9월 26일 실질심사에서 “수사받고 있는 사건에 대해 형(刑)이 모두 선고되면 한 50년은 받을 것”이라며 “판사님의 결정이 저의 운명을 정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재명은 유창훈에게 “딱 하나만 부탁하는데 방어만 할 수 있게 해달라”며 “제가 조그만 방에 혼자 있으면서 검사 수십 명이 덤비는데 어떻게 방어를 하겠나”라고 말했다는데, 이 과정에서 이재명은 목이 메었다고 한다. 이어진 운명의 순간을 더 감상해 보자.

    “감정에 호소하는 이 대표의 최후진술에 대해 법정에 있던 검사들도 긴장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전까지 영장실질심사 분위기는 이 대표가 몰리는 쪽이었다고 한다. 당시 검찰은 2019년 1월 김성태 전 쌍방울 회장과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중국 선양에서 북한 조선아태위 송명철 부실장과 술자리를 가진 사진이 첨부된 보고서를 제시했다. 이 대표가 ‘보고받은 사실이 없다’고 하자, 영장 전담 판사가 ‘그걸 어떻게 보고를 안 받을 수 있나. 당연히 보고를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 대표가 ‘기억이 안 난다’는 식으로 말을 바꾼 것으로 전해졌다. 유 부장판사는 9월 27일 새벽 이 대표 구속영장을 기각했는데 한 법조인은 ‘목멘 이 대표를 보고 판사가 기각하겠다는 생각을 더 굳힌 것 아니냐’고 했다.”

    이재명이 애절하게 호소한 방어권은 물론 법적 방어권이었으며, 유창훈도 그렇게 알고 영장을 기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개월 후에 드러나게 되지만, 이재명은 법적 방어권엔 별 관심이 없었으며 재판에도 불출석하는 등 불성실한 자세로 임해 재판부로부터 ‘구인장 발부’를 경고받을 정도였다. 이재명 측은 “선거운동 기간에 후보자 불러서 재판하는 것을 처음 본다”고 투덜거렸지만, 이거야말로 “물에 빠진 놈 건져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속담에 딱 들어맞는 불만이 아닌가. 영장 심사 때 이재명이 “법적 방어권이 아닌 정치적 방어권을 위해 투쟁하겠다”고 말했다면, 그래도 유창훈이 영장을 기각했겠느냐는 것이다.

    비명계는 ‘인간쓰레기’ ‘국민의힘 프락치’?

    이재명이 구속을 면하자 “당원들이 그들의 정치적 생명을 끊을 것”이라고 했던 경고 또는 협박이 서서히 가동되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이는 ‘외상값’ 운운했던 정청래였다. 그는 10월 1일 “사람 쉽게 안 변한다. 고름은 살이 되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한겨레 논설위원 강희철은 “무자비한 응징을 다짐하는 이 뒷골목 언어에는 혐오와 비하의 적대 감정이 흘러넘친다”고 개탄했다.

    문재인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던 최재성은 KBS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 인터뷰에서 “정 의원은 개인 의원이 아니라 친명 지도부고 수석 최고위원 아니냐”며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무기명 비밀투표였는데 가결표를 색출해 징계하겠다는 건 불가능하고 당론으로 (부결 투표 방침을) 정하지도 않았다”며 “(징계하면) 파장이 더 커진다”고 지적했다. 최재성은 “민주당이 저렇게 무자비하게 해? 무자비하게 죽여? 이런 것이 여론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하면서 “외상값 갚는다는 표현 자체도 적절치 않지만 민주당으로선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원들을 동원하거나 자극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비명계 의원 이원욱은 10월 2일 ‘개딸’들이 보낸 살벌한 문자들을 공개했다. 그가 공개한 문자 내용을 살펴보면 ‘현수막에 이원욱 얼굴 사진 거니 더 역겹다. 나대지 말라’ ‘인간쓰레기. 민주당 탈당하라’ ‘국민의힘 프락치’ ‘해당 행위 하는 쓰레기’ ‘꺼져. 수박 아웃’ 등 원색적 비난 표현이 난무했다. 수박은 ‘겉은 민주당, 속은 국민의힘’이란 뜻으로, 주로 민주당 내 비명계를 지칭할 때 쓰이는 말이다. 이원욱은 “이 대표가 이장으로 있는 재명이네 마을 카페는 혐오 정치의 산실이 됐다”며 “이 대표가 ‘재명이네 마을’ 이장을 그만둬야 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10월 3일 비명계 의원 이상민은 KBS TV ‘더 라이브’에 출연해 ‘고름은 살이 못 된다. 외상값 치러야 할 때’라고 한 정청래 주장에 “정 의원이 강성 지지자들의 요구 사항이 빗발치듯 하니까, 팬서비스하는 것 아닌가 하는 정도다. (하지만) 고름, 색출은 아주 고약한 표현이다. 심하게 말하면 미개한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10월 4일 최고위원 박찬대는 KBS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 인터뷰에서 40여 명으로 추정되는 가결파의 이번 표결 등이 총선 공천 심사에 반영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공천은 결국 경선을 거쳐 진행해야 하니까 이 경선 과정에서 그동안의 행동, 발언, 평가 이런 것이 종합적으로 반영되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말했다. 당대표와 지도부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한 의원들을 사실상 가결파로 간주하겠다는 것이었다.

    10월 5일 비명계 의원 조응천은 라디오 ‘전영신의 아침저널’에 출연, 이상민·김종민·이원욱·설훈·조응천을 이른바 ‘가결파 5인’으로 지목한 징계 청원 글이 올라온 것에 대해 “이재명 사당화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는 “특정인을 중심으로 또 특정인의 보위를 위해 당이 운영되고,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른 소리를 내면 ‘수박’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온·오프라인에서 테러를 가하고, 과연 이런 정당이 공당이냐, 이런 정당이 민주정당이냐 얘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고 강조했다.

    윤리심판원 회부 기류가 당내에 흐르는 것에 대해서는 “저를 비롯해 5명 전부 가결 표결했다고 자인한 적이 없다”며 “어떻게 인정할까, 고문을 해서 인정했다고 치자. 그런데 당론으로 정한 바 없는 자유투표를 갖고, 양심에 따라 표결한 걸 갖고 어떻게 징계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그는 “설사 당론으로 정했다 하더라도 헌법과 국회법은 ‘의원은 국민의 대표자로서 소속 정당의 의사에 귀속되지 않고 양심에 따라 표결해야 된다’고 한다. 제가 몇 번이고 얘기를 하는 것”이라며 “그러면 당헌·당규가 헌법이나 법률보다 우위에 있는가”라고 꼬집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월 18일 서울 마포구 경의선숲길과 백범로 일대를 돌며 시민들에게 정청래(마포을)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3월 18일 서울 마포구 경의선숲길과 백범로 일대를 돌며 시민들에게 정청래(마포을)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모택동 홍위병과 무엇이 다르냐”

    이즈음 개딸들 사이에선 민주당 의원 총 168명을 나열하고 이들의 성향을 따져보는 이른바 ‘수박 당도 감별 명단’이 확산하고 있었다. 10월 5일 ‘수박아웃’ 사이트에 따르면 민주당 의원 168명은 △검사 탄핵 발의 불참 △불체포 포기 △대의원 1인1표제 반대 △민주당의 길 △민주주의 4.0 △원내대표단 등 6가지 기준에 따라 최고 당도 5부터 최저 당도 0까지 분류됐다. 해당 사이트는 한겨레신문 출신으로 한 인터넷 매체에 소속된 허모 기자가 만든 것이며, ‘당도 분류 기준’은 인터넷 매체 ‘더탐사’가 10월 2일 보도한 ‘민주당 수박감별기: 수박감별’ 기사에 따른 것이었다.

    이 사이트에서는 민주당 의원들이 6가지 기준을 충족할 때마다 1점씩 부여하고, 이를 ‘당도’로 표기했다. 명단은 강병원·김종민·윤영찬·최종윤·홍영표 등 5명을 당도 5로 분류했다. 김영배·박용진·양기대·오기형·이용우·이원욱·조응천 등 7명은 당도 4에 이름을 올렸다. 당도 3은 박광온·전해철·이상민 등 16명, 당도 2는 고민정·김한규 등이었고, 당도 1은 54명이었다. 반면 이재명을 비롯해 김의겸·박찬대·정청래·우원식 등 66명은 당도 0으로 분류됐다. 이 사이트는 당도와 상관없이 ‘수박 정치인’이라며 이원욱, 설훈, 고민정, 윤영찬, 조응천 등 5명을 공개적으로 저격했다. 이원욱에 대해서는 “이재명 비판 외에 다른 콘텐츠가 없다”며 “국민의힘 입당이 얼마 안 남은 듯”이라고 썼다. 고민정에 대해서는 “수박계라 그런 것인지 정무적 판단이 떨어진다. 중요한 순간마다 실수를 하는 것인지 애매한 행동을 한다”고 했다.

    이원욱, 조응천(오른쪽) 개혁신당 의원이 2월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22대 총선 경기 화성을과 남양주갑 출마 선언 기자회견을 마치고 이동하고 있다. 비명계 두 의원은 1월 10일 민주당 탈당 후 이준석 대표가 이끄는 개혁신당에 합류했다. [뉴시스]

    이원욱, 조응천(오른쪽) 개혁신당 의원이 2월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22대 총선 경기 화성을과 남양주갑 출마 선언 기자회견을 마치고 이동하고 있다. 비명계 두 의원은 1월 10일 민주당 탈당 후 이준석 대표가 이끄는 개혁신당에 합류했다. [뉴시스]

    이에 이원욱은 10월 6일 페이스북에 ‘팬덤 민주주의의 폐해를 다시 마주하며’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이 글에서 “‘수박’이라는 용어를 서슴없이 사용하는 지지자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해 묻는다. 당신들은 민주주의자가 맞느냐” “극단적 종교집단이나 모택동 홍위병과 무엇이 다르냐” “‘민주’라는 단어를 앞세워 민주를 오염시키고 있지 않으냐”고 했다. 그는 “이런 팬덤에 의지해, 팬덤을 결집해 정치하려는 이 대표에게도 민주주의에 대해 묻는다”며 “이 대표의 관심은 오직 순도 100% ‘이재명의 민주당’을 만드는 것이냐. ’누구의 민주당’이라는 용어가 민주주의 정당에 맞느냐”고 했다.

    이날 비명계로 꼽히는 박용진도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수박의 당도 측정이 지금은 우스갯소리처럼 되고 있지만, (새누리당에서도) 진박 감별사는 어떻게 보면 농담 비슷하게 시작된 이야기였다. 그런데 국민들이 볼 때는 엄청 불쾌한 얘기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새누리당을 패배의 길로, 박근혜 정권을 폭망의 길로 이끌었던 시초가 ‘진박 감별사’”라며 “수박 감별사 사태가 우리 민주당 안에서 벌어져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이날 이재명과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친명계 좌장’으로 불리는 정성호는 SBS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연해 자신이 이 사이트에서 당도가 0이 아니라 1로 분류됐다고 소개했다. 그는 “제가 검사 탄핵에 동의 안 했다고 (당도 1이 됐다)”며 “(라디오 출연하러) 오기 전에 ‘왜 탄핵에 동의하지 않았느냐’는 항의 문자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도를 지나친 표현에 대해서는 자제해야 할 것”이라며 “이재명 대표가 이미 여러 차례 ‘자제를 당부한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고 강조했다.

    정성호가 강성 당원들의 자제를 요청한 것은 평가할 만한 일이지만, 이재명이 그런 당원들에게 자제를 당부한 걸 이재명의 진심으로 본 것은 쓴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원욱의 말마따나 이재명이 ‘재명이네 마을’ 이장을 그만두고 자신의 팬덤을 대상으로 한 일체의 선전·선동을 중단하면 간단히 해결될 텐데 왜 마음에도 없는 하나마나한 자제 당부를 반복한단 말인가. 팬덤이 그런 당부를 듣지 않는다고 해서 이재명이 추가적으로 더욱 강한 메시지를 낸 적이 있던가.

    괴물과 싸우다 괴물을 닮아가는 비극

    “너 수박이지?”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1971년 대선 때 대학생들은 군사정권의 부정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참관인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참관인단으로 많은 부정선거를 목격한 학생들은 신민당을 방문해 부정선거를 여론화하기 위해 국회의원 선거를 보이콧하라고 요구했다가 정당법·선거법 위반으로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로 보내졌다. 며칠 뒤 검찰청으로 불려간 학생에게 검사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수박 타령을 했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학생에게 그는 다시 물었다. “너, 빨갱이잖아?” 수박과 빨갱이가 무슨 관계인가? 당황하는 학생에게 그가 설명해 줬다. 수박은 겉은 푸른데 속은 붉다는 점에서 겉은 우파인 ‘자유주의자’ 같지만 사실은 좌파인 경우로 공안당국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유형이라는 것이다.

    검찰청으로 불려가 검사의 수박 설명을 들었던 학생은 서강대 명예교수 손호철이다. 그는 10월 10일 경향신문에 쓴 칼럼에서 정청래의 ‘고름’ 표현에 대해 “군사독재가 저지른 ‘1971년의 만행’을 민주당이 재연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당을 전체주의로 이끌어가고 있는 ‘개딸’과 친명 강경파들이야말로 당을 망치고 국민의힘을 도와주는 ‘국민의힘 프락치’인 ‘진짜 수박들’ 아닌가?”라고 물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니 수박에 대한 개딸식의 용법은 분단 상황에서 오랫동안 사용돼 온 역사적 개념인 ‘수박에 대한 모독’이다. 민주당의 진짜 문제는 겉으론 민주당이란 ‘자유주의 우파’ 정당, 정확히 말해 ‘중도우파’ 정당에 속해 있지만 속은 ‘좌파’ 내지 ‘진짜 진보’인 ‘진정한 수박’ 의원이 없는 것이 아닌가? 수박, 만만세다! 수박이여 영원하라!”

    수박이란 단어의 비극적 역사성을 감안컨대, 오늘날 수박은 함부로 써선 안 될 말이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을 닮아가는 비극을 이처럼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사례가 또 있을까. 윤석열 정권을 군사독재정권의 후예라고 비난하는 이재명의 강성 지지자들이 군사독재정권에서 핍박을 받은 민주화 인사들과 김대중을 지지한 호남인들을 향해 썼던 그 몹쓸 표현을 단지 이재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정당의 구성원들에게 퍼부어대는 이 정신착란을 어찌할 것인가.

    1950년대 초반 미국을 휩쓸었던 ‘빨갱이 사냥’의 광풍 속에서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던 ‘매카시즘’은 이젠 한국에서도 사라진 지 오래다. 북한을 지지하는 언행에 대한 정당한 문제 제기마저 ‘색깔론’이라며 오히려 역공을 펴는 게 먹혀드는 현실이 아닌가. ‘수박 타령’은 역사의 유물로 사라진 그런 매카시즘을 이상한 방식으로 응용해 되살린 ‘레트로 매카시즘’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런 퇴행적 작태에 일부 호남인까지 가세하고 있으니, 이걸 가리켜 ‘역사적 비극’이라고 해야 할지 ‘역사적 희극’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지난해 10월 17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경기도청에서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경기도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지난해 10월 17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경기도청에서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경기도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군사독재정권 시절엔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한 발언만 해도 ‘수박’이라며 탄압을 하곤 했다. 민주당에서 수박 타령을 하는 강성 당원들의 행태도 비슷했다. 10월 17일 국회 행정안전위의 경기도 국감에서 이재명 아내 김혜경의 ‘법인카드 유용’ 의혹 문제가 다뤄졌다. 경기도지사 김동연은 국민의힘 의원들의 관련 질의에 “취임 전 경기도가 법인카드 유용 자체 감사를 통해 최소 61건에서 최대 100건이 사적 사용 의심이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며 “업무상 횡령·배임으로 경찰에 수사 의뢰를 했다”고 밝혔다.

    이 발언에 이재명 지지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강성 당원들은 이재명 체포동의안 표결 당시 가결에 투표한 민주당 의원들을 성경에서 예수를 배신한 제자 유다에 빗대 ‘가결 유다’라는 말을 썼는데, 김동연에 대해서도 “수박은 다 똑같네. ‘가결 유다’ 좀 처리하자. 같이 못 간다”고 비난했다. 김동연을 향해 “제2의 윤석열 같은 냄새가 난다”는 비난도 나왔다. 김동연의 죄는 무엇인가. 그 어떤 사실과 진실일지라도 이재명에게 불리한 걸 언급해선 절대 안된다는 게 이재명 팬덤의 한결같은 믿음이었는데, 그는 그 믿음을 배신했다는 것이다.

    비단 강성 팬덤만 그런 건 아니었다. 일반적인 이재명 지지자들의 지지 자세도 ‘무조건’이었다. 이재명이 어떤 일을 저질렀건 앞으로 또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무조건 이재명을 지지하겠다는 것이다. 이재명에 대해 국민의힘 지지층의 88.5%가 ‘유죄일 것’, 민주당 지지층의 72.0%가 ‘무죄일 것’(주간조선-현대리서치의 2023년 10월 13~14일 수도권 거주자 대상 여론조사)이라고 답하는, 정치가 종교가 되는 극단적 정치 양극화 체제하에선 정치는 가능하지 않았다.
    이런 토양에서 성장한 게 바로 강성 팬덤이다. 윤석열은 공정과 상식을 적극 수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걸 훼손하는 정치적 행태를 고수함으로써 그런 체제를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다음 호에 계속)

    강준만
    ● 1956년 출생
    ●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메디슨캠퍼스 언론학 박사
    ● 저서 : ‘발칙한 이준석: THE 인물과사상 2’ ‘싸가지 없는 정치’ ‘부동산 약탈 국가’ ‘한류의 역사’ ‘강남 좌파’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김대중 죽이기’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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