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호

배아는 인간인가, 아닌가

[난임전문의 조정현의 생식이야기]

  • 난임전문의 조정현

    입력2024-05-10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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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아를 동결하고 있다. [Gettyimage]

    배아를 동결하고 있다. [Gettyimage]

    배아는 생식세포인 정자와 난자가 수정해 이뤄진 수정란으로 생명의 첫 세포다. 아이 밸 배(胚)에 싹 아(芽)로 ‘생명의 싹’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의학적으로는 수정 후 조직과 기관으로 분화가 마무리되는 임신 8주까지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배아를 생명(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최근 미국 앨라배마주 대법원은 시험관아기시술(IVF)에서 자궁 내 이식을 위해 동결 보존하고 있는 냉동 배아를 태아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법원 해석을 정리하자면 병원 관계자든 일반인이든 누구라도 배아를 파손했다면 살인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가 임신을 위해 체외수정술인 시험관아기시술(IVF)를 시도한 지 49년째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날벼락 같은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세계 의료계가 미국 법원의 과감한 판단(배아를 인간으로 간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특히 생식의학 종사자 중에는 당혹스럽다 못해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라고 불편한 심기를 내보이는 이가 적지 않다.

    필자만 해도 그렇다. 담당 판사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토대로 판결문에 성경 문구를 포함하면서까지 ‘냉동 배아의 파손은 사람의 생명을 끝내는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한 것이 의아할 따름이다. 배아는 생명의 근원(씨앗)일 뿐이지, 생명 자체로 의미를 부여하며 사람으로 규정한 것은 억지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생명이 정자와 난자의 결합(수정란/배아)에서 시작되는 것은 맞지만, 생명이 완성되려면 자궁 내 착상이 되고도 세포분열의 긴 여정을 끝까지 완수해야 한다. 그러니 배아 자체를 생명체로 봐서는 안 된다.

    헌재 ‘초기 배아는 아직 생명 아니다’ 판시

    수정된 지 3일 된 배아. [위키피디아]

    수정된 지 3일 된 배아. [위키피디아]

    배아를 생명 자체로 보았다면 생식의학이 오늘날 이토록 눈부시게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난임병원 배양실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개의 배아를 배양하고 있다. 냉동 배아의 경우 해동할 때 배아가 손상돼 못쓰게 되기도 한다. 배아의 유형, 동결 방법, 배아의 질도 영향을 미친다. 해동한 후 세포분열 재개가 안 돼 자궁 내 이식이 불가능한 배아가 상당수다. 그렇기에 동결할 배아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해동 후 생존 가능성까지 감안해 판별하는 것이 포인트다.



    ‘이식 불가’ 판정을 받은 배아는 모두 폐기될 수밖에 없다. 미국 앨라배마주 대법원의 판결대로라면 배양실 연구원은 모두 생명을 유기(遺棄)하는 것이 된다. 미국 국민의 66%가 ‘냉동 배아도 사람’이라는 대법원 판결에 반대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난임병원 체외배양실에서는 배아(수정란)를 배양하고 남은 배아를 냉동시키거나 폐기처분(이식 불가 배아)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 IVF에서 자궁 내 이식 후 남은 배아(착상 가능성 있는 배아)를 다음 시술에서 쓰기 위해 영하 196℃의 액체질소에 넣어 급속도로 냉동한다.

    단, 동결 기간은 제한적이다. 배아의 보존 기간이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일명 생명윤리법)에 의거해 5년밖에 되지 않아서 연구 목적으로 이용에 동의한 배아 외에는 모두 폐기하고 있다. 따라서 연간 수만 개의 배아가 폐기물관리법 제13조에 의거해 폐기 처리되는 실정이다.

    한때 국내에서도 인간 배아를 폐기물로 처리한다는 것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배아줄기세포, 유전자 치료 등으로 인간 배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생명과학 기술 발전에 가속도가 붙은 1990년대부터 배아를 언제부터 생명으로 봐야 하는지를 놓고 의견 대립이 팽팽했다.

    국제줄기세포학회(ISSCR)가 정한 생명윤리 가이드라인은 배아 연구를 수정 후 14일 이내까지만 허용했다. 수정 후 14일이 지나면 뇌와 척수가 분리되는 원시 신경관 윤곽이 생기므로 비로소 생명의 실질적 시작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도 수정으로부터 2주까지는 ‘초기 배아’로만 인정, 생명(인간)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동결 보존된 배아는 수정으로부터 3~5일밖에 안 되는 포배기 배아이므로 생명(인간)일 수는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철학계에서도 초기 배아(수정으로부터 10일까지)는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다.

    배아가 생명이라면 낙태에 대한 해석도 바뀌어야 마땅하다. 지금 유럽은 태아의 생명도 중요하지만 여성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임신 12~14주 이전)한다. 미국도 주(州)마다 낙태할 자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그러니 냉동 배아를 손상케 하면 살인죄를 적용하는 주가 있는가 하면, 임신 20주에 낙태해도 문제가 안 되는 주도 있다.

    어디까지나 짐작이지만, 냉동 배아를 사람으로 규정한 판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 난임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설령 그렇더라도,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는 중용의 도를 저버린, 시대에 뒤떨어지는 판결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작금의 시대를 사는 법조인, 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치인 등은 의과학적 사고와 시대 흐름에 민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동결 배아 5년 보존 연한 재검토해야

    필자는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바람이 있었다. 국회의원의 전직(前職)이 다양했으면 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법령을 제정하고 개정하는 일 외에 사회를 통합하고 이끌어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 누구보다 시대 흐름에 민감하고, 현실 감각과 과학 지식을 쌓아야 한다. 배아만 해도 그렇다. 미국과 한국에서 받는 대우가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미국에서처럼 배아를 인간(생명)으로까지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그렇다고 폐기물 취급을 받으며 5년까지만 동결 보존할 수밖에 없는 한국 난임병원의 현실에도 불만이 없지는 않다. 난임병원에는 동결 보존된 잔여 배아는 많다. 잔여 배아는 둘째, 셋째를 임신할 가능성을 의미한다. 부부가 원한다면 10년 이상 동결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는 출산하지 않겠다던 여성도 나이가 들어 마음이 바뀌어 IVF를 하러 오는 경우가 많다. 이때 과거 동결한 배아가 남아 있다면 힘들게 과배란 주사를 맞고 난자를 채취해야 하는 부담이 줄어 좀 더 수월하게 임신에 도전할 수 있다. 실제로 한 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채취한 난자로 수정된 배아의 임신율이 훨씬 더 높다.

    최근 난임병원에서는 냉동 배아 이식이 신선 배아 이식보다 더 활발하게 행해지고 있다. 직장을 다니는 여성이 많아지면서 IVF 시술의 시간적 제한이 있는 신선 배아 이식보다 몸도 편하고 시간 여유가 있는 냉동 배아 이식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시기에 간단한 방법으로 동결 배아를 이식받을 수 있어서다. 여성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임신과 출산 시간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생명윤리법도 시대적 요구와 사회 구성원의 기대에 부응하는 쪽으로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법 제정의 최전선에 있는 국회의원들이 과학적 마인드로 세상을 해석하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조정현
    ● 연세대 의대 졸업
    ● 영동제일병원 부원장. 미즈메디 강남 원장.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교수
    ●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
    ● 現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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