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그린 크리스토퍼 놀런과 그의 영화가 주인공이다. 한국 대중에게는 시상식 면면보다 ‘아시안 패싱’이 이슈가 됐다. 물론 미국 내에서는 이를 우리처럼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카데미는 영화 산업 최대의 축제이며 4년 후면 100주년을 맞이한다. 안타까움과 분노를 잠시 뒤로 하고 아카데미에 얽힌, 소소하지만 들어보기 어려웠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 [위키피디아]
어쩌다 보니 ‘아카데미 시상식’으로
그는 1919년 메이저 제작사에 맞서 찰리 채플린, 메리 픽포드 그리고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이던 D. W. 그리피스와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를 설립한 진정한 할리우드의 황제였다. 페어뱅크스는 1920년, 오랫동안 불륜 관계였던 ‘미국 국민 여동생’ 픽포드와 재혼한 이후 영화보다는 사업에 눈을 돌렸다. 그는 유명한 사업가 시드 그래우만의 투자를 받아 300개의 객실과 63개의 스위트룸을 갖춘 12층짜리 호텔을 완공하면서 여기에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이름을 붙였다. 루스벨트 호텔(Hollywood Roosevelt Hotel)은 그 유명한 할리우드 언덕과 사인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페어뱅크스는 AMPAS 존재를 부각하고 호텔을 전국적으로 알리기 위해 이벤트를 계획했다. 1929년 5월 16일 이 호텔의 블라섬 룸에서 열린 첫 번째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렇게 세상에 존재를 알렸다. 1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이미 3개월 전에 수상자가 발표되고 세리머니는 15분 만에 마무리됐다. 사업적 복안으로 시작한 아카데미 시상식이 지구촌 영화 관계자들과 영화 팬의 최대 축제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요절한 페어뱅크스는 상상이나 했을까.
첫 번째 시상식에서는 최고 작품상을 포함한 12개 부문 시상이 진행됐다. 눈에 띄는 점은 ‘최고 작품상’이 ‘뛰어난 영화(Outstanding Picture)’와 ‘가장 독특하고 예술적인 영화(Best Unique and Artistic Picture)’ 두 부문에 걸쳐 시상됐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 세기 전에도 영화를 ‘산업’과 ‘예술’로 구분 짓는 경향은 존재했다. 그런데 AMPAS는 이듬해 두 부문으로 나눠 시상했던 결과를 뒤집어 ‘가장 독특하고 예술적인 영화’를 ‘뛰어난 영화’에 통합했고, 이를 1회 시상식에도 소급 적용했다.
1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고 작품상 수상작 ‘날개들 Wings’(1927) 포스터. [IMDB]
조르주 뒤아멜은 일찍이 할리우드 영화를 가리켜 ‘노예들의 소일거리’라고 경멸했다. 이런 멸칭을 듣던 스펙터클 영화가 지금은 전 세계 영화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첫 번째 아카데미 시상식은 1세기 가까이 지속된 ‘축제’의 서막을 알리면서 예술보다는 산업에 방점이 찍히게 될 미국 영화의 방향성을 대중에게 인식한 사건이었다.
영화제 개성 담긴 ‘최우수 작품상’ 명칭
12개 부분으로 시작한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사이 사운드, 단편, 애니메이션, 음악 부문 등이 추가되고 최우수 코미디 작품상과 최우수 조감독 부문은 삭제됐다. 첫해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날개들’은 무성영화였다. 1927년 워너브라더스가 최초의 토키(talkie·발성영화) ‘재즈싱어(Jazz Singer)’를 론칭하면서 무성영화는 급속하게 사라졌다. 1929년 개최된 2회 수상작은 모두 ‘소리’가 들어 있는 영화다.2회 시상식부터 최고 작품상 부문이 단일화됐지만, 명칭은 여전히 ‘뛰어난 영화’였다. 최우수 작품상에 대한 명칭은 이후 여러 번 바뀐다. 5회부터 13회 동안은 ‘뛰어난 제작(Outstanding Production)’, 14~16회는 ‘뛰어난 활동사진(Outstanding Motion Picture)’, 17~34회에 걸쳐서는 ‘최우수 활동사진(Best Motion Picture)’으로 불렸다. 최우수 작품상이 현재와 같은 명칭(Best Picture)으로 불린 것은 1963년 35회 시상식부터다.
시상식(Awards)과 더불어 각종 영화제(Film Festival)는 최우수 작품 부문을 가장 중요하게 취급한다. 일반적으로 최우수 작품은 ‘Best Film’으로 불린다. 그런데 영화제마다 최우수 작품상 명칭에 개성을 부여해 서로 다른 이름을 쓴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칸영화제는 황금종려상(Palme d’Or),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베니스영화제는 황금사자상(Leone d’oro), 3대 영화제 가운데 정치색이 가장 짙다고 알려진 베를린영화제는 황금곰상(Goldener Bär)이라고 부른다. 관객의 참여를 중시하는 토론토영화제의 최우수 작품상은 취지에 걸맞게 관객상(People’s Choice Award)으로 갈음한다.
미국의 아카데미에 대항해 설립된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과 프랑스의 세자르 시상식(César du cinéma)은 최우수 작품상을 모두 Best Film으로 지칭한다. 물론 일반적인 영화제에서도 최우수 작품상은 대부분 Best Film으로 불린다. 상 이름에 관해 이렇게 길게 늘어놓는 의도를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왜 ‘Best Film’ 아닌 ‘Best Picture’로 부르는가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토스코프. [위키피디아]
에디슨이 처음으로 모션픽처를 만들었지만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한 것은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의 발명품이었다.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 국가들은 이 새로운 발명품을 Film, Kino, Cinema로 지칭했지만, 미국에서는 직관적 명칭인 활동사진으로 불렀다. 그러므로 Motion Picture라는 영화를 표하는 단어는 이 신문물의 기원이 미국임을 명시적으로 표명한 것이리라.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영화 종주국 논쟁은 여전히 뜨겁다. 에디슨의 영화는 극장이 아닌,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라는 일종의 핍홀(peep hole) 상자를 통해 한 사람씩 볼 수 있었다. 반면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는 파리의 그랑 카페 지하의 인디언 살롱이라는 어두운 공간, 즉 ‘영화관’에서 영화를 상영했다.
에디슨은 패했고 그의 아이디어에서 착안한 뤼미에르 형제가 승리함으로써 영화 교과서에는 뤼미에르 형제를 영화의 아버지로 기술한다. 전투에서 승리한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는 20세기를 지배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가 본격적으로 점화된 21세기에는 ‘아버지’로 인정받지 못한 에디슨이 복권될 수 있는 새로운 영화 관람 문화가 조성됐다. 비디오테이프, 레이저 디스크, VCD, DVD를 거쳐 이제 영화는 파일을 내려받아 노트북으로 보는 시대를 맞았다. 게다가 코로나 사태를 거치면서 영화 팬들은 극장보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는 것을 선호하게 됐다. 에디슨이 발명한 1인 관람 영화 상자, 키네토스코프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명칭으로 시작된 기원 논쟁은 영화의 개념마저 흔든다. 우리는 이쯤에서 한 번쯤 다음과 같은 앙드레 바쟁의 저서 제목이자 오래된 ‘질문’을 다시 상기해야 할 것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아흔여섯 번째 영화 축제를 보면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2019년 5월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만장일치로 수상했다. [뉴시스]
“아카데미 시상식은 국제영화제가 아니다. 그저 ‘로컬(지역 영화상)’일 뿐이다.” “(자막이 깔리는)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봉준호의 명언은 널리 회자됐다. 봉준호는 따끔한 경고 못지않게 유머와 감동도 잊지 않았다. “오스카가 허락한다면, 이 트로피를 ‘텍사스 전기톱’(미국 공포영화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에 등장하는 살상 무기)으로 5등분해 다른 감독들과 나누고 싶다”고 말하면서 패배자들을 위로하는가 하면, “어릴 때 영화를 공부하면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란 말을 마음에 새겼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바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다. 그의 영화를 보며 공부한 사람으로서 함께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너무 큰 영광이다”라는 소회는 미국 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노장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한 2021년, 93회 시상식은 평상시보다 두 달 가까이 연기되면서 덩달아 영화 팬의 관심도 멀어졌다. 92회 시상식을 지켜본 미국 내 시청자가 2360만 명이지만, 2021년에는 절반도 되지 않는 1040만 명에 그쳤다. 2022년부터 시나브로 시청자 수가 올라갔지만 올해 시청자는 봉준호의 해이던 2020년보다 적은 1950만 명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제임스 캐머런의 ‘타이타닉(Titanic)’이 14개 부문 후보에 올라 11개 부문에서 수상한 1998년 시상식은 미국에서만 5700만 명이 시청했다.
코로나19 사태로 한동안 아카데미는 잠시 일부에 한해 OTT 영화에도 ‘자격’을 부여했지만 현재는 다시 예전 체제로 복귀했다. 영화는 여전히 ‘동영상’을 자신의 영역에 끼워주지 않는다. 간편하면서도 팬데믹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OTT는 극장에 대항해 자신의 몸집을 더욱 부풀릴 것이다. 영화의 영토를 둘러싼 에디슨과 뤼미에르의 전투가 재개된 현재, 오래된 제방은 간신히 버티고 있다. 1회 시상식에서 ‘뛰어난 영화’와 ‘가장 독특하고 예술적인 영화’로 나눠 작품상을 시상했던 아카데미는 조만간 OTT와 극장용 영화를 구분해 시상하게 될 것이다. 이런 타협은 당분간 지속되겠지만 결국에는 새로운 흐름이 제방을 무너뜨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우수 영화상의 명칭 변경, 에디슨과 뤼미에르의 기원 논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깨워주는 또 하나의 진실이자, 미래의 풍경이다.
‘로다주’와 에마 스톤의 무심한 패싱
2024년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수상자 에마 스톤(왼쪽에서 세 번째)이 전년도 수상자인 양자경(왼쪽에서 두 번째)을 무시하고 지나쳐 ‘아시안 패싱’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Gettyimage]
2023년 95회 아카데미의 주인공이 ‘애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서부전선 이상 없다’였다면, 올해는 ‘오펜하이머’와 ‘가여운 것들’이었다. ‘애브리씽…’과 ‘오펜하이머’는 11부문 후보에 올라 7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서부전선…’과 ‘가여운 것들’은 4개 부문에서 영광을 누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올해 시상식도 다사다난했지만 수많은 에피소드 중 가장 주목을 끈 사건은 아시안계 배우를 무시하고 지나갔다는 이른바 ‘패싱’ 논란이다. 로다주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가여운 것들’로 두 번째 여우주연상을 받은 에마 스톤은 약속이나 한 듯, 전년도 수상자인 호이 콴과 양자경을 지나쳐 백인 동료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 자리에 흑인 배우가 있었더라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었겠지만 아시안 배우라서 그런지 미국 내에서 큰 소란은 없었다.
로다주와 에마 스톤의 행동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이 자연스러움 속에 문제의 핵심이 존재한다. 무의식에 스며든 ‘차별 의식’을 두 배우는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 세계 영화 팬이 지켜보는 영화산업 최고의 축제에서 그들은 ‘의식’했어야 했다. 우리를 매일 숨 쉬게 해주지만 어느 누구도 평상시 공기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우리를 슬프게 한 것은 차별이 공기와 같은 무의식에 근원을 둔다는 점이다. 정치적 올바름(PC)을 행사하기 위해서 인간은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그들이 비난받아야 한다면, ‘각성’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다. 아니 각성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이 진정 비난의 요체가 돼야 한다. 의식·각성·노력이 필요한 정치적 올바름의 길은 그래서 어렵다.
100회 시상식을 기대하며
주요 부문 수상 이외에 가장 눈에 띈 이슈는 멜 브룩스(Mel Brooks)의 공로상(Honorary Award) 수상이었다. ‘의적 로빈후드’(1991)를 패러디한 ‘못 말리는 로빈 훗’(1993)을 기억하는 영화 팬들이 있을 것이다. 브룩스는 패러디 코미디 장르를 개척한 인물이다. 이보다 그의 업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브룩스가 EGOT(Emmy, Grammy, Oscar, Tony)를 거머쥔 역대 19명의 예술가 중 한 사람이란 사실이다. 방송·음악·영화·연극에 이르기까지 그는 정말 다재다능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역전의 용사였다. 그는 1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개최되기 두 해 전에 태어났다. 브룩스가 연출한 ‘불타는 안장’(1974), ‘프로듀서스’(1967), ‘영 프랑켄슈타인’(1974)은 미국영화연구소(AFI)가 선정한 최고의 코미디 영화 리스트에서 각각 6위, 11위, 13위를 기록했다.1926년생인 브룩스는 4년 후, 아카데미가 100주년을 맞이하면 102세가 된다. 그때 그가 다시 공로상을 수상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채플린도 1회와 44회 때 공로상을 두 차례 받았다. 1972년 시상식에서 찰리 채플린은 역사상 가장 긴 12분간 기립 박수를 받았다. 브룩스도 채플린처럼 두 번의 공로상을 수상할 자격이 충분하다. 이제는 공로상을 미리 시상하기 때문에 본 시상식에서 볼 수 없지만 100주년 기념 이벤트로 살아 있는 영화사 자체인 브룩스가 기립 박수를 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 Long live Brooks!
김채희
● 1990년 출생
●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졸업
● 부산대 대학원 박사
●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등단
● 現 부산대 영화연구소 연구원 및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