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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은 부모가 물려준 다부진 몸으로 물지게를 져 간신히 입에 풀칠했다. 남산 중턱에 자리 잡은 고래등 같은 대저택들은 북촌 명문가 자제들의 별장이었는데, 밤낮없이 열리는 잔치 탓에 똥지게꾼과 물지게꾼이 끝없이 드나들었다. 이홍은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돈을 잘 벌려면 물지게를 빨리 버리고 똥지게를 져야 했다. 이홍은 지게 지는 법에 익숙해지자마자 똥지게로 갈아타 제법 큰돈을 만질 수 있었다. 온몸에서 진동하는 똥 냄새는 돈 냄새였고, 돈은 세상 온갖 시름을 잊게 해주는 도깨비 방망이였다.
그는 처음으로 고운 한복을 맞춰 입고 운종가를 누벼보았다. 사람들 대접이 완연히 달라졌다. 우쭐해진 그가 엽전 몇 냥을 거지들에게 던져주자 그들 눈에 비친 자신은 나라님이 따로 없었다. 이홍은 내친김에 홍등가에 들어서서 한양 갑부 행세를 해보았다. 처음엔 미심쩍어하던 우두머리 기녀가 그의 돈 씀씀이를 유심히 지켜보더니 바싹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못 뵀던 분인데, 어디 사시는 뉘슈?”
술기운이 적잖이 돌았겠다 어차피 똥지게꾼 인생에 두려울 것도 없었기에 그는 거침없이 소리쳤다.
“날 몰라? 이 이홍이를? 그럴 만도 하긴 해! 청나라에서 막 돌아왔다네.”
“청나라? 청나라 어디? 여기 오시는 도련님들 다 청나라 다녀오신 분들인데.”
말문이 막힌 이홍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때 옆을 지나가던 선비 한 명이 불쑥 다가와 말했다.
“아니, 이거 이홍 아니신가?”
첫 단추
이홍은 상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지만 전혀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이홍이 어색하게 일어서며 물었다.“누구신데 제 이름을 아시는지?”
상대가 이홍을 덥석 끌어안으며 호탕하게 말했다.
“연경에서 함께 어울리던 날 몰라? 나 백시봉일세!”
“백시봉?”
“그래! 내 아버님이 이조판서 되시는 백대붕 대감 아니신가? 벌써 다 잊었나?”
이홍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상대 품에 안겨 있는 사이 우두머리 기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귀한 새 손님 오셨다! 시봉 도련님이랑 연경에 계시던 분이란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나타난 어린 기녀들이 이홍과 시봉의 팔짱을 끼고 내실로 이끌었다. 영문도 모른 채 산해진미를 배불리 먹은 이홍이 못내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해 시봉에게 넌지시 물었다.
“우리가 진정 연경에서 만났다고 믿으시는 게요? 혹시 비슷한 얼굴을 혼동하신 건 아니고?”
소갈비를 뜯던 시봉이 눈을 부라리며 대답했다.
“뭔 헛소린가? 어서 먹을 것 챙겨 먹고 오늘밤엔 우리 집에서 자고 가시게!”
상대를 빤히 노려보던 이홍은 마침내 자포자기의 마음에 빠져들었다. 그는 근심걱정을 내려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어차피 시작한 허풍이라면 갈 때까지 가보고 정 안 되면 이번 생을 장렬히 하직할 심산이었다. 그는 고주망태가 됐다.
식사를 마친 시봉은 외상 장부에 멋지게 서명하고 주점 밖으로 나섰다. 비틀대며 그의 뒤를 따르던 이홍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물었다.
“댁네가, 아니 댁이 어디슈?”
묵묵히 뒷짐 지고 서 있던 시봉이 빙글 몸을 돌리더니 매정한 말투로 속삭였다.
“술은 왜 그리 많이 처먹는 거야? 자칫 실수할 뻔했잖아!”
“무슨 실수를?”
이홍 앞으로 다가선 시봉이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대답했다.
“너 진짜 날 몰라? 나 너랑 같이 똥지게 지는 달보야. 백달보!”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듯 충격에 빠진 이홍이 눈을 치켜떠 상대를 바라봤다. 취기가 달아나며 희미한 이성의 빛이 깜빡이며 되돌아왔다.
“백달보라면, 왜, 어쩌다 양반 노릇을 하는 겐가? 걸리면 개죽음인데?”
콧방귀를 낀 달보가 음산한 표정으로 말했다.
“걸리기 전에 사라지면 돼! 오늘 이 주점 마지막 오는 날이었어. 조금 아쉬울 때 연을 끊어야 하거든. 암튼 도와준 걸 감사히 여기고 앞으론 알은체 하지 마.”
표표히 멀어지는 달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홍은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날따라 달빛도 고왔고 회색으로만 보이던 한양이 알록달록 윤기를 머금고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래도 세상이 살 만하다고 여긴 첫 순간이었다.
소매치기
똥지게꾼 백달보는 그 후로 이홍을 본체만체했다. 평소 동료들에게 별 관심이 없던 이홍은 달보의 행동거지에 무섭게 집중했다. 그가 존경스러웠다. 약삭빠르기론 첫째라는 운종가 주점 주인을 속이고 양반 행세를 해서가 아니라, 그러면서 그가 보여준 담대함과 극도의 뻔뻔함이 너무 부러웠기 때문이다. 그건 당시 이홍으로선 꿈도 꿀 수 없는 탁월한 재능이었다.어느 날 곰방대를 물고 휴식을 취하던 이홍에게 달보가 다가와 앉았다. 대갓집 뒷간 하나를 말끔히 치운 뒤였다.
“너 내가 경고했을 텐데?”
상대의 음성에서 위험을 느낀 이홍이 얼른 곰방대를 내려놓으며 자리를 옆으로 옮겼다. 달보가 다시 말했다.
“왜 날 관찰하는 거지? 너 자꾸 날 훔쳐봤잖아? 무슨 꿍꿍이야?”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이홍이 대답했다.
“부러워서 그랬네.”
“부러워? 내가?”
“실은 존경하고 있네.”
눈을 가늘게 뜬 달보가 이홍의 곰방대를 자기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존경이라. 너 한때 양반이었다며? 난 부모 성도 몰라. 백 씨라고 했다가 천 씨라고도 하고, 뭐 나중엔 만 씨로 살 생각이거든.”
“자네의 용기가 정녕 놀랍고 본받고 싶다네.”
“용기? 그게 용기로 보였어?”
“분명 사내다운 기개였거든! 적어도 나한텐 말일세.”
말없이 이홍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던 달보가 곰방대를 바닥에 툭 던졌다. 그에게선 백시봉을 가장하던 때와 같은 위풍당당함이 느껴졌다. 달보가 천천히 입을 뗐다.
“난 서문 밖 소매치기 출신이야. 장터에서 잔뼈가 굵었지. 사람들 소매 째는 걸 누구보다 잘했어. 그런데 왜 똥지게나 지고 있냐고?”
이홍이 고개를 끄덕이자 달보가 두 다리를 쭉 펴며 말했다.
“소매치기는 혼자 못 해. 내가 소매를 쨀 동안 바람잡이가 옆에서 상대 시선을 흩어놔야 해. 안 그러면 예민한 것들은 금방 눈치를 채거든. 일단 물건을 훔치면 난 그걸 재빨리 발 빠른 배달꾼에 넘겨. 계속 가지고 있다간 낭패를 보거든. 배달꾼은 뜀박질 잘하는 두세 명으로 무리를 이뤄서 움직이지. 한데 간혹 포졸들에게 걸리기도 해. 그럼 포졸들 추격을 막아주는 방해꾼이 투입돼. 지게를 지고 있다가 물건을 길바닥에 엎어버리는 거야.”
달보가 자신의 얘기를 경청하는 이홍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입을 뗐다.
“나랑 함께 일하던 배달꾼 하나가 포청에 잡혔어. 하필 훔친 물건을 품고 튀던 놈이었지. 그 후 우린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하고 있어.”
이홍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내게 그 기술들을 가르쳐줄 순 없겠나?”
세상을 훔치는 기술
이홍은 스승인 달보로부터 많은 걸 배워나갔다. 멀쩡한 남의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로 대중을 현혹하며, 엉뚱한 말로 자신의 죄를 잡아떼는 방법을 차례로 익힌 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났다. 배운 기술을 써먹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던 그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자신 안에 숨어 있던 능력을 발휘했다.여느 때처럼 똥지게를 지고 남산 남쪽 기슭의 거름 보관소로 가던 이홍은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포청 감옥에 가보니 이미 잡혀온 달보가 피투성이가 돼 누워 있었다. 운종가 주점에서 고용한 왈짜패 손에 잡혀 포청에 넘겨진 것이었다. 달보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놈이라도 공범을 불면 살려주겠다는데 별수 없지 않아? 미안하지만 재수 없었다고 생각해.”
이홍은 달보의 몸 상태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어차피 살아도 사람 구실하기는 힘들 정도로 곳곳이 부서져 있었다. 감옥 벽에 기대 우두커니 생각에 잠겼던 이홍이 물었다.
“기왕이면 세상을 훔치라고 했지?”
힘들게 고개를 든 달보가 이홍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래. 넌 그래도 양반이었잖아? 까짓 법 따위가 두렵다면 이 일은 못 하거든.”
고개를 끄덕인 이홍이 침착하게 속삭였다.
“그럼 우선 살아야 하는 거 아닐까?”
“그렇긴 하지.”
“그럼 날 위해 죽어주면 좋겠어.”
달보가 숨을 멈춘 채 이홍을 노려보았다. 이홍이 다시 말했다.
“그 몸으론 더 뭘 하긴 힘들어. 차라리 날 위해 죽어주면 어떨까? 내가 달보 형이 못 이룬 것들을 죄다 해보고 곧 따라갈 테니!”
이홍은 달보가 당장 죽어야 할 여러 이유를 대며 끝없이 설득했다. 처음엔 분노하던 달보가 마침내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봐야 넌 여기서 못 나가. 뭘 어쩌려는 건진 몰라도 소용없어. 하지만 내 죽음을 팔아 마지막 사기를 치는 거라면, 어디 해보시지. 성공하면 기꺼이 축하해 주겠어.”
이홍은 지체 없이 간수를 소리쳐 불렀다. 다가온 간수를 향해 이홍이 부르짖었다.
“내 역모를 발고하려 하오. 그리고 내 신분을 밝히겠소. 난 평안도관찰사가 파견한 기찰포교 이정립이라 하오. 어서 종사관을 불러주시오!”
종사관 앞에 불려간 이홍은 평양에서 온 기찰포교 이정립이 돼 한양 서문 밖에서 암약해 온 역모 세력에 대해 술술 불기 시작했다. 종사관이 물었다.
“네가 기찰포교라면 어째서 시간을 끌었지? 달보 정체를 깨달은 순간 의금부나 이리로 왔어야지.”
“달보 놈이 나머지 잔당들 있는 곳을 불지 않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요즘 서북도에서 역모를 꾀하는 간흉들이 연이어 일어나 나라의 골치 아닙니까? 녀석들이 버젓이 한양 사대문 안까지 휘젓고 다닌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종사관이 이홍을 지긋이 노려보며 천천히 물었다.
“너 기찰포교 아니지?”
“무슨 말씀이신지?”
“넌 포교가 아니다. 하지만 소매치기 패거리도 아닌 듯한데. 도대체 무슨 꾀를 내려는 거지?”
이홍이 길게 한숨을 몰아쉬고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전 포교는 아닙니다. 하지만 종사관께서 절 기찰포교로 만들어주시면 어떨지요?”
“내가? 왜지?”
“근자에 서북도 출신 역도들이 도성에 나타난다는 흉흉한 소문에 나라님께서도 걱정이 태산 아니신지요?”
“그러하다.”
“놈들 일당을 일망타진한다면 이보다 더 큰 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종사관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홍이 다시 말했다.
“기찰포교는 종사관께서 은밀히 심는 자 아닙니까? 포도대장께서도 누가 기찰포교인지 아실 길이 없습지요.”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던 종사관이 마침내 입을 뗐다.
“포교라고 해봐야 요즘엔 봉급도 없어 아무나 할 수야 있긴 하지. 한데 달보란 놈이 순순히 죄를 불겠느냐? 당장 목이 잘릴 것인데?”
손을 깍지 낀 이홍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문제없습니다. 서문 밖 역도들 사냥할 준비나 하십시오. 몸이 부서져라 돕겠습니다.”
한양의 허풍선이
한양 서문 장터에서 암약하던 역도들이 잡히자 세상은 온통 떠들썩했다. 달보를 수괴로 한 역도들은 모조리 목이 잘려 서문 입구에 전시됐다. 목 잘린 자들이 사실은 장터를 무대로 물건이나 훔치던 소매치기 조직이란 상소문이 올라갔지만 왕은 묵살했다. 어쨌든 한양은 삼엄한 질서 속에 기강이 바로 선 것처럼 보였다.의금부 도사로 승진한 종사관은 이홍의 존재를 나라에 보고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공을 독차지한 대신 기발한 꾀를 낸 이홍에게 다른 죄를 묻진 않았다. 아니, 이홍의 든든한 후견인이 돼주었다. 이홍은 제법 되는 포상금을 밑천으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실은 장사라기보다 사기에 가까웠다. 그 모든 행각은 의금부 도사라는 뒷배가 있기에 가능했다.
이홍은 삼남 땅에서 군역을 대신해 바치는 세금인 군포에 눈독을 들였다. 군포를 운반해 한양에 올라오는 사람들을 노린 그는 마포나루 근처에서 창고를 빌려주는 자로 위장했다. 의금부 도사 친구라는 창고 주인에게 속은 운반업자들은 속절없이 군포를 빼앗기고도 찍소리조차 할 수 없었다. 이홍은 그들에게 이런 말로 입단속을 하곤 했다.
“맞소! 창고들은 내 것이 아니었소! 하지만 그게 누구 것인지가 뭐가 중요하오? 내 성심껏 보관하려 했건만 도둑이 든 걸 어쩌란 말이오? 좋소! 관가에 날 고발하시구려! 내 지은 죄가 있다면 다 받아들이고 자결하면 그만이오. 하지만 우리 금부도사 형님께서 가만 계시지만은 않을 것이란 점은 아주 분명하오. 그건 내 책임 못 지지! 암!”
말을 마친 그는 가끔 진짜 목을 매는 흉내를 내기도 했다. 어차피 목을 걸어봐야 바로 끊어질 삭은 노끈이었지만 군포 운반업자들은 그를 구하려 달려드는 시늉까지 해줘야만 했다. 물론 더러 포청에 잡혀가기도 했건만 이홍은 전직 기찰포교임을 내세워 쉽게 풀려나오기가 다반사였다.
이홍은 밤낮없이 목탁을 두드려 시줏돈을 모은 승려를 꾀어 알거지로 만들어버리거나, 부잣집 외동아들 흉내로 가짜 결혼식을 치르는 등 방자한 기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점점 두려움을 잃어갔고 사람들은 그를 한양 최고의 허풍선이라고 불렀다. 당연히 이홍의 행실을 비난하는 자들도 나타났지만 그는 나라의 금법이 허용하는 어떤 선은 절대 넘어서지 않았다. 그는 나라에 위험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의금부 도사 역시 이홍의 사기 행각이 부담스러웠지만 그를 제거하기보다 그냥 웃어넘기는 게 낫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마지막 사기
이홍은 평안도 안주 땅에서 마지막 사기 행각을 벌였다. 그런데 그 수법이 그답지 않게 잔인해 한 집안을 풍비박산 내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쪽박을 차게 된 집안은 안주 지역에서 가장 큰 객점을 운영하던 곽 씨 집안이었다.곽 씨 부부는 외동딸의 미색을 이용해 인근 수령들은 물론이려니와 관찰사까지 녹여내 각종 관권에 개입했다. 겉으론 평범해 보이는 객점 안에서 온갖 이권 사업이 거래됐고, 곽 씨는 중간에서 흥정을 주선하며 막대한 이문을 챙겼다. 돈과 권력을 다 가진 이들 부부는 자신들이 여진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떠벌일 만큼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다.
곽 씨 객점에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낯선 사내가 나타난 건 압록강 얼음이 막 녹는 초봄 무렵이었다. 사내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난 이홍이라는 한양 시전 상인이오. 청나라로부터 비단을 사들여 이번에 크게 한몫 챙길 심산인데, 한 보름 정도 은밀하게 묵었으면 하오만.”
사내를 의심에 찬 눈초리로 뜯어보던 곽 씨가 물었다.
“청나라에서 비단을 들여오려면 나라의 허락이 있어야 할 것이고, 설령 뒷배의 은밀한 도움이 있더라도 물건이 압록강을 넘어 의주를 지나 이리 오려면 수속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닐 텐데? 곳곳마다 바칠 뇌물이 어디 한두 푼이어야 말이지?”
뒷짐을 진 채 곽 씨를 느긋하게 째려보던 이홍이 대답했다.
“그건 댁이 알 바 아니고, 안전히 쉴 방이나 내주구려.”
그날 머물 숙소를 정한 이홍은 함께 데려온 하인을 시켜 방 전체를 새로 도배하도록 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임시로 타고 다닐 전용 말을 사서 객점 입구에 묶어두게 했다. 그러자 곽 씨가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돈 써대는 낌새는 틀림없이 부자인데, 그렇다고 다 믿을 순 없지! 조공하러 오가는 사신들도 몰래 팔 물건 들여올 땐 조심 또 조심하는 판국에, 무슨 임금님 동생도 아니고 제까짓 게 어찌 비단을 그리 많이 들여온담!”
하지만 며칠 뒤 한양에서 이홍에게 도착한 편지를 중간에 살짝 열어본 곽 씨는 의심을 조금 풀기 시작했다. 편지 속에서 스스로를 형이라 부르며 이홍의 안부를 묻는 이가 의금부 도사였기 때문이다. 곽 씨는 친한 고을 수령에게 편지 내용이 틀림없다는 확인까지 받고 나서야 이를 다시 밀봉해 이홍에게 전달했다. 그날 밤 곽 씨가 부인에게 말했다.
“저 양반 한양에 엄청난 끈이 있어! 내가 편지를 주니까 말이지. 열어보지도 않고 바닥에 던지더란 말이야. 내가 모른 척 누구냐 물었더니, 아는 형들 중 하나니 신경 끄라는 거야! 아무래도 비단이 오고 있는 건 사실인 듯하이!”
다음 날 곽 씨는 하루 종일 방에만 죽치고 있는 이홍 동태가 궁금해 몰래 방문 앞에 귀를 대고 있었다. 그러자 안에서 하인에게 말하는 이홍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짐들 안에 든 황금과 은화를 합치면 도합 오만 냥은 된다. 내 그래서 밖에도 못 나가고 있어. 의주에 물건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여태 없으니 내 불안하구나!”
곽 씨는 이홍이 왜 하루 종일 문을 잠그고 잠만 자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상대에게 잘 보여 자기도 크게 한 건 해야겠단 마음에 들뜬 그가 아내에게 말했다.
“앞으로 저 양반한테 지극정성을 다하시게! 우리도 저 사업에 끼어 일확천금 함 해야지!”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창백한 표정의 이홍이 곽 씨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조급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구려. 당장 말을 타고 의주로 가보려 하는데.”
“가보시면 되지요?”
“중요한 물건을 몸에 지니고 갈 수는 없지 않소? 좀 잘 맡아주시겠소?”
“중요한 게 뭔지요?”
“그건 알 거 없고, 방문 단속을 단단히 해주시겠소?”
“그럼요! 걱정일랑 붙들어 매시고 어서 다녀 오십시오!”
하인이 부리는 말을 타고 막 떠날 채비를 하던 이홍이 갑자기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곽 씨에게 말했다.
“아뿔싸! 의주에서 물건을 인수하게 되면 곧바로 돈을 지급해야 될 터, 이를 어쩐다! 혹시 주인장께서 한 2만 냥 정도 변통하실 수 있겠소? 내 돌아와 물건으로 바로 보상하리다!”
평소 같았으면 결코 넘어가지 않을 뻔하디뻔한 속임수였지만 곽 씨는 뭔가에 홀린 듯 집안에 있던 어음과 땅 문서들을 담보로 2만 냥을 만들어 이홍에게 내줬다. 그리고 그렇게 떠난 이홍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도 이홍이 돌아오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진 곽 씨는 이홍이 머물던 숙소 방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벽장을 열고 단단히 묶인 짐들을 풀자 자갈더미가 와르르 쏟아졌다. 한참 동안 얼어붙은 채 서 있던 그가 관아에 이홍을 고발하고 뒤를 쫓았지만 이미 청나라로 넘어간 뒤였다.
달보와의 맹서
이홍의 터무니없는 제안을 수락하던 날, 달보는 감옥 안에서 이렇게 말했다.“만약 그 꾀가 성공해 밖으로 나간다면, 너 이거 하나만은 꼭 약속해.”
무릎을 꿇고 상대에게 다가간 이홍이 대답했다.
“뭐든 내 그 약속 꼭 지키리다! 지키고말고!”
힘을 내 상체를 간신히 일으켜 세운 달보가 말했다.
“난 청나라 가보는 게 소원이었어. 기왕 태어난 거, 대륙에 가서 세상을 훔쳐보고 싶었어. 그러니 나 대신 네가 그걸 좀 해줘. 여기서 끝내기 너무 억울하지만, 그래 주면 조금 위로가 되겠어. 알았지?”
*이 작품은 조선 후기 문인 이옥의 ‘이홍전’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