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가 밀실에서 진행된다는 점도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다. 소위원회는 등급보류 결정 후 등급위에 ‘영화진흥법과 등급보류 규정에 의하여 등급을 보류’한다는 단 한 줄의 의견에 위원들이 서명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물론 회의록도 공개하지 않았다.
‘거짓말’에 등급보류 의견을 낸 영화등급분류 소위원회는 위원 중에 감독과 배우 등 영화제작에 직접 관련된 인사가 있기 때문에 개인 의견을 밝히지 않고 통합의견서를 작성해 제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심의 과정과 토론내용이 공개돼 공론화하는 것이 말 그대로 ‘사회적 합의’를 이뤄가는 과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등급위의 결단이 필요한 대목이다.
또 하나 심각한 문제는 등급위의 등급분류가 영화를 보는 관객들 입장에서 이뤄지기보다는 검열과 통제에 중점을 뒀던 공륜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등급위가 관객들에게 볼 권리를 보장하면서 편의를 제공하는 장치가 아니라 권력이 되고 있다는 비판에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지난해 1월 법개정 때 ‘15세 관람가’ 등급을 없앴다가 시행 6개월 만에 원래대로 돌려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등급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부의 무원칙과 행정편의주의가 맞물린 결과지만 등급위의 권력화를 부채질한 셈이다.
‘12세 관람가’ 등급과 ‘15세 관람가’ 등급을 통합했다가 되돌린 과정은 자세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애초 ‘15세 관람가’ 등급을 없앤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15세 관람가 등급이 12세 관람가 등급으로 합쳐진 것이다. 15세 관람가 등급을 없애는 것에 대해 “‘미성년자는 볼 수 없는 영화’와 ‘어린이 영화’로 양분될 수밖에 없고, 청소년 관객을 배제함으로써 산업적으로도 손해”라는 견해도 있다. “두 등급을 통합하면 실제 적용에서는 낮은 등급을 분류기준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성 표현이나 폭력언어 등의 기준이 좀더 엄격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반면 15세 관람가 등급 폐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12세 등급과 15세 등급을 합친 것은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인지능력에 큰 차이가 없고, 실제 영화관에서 중학생과 고등학생을 구분하기 어려우며 구별하지도 않는 현실을 고려한 것”이라며 “청소년이 볼 수 있는 영화의 폭을 넓히자는 입법 취지를 반영해서 운영하면 득이 더 많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영상물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여지가 중학생보다 고등학생들에게 더 크게 나타난다는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배경과 정황을 종합하면 문제는 등급분류 위원들의 적용기준이다. 다시 말해 15세 등급을 주던 영화를 12세 관람가로 등급을 내주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이는 12세 관람가 등급과 15세 관람가 등급을 통폐합한다는 법 개정 취지를 살리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그런데 정부는 “15세 관람가 등급을 받을 영화가 15세 관람가 등급이 없어져 18세 관람가 등급을 받아서 손해”라는 제작, 수입업자들의 항의에 못이겨 지난해 12월16일 영화진흥법을 개정해 15세 관람가 등급을 부활시켰다. 관객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결과적으로 등급위의 권력화에 힘을 실어준 꼴이 된 것이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런 등급위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준 것이 ‘거짓말’ 사태다. ‘거짓말’이 처음 등급보류 판정을 받은 99년 8월, 등급위가 문제 삼은 것은 ‘사도-마조히즘 등 비정상적 성행위’와 ‘여고생 교복이 성행위에 직접 연관된 장면’‘욕설과 지나친 대사’등이었다.
‘거짓말’의 소모적인 싸움
등급위의 등급보류 기준에는‘성·음란 등의 과도한 묘사로 건전한 가정생활이나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을 때 음란묘사로 규정해 등급보류한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인체의 특정부분을 확대하여 노출하거나 성행위 장면이 지나치게 음란하고 선정적인 것’‘기성·괴성을 수반한 원색적이고 직접적인 성애를 묘사한 것’‘사회통념에 어긋나는 변태적 성행위, 동성애, 혼음, 매매춘, 강간, 윤간, 근친상간, 시간, 수간 등의 성행위를 지나치게 묘사한 것’‘아동 및 청소년을 성폭력·유희의 대상으로 직접묘사 한 것’ 등으로 세부조항을 두고 있다.
위원들은 ‘거짓말’에 대해 “아무리 전향적으로 본다 해도 등급보류 기준을 넘어설 수는 없다”고 항변했다.
그리고 11월9일 ‘거짓말’은 두 번째로 등급보류 판정을 받았다. 10월26일 영화소위가 참석 위원 합의로 등급보류를 결정했고, ‘거짓말’은 등급위 운영규정에 따라 상급심에 해당하는 위원회에 회부됐다. 이어 11월9일 등급위원회의(위원회)에서도 2개월 동안 등급보류 결정을 내렸다. 전체 위원 15명 중 14명이 참석한 위원회에서 표결 결과는 10대 4, 등급보류 결정이 났다. 8월 결정 때보다 등급보류 결정에 반대한 위원이 2명 늘었다.
이날 위원회에서는 영화 자체에 대한 논쟁보다는 등급위의 위상과 현행 법체계에 대한 논의에 비중이 실렸다. 부분 수정으로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거짓말’을 두고 영화소위, 위원회를 거치면서 몇 차례 토론을 벌였고, 사회적으로 화제가 돼 수차례 공방이 벌어졌는데, 이는‘등급보류’의 본질적인 문제는 정돈되지 않은 법과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위원들은 만약 위원회가 ‘거짓말’에 등급을 내줄 경우, 전문성을 고려해 위원회의 권한을 위임한 영화소위의 결정을 뒤집는 것이 타당한가와 위원회는 등급보류 기간만 정하는 것이 아니라 등급위의 최고 의결기구로서 영화소위의 결정을 검증하는 권한도 갖는 것이냐를 놓고 고민했고, 결국 후자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어 토론을 했지만 위원들은 ‘미풍양속과 사회질서 유지’라는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영화에 대한 쟁점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영화를 만드는 작업도 사회적 통념의 경계를 허무는 예술활동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영화의 산업적인 특성과 그동안의 논의를 통한 사회적인 분위기의 변화를 이해하자”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위원들은 ‘등급위 존재의미가 부당하고, 위원들이 몰지각한 검열관으로 매도당하는 분위기’에 대해 한결같이 반감을 드러냈다. ‘거짓말’에 대한 등급보류 결정을 두고 “등급위 내부와 사회적 합의없이 등급위 위원들 개개인의 문제로 공격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엄연히 법에 따른 규정이 있고, 법에 등급을 보류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사실상 모든 영화에 다 등급을 내주라는 주장은 초법적인 발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등급위는 지난해 12월29일 ‘거짓말’에 ‘18세 관람가’ 등급을 내주었다. 오리지널 버전에서 17분 가량이 삭제된 ‘거짓말’은 영화에서 여고생으로 등장하는 Y의 신분이 고등학생임을 드러내는 장면이 사라지고, 성기나 욕설이 들어간 대사 일부가 지워졌다. 6개월 가량의 논란이 겨우 몇 장면 삭제하는 선에서 어물쩍 수습된 것이다.
등급위가 ‘거짓말’에 대해 등급보류 결정을 뒤집어 등급을 내준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사회적인 공감대를 만들거나 어떤 합리적인 대안도 내지 못하고 소모적인 다툼으로 끝났다는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따라서 영화계 한쪽에서는 현행 등급위와 등급분류제도가 헌법에 위배된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 신청을 하는 등 적극적인 개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역시 두 차례 등급보류를 받은 독립영화 ‘둘 하나 섹스’ 제작진은 실제로 헌법 소원을 내려고 준비 중이다.
등급위는 검열기구인가
지난해 9월16일 헌법재판소 판례에 따르면 지금의 등급위도 사실상의 검열기관으로 위헌 소지가 다분하다. 헌법재판소는 옛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과 관련한 위헌제청에 대해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공진협)는 그 구성, 심의 결과의 보고 등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공연법에 의하여 행정권이 심의기관의 구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고 행정권이 주체가 되어 검열절차를 형성하고 있는 점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으므로, 공진협도 검열기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판결했다. 이는 옛 공연윤리위원회(공륜)의 사전심의가 ‘사실상의 국가기관이, 사전에 상영여부를 최종 결정하는 것은 검열이고 위헌’이라는 요지의 헌법재판소 판결에 따라 민간자율기구를 표방하며 새로 출범한 공진협도 검열기관이라는 판결이었다.
비록 지금 등급위는 문화부가 청소년보호위, 영진위, 변협, 방송위원회 등 11개 단체에서 선정한 위원을 예술원 회장이 추천하고 대통령이 위촉해 영상물등급위를 구성했으나 공연법에 따라 문화부의 행정권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보기 어렵다. 공연법에는 등급위에 필요한 운영 경비를 국고에서 보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등급는 99년 예산 중 5억700만원의 국고보조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문화부 전체 예산의 약 20%에 이르는 액수다. 국정감사 때 문화부 산하기관으로 감사를 받는 것도 문화부의 행정권 아래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공진협을 검열기관으로 규정한 판례에 비춰 법률적으로 면밀하게 따져야겠지만 등급위는 적어도 민간자율기구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 등급위 구성부터 순수한 의미의 ‘민간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지금처럼 파행을 답습하게 되고, 등급분류 위원과 영화 제작자·감독 모두가 상처투성이가 되는 불행이 거듭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등급보류가 문제가 되는 것은 등급보류 조치를 받으면 사실상 상영이 원천 봉쇄돼, 창작물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 당하는 것은 물론 제작자는 엄청난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또 관객쪽에서도 볼 권리를 제약 당하는 결과가 된다. 등급보류 조항이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당연히 등급외 영화도 상영할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완전한 등급분류제가 꼴을 갖추려면 등급외전용관 설치 허용은 필수다. 등급외전용관를 허용하는 문제는 공동 정부내에서 자민련의 극렬 반대로 번번이 벽에 부딪혔으며, 옛 국민회의와 문화부도 정치적 흥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부작용은 있겠지만 등급외전용관을 허용하고 완전등급분류제를 하루 바삐 도입하는 길이 우리 사회의 문화의식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지름길이라는 것이 뜻 있는 대다수 국민들의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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