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단과 결정의 어려움을 이야기한 책들
병원장 : 사망이 100% 확실한데 무슨 방법을 찾습니까.
최강국 :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방법은 찾아봐야죠.
병원장 : 최 교수님도 방어율을 신경 쓰셔야죠. 직구만 잘 던진다고 잘하는 투수입니까. 포볼로 타자를 거를 줄도 알고, 병살타도 유도해낼 줄 알아야죠. …여기 모든 의사분들께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결과가 뻔히 예측되는 수술은 병원 차원에서 불허합니다.
드라마에서 최 교수는 자신의 뜻대로 수술을 강행해 환자의 생명을 구한다. 환자의 생명을 구한 최 교수는 선이고 병원의 명성을 먼저 생각하는 병원장은 악으로 묘사된다. 정말 그럴까. 이 대목에서 생각이 복잡해진다.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은 수술을 강행한 최 교수의 행동이 과연 정의롭기만 한 것일까. 수술 대신 환자에게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것이 더 올바른 선택 아닐까.
며칠 전 강 얼음이 깨지면서 아이들이 빠지자 구하러 뛰어든 어머니까지 4명이 익사한 사고가 있었다. 얼음이 깨져 물에 빠지는 사고가 났을 때 구조하겠다고 물속에 뛰어들면 함께 죽는다는 건 상식이다. 빠진 사람은 침착하게 비교적 얼음이 단단한 쪽을 찾아 천천히 엎드려서 빠져나와야 하고, 구조하는 사람은 로프 등을 사용해 끌어내야 한다. 그러나 눈앞에서 자식이 죽어가는데 “잠깐 기다려, 로프 빌려 가지고 올게” 하며 등을 보일 부모가 있을까. 이 순간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다. 그래서 차가운 얼음물 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죽는다.
모호해지는 옳고 그름의 기준
언제부턴가 어떤 행동이나 결과를 놓고 쉽게 잘잘못을 가리기가 힘들어졌다. 나이를 먹을수록 선택과 판단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걸까. 그 두려움에 제목을 붙이면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달리 말하면 자신감 상실이다. 패기만만하던 젊은 시절에는 소신대로 판단하고 단호하게 결정할 수 있었다. 옳고 그름을 두부 자르듯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월은 그런 자신감을 앗아간다. 옳고 그름의 기준 자체가 모호해지고, 과연 그 시절 그 판단이 옳았는지 반추하면서 결정을 망설이게 된다.
번역가 이종인의 산문집 ‘지하철 헌화가’(즐거운상상, 2008)에는 ‘좋아하다가 싫어진 소설’이란 제목의 글이 있다. 대학 시절 서머싯 몸의 소설에 심취한 저자가, 졸업 후 직장(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 다니면서 단편전집을 두 번째 완독하고, 중년이 되어 세 번째로 다시 읽게 됐을 때 작품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짐을 경험하고 쓴 글이다. 이종인은 글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문학 작품을 되풀이하여 읽다 보면 얼마든지 생각이 바뀌게 된다. 사람이나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생애의 단계에 따라 변화하는 것처럼. 이렇게 볼 때 어떤 작품을 평가하려면 적어도 세 번은 읽은 다음에-그것도 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서-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한 권의 책도 이러한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또 인생에 있어서랴.”
세월의 힘이 아니더라도, 조직 내에서의 위치가 종종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두려움에 빠뜨린다. 경영컨설턴트 패트릭 M 렌시오니가 쓴 ‘CEO가 빠지기 쉬운 5가지 유혹’(위즈덤하우스, 2007) 중에 세 번째가 ‘확신이 설 때까지 결정을 미루고 싶은 유혹’이다. 렌시오니는 이렇게 설명한다.
“수많은 CEO, 특히 아주 분석적인 CEO들은 자신이 내린 결정이 항상 옳다고 확신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정보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빈틈없고 확실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경영자들은 결정을 자꾸 미루다가 직원들이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정해주지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