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집에 초대받아 일본식 찌개인 ‘나베모노(鍋物)’를 먹은 적이 있는데, 그는 내게 ‘떡볶이’가 어떤 음식이냐고 물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그의 부인 역시 ‘떡볶이’이라는 음식이름을 알고는 있는데, 먹어보진 못했다는 것이다. 아,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구나. 한국 드라마가 일본에서 일대 유행을 하면서 그들은 한국인의 생활을 교과서가 아닌 구체적인 사건과 상황을 통해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일은 1995년 베이징에서도 경험한 적이 있다. 일명 ‘대발이’로 통하는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중앙방송(CCTV)을 통해서 방영되자, 베이징의 지인들은 내게 한국 가정에서 아버지가 대단한 권위를 갖고 있음을 알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거나 쪼그리고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이 매우 신기했다는 감상도 들었다. 심지어 어른 앞에서 술을 마실 때는 정면으로 잔을 들지 않고 머리를 옆으로 돌려서 마시는 모습을 보며 가히 공자가 다시 탄생한 기분이 들었다는 소회를 전하는 노인들까지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자국 내에서 소비하는 대중문화’로 여기던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최근 동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이것을 ‘한류(韓流)의 성과’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 말에 반드시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다국적 문화가 소비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21세기 사람들의 문화적 경향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사람들이 요즘처럼 자주, 쉽게 상대방의 문화를 알게 된 때는 없었다. 중국 당나라 때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수많은 승려와 정치인, 지식인이 창안(長安)을 비롯한 남북 실크로드를 통해 만났지만, 결코 지금과 같은 수준이 아니었음은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9세기 말, ‘제국과 식민지’라는 양 극단의 정치적 상황에서 시작된 근대적 교류 역시 결코 ‘호혜적 관계’라고 규정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비록 ‘경성(京城)’이라는 한 공간에서 생활했어도 재조(在朝) 일본인들은 끼리끼리 모여 조선인을 지배했을 뿐이다. 1883년 임오군란을 통해 ‘한성(漢城)’에 온 중국인들은 오로지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자신의 상업적 이익을 챙기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오해와 질시는 서로를 ‘조센진’ 혹은 ‘왜놈’ 혹은 ‘지나인’이라는 천한 지칭어로 부르게 만들었다.
음식 역시 오해를 증폭시키는 매개물로 작용했다. 조센진의 마늘 냄새를 조심해야 한다는 1920년대 일본의 조선관광 팸플릿 경고문은 지금도 도쿄에서 회자된다. 밥그릇을 들고 밥을 먹는 일본인의 ‘쪽발이다운’ 경거망동을 지금도 한국인은 잘 참지 못한다. 땟국이 반질반질한 ‘되놈’이 만드는 청요리는 맛이 있지만, 그들과 사귀거나 가까이 하는 일은 결코 용인되지 않는 분위기가 1980년대까지 서울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정확하게 말하면 2000년이란 시간축을 경계로, 한국인 삶의 ‘실재’를 들여다보는 일본인과 중국인이 늘기 시작했다. 영화와 드라마로 대표되는 ‘한류’가 유행한 시점과 이러한 경향이 맞아떨어졌기에 더욱 한국 사회를 열광시켰다.
매스미디어가 제공한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본 그들이 ‘떡볶이’란 음식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의 백설기나 신선로같이 ‘전통’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음식 이름은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이 즐겨 보는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는 이런 음식이 잘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서로의 속살이 드러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