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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씨앗만은 팔지 마라

그대, 씨앗만은 팔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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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잃어버린 힘

박노해가 찾고 있는 인류의 희망은 인류에게 원래 없는 새로운 힘이 아니라 우리가 원래 갖고 있었지만 오래전에 잃어버린 힘이다. 그것은 서로를 짓밟아 나만을 지키는 생존이 아니라 서로 도움으로써 더 큰 사랑을 실천하는 인류의 본성을 되찾는 일이다. 자연의 모든 축복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되찾는 것이며,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보느라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 것이다. 박노해는 평범한 농가의 창고에 매달린 옥수수 알을 보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씨앗’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종자로 쓰려는 것은 그 해의 결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만을 골라 매달아진다.

수백 수천의 옥수수 알들은 단지



한 톨의 씨앗에서 비롯되었다.

씨앗이 할 일은 단 두 가지다.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고 지켜내는 것.

자신의 대지에 파묻혀 썩어내리는 것.

희망 또한 마찬가지다.

헛된 희망에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는 것.

진정한 자신을 찾아 뿌리를 내리는 것.

그대, 씨앗만은 팔지 마라.

-박노해 ‘다른 길’ 중에서

풍성한 열매만을 재빨리, 더 많이, 더 자주 수확하기 위해 소홀하게 여겨온 우리 자신의 씨앗. 그것은 각종 학원이나 공부가 아니라 친구들과 하루 종일 놀이에 빠져 하루를 보낸 우리의 어린 시절이기도 하고, 스펙이나 재테크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나의 신념과 나의 희망에 따라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시절의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잃어버린 또 하나의 씨앗은 힘겹게 보낸 오늘 하루, 그 자체에 무한한 감사를 느낄 줄 아는 우리 자신의 순수이기도 하다.

번민의 잡초를 뽑아내는 일

하루 일을 마친 버마 여인이 저문 강으로 향한다.

전통 의상 렁지를 가슴까지 끌어올려 감싸고

단아하게 무릎을 꿇은 채 강물을 떠서 몸을 씻는다.

시원한 강물과 향긋한 풀꽃 내음, 지저귀는 새소리는

노곤한 그녀의 몸과 마음에 새 힘을 채워준다.

이제 그녀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

작은 불전에 꽃을 바치고 감사 기도를 올린 다음

가족들을 위한 정갈한 밥상을 차리리라.

-박노해 ‘다른 길’ 중에서

힘든 하루 일을 마친 버마 여인이 집에 가면 또 온갖 집안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지치거나 불만스러운 기색 없이, 너무도 평화롭고 경건한 표정으로 강가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몸을 씻어내리는 정화의식을 치르고 있다. 가족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아이들을 재우고, 또 쉴 새 없이 바쁜 내일 하루를 준비하리라. 몸을 씻는다는 것은 마음밭에 무성히 자라난 수많은 번민의 잡초들을 뽑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나 또한 내게 주어진 어깨의 짐을 원망하고 내가 겪어야 할 마음의 굴레를 저주하는 대신, 강물로 몸을 씻어 내리듯 마음속 잡념 또한 하루하루 씻어버리고 내게 주어진 길을 담담히 걸어가고 싶다.

신동아 201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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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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