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가족이 그 집으로 이사를 온 날부터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소리였다. 어느 날은 모차르트가 천상의 멜로디처럼, 어느 날은 여자의 비명이 지옥의 울부짖음처럼. 배음처럼 울리는 그 집 남자의 고함과 욕설과 세간을 때려 부수는 소리에 나는 몸을 움츠리고 앉아 숨을 죽이고는 했다. 저 집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몸서리나는 상상을 하다 파출소에 신고한 적도 있다. 경비원을 직접 이끌고 그 집 현관 벨을 누른 이웃도 있다고 들었다. 아마도 이웃한 집들은 돌아가며 한 번쯤 어떤 조처를 취해봤을 거라고 짐작한다. 풍문으로 들은바, 그럴 때마다 남자는 “내 집 일”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여자는 “아무 일도 없다”고 거짓말을 늘어놓기 일쑤이고.
얼마 전, 그 집 앞에 이삿짐 트럭이 서 있었다. 남자가 주먹질을 멈추는 대신 이사를 택한 모양이었다. 이사 온 지 불과 몇 달 만의 일이었다. 나는 베란다에 선 채 가족이 떠나는 걸 지켜봤다. 맥없이 차에 오르던 소녀의 뒷모습과 다갈색 피아노가 오래도록 눈에 남았다. 모차르트의 소나타가 귓가를 맴돌았다.
스티븐 킹의 소설 중 ‘여인 삼부작’이라 불리는 작품이 있다. ‘로즈매더’ ‘제럴드의 게임’ ‘돌로레스 클레이본’. 그중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가정폭력의 비극성을 실감나게 그려낸 빼어난 문학작품이다.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리틀톨아일랜드라는 섬에서 평생을 살아온 입심 좋은 할머니가 밤샘으로 펼치는 ‘수다’정도가 될 것이다. 진술자인 돌로레스의 말을 빌리면 ‘메인주 연안에 떠 있는 조그만 바위 덩어리에서 살아온 두 독한 년’에 대한 이야기기도 하다. ‘한 독한 년’은 개기일식이 있던 날 남편을 살해한 돌로레스 자신이고, ‘다른 독한 년’은 돌로레스가 30년 동안 가정부로 일해온 별장의 여주인, 베라 도노번이다.
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소설을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은 주인공 돌로레스에게서 나온다. 강인하면서도 유머러스한 그녀의 캐릭터는 불행하고 굴곡 많은 여자의 인생을 다루는 소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자기 연민과 궁상맞은 신세 한탄의 함정에서 건져내는 하나의 장치가 되어준다.
돌로레스는 고교 시절, 여드름 하나 없는 ‘멋진 이마’를 가진 남학생 조 세인트 조지에게 반해 무도회에 따라간다. 그리고 그 멋진 이마를 만지다가 다른 ‘멋진 것’까지 만져버리는 바람에 배 속에 아기를 갖게 된다. 멋진 이마의 혜택은 딱 여기까지, 결혼 직후부터 그녀는 비용을 치르기 시작한다. 우선 남자가 아닌 술통과 결혼했다는 걸 깨닫는다. 그녀는 한때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와의 결혼생활을 이렇게 진술한다.
“아무 상관도 없던 박쥐 두 마리가 같은 동굴 속에서 나란히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익숙해졌던 생활.”
남편 조는 가장의 권위를 주먹으로 확인시키는 마초이자 질투와 의심의 화신이었다. 돌로레스는 이를 팔자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그녀의 “팔자려니…”는 이런 뜻이다. 처음엔 매를 맞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일정 간격으로 규칙적인 폭력에 시달리자 부당한 폭력과 압박에 순응하게 되고, 매 맞을 때가 다가오면 급기야 얼른 얻어맞고 불안한 상황을 끝내버렸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 이른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증세다.
끔찍한 결혼생활이 계속된다. 낮이면 베라의 하녀로 일하며 돈을 벌고, 밤이면 집으로 돌아와 조에게 두들겨 맞는다. 세 아이를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고 교육시키겠다는 일념이 그녀를 견디게 한다. 그날도 조는 죽도록 일하고 돌아온 돌로레스를 장작개비로 두들겨 팬다. 그야말로 납죽하게, 허리가 부러질 지경으로. 비로소 그녀는 뭔가를 시도한다. 화장품 병을 들어 남편의 귀싸대기를 후려갈겨버리고 손도끼를 내미는 것이다. 해석하면 이런 뜻일 테다. 다시는 내 몸에 손대지 말라, 아니면 지금 죽이거나.
모차르트의 초상화.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영특한 딸 셀리나를 육지의 사립학교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녀가 죽기 살기로 일하는 힘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을 깨닫고 딸을 당장 육지로 내보내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땐 이미 때가 늦었다. 셀리나의 교육적금을 붓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남편이, 아내의 돈을 인출할 수 있었던 당시 은행법을 악용해 이를 가로채버린 것이다. 그녀는 기나긴 세월,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분노의 스위치를 켠다. 그녀의 고용주이자 친구이며 멘토인 베라는 이렇게 충고한다.
“모든 사고가 우연히 일어나는 건 아니야. 때론 악녀가 되는 게 자신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지.”
이 세상에 자식이 위험에 처한 순간의 어미만큼 독한 것이 있을까. 독한 모성은 어미를 전사로 만든다. 돌로레스는 기꺼이 칼을 뽑는다. 자신이 아닌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딸이 자신처럼 불행한 삶을 살지 않도록.
돌로레스는 개기일식을 틈타서 집 앞 우물로 남편을 유인한 뒤 빠뜨려 죽인다. 당연히 가장 먼저 용의자로 지목되지만, 심증은 있되 물증이 없는 관계로 살인혐의에서 벗어난다.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딸과의 관계만 빼면. 그녀는 슬퍼하면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그럴 여유도 없다. 아직 책임져야 할 두 아이가 남아 있었으므로. 셀리나를 육지 사립학교에 보낸 후, 그녀는 몸종의 신분으로 베라의 별장에 들어간다.
세월이 흐른다. 아이들은 자라고 돌로레스는 나이를 먹는다. 그녀에게 주체성을 가르친 멘토, 베라는 하반신 불구가 된 채 층계 끝에서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한다. 문제는 완전히 죽지 못했다는 것이다. 깐닥깐닥 숨만 붙어 있던 베라는 놀라 달려 나온 돌로레스에게 자신의 숨을 끊어달라고 애원한다. 돌로레스는 몽둥이를 들지만 차마 죽이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경찰이 들이닥치고 그녀는 범인으로 몰리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베라는 돌로레스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물려준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김으로써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돌로레스가 경찰서에 잡혀와 밤샘진술을 하게 된 이유다.
돌로레스는 이 기나긴 진술로 베라 살해혐의를 벗는다. 남편을 죽였다고 자백했지만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일이고.
살다보면 종종, 알고 있다고 여겼으나 실제로는 알지 못했던 ‘무엇’과 맞닥뜨린다.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피부로 느낄만한 실제 상황이 자신에게 닥쳐오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어떤 진실. 그러한 것들 중 하나가 딸과 여성과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남성이라는 이름과 대별되는 성을 가진 이들이 갖는 고통이다. 그것도 순전히 그 대별성이 가지는 약점 때문에 부당하게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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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소녀와 가족이 우리 동네를 떠난 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나는 집을 나설 때마다 습관처럼 비상계단을 올려다본다. 그곳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던 소녀의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는 듯해서. 돌아서며 가망 없는 기원을 해보기도 한다. 부디 새로 이사 간 동네에선 모차르트의 소나타만 울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