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호

구태 전략·내부 불통이 이길 수 있는 선거 놓쳤다

前 김부겸 캠프 대변인의 직설

  • 이송하 │전 김부겸 새정치민주연합 대구시장 후보 대변인·전 연합뉴스 기자

    입력2014-06-20 14: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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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4 지방선거에서 김부겸 새정치민주연합(새정연) 대구시장 후보는 40% 넘게 득표하며 선전했지만, 승리하진 못했다.
    • 당시 김 후보 캠프 대변인이던 이송하 씨가 “새정연은 문제가 많다.
    • 이대론 차기 대선에서 또 질 것”이라며 내부에서 겪고 느낀 점을 ‘신동아’에 기고해왔다. <편집자>
    구태 전략·내부 불통이 이길 수 있는 선거 놓쳤다

    선거 유세를 하는 김부겸 후보.

    새정치민주연합의 잠룡 김부겸은 대구시장 선거에서 패했으나 40.3%의 득표율을 올려 화제를 모았다. 여당 텃밭 대구에서 야당 후보가 꽤 선전했다는 게 여러 언론의 평이다. 2012년 12월 대선 때 이 지역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80.14%의 몰표가 나온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일이다.

    대구시장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김부겸은 당선될 수도 있었다. 대구의 상당수 시민은 김부겸을 박근혜의 뒤를 이을 TK 대선 주자로 여겼다. 이들이 모반을 감행할 태세였으나 김부겸 캠프가 어이없는 실수로 망쳐버린 면이 강하다. 김부겸의 대변인으로 선거에 참여한 나는, 이번 선거가 2012년 대선 및 총선의 복사판이었다고 본다. 또한 다음 대선에서도 야당이 똑같은 실수를 할 것 같은 예감을 지울 수 없다.

    2014년 3월 24일 월요일 오후 김부겸은 대구 서문시장에서 대구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첫 출발은 무난했다. 그는 “대구의 위기 극복을 위해선 대구가 변해야 한다. 정치권부터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변화는 대구시민 모두가 바라는 일이다. 김부겸이 변화를 내건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김부겸은 “내가 시장이 되면 야당을 설득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 국회의원들은 여당을 설득할 수 있다. 대구를 더욱 잘 살릴 수 있다”며 ‘박근혜 대통령, 김부겸 대구시장 협력론’을 피력했다. 김부겸은 또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합을 위해 상징적인 박정희컨벤션센터를 짓겠다”고도 했다. 예비 홍보물과 선거공보도 변화를 최고 목표로 두고 세부 실천과제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변화’의 가치를 ‘상생’의 가치가 덮기 시작했다. 캠프의 발걸음이 꼬였다. 김부겸은 여전히 연설에서 변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캠프에서 나오는 메시지는 상생을 우선하는 것처럼 들렸다.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지만 아무리 현실이 불만이어도 항상 같은 정당에 표를 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보기에 따라선 양대 정당은 진보, 보수 양면을 다 갖고 있다. 대구에도 여야 고정 투표 층의 중간에 부동층 유권자들(swing voters)이 존재한다. 여든 야든 이들이 과녁이어야 함은 당연하다. 난 이들을 빨강(새누리당)과 파랑(새정치민주연합)이 섞인 보라빛 새를 뜻하는 ‘보라새’라고 불렀다.

    상생이 변화 덮어

    대구에 보라새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했다. 겉으로 보기엔 야권 20%, 여권 80%지만 여권 지지자들 속에는 분명히 보라새들이 있다고 봤다. 특히 호남의 새누리당 후보와 영남의 새정연 후보는 변변치 않은 경우가 많다. 보라새들이 선거 때마다 지역 기반 당의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이러한 인물 경쟁력에 기인하는 면이 있다.

    전국의 보라새들은 지난 대선 때 안철수를 지지했다. 이들은 인물만 좋으면 지역 기반 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의사가 있다고 봐야 한다. 김부겸의 등장은 대구의 보라새들이 지역주의를 뛰어넘을 절호의 기회였다. 누구도 정확하게 추산할 수 없지만 나는 대구 유권자의 80%가 여권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이 중 절반은 보라새일 것으로 추정했다.

    보라새 대신 빨강새 선택

    이런 관점에 따르면 김부겸은 당연히 대구의 보라새를 집중 공략해야 했다. 그러나 김부겸 캠프는 시간이 흐르면서 보라새가 아닌 빨강새를 겨냥했다. 특히 선거 막판에는 정도가 심했다. “빨강새는 여권 지지 의사를 바꾸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선거전 중반부터 앞세운 ‘상생과 화합’, 선거 막판 내세운 ‘박근혜 마케팅’은 변화 담론을 생략했다. 시민들로부터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대구를 바꾸기 위한 ‘상생과 화합’이었으나, 김부겸은 ‘표를 얻기 위해 정체성도 버리는 사람’으로 비쳤다. 김부겸 캠프는 잡기 어려운 빨강새만 쫓아 다녔고, 정작 지지할 마음을 먹고 있던 보라새는 실망했다.

    선거를 한 달 남긴 5월 초 난 김부겸 캠프의 연락으로 대변인을 맡게 됐다. 5월 10일 토요일 오후 팀장급 회의에 처음으로 들어갔다. 참석자는 10여 명이었다. 그런데 회의에 진전이 없었다. 이미 전쟁이 일어나 각 전선에선 백병전이 벌어졌다. 선거캠프는 군 지휘부와 같다. 이런 데에서 민주주의만 따져선 곤란하다.

    지휘관이 보좌관 서너 명의 합리적 의견을 참고해 결정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실제론 사소한 일을 결정하는 데에도 너무 시간이 걸렸다. 집단 지혜가 발휘된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후보와 캠프 구성원들의 관계는 왕과 신하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후보에 대한 충성 경쟁은 대단하다. 후보의 신임도가 조직 체계보다 앞서다보니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캠프는 구성원들의 실력이 있건 없건, 실수를 했건 말건 그냥 간다. 온갖 문제가 일어난다. 결국 능력 있는 화합형 인사들로 준비하는 것이 효율성을 높이는 길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는 ‘전원공격 전원 수비’ 전략을 썼다. 공격수도 수비해야 했고 수비수도 틈을 노려 공격해야 했다. 히딩크는 모든 선수에게 전체 전략을 주지시켰다. 선수들은 자신의 임무뿐 아니라 동료 선수의 임무, 상대팀의 움직임까지 꿰고 움직여야 했다. 이런 점이 4강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손자병법도 적을 알고 나를 알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 캠프는 상대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우리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게 없었다. 나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캠프 구성원들이 무슨 일을 맡아서 하는지 알지 못했다. 만약 상대 후보가 결정적 실수를 했어도 캠프는 틀림없이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캠프의 한 멤버가 승부를 가를 중요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도 우리는 이를 알 수도 없었고 채택할 수도 없었다. 내부 불통은 심각했다.

    캠프 멤버들은 모래알과 같았다. 시스템이 고장 난 게 아니라 아예 없었다. 각 팀이 각자 업무를 충실히 하려는 경향 때문인지 팀플레이가 이뤄지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평가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구멍가게라도 적자인지 흑자인지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 캠프엔 이게 없었다. 팀원이 해놓은 결과가 일정 수준이 되는지, 상대 후보가 내놓은 결과보다 품질이 나은지 따져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지고 있었음에도 공격은커녕 수세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다.

    캠프가 내놓는 보도 자료는 수준이 너무 떨어져 기삿거리가 되지 않았다. 페이스북 등 SNS도 얌전한 색시처럼 인상 깊지 않았다. 투표일 2주 전쯤 SNS는 내 소관으로 넘어왔으나 나는 전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내가 의견을 얘기하면 ‘기획팀과 상의하라’고 하고, 상의하면 의견이 달랐다. 무엇보다 각 팀에 몸담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기 싫었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맞다고 믿는 확신범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인상 깊지도 않고 득표에 도움 될 것 같지 않은 글이나 사진이 매일 SNS를 채우고 있었다. SNS는 네티즌의 반응과 소통이 중요한데 그런 수준으로는 눈길을 끌기도 불가능해 보였다.

    5월 하순, 정책팀으로부터 공약을 넘겨받았다. 하지만 내용이 너무 허술해 ‘큰일 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주 표어를 ‘300만 대구시대’로 내세웠으나 별 감흥이 없었다. 남부권 신공항과 동서 광역철도망, 남부권 광역경제권 같은 거대 공약이 있었다. 그러나 ‘대구시장 공약으로 적절할까?’ 의문스러웠다. 무엇보다 현실성과 현장감이 없었다. 예산 전문가가 점검해야 했지만 그런 절차 없이 만들어진 것 같았다.

    교육 공약으로 공약 관련 첫 보도자료가 나왔다. ‘사교육비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사교육비가 많이 드는 것은 공교육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거 해결할 수 있으면 대통령 해도 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나는 김부겸의 인간됨과 현안을 중심으로 기삿거리를 내보내기로 했다.

    인간 김부겸의 눈부신 개인기

    나는 5공화국 때부터 연설 잘하는 사람을 많이 봐왔다. 그러나 김부겸만큼 잘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소위 ‘벽치기 연설’이나 ‘폭풍 게릴라 유세’를 하곤 했다. 적은 사람 앞에서 연설하는 이유는 진심이 통할 거라는 기대 때문인 것 같았다. 일단 그의 연설을 들은 사람은 다 넘어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대구의 유권자는 200만 명이 넘는다. 그의 작전은 애초부터 무리수였다.

    5월 22일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날부터 후보 차량 뒤에 별도 차량을 따라붙이기로 했다. “후보가 시민을 만날 때 하는 말들이 기삿거리인데 그것들이 매체엔 거의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시민에게 피해 안 가게 멀찍이 따라가게 하겠습니다.” 나는 김부겸이 기득권인 ‘그들 중 한 명(One of Them)’이 아니라 서민인 ‘우리 중 한 명(One of Us)’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김부겸의 유머나 언어를 기사나 SNS로 퍼 나르려고 노력했다.

    김부겸은 TV 토론 실력도 뛰어났다. 첫 토론 준비를 위한 독회 때 일이다. 그는 원고를 놓고 몇 사람의 의견을 들은 뒤 어지럽게 메모했다. 그 원고 내용이 썩 뛰어난 편이 아닌 데다 조언 내용도 복잡해 그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구태 전략·내부 불통이 이길 수 있는 선거 놓쳤다

    대구시내에 걸린 권영진 후보와 김부겸 후보의 선거 플래카드.

    그러나 실제 토론에 들어가자 그는 명배우가 열연하듯 제한시간 안에 깔끔히 해냈다. 준비 못한 질문에도 막힘이 없었다. 참모가 차 안에서 그에게 몇 마디만 조언해도 그는 여기에 살을 붙여 연설과 토론을 기막히게 해냈다.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김부겸은 외로운 사람처럼 보였다. 옆에 데리고 쓸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는 축구 천재 메시처럼 상대편 전원을 혼자 상대했다.

    나는 선거 내내 우리 캠프가 대구의 지식인이나 서민의 본류에 닿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건 순전히 나의 감이다. 캠프의 다른 구성원들이 누구를 얼마나 만나고 다녔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만난 시민단체 간부, 교수, 전문직 인사는 우리 쪽 메시지에 박한 평가를 내렸다. 우리 후보에 대해 기대감을 가진 이른바 개혁적 보수 인사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박정희센터와 우경화

    이들에게 가장 안 좋은 영향을 미친 것은 ‘박정희대통령컨벤션센터 건립’ 공약이었다. 이들은 우리가 대구시민의 레드 콤플렉스를 감안했다 하더라도 좀 더 기발한 것이 있었을 텐데 돈만 들고 실속 없는 것을 내세웠다고 생각했다.

    이후 캠프가 보여준 우경화는 이들을 더욱 얼어붙게 했다. 또 이들 외부 인사는 캠프 관계자들이 조언을 구한 뒤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음 연락이 없더라는 것이다. 지역 오피니언 리더들은 수십 년에 걸쳐 전문 지식을 쌓고 자신만의 네트워크를 구축한 사람들이다. 캠프는 이들을 보다 조심스럽게, 깊이 있게 대했어야 했다.

    우리 캠프가 ‘상생과 화합’을 앞세우자 오히려 권영진 새누리당 후보 쪽이 ‘변화와 개혁’을 주 표어로 내밀며 진정한 개혁론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여당이 ‘개혁’을, 야당이 ‘화합’을 내세우는 기묘한 뒤바뀜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진짜 개혁과 가짜 개혁 논쟁으로 가자”고 주장했다. ‘누가 진짜 할 수 있나’를 따지면 무조건 이긴다고 봤다. 선거전 중반 ‘메기론’으로 권영진 쪽을 궁지에 몰기도 했다. “농부가 논에 메기 한 마리를 풀어놓으면 미꾸라지들이 더욱 튼실해진다”는 옛이야기를 인용해 “게으른 여당 집권층을 자극하기 위해서라도 김부겸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캠프 수뇌부는 권영진이 내세운 ‘변화와 개혁’에 우리가 대응하면 저쪽의 술수에 말려든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개혁의 진위 논쟁을 포기했고 상생과 화합을 계속 내세웠다.

    선거에선 명분 선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라새들은 물론이거니와 대구 시민 대다수의 바람은 ‘변화와 개혁’이었다. 김부겸은 바로 그 변화와 개혁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캠프는 스스로 포기했다. 그러자 권영진 쪽이 필사적으로 ‘대구를 바꾸겠다’고 호언한 것이다. 보라새들은 김부겸의 표밭임에도 오히려 권영진 쪽이 둥지를 튼 꼴이 되고 말았다.

    대권의 꿈

    5월 31일 토요일 오후 6시 대구 동성로 한일극장 앞에서 시민들이 거리를 메운 가운데 우리 쪽 유세가 열렸다. 김부겸은 며칠 전부터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거리를 메운 시민을 보고 감격했다. 땅바닥에 꿇어앉아 시민에게 절을 했다.

    김부겸은 대구 변화론을 힘주어 강조했다. “김부겸을 시장으로 만들어달라. 그러면 대구만 바꾸는 것이 아닌 대한민국을 바꾸는 선거혁명을 하는 것이다.” 이날도 다음 날도, 김부겸의 연설 장기는 한껏 발휘됐다. 그는 변화를 역설해 집회장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그러나 시내에 걸린 현수막과 일간지 광고에는 자신과 박근혜 대통령이 함께 웃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6월 1일 일요일, D-3일이 됐다. 이날은 오후 6시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에서 시민 2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가장 큰 유세가 열렸다. 김부겸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언급에 대한 해명 형식으로 “대구시장 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리더십을 인정받은 뒤 대구시민의 사랑 속에서 대권에 도전할 꿈이 있다”고 했다. 대구 시민 상당수가 바라고 자신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세월호 사건 여파로 얼어붙었던 대구시장 선거 열기가 비로소 달아올랐다. 그러나 전세를 뒤집기엔 남은 선거운동 기간이 너무 짧았다.

    5월 22일 선거운동에 들어간 후 공식 공약집에서 ‘변화론’이 사라지고 ‘300만 대구시대’가 주 표어로 등장했다. 유토피아 공약이 나열됐다. 주요 일간지 광고에도 “박근혜 대통령과 김부겸 시장이 함께 힘을 모으면 대구는 대박입니다”라는 소위 ‘박근혜-김부겸 대박론’이 크게 실렸다.

    오른쪽으로 너무 꺾어

    마지막 현수막 아이디어를 모은다더니 나도 모르게 현수막이 내걸렸다. 대구시내엔 권영진 쪽의 “박근혜 대통령, 대구가 지켜야 합니다”라는 현수막이 펄럭였다. 그 옆에 우리 쪽의 “대통령과 협력하여 대구 발전”이라는 현수막들이 걸렸다. 거기에다 권영진 쪽의 현수막에는 박 대통령이 울고 있었다. 우리 쪽의 현수막에는 우리 후보가 박 대통령과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우향우도 좋지만 지나치게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려 차가 길가에 처박힌 듯한 기분이었다. 선거일이 임박하면 권영진 쪽은 ‘박근혜를 구하라!’ 작전을 펼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럴 경우 보라새를 대상으로 ‘김부겸을 살려라!’를 내세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리 캠프가 ‘박근혜 대통령과의 협력’을 제시하는 바람에 ‘김부겸 구출’을 주장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누가 봐도 우리 쪽의 ‘박 대통령과의 협력’은 어색했다. 언론은 두 현수막이 나란히 걸린 사진을 실으며 ‘박근혜 대통령의 눈물과 웃음’이라고 제목을 뽑았다. ‘박 대통령과의 협력’은 시민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선거 전날까지 이 문제를 파고드는 기자들에게 설명하느라고 애를 먹었다.

    냉정하게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현재의 대통령이지만 과거로 간다. 대구의 보라새들은 ‘박근혜 이후 TK 대권주자 김부겸’이 갖는 파괴력을 이미 감지했다. 이들은 충분히 해볼 만한 모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캠프는 이런 시민의식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박 대통령 얼굴이 나란히 실린 현수막들을 지나며 한 택시 운전사가 말했다. “그놈이 그놈이다.” 젊은층과 보라새들의 표가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우리는 15.7%포인트 차이로 패했다. 보라새 4명 중 3명을 잡아야 했으나 2.2마리만 잡은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은 “새누리당의 아성인 대구에서 야당 후보가 40%를 넘긴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여긴다. 김부겸은 그 정도를 넘어 기적을 만들 수 있었다. 캠프의 과도한 우향우가 이를 방해했다고 본다. 일부는 “그러한 선거운동 때문에 그 정도 표라도 받았다”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대구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거리마다 창가마다 야당 후보의 이름을 연호하며 손 흔들던 시민을 잊을 수 없다. 우리 캠프가 시민의 거센 변화 욕구에 스스로 찬물을 끼얹어버린 것이다. 언론이 대구의 선거 결과를 두고 “결국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캠프는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대구시민에 대한 불신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여기엔 새정연 식의 구태와 불통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김부겸은 살면서 실패만 10번 넘게 경험했지만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선 사람이다. 그가 이 선거로부터 교훈을 얻는다면 다시 대구의 희망으로 비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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