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 영화는 모두 미국 할리우드의 월트디즈니(Walt Disney) 작품으로, 유럽 동화를 미국의 관점과 스케일로 해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1937년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를 선보인 이래, 유럽 동화를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을 꾸준히 제작해왔다. 특히 중세 유럽의 설화를 각색한 안데르센 동화나 그림 형제의 동화는 디즈니의 단골 메뉴였다. 1989년에 나온 ‘인어공주’도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그런데 유럽의 원작과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다른 점은, 전자는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후자는 대체로 해피 엔딩으로 각색된다는 점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한 디지털 장편 애니메이션 붐이 일었다. 이 무렵 디즈니의 강력한 라이벌로 드림웍스(Dream Works)가 등장한다. 드림웍스는 왕자가 괴물을 무찌르고 결국 공주와 맺어지는 중세 유럽의 동화를 비틀어 왕자의 자리에 괴물을, 공주의 자리에 못생긴 공주를 앉힌다. 괴물 슈렉과 피오나 공주가 맺어지는 애니메이션 영화 ‘슈렉’(2001)을 선보인 것이다. 이 영화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이에 대응해 디즈니는 2006년 ‘토이 스토리’(1995)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픽사(Pixar)를 인수했다. 이를 계기로 전통적 캐릭터인 미키마우스, 도널드 덕, 동화 주인공들과 차별화한 새로운 작품인 ‘몬스터 주식회사’‘니모를 찾아서’ 등을 발표했다. 즉, 디즈니는 동화를 각색한 애니메이션은 원래의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통해 배급하고, 각색물이 아닌 창작물은 픽사 스튜디오를 통해 배급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셈이다.
‘겨울왕국’의 한 장면(왼쪽). ‘말레피센트’ 포스터.
‘겨울왕국’은 유럽 동화를 미국의 시각으로 각색한 뒤 여기에 광대 노릇을 하는 조연들을 배치하는 디즈니 식 이야기 전략의 최고 히트작이라고 할 만하다. ‘말레피센트’는 ‘슈렉’에서 선보인 드림 웍스 식의 동화 비틀기를 디즈니가 차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제목인 말레피센트는 마녀가 된 요정(안젤리나 졸리)의 이름이다. 영화는 등 뒤에 날개가 달리고 머리에는 산양의 뿔을 가진 말레피센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이 요정이 무어스 숲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6)의 여주인공이나 ‘원령공주’(1997)의 여주인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 다른 디즈니 애니메이션인 ‘라이온 킹’(1994)에서 주인공 사자 이름을 데스카 오사무의 애니메이션 ‘밀림의 왕자 레오’에서 따온 것과 상통한다. 미국 애니메이션계에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원래 말레피센트는 디즈니의 1959년 작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서 오로라 공주에게 죽은 듯한 깊은 잠에 빠지는 저주를 내린 마녀의 이름이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서 말레피센트는 공주를 구하러 온 왕자를 막으려고 용을 보낸다. 오로라 공주는 독이 든 사과를 먹은 백설공주만큼이나 여성의 수동성을 상징하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이번에 개봉한 ‘말레피센트’는 공주나 왕자가 아닌 마녀 말레피센트의 시각에서 같은 이야기를 전개한다. 어린 말레피센트는 숲의 돌을 훔친 스테판이라는 남자아이를 만난다. 스테판은 돌을 말레피센트에게 돌려주고 용서를 구한다. 스테판은 반지를 낀 손으로 말레피센트와 악수를 하려 한다. 그러나 요정은 금속이 몸에 닿으면 다친다는 것을 알고 스테판은 반지를 손가락에서 뺀다. 말레피센트는 자신을 배려하는 스테판과 친구가 된다.
성인이 된 스테판(샬토 코플리)은 인간의 왕국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 꿈을 갖고 산다. 역시 어른이 된 말레피센트는 그런 스테판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우정 이상의 감정을 느낀다.
어느 날, 그 왕국의 왕은 군대를 이끌고 무어스를 정복하러 오지만 말레피센트와 숲의 요정들은 힘을 합쳐 군대를 격퇴한다. 큰 부상을 입은 왕은 말레피센트를 죽여 복수를 해준 이에게 공주와 결혼하게 하고 후계자로 삼겠다고 신하들에게 공표한다. 밤에 스테판은 말레피센트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며 안심시킨다. 이어 수면제를 먹여 말레피센트를 잠들게 한다. 스테판은 차마 말레피센트를 죽이지 못하고 대신 날개를 잘라 말레피센트를 죽인 증거로 왕에게 가져간다.
왕은 스테판과 공주의 결혼을 승낙하고 스테판을 후계자로도 지목한다. 잠에서 깬 말레피센트는 날개를 잃었다는 것, 스테판에게 배신당한 것에 분노한다. 이로 인해 마녀가 된 말레피센트는 곤경에 처한 까마귀를 구해주고 사람의 형상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는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말레피센트의 종인 디아발(샘 라일리)이 된다.
백마 탄 왕자 안 통해
말레피센트는 디아발을 인간 사회에 보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보게 한다. 스테판이 결국 왕이 됐고 딸 오로라 공주를 얻었음을 알게 된다. 오로라 공주의 탄생 축하 잔치에 초대받지 않은 채로 나타난 말레피센트는 “오로라 공주가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소녀로 자라지만 열여섯 살이 되는 날 물레의 바늘에 손가락을 찔려 깊은 잠에 빠지게 되고 오직 순수한 사랑의 키스만이 그녀를 깨어나게 하리라”는 저주를 내린다.
죄책감과 공포에 떤 스테판 왕은 왕국 안에 있는 모든 물레를 한데 모아 불태워버린다. 숲의 세 요정에게 오로라 공주를 멀리 데려가 양육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말레피센트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오로라 공주를 외딴 오두막에 데려간 세 요정은 양육과 보호에 도통 소질이 없었다. 디아발을 통해 그 뒤를 밟은 말레피센트가 오히려 오로라 공주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보호해준다. 세월이 흘러 열여섯 살에 가까워진 오로라 공주(엘르 패닝)는 말레피센트와 만나 그녀를 자신의 수호 요정으로 여긴다. 오로라 공주의 성장을 먼발치서 지켜보아온 말레피센트도 어느덧 그녀에게 모성애를 느낀다.
오로라 공주의 열여섯 살 생일이 눈앞에 다가오자 말레피센트는 자기가 내린 저주를 풀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모든 노력이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된다. 오로라 공주는 스테판 왕에게 돌아가는데 스테판 왕은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유폐시킨다. 결국 오로라 공주는 왕궁의 지하 창고에서 타다 남은 물레의 바늘에 찔려 깊은 잠에 빠진다.
원작에선 왕자가 앞을 막는 용을 격퇴하고 오로라 공주에게 키스하자 공주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선 왕자의 키스가 효력이 없다. 오히려 말레피센트의 키스로 인해 오로라 공주는 깨어난다. 말레피센트는 공주를 데리고 왕궁에서 빠져나가려 한다. 스테판 왕은 이들을 막는다.
영화는 이야기의 원형을 그대로 따라가지만 등장인물들의 선악 구도를 바꿔놓았다. 이런 각색상의 변화는 수동적으로 구원을 기다리는 공주, 저주를 퍼붓는 마녀 같은 부정적인 여성 이미지를 지워버린다. 아울러 기존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보여준 남녀 간 사랑을 문제시한다.
‘겨울왕국’의 경우, 엘사 여왕의 대관식에 참석한 이웃나라 왕자 한스는 전통적인 이야기 방식대로라면 엘사를 구하고 동생인 안나와 결혼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스는 엘사와 안나를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악당으로 그려진다.
여성과 여성의 유대
‘말레피센트’의 스테판 왕도 어린 시절엔 말레피센트와 순수한 사랑을 나누는 남성으로 그려지지만 어른이 된 후엔 권력에 눈이 먼 탐욕스러운 인물로 변질된다. 오로라 공주에게 첫 키스를 하는 왕자도 말레피센트, 디아발, 세 요정에게 끌려 다니는 어리석은 인물로 그려진다.
‘겨울왕국’과‘말레피센트’는 남녀 간 사랑에 의구심을 드러내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동성 간 유대관계를 제시한다. 남성이 아닌 여성이 상황을 주도하고 이런 여성을 남성이 보조한다는 점도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겨울왕국’에서 얼음장수 크리스토프는 안나를 도와 엘사가 머무는 눈 덮인 산으로 간다. ‘말레피센트’에서 충성스러운 하인 디아발은 크리스토프와 비슷한 역할을 맡는다. 이렇게 두 영화에선 성 역할과 남녀 간의 역학관계가 바뀐다. 이 변화는 우연적으로 찾아온 것이 아닐 것이다.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봐야 한다.
유럽 동화들은 19세기 이전 신분제 사회에 삶을 산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때문에 동화 속 여주인공인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백설공주, 오로라 공주는 남성에 의해서만 구원받는 수동적 인물로 그려졌다. 혹은 인어공주처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다 좌절하는 인물로 형상화된다.
그런데 이런 여성상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21세기 현대사회의 여성상과 맞지 않게 됐다. 1930~1980년대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은 그나마 유럽 동화의 성 역할 설정을 충실하게 따랐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여성은 더 이상 남성에 의해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남성과의 사랑만을 절대적으로 추구하지도 않는다. 상당수 여성은 웬만한 남성보다 오히려 우월하고, 다른 여성과의 연대에서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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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의 관객은 이런 여성상이 영화에도 투영되기를 원한다. 심지어 애니메이션 영화에도 말이다. 미국인들이 ‘겨울왕국’과 ‘말레피센트’에 열광하는 이유다. 이들 영화가 미국을 넘어 한국에서도 인기를 끄는 현상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남녀관계도 미국처럼 돼간다는 증거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