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호

삶이 교차하는 미로에서의 산책

‘지혜의 숲’과 벼룩시장의 오후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14-06-19 1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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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질서하면서도 질서가 있는 미세한 길이 사방으로 난 곳을 둘러보았다. 복잡하고 다양한 경로가 교차하는 곳에서의 소요(逍遙)는 언제나 흥미롭다.
    삶이 교차하는 미로에서의 산책

    경기 파주출판도시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1층에 둥지 튼 ‘지혜의 숲’

    선거가 끝난 후, 한숨 돌리기 위해, 서울의 북쪽으로 바람을 쐬러 갔다가 파주출판도시에 새로 장만된 ‘지혜의 숲’에 들러보았다. 선거 때, 어느 쪽에 가서 뭐라도 열심히 활동했느냐 하면 전혀 그것은 아니고, 그저 밤새 전국의 주요 접전 지역 개표 방송을 지켜보는 데 불과했지만, 그래도 그 모든 것이 끝나자, 갑자기 마음 속 깊이 허기가 져서 자유로를 달렸던 것이다.

    오래전에 이 지면을 통해 출판도시의 중심 거점인 ‘지지향’을 소개한 바 있지만, 그 ‘지지향’ 안에 인문도서관 ‘지혜의 숲’이 개장 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은, 경향 각지에 책이 있는 풍경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구경도 하고 책도 읽고 또 살 수만 있다면 몇 권씩 사서 돌아오는 나에게는 안성맞춤의 장소처럼 보였다.

    무질서의 질서

    과연, 장관이었다. 일단 그런 풍경이 펼쳐졌다. 지혜의 숲은, 출판도시문화재단(이사장 김언호)이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1층에 마련한 것이다. 파주출판도시에 입주한 수많은 출판사, 크고 작은 서점과 기관, 그리고 은퇴한 노학자들의 서재에 있던 책이 한자리에 모여든 것이다. 대략 50만 권이 모였고 그중 20만 권 정도가 길고도 높다란 서가에 자리 잡았다. 전체 수장 능력은 100만 권에 달한다.

    내 관심의 초점은 이 많은 책이 ‘모여들었다’는 점이다. 한길사 대표이자 출판도시문화재단을 이끄는 김언호 이사장은 기자 간담회에서 “요즘 버려지는 책이 너무 많다. 책을 처분하고 싶어도 마땅한 방법이 없어 고민하는 분이 많은데, 이를 집적해 지혜의 숲을 이룬 곳이 바로 이 도서관이다. 원로 지식인과 학자, 교수가 평생 연구하고 읽은 책, 출판사들이 그동안 펴낸 책 등이 모였다”고 말했다. 서가를 천천히 살펴보니, 길고도 높다란 서가를 빼곡하게 채운 책을 기증한 이들의 면면을 볼 수가 있었다.



    일면 아름다운 풍경인데, 두 가지 면에서 씁쓸한 점도 있다. 먼저 책이 모여든 일차적인 원인이랄까, 김언호 이사장의 말대로 ‘처분하고 싶어도 마땅한 방법’이 없는 시대라는 점이다. 소설가 문순태는 2013년 8월 14일자 ‘광주일보’ 기고문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7년 전 정년퇴임할 때 연구실 책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다. 학교 도서관에 기증 의사를 밝혔더니 필요한 책만 골라가겠다고 했다. 학생들에게 나눠줄까 했으나, 조교는 학생들이 재미있는 책들만 가져갈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쓰레기장에 버릴 수는 없었다. 소장하고 있는 책들 중에는 선후배 작가들과 동료 문인들이 사인을 하여 기증한 것도 많고, 가난했던 시절 용돈을 아껴가며 어렵게 구입한 것들이 대부분이다(중략). 많은 책이 쓰레기가 되고 있다. 광주·전남에서 1년이면 30명 넘는 교수가 퇴직하고, 그들이 소장하던 수만 권의 책이 버려지고 있다. 전공서적 중에는 구하기 어려운 책도 많다. 그뿐인가. 광주 시내 도서관에서도 한 달이면 한 트럭 분량의 헌책이 폐지가 된다고 한다.”

    이런 정황이 일차적으로 씁쓸하다. 그리하여 천, 천, 히 완상하며 ‘지혜의 숲’을 살펴보는데, 귀한 책들이 용케도 폐기처분되지 않고, 정성껏 읽어줄 독자를 기다리며 옹기종기 서가를 채우고 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절반 이상의 책이 어른 키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 잔뜩 꽂혀 있다. 이 점이 두 번째로 씁쓸하다. 건축가 김병윤(대전대 교수)과 디자이너 김현선(김현선디자인연구소 대표)이 설계한 ‘지혜의 숲’은 책과 더불어 한두 시간을 충분히 소요할 수 있을 만큼 그 동선이 부드럽고 조명 또한 아늑하다. 누가 굳이 주의를 주지 않더라도 책을 고르고 자리를 잡아서 앉고 가만히 한두 페이지씩 넘겨보는, 그런 분위기를 형성해준다. 그런데 서가가 너무 높다. 6월 중순 본격적인 개장을 한다는데, 그때가 되면 도서관용 안전 사다리 같은 것이 비치될지 몰라도 만약 이 상태대로라면 이 안에 모여든 책의 3분의 2는 ‘전시용’이다. 수많은 책이 다양한 행로를 따라 모여들었지만, 지적 호사와 한나절 산책을 위하여, 누군가의 블로그 이미지를 위하여, 또 누군가의 정서적 만족을 위하여 아주 근사하게 만들어진 ‘책으로 된 병풍’이 될 가능성이 크다.

    자연 닮은 ‘지혜의 숲’

    그렇기는 해도 발상이 놀랍고 규모 또한 장대하면서도 점잖다. 모두가 함께 키우고 나눠도 영원히 마르지 않을, 책에 대한 무한한 욕망이 펼쳐져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많은 책이 기존의 도서관식 분류, 즉 십진분류법에 따라 정밀하게 나뉘어 꽂혀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책들은 얼추 대항목에 따라 분류는 되어 있지만, 엄밀하게 십진분류법을 따라 흩어져 있지 않다. 기증자의 이름을 딴 서가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거의 무질서하게 꽂아놓은 것이 불편할 수 있겠지만, 만약 엄정한 분류에 따라 원하는 책을 어김없이 찾아내고자 한다면 기존의 도서관을 찾아가라고 나는 권유하겠다. 내 생각에 이 ‘지혜의 숲’은, 그야말로 자연의 숲을 닮아 있다.

    숲으로 들어선다. 우거진 나무와 풀, 그리고 길이 여러 갈래로 나 있다. 그중 하나를 선택하여 걷고 또 걸으면 길이 나뉘었다 합쳐지면서, 조금 전에 미뤄둔 다른 길과 겹쳐진다. 그 길을 따라 다른 방향으로 또 걷는다. 이곳의 책들이 그런 풍경으로 꽂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헌책방의 분류 방식이다. 동네 헌책방에 가면 책들이 대강의 분류에 따라 꽂혀 있지만, 엉뚱한 서가에서 귀한 소설을 발견하기도 하고 무수한 잡지틈바구니에서 절판된 문학 계간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지혜의 숲’은 동네 헌책방이 모여들어 수십 배 크기로 확장한 셈이다.

    취재 삼아 한두 시간 돌아보니 백낙청의 평론집이 서로 다른 서가에 서로 다른 이유로 꽂혀 있었고, 건축 관련 책이 사회학 저서 틈에 끼어 있었다. 백낙청의 평론집이 김우창이나 염무웅이나 김지하의 저서와 함께 있는 것도 지적 이유가 있으며 현대 도시와 건축에 관한 책이 사회학 서적들과 어깨동무를 한 것도 엄연한 지적 관련이 있는 것이다. 본문 읽다 말고 각주를 따라가다보면, 본문과는 전혀 다른 놀랍고도 흥미로운 지식의 세계로 건너가는 수가 있다. 이런 무질서한 질서가 미세하면서도 끈질긴 지적 유혹을 일으키는 것이다. 무질서한 질서, 복잡한 질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 말이다.

    삶이 교차하는 미로에서의 산책

    ‘지혜의 숲’ 동선은 부드럽고 아늑하다.

    거대한 도시, 왜소한 인간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도시의 승리’를 보면, 미국의 경우 국토 넓이의 겨우 3%에 불과한 도시 지역에 인구 2억4300만 명이 군집해 있으며, 도쿄와 그 주변에는 3600만 명이 살아간다. 글레이저에 따르면 2011년 현재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서 삶을 꾸린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도 2009년 4/4 분기 기준으로 1046만4051명이 살고 있다. 인접한 경기도의 인구 또한 1000만 명을 상회하는데 이 지역 거주자의 상당수가 서울과 직간접적 관련을 맺고 살아간다는 것을 감안할 때 거대도시 서울은 가히 ‘더블 메트로폴리스’로 비대해 있다.

    이렇게 비대해질수록, 이정만이 2007년 ‘건축의 인문학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에서 강조했다시피 “인간이 사는 건축·도시공간은 인문학을 통해 기본적 인간의 가치를 논하고 개발하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참다운 가치를 제공받고, 예술과 기술 또한 사회과학의 방법을 통해 현실 속에 종합적 해결책을 제공”받아야 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에 의하여 도시 구조를 이루는 각 분야의 공학적 설계에 인문적 근거를 마련하고 도심 공간 구상에 따른 문화적 성찰의 기회를 마련하며 궁극적으로 거대도시 속에서 인간적 삶이 가능할 수 있도록 모색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 서울의 변화와 발전은 이러한 인문적 모색, 인간적 삶의 가능성이 위태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개발주의 신드롬, 즉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오랫동안 서울을 압도하였기 때문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심지 하층민의 낙후한 주거지 개량과 생활공간 활성화 프로젝트가 오히려 중상류층이 도심지로 복귀하고 하층민이 도시 바깥으로 추방당하는 방식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말한다.

    이런 현상을 일컫는 용어에 영국 지주계급을 가리키는 젠트리(Gentry)가 접두사로 쓰인 것은 근대 자본주의 초기의 인클로저(Encloser) 운동에 따라 영국 지주들이 대량의 양모 생산 및 대규모 공업화 농업을 위해 자영 농민을 울타리 바깥으로 몰아낸 것과 흡사한 과정을 밟기 때문이다. 그 분명한 형태로는 오래된 도심지 공간이나 건물의 재개발과 재건축을 들 수 있는데 데이비드 하비는 이를 ‘도시의 변형을 통한 잉여 흡수’라고 불렀다.

    삶이 교차하는 미로에서의 산책

    동묘 인근 벼룩시장 좌판.

    현대의 초기에 젠트리피케이션이 최초로 가시화한 것은 1893년 미국 시카고의 만국박람회를 앞두고 그 도시가 이른바 ‘도시미화운동(City Beautiful Movement)’으로 급속히 변모한 것을 들 수 있다. 낙후한 도심지 건축이나 공간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백색의 고전주의 대형 건물이 200채 넘게 건설되는 과정을 ‘백색도시(White City)’라고 부르는데 한때 이 도시미화운동은 19세기 산업혁명기에 발달한(동시에 산업혁명의 갖가지 모순이나 도시 문제를 포함한) 거대한 공업도시를 탈바꿈하게 하는 운동으로 평가받았다.

    이 도시미화 프로젝트의 21세기 버전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20세기 산업화 과정에서 도심지가 낙후하고 중상류층은 대도시 외곽의 전원주택 단지나 신도시로 이주한다. 그러다가 21세기 들면서 도심지 재개발이 시도되어 도시 바깥의 중상류층이 다시 귀환하는데, 이때 낙후했던 도심지는 쾌적한 주거환경과 높은 경제력의 고학력 시민으로 채워지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는 머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특히 21세기 젠트리피케이션의 특징은, 이를 주도하는 정치인과 자본의 이해뿐만 아니라 이러한 변화를 통해 새로운 주거 환경과 부동산 이익을 기대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삶을 동경하는 한 시대의 욕망이 뒤엉켜 진행된다는 점이다.

    런던, 시애틀, 베를린, 브뤼셀, 프라하, 도쿄, 베이징, 케이프타운 등 21세기의 대규모 도시가 이러한 과정을 겪었다. 우리의 경우 최근 몇 년 사이에 광화문과 종로 일대, 그리고 무엇보다 용산에서 이러한 급변을 보게 된다.

    도시사학자 박진빈은 ‘1970년대 이후 뉴욕의 젠트리피케이션’에서 이러한 급변이 단지 외형상의 변화만이 아니라 삶의 질서, 재정 질서, 부의 편재 등을 변화시킨다고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젠트리피케이션의 “도시는 재정, 회계 분야의 다국적 기업을 유치하는 공간으로서, 그리고 국제적 수요를 염두에 둔 관광 사업에 알맞도록 경관을 바꿈으로써 국제적 자본과 직접 연결된다. 더 이상 지역적 요구나 지역민의 특성을 고려한 개발이라기보다는 자본의 요구를 충실히 따르기 위한 변화”가 되는 것이다.

    빨간 비디오의 추억

    이렇게 하여 중상류층의 이해 및 그들의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에 기초한 방식으로 도심지가 재구성된다.

    동묘 앞에 가봤다. 내가 사는 곳이 일산이라 주말에는 서울에 나갈 일이 없다. 그런데 일부러 틈을 내어 가봤다. 그곳에 일요일이면 벼룩시장이 서기 때문이다. 평일에는 서지 않는다. 동묘 앞 일대의 상가가 평일에는 장사를 하기 때문에 벼룩시장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상가가 문을 닫고 가게가 철시하기 때문에 벼룩시장이 선다. 그래서 일부러 가봤다.

    이 벼룩시장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젠트리피케이션, 즉 야심 찬 청계천 복원사업이 ‘뜻하지 않게 거둔 성과’다. 엄밀히 말하여 그의 성과는 아니지만, 어쨌든 청계천 복원 사업에 의해 떠밀린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찾아낸 공간이 동묘 앞 벼룩시장이다. 저 20세기에 청계천 일대는 ‘이쑤시개에서 항공모함까지’ 다 만들어낸다는 곳이었다. 광교 지나 청계천 2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저 끄트머리 7가, 8가 즉 ‘황학동 벼룩시장’까지 온갖 세상만물이 만들어지고 거래되던 곳이다.

    나의 경험으로 말하자면, 고등학생 때 종로에서부터 청계천을 지나 을지로까지 가로지르는 세운상가를 걸었다. 걷다보면, 특히 아세아극장 부근을 걷다보면, 검은 점퍼 차림의 아저씨들이 “좋은 거 있는데, 보고 가라”고 했다. 그 은밀하고 끈적거리는 시선을 피하기가 때로는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 관심은 오디오였고 음반이었다. 글 쓰는 동네의 어느 선배도 그 무렵에 그 아저씨들 유혹에 이끌렸다고 했다. 갔더니, 예닐곱 명을 한 조로 하여 맨 앞과 뒤에 건장한 인솔자가 바짝 붙어 서서 다시 종로 쪽으로 하여 낙원상가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그 허름하고 음침한 낙원상가의 한구석으로 들어가니 사내 대여섯 명이 ‘빨간 비디오’와 함께 웅크리고 앉아 있더란 것이다. 잠시 후, 그들이 나오고, 이 선배가 동참한 조가 들어가서 40분가량, 화질도 좋지 않은 ‘빨간 비디오’를 봤더라는 추억이다. 다 보고 나서 흩어지는데, 검은 점퍼의 인솔자가 이렇게 덧붙였대나. “아무리 급해도 이 건물 화장실 쓰지 마. 영업 방해로 죽여버릴 거야. 딴 데 가서 흔들어.”

    그 지점을 시작으로 하여 평화시장 부근의 헌책방을 거쳐 황학동에 이르면 또다시 별천지가 펼쳐졌는데, 역시 나의 관심은 황학동 벼룩시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음반 가게, 즉 돌레코드와 장안레코드가 최종 목표였다. 그 길고도 복잡한 길 위에 리어카에 작은 의자 하나 놓고 장사하던 사람들이 청계천 공사 때문에 오갈 데가 없어졌던 것이다.

    청계천 상인들을 위한 대안으로 송파구 문정동에 가든파이브가 지어졌지만 분양가도 높았고 임차 자격도 일정 조건 이상을 갖춘 상인 위주였다. 리어카 장수, 보따리 장수, 방물장수가 가든파이프에 입주할 수는 없었다. 결국 복원된 청계천 주변을 헤맨 끝에 동묘 앞에 주말 벼룩시장을 조성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나는 두 군데를 다 가보았다. 작년 가을에 들렀던 가든파이브는 거대했고 근사했으며 깔끔했다. 청계천에서 이주하여 간신히 터를 잡은 가게들이 일련번호에 따라 네모반듯하게 자리 잡았다. 그러나 오가는 손님은 드물었고 ‘임대’ 혹은 ‘급매’라는 낱말을 써 붙인 빈 가게도 적지 않았다. 대규모 영화관과 NC백화점만이 성업 중이었을 뿐, 한산하여 씁쓸했다.

    반면 동묘 앞의 벼룩시장은, 비록 일요일에 한시적으로 열릴 뿐이지만,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북적거렸다. 물건은 다소 허름했지만 값이 쌌고 잘 고르면 이른바 ‘명품 구제옷’을 1만 원 꾸러미에서 골라낼 수도 있다. 나는 지포 라이터를 열 개나 샀는데, 개당 3000원, 3만 원으로 득템하였다. 집에 와서 대강 손질하고 기름을 충만한 후 써보니 여섯 개가 정상 작동했다. 나머지 네 개도 심지를 갈고 돌을 교체해두었다. 흠집도 있고 벗겨진 데도 있어서 오히려 시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복잡한 질서를 위하여

    고등학교 1학년 때, 황동규 시선집 ‘풍장’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시집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시집 끝에 실린 김우창의 해설이었다. 그 무렵 읽었던 많은 시집의 해설과 달랐다. 우선 19세기 영국의 도덕철학자이자 문예비평가인 매슈 아놀드를 언급하면서 현대 문명의 위기와 지식인의 고뇌가 제시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논한 끝에, 황동규의 시 세계가 분석되기 시작했다. 나는 곧장 김우창이라는 이름으로 된 책들을 찾으려고 시내 큰 서점으로 가 ‘궁핍한 시대의 시인’을,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읽고 또 읽었다. 김우창은 본업인 문학평론만이 아니라 이를테면 ‘거대도시와 인간의 운명’이라는 주제에 대해 오랫동안 써왔다.

    동묘 앞 벼룩시장, 그 언저리의 허름한 파라솔 의자를 어렵사리 구하여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앉았을 때, 문득 떠오른 글도 김우창의 것이었다.

    김우창은 ‘사회공간과 문화공간’에서 “우리가 매일매일 일터나 놀이터를 향하여 가면서 통과하는 도시, 공간이나 그러한 통과 중에 마주치는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실감나는 것인가”라고 쓰면서 그러한 “단편적 자극들의 집적”이 한 도시에 대한 문화적 인상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보들레르가 파리를 ‘대낮에도 허깨비가 부르는, 몽환에 찬, 잡담의 도시’라고 하고, 엘리어트가 이러한 보들레르의 느낌을 연상하면서 런던을 죽음의 행렬이 흘러가는 ‘비현실의 도시’라고 한 것은 납득이 가는 일”이라고 언급한 적 있다.

    과연 서울은 보들레르의 파리나 엘리어트의 런던같이 실감 나는 도시인가. 서울이 젠트리피케이션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점점 비대해져서 바코드와 태그로 이뤄진 가든파이브 같은 도시가 된다면, 그것은 악몽이 아닐까.

    20세기 중엽 뉴욕, 시카고, 디트로이트 같은 대도시가 19세기부터 형성된 다양한 생활 질서를 네모반듯한 직선의 대로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할 때, 그에 맞서 싸웠던 건축평론가 제인 제이콥스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일상 속의 ‘불가사의한 질서’, 그러니까 ‘미묘하고도 복잡한 질서’가 도시의 생명, 그 자체라고 강조한 적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오래된 도시가 제대로 기능을 하는 곳이라면 어디나 외견상의 무질서 아래에는 거리의 안전과 도시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사의한 질서가 존재한다. 그것은 복잡한 질서이다. 이 질서의 본질은 끊임없는 얽히고설킨 보도(步道) 이용과 그 결과물인 끊임없는 보는 눈의 연속이다. 이 질서는 이동과 변화로 이루어지며, 비록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생활이지만 우리는 그것에 도시의 예술 형식이라는 공상적인 이름을 붙이고 춤에 비유할 수도 있다.”

    제이콥스는 뉴욕을 비롯한 미국의 거대도시들이 젠트리피케이션의 유혹에 휩싸여 이른바 ‘개발 신드롬’에 빠져 있을 때, 도시 안에 내재된 수많은 ‘다양성’과 그것들이 교합하여 이뤄내는 생활 세계의 내면적 질서를 보호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김우창도 “문화적 도시는 볼만한 건물과 거리가 있으면서, 생활 전체가 그 나름의 미적 균형을 유지하여야 한다. 그러나 정책적 선택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생활의 아름다움의 선택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스스로를 초월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옳다”고 강조했다.

    미로에서 길을 찾다

    파주의 지혜의 숲에서 동묘 앞의 벼룩시장까지, 나는 복잡하고 미세한 길이 사방으로 나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두 군데 모두 최소 두 시간 이상을 머물렀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만약 이 두 장소가 백화점처럼 네모반듯한 분류를 따르거나 일련번호로 된 가게였다면 쉽게 지치고 따분했을 것이다. 일상 속의 미묘한 질서, 복잡하고 다양한 미로, 쉽게 판별할 수 없는 미세한 삶의 경로가 교차하는 장소, 그런 장소에서의 산책은, 언제나 흥미롭다.

    삶이 교차하는 미로에서의 산책

    동묘 옆 골목에 터 잡은 오래된 여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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