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스물다섯, 그녀는 서른하나. 여름도 겨울도 아니었던 그날, 마실 온 듯 가벼운 차림새로 나타난 그녀는 지쳐 보였다. 말랐고 어두웠고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다. 내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새벽마다 검은색 타르 가득한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꿈을 꾸던 시절이었다.
빵은 내가 골랐던 것 같다. 집게를 들고 신중히, 이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녀이니 오늘 빵 값은 그녀가 낼 거라 생각하면서. 먹고 싶은 게 많았지만 작가들은 원래 조금만 먹으니까, 정신적 허기라는 거, 나는 입으로 채우지만 그들은 맞서 싸우니까, 그런 사람들 앞에서 많이 먹는 건 아무래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니까.
하여튼 그렇게 그녀와 마주앉아 빵을 먹었고, 예상대로 그녀는 정말 조금밖에 먹지 않았고, 일 얘기도 진전될 만한 것이 별로 없어, 나와 그녀는 헤어졌다. 연재는 성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11년. 나는 지금 2만7000원짜리 사과상자 하나를 껴들고 그녀가 사는 경기도 분당의 한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다. 곧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날 알아볼 것이다.
곱씹고, 되씹고, 또 후벼 파고
“아, 안녕하세요!”
스스럼없이 밝은 하이 톤의 목소리. 여전하구나. 여전히 예쁘고 키 훌쩍 크고 당당하구나. 그런데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 있다. 살이 붙었고 환해졌으며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 그녀를 보지 못한 제법 긴 세월, 아이를 더 낳고 글을 더 쓰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졌다 다시 만나면서 그녀는 점점 더 좋아졌나 보다. 열심히, 아주 잘 살아왔나 보다.
그녀는 최근 연작소설집 한 권을 펴냈다. ‘별들의 들판’(창비)이란 낭만적인 제목이다. 지지난해인가, 대학 교수인 남편, 세 아들과 함께 독일 베를린에서 살았던 1년간의 기억을 바탕 삼아 쓴 글이라 한다.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한겨레신문 문학전문기자인 최재봉씨는 관련 기사에서 ‘개인과 사회, 사적인 차원과 공적인 맥락이 섞여 있는, 이른바 386세대 작가의 대표주자로서 공지영 소설의 변치 않는 핵심을 이루는 양상’이 잘 투영된 작품이라 했다. ‘때로 대립할 수도 있는 그 두 지점을 한데 묶는 요소는 연민인 것처럼 보이’며 ‘공지영 소설의 강한 호소력과 파급력을 보장하는 그 연민’은 ‘버림받은 것들, 잃어버린 것들, 상처를 벗어나려고 안간힘 쓰는 것들, 용서하게 해달라고 울고 있는 것들, 울 시간은 많다면서 밥을 먹는 것들을’ 향해 있다고도 써놓았다.
개인, 사회, 386, 연민, 용서, 상처, 밥. 여기에다 폭력, 희생, 절망, 사랑, 어쩔 수 없이 품는 작은 희망 같은 단어를 몇 개 더 보태면 공지영 문학의 큰 덩어리가 거친 형태로나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왠지 그것은 눈물 범벅이 된 소녀의 꼬질꼬질한 손에 들려 있는, 끈적한 꿀물이 조금씩 밖으로 배어나오는 중인, 고소하고 달콤하면서 쌉싸래한 뒷맛이 목구멍으로 넘긴 후에도 꽤 오랫동안 남아 있을, 계핏가루 듬뿍 들어간 중국식 호떡만 같다.
-야, 전망이 좋은데요. 28층이죠. 이렇게 높은 데서 자면 기분이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오, 제가 아파트 생활을 언제부터 했는데요. 전 완전히 아파트 키드예요. 이사 온 첫 날부터 잠 잘 잤어요.”
-작품 속에 그런 게 자주 보이죠. ‘나는 부잣집 딸’이라는 자의식, 혹은 죄의식? 그게 문제적 상황일 수 있다는 걸 언제 자각했나요.
“제가 3남매 중 막내거든요. 언니, 오빠는 공립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제가 학교 입학할 때쯤 살림이 좀 폈나봐요. 부모님께서 절 동네(서울 아현동) 사립초등학교로 진학시키셨어요. 아무래도 그런 게 좀 달랐겠고. 하지만 그보다 더 생생히 기억 나는 게 있어요.
여섯 살 때쯤일 거예요. 전 유치원 대신 피아노학원에 다녔는데 그게 당시로선 아주 흔한 일은 아니었거든요. 어느 날 집 앞 담벼락에 기대 서서 손가락 장난을 치고 있었어요. 왜, 양 손가락을 피아노 치듯 움직이는 거 있잖아요. 그런데 한 동네 친구가 지나가며 이러는 거예요. ‘너 지금 피아노 친다고 잘난 체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