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호

필리핀에서 맛본 ‘그라냐뇨 파스타’의 결

[김민경의 식도락] 세계의 골목을 점령한 ‘이탈리아의 맛’

  • 글·사진 김민경 맛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26-06-17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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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낯선 땅에서 만난 가장 친숙한 위로, 파스타

    • 바람과 햇살이 빚어낸 500년의 기다림, 그라냐뇨

    • 맛을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차이 ‘저온 건조’와 ‘결’

    그라냐뇨 파스타 맛이 나는 필리핀 파스타.

    그라냐뇨 파스타 맛이 나는 필리핀 파스타.

    꽃샘추위가 남아 있던 이른 봄, 업무차 필리핀에 다녀왔다. 관광하러 간 게 아니었기에 한동네에 오래 머물며 숙소 근처 식당에서 하루 두 끼를 꼬박꼬박 해결해야 했다. 낯선 나라에서 자주 먹은 음식들의 고향은 필리핀이 아니라 이탈리아였다. 단골 브런치 카페에서는 참치와 레몬으로 맛을 낸 파스타, 라구소스가 듬뿍 섞인 파스타, 크림소스와 새우를 섞은 파스타 등을 골고루 먹었다. 목 좋은 곳에 자리한 화덕 피자집은 두 번이나 들러 더위와 허기를 달랬다. 돈과 시간의 여유가 허락된 날에는 ‘주세페(이탈리아에서 흔한 누군가의 이름이 분명한)’라는 이름의 깔끔한 식당에서 피자, 파스타, 리조토에 차가운 화이트 와인까지 마셨다. 이 모든 게 칼칼하게 끓인 라면 한 그릇 사 먹기보다 쉬웠다.

    알다시피 필리핀은 스페인의 오랜 식민지였다가, 미국과 아주 잠깐의 일본 점령기를 거쳐 독립한 국가다. 그 어디에도 이탈리아의 흔적은 없다. 세계 여러 나라 도심 골목 어딘가에 작은 중국 식당이 하나쯤 있듯이 스파게티(파스타의 일종이지만 대표 격으로 불리는 종류)도 나라를 가리지 않고, 심지어 식당 종류에도 상관없이 불쑥불쑥 메뉴판에 올라와 있는 메뉴다. 밀가루로 만든 다양한 국수를 비롯해 쌀국수·우동·당면, 메밀이나 옥수수 등이 원료인 국수, 심지어 두부로 만든 국수까지 건조 국수가 넘쳐나는데 왜 유독 파스타 레스토랑만 세계 곳곳에 있을까.

    건조 파스타의 고향인 캄파니아주. 구글지도 캡쳐

    건조 파스타의 고향인 캄파니아주. 구글지도 캡쳐

    건조 파스타의 고향은 이탈리아 남부

    이탈리아에서 건조 파스타의 고향을 꼽으라면 남부 지역, 그중에도 나폴리가 주도인 캄파니아(Campania)주다. 캄파니아라고 하면 낯설 수 있지만 이곳은 지중해의 아말피 해안, 소렌토, 카프리섬, 화산 폭발로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폼페이와 그 화산인 베수비오가 있는 지역이다. 캄파니아가 파스타를 생산하는 곳이라면 그 원료인 듀럼(Durum)밀을 재배하는 곳은 풀리아(Puglia)주다. 캄파니아는 서쪽 바다를, 풀리아는 동쪽 바다를 마주하며 아펜니노산맥을 가운데 두고 붙어 있다. 이 두 지역으로부터 세계 골목골목을 향해 파스타가 퍼져나간 셈이다.

    캄파니아 사람들이 건조 파스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약 500년 전이다. 건조 파스타가 성행하기 전에 칼국수 같은 생파스타는 이미 집집마다 만들어 즐겨 먹고 있었다. 그리고 약 400년 전부터 건조 파스타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본격적 생산이란 돈을 받고 판매할 수 있을 만큼 수량이 늘고 품질도 균일화됐음을 의미한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수작업을 하는 형태였지만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간을 마련하고, 더 빠르고 안정적으로 파스타 모양을 낼 수 있도록 다양한 기계도 만들어냈다. 

    품질 좋은 파스타에는 특유의 결이 있다

    건조 파스타 생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마을이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그라냐뇨(Gragnano)다. 나폴리와 가까우며 바닷가 마을로 마을 뒤편에는 좁고 깊은 골짜기가 있는 산 라타리(Lattari)가 있다. 바다에서는 습기가 밀려오고, 마을 뒤편에 있는 산으로부터 건조한 바람이 불어 내려오는 곳이라 파스타 반죽을 자연 건조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반죽을 만들어 자르고 건조대에 가지런히 널어두는 것까지는 사람이 하지만, 건조는 자연의 몫이었다. 물론 날씨에 따라 건조대를 실내와 실외로 옮기는 일은 잦았지만. 1년 중 봄부터 초가을까지는 습도와 바람이 알맞고, 햇빛이 충분해 파스타 건조가 안정적으로 이뤄졌다. 강수량이 늘어나고 일조량이 부족해지는 늦가을과 겨울은 파스타 건조가 불안정하기에 마을도 대부분 일손을 멈췄다. 그렇게 어언 300년을 보냈다. 



    그라냐뇨 파스타를 제조, 건조, 압출, 포장하는 과정(위에서부터). 

    그라냐뇨 파스타를 제조, 건조, 압출, 포장하는 과정(위에서부터). 

    그라냐뇨 사람들은 품질 좋은 건조 파스타가 완성되는 자연의 조건을 깨달았고, 약 100년 전부터는 건조과정에 기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재 그라냐뇨에는 20개 정도의 파스타 생산 브랜드가 자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고품질로 손꼽히는 카르미아노(CARMIANO)의 제조공정을 들여다보자. 완성도 높은 건조 파스타를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정이 중요하다. 건조와 압출이다. 

    파스타 반죽에 필요한 것은 세몰리나(Semolina)와 물뿐이다. 세몰리나는 듀럼밀을 거칠게 빻은 가루인데 손으로 만졌을 때 까슬까슬한 입자가 느껴진다. 듀럼밀이 본래 노르스름하기 때문에 파스타의 색도 그렇다. 그라냐뇨의 파스타 생산자들은 대체로 풀리아 지역 유기농 듀럼밀로 만든 세몰리나와 라타리산 계곡의 물을 정수해 반죽에 사용한다. 반죽은 압출기를 통과하면서 특정 모양으로 성형된다. 국수처럼 길쭉한 파스타는 건조대에 널고, 손가락 길이 내외로 짧은 파스타는 나무틀에 고운 망을 단단히 끼운 채반에 얹어 말린다.

    우리가 가장 흔히 먹는 스파게티의 경우 건조 온도는 섭씨 약 50도, 습도는 약 40%에서 약 20시간 동안 말린다. 처음 습도는 대체로 90%로 시작하지만 말리면서 낮아진다. 온도는 섭씨 40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아야 원하는 시간만큼 오래 말릴 수 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조 과정은 단순히 물빼기가 아니다. 수분이 골고루 퍼지면서 글루텐이 잘 엉겨 탄탄한 조직을 이루고, 그 사이사이에 전분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 파스타를 단단하게 만든다. 마른 상태로 유통할 때 쉽게 부서지지 않고, 물에 삶으면 전분이 금세 풀리며 부드러워지되 탄력은 잃지 않는다. 좋은 건조 파스타가 여느 밀가루 국수처럼 쫄깃쫄깃함은 없지만 탄력이 있고 씹었을 때 묘한 밀도가 느껴진다. 저온 장시간 건조한 결과다.

    좋은 건조 파스타를 만드는 또 하나의 과정은 압출이다. 압출 과정에서 파스타에 질감, 즉 결이 생긴다. 파스타는 다양한 모양과 무늬가 있지만 품질 좋은 파스타는 만졌을 때 손끝에 가슬가슬함, 포슬포슬함이 느껴져야 한다. 여분의 가루 따위가 묻은 게 아니며, 이 결은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건조에 공을 들이는 게 식감을 위해서라면 결을 내는 일은 맛을 좌우한다. 결이 살아 있는 파스타는 소스와 잘 어우러진다. 오일이든, 크림이든, 토마토든, 간 고기든 상관없이 서로 착착 붙고 감긴다.

    맛 결정하는지 않는 차이

    듀럼밀을 거칠게 빻은 가루인 세몰리나가 담긴 포대.

    듀럼밀을 거칠게 빻은 가루인 세몰리나가 담긴 포대.

    모든 건조 파스타는 세몰리나와 물이라는 같은 재료로 만드는데 질감의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일까. 답은 압출기의 재질과 미세한 온도 차이다. 청동 압출기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매우 단단해 변형이나 마모가 적고, 압출기 표면이 미세하게 거칠다. 거친 가루로 만들어 꺼끌꺼끌한 반죽이 압출기를 통과하며 표면이 미세하게 찢어지며 결이 생긴다. 스테인리스나 테프론 등으로 코팅이 된 압출기는 표면이 너무 매끈해 결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 반죽의 온도가 높아져도 결이 생기지 않는다. 글루텐이 변형되거나 전분이 부분적으로 익어 표면이 매끈해져 버리면 압출기를 통과할 때 미세하게 긁혀도 아물 듯 들러붙어 버리기 때문이다.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맛있는 무엇인가를 완성하기 위해 수백 년간 노력했고, 스스로 까다로운 기준을 세워 철저히 지켜나가고 있다.

    아티잔 파스타.

    아티잔 파스타.

    물론 이런 아티잔 파스타를 전 세계인이 맛보기에는 생산량이 부족하다. 그러나 이런 실천, 철학, 역사가 만든 깊은 뿌리 덕에 수많은 파스타가 더 자유롭게 퍼져나가고 유연하게 세계의 재료를 받아들이면서도 제 모습(오직 세몰리나와 물로만 만듦)을 굳건히 지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흔히 먹는 파스타는 매끈한 압출기를 통해 대량 생산된 다음 섭씨 90도라는 뜨거운 온도에서 4시간 정도 빠르게 건조했을 확률이 높다. 물론 이런 방법을 선택한 수많은 브랜드 덕에 지구 전역에서 파스타를 즐기게 된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다음 번, 어딘가에서 먹게 될 파스타의 고향은 어디일까.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나폴리 옆 작은 마을 그라냐뇨에서 온 까슬까슬한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미국이나 호주의 파스타 장인이 빚어낸 섬세한 결을 자랑하는 무언가일 수도 있다. 이렇게 그라냐뇨의 파스타 이야기를 알고 나면 파스타를 고를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고 말 것이다. 봉지 안쪽을 조금 더 유심히 보면 혹시 파스타의 포슬포슬한 ‘결’이 보이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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